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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글편지
조선시대 한글편지는 오늘날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도가 높은 자료로
재조명되고 있는 자료이다.
조선시대 일기자료
조선시대 및 근현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일기,
관직일기, 가계출납부

고문서표준사례

  • 1289년 정인경(鄭仁卿) 공신녹권(功臣錄券)
    13세기 이전
    1289년(충렬왕 15) 5월에 충렬왕이 정인경을 1등 공신 으로 책록하면서 전답 100결과 노비 4구를 하사하기 위하여 발급한 문서이다. 이는 충렬왕이 1269년(원종 10)에 세자로서 원나라에 함께 따라갔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함이었다. 본 문서는 원문서로 현전하는 것이 아니라 1819년(순조 19)에 간행된 『서산정씨가승』에 그 내용이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는 정인경의 공신교서 및 정안의 내용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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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54년 윤광전(尹光琠) 별급문기(別給文記)
    14세기
    1354년윤광전(尹光琠)이 아들 윤단학(尹丹鶴)에게 여종 1명을 증여하였다. 딸만 두고 성을 이을 아들은 단학이 유일하니 제사를 모시는 몫으로 여종을 내려준다는 것이 증여의 이유이다. 현전하는 고문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증여 혹은 상속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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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02년 신사렴(申士廉) 조사첩(朝謝帖)
    15세기
    1402년(태종2)신사렴(申士廉)을 부사정(副司正)에 임명하는 문서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관리를 임명할 때 대간(臺諫)의 서명을 거치는 제도가 있었다. 이를 서경(署經)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그 규모가 축소되어 주로 5품 이하의 관료들에게만 적용되었는데,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서 임명대상자에게 결격사유가 없는지를 심사하여 합격한 경우에 서명을 하였다. 하급관리에 내정된 신사렴 또한 사헌부에서 서경을 거쳤다는 공문을 보내왔기에 병조에서 본 문서를 내려 임명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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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01년 손중돈(孫仲暾) 고신(告身)
    16세기
    1501년(연산군7)손중돈(孫仲暾: 1463~1529)을 조봉대부(朝奉大夫) 양산군수(梁山郡守)에 임명하는 문서이다. 양산군수에 임명된 것은 이보다 몇 해 전인 1497년의 일이다. 따라서 이 문서는 손중돈을 조선시대 문신의 종4품 하의 품계인 조봉대부로 올려주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손중돈은 아버지 손소(孫昭)와 함께 경주 양동마을의 경주손씨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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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03년 김선지(金銑之) 고신(告身)
    17세기 이후
    1603년(선조36)수문장(守門將)김선지(金銑之: 1570~97)를 병절교위(秉節校尉)용양위(龍驤衛)좌부장(左部將에 임명하는 문서이다. 이미 4년 전인 1599년에 왜란 중에 세운 군공을 치하하며 상직으로 내려진 관직인데, 이제서야 임명장을 발급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게다가 김선지는 정유재란(丁酉再亂)이 발발한 선조 30년(1597) 11월 경에 이미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본 문서에는 그에 관한 언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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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로 찾아보는 16세기 사회와 생활

  • 1489년 손중돈(孫仲暾) 홍패(紅牌)
    과거급제
    1489년(성종 20) 4월 10일에 손중돈이 문과 병과 10인으로 급제하였기 때문에 발급한 홍패이다. 문과나 무과 같은 대과에 합격시에는 그 합격 증서로 홍패를 내려주고, 진사 생원시 같은 소과의 경우에는 백패를 내려준다. 홍패와 백패에는 [과거지보(科擧之寶)]를 안보한다. 손중돈은 조선초기의 문신으로 김종직의 문인이다. 경주 양동 경주손씨의 중시조로 동강서원에 제향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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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직과급여
    1289년(충렬왕 15) 5월에 충렬왕이 정인경을 1등 공신 으로 책록하면서 전답 100결과 노비 4구를 하사하기 위하여 발급한 문서이다. 이는 충렬왕이 1269년(원종 10)에 세자로서 원나라에 함께 따라갔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함이었다. 본 문서는 원문서로 현전하는 것이 아니라 1819년(순조 19)에 간행된 『서산정씨가승』에 그 내용이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는 정인경의 공신교서 및 정안의 내용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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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54년 윤광전(尹光琠) 별급문기(別給文記)
    상속
    1354년윤광전(尹光琠)이 아들 윤단학(尹丹鶴)에게 여종 1명을 증여하였다. 딸만 두고 성을 이을 아들은 단학이 유일하니 제사를 모시는 몫으로 여종을 내려준다는 것이 증여의 이유이다. 현전하는 고문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증여 혹은 상속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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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87년 김효로(金孝盧)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논밭 사고팔기
    1487년우령(禹令)은 논 31부를 목면 12필에 김효로(金孝盧)에게 팔았다. 배꾼인 우령은 직접 배를 타는 군역을 대신하여 내야하는 기선가(騎船價)를 내지 못한 것이 쌓여 논을 팔 수 밖에 없었다. ‘부(負)’는 ‘卜’이라고도 쓰는데 조세를 계산하기 위한 토지 면적의 단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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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07년 손중돈(孫仲暾) 처(妻) 최씨(崔氏) 노비매매명문(奴婢賣買明文)
    노비 사고팔기
    1507년(중종2) 손중돈(孫仲暾: 1463~1529)의 처 최씨(崔氏)가 남자종 1명을 사들이고 작성한 거래계약서이다. 이 남자종의 원소유주는 최씨의 친정 사촌오빠인 습독관(習讀官) 최세징(崔世澄)의 아내인 이씨(李氏)이다. 당시 최세징은 이미 사망한 후이므로 이 거래에 이씨가 직접 참여하여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있다. 반면 최씨는 남편이 당시 상주목사로 재직중이었음에도 남편의 명의를 빌리지 않고 직접 거래에 참여하였다. 양반 여성이 직접 거래의 두 당사자로 참석한 드문 자료이다. 최씨는 이 거래를 마친 후 이에 대한 관의 공증을 받아두기 위해 본 문서를 증빙서류를 첨부하여 김산군에 공증신청서를 올렸다. 이에 군에서는 전후 문서를 검토한 후 공증문서인 입안(立案)을 발급하면서 관련 자료를 모두 풀로 붙여 함께 내려주었다. 그런 까닭에 이 문서는 입안문서와 함께 점련(粘連)되어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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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54년 윤단학(尹丹鶴) 사급입안(斜給立案)
    공증과 증빙
    1354년탐진군(眈津郡)의 지방관인 감무관(監務官)이 윤단학(尹丹鶴)에게 내려준 노비 소유권 공증 문서이다. 윤단학은 아버지 윤광전(尹光琠)으로부터 여종 1명을 상속받은 후 이에 대한 관의 공증 문서를 요청하였다. 그 결과 발급된 것이 본 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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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54년 윤단학(尹丹鶴) 소지(所志)
    민원 올리기
    1354년윤단학(尹丹鶴)이 아버지 윤광전(尹光琠)으로부터 물려받은 여종 1명에 대한 소유권을 공증해달라고 관할 지방관아인 탐진(眈津)군에 올린 문서이다. 토지나 노비에 대한 소유권을 관에서 공증하는 제도가 고려시대 때부터 있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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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28년 안동부(安東府) 호적(戶籍) 단편
    호적
    1528년(중종23)에 만들어진 안동부(安東府)의 호적대장(戶籍臺帳)의 1면이다. 안동(安東) 주촌(周村) 진성이씨(眞城李氏) 종가(宗家)에 소장되어온 것이니, 어느 때인가 이 집안에서 안동부에 보관되어 있던 대장의 한 면을 뜯어내어 가져온 모양이다. 이 면에서 맨 처음 나오는 호(戶)가 진성이씨 종손 가운데 한 사람인 이훈(李壎: 1467~1538)의 집이니, 선대에 관한 기록을 열람한 후 가지고 온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기록이 없어 그 외 자세한 소장 경위는 알 수 없다. 다만 기록된 이훈의 나이를 통해 작성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61세로 기록되어 있으니, 그의 생년을 고려하면 1527년(丁亥)에 작성된 내용이다. 그러나 그 이듬해가 호적을 정기적으로 작성하는 식년(式年)인 무자년(戊子年)이니, 1527년에 가가호호에서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를 근거로 하여 이듬해 작성된 호구대장으로 생각된다. 비록 1면에 불과하나 조선전기의 호적대장으로는 유일하다. 그 전후로는 현전 최고의 호적인 1391~2년경 화령부(和寧府) 호적과 1606년(선조39)산음현(山陰縣) 호적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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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83~96년 진성이씨(眞城李氏) 계중완의(契中完議)
    마을과 계
    1583년(선조16)과 1596년(선조29)에 작성된 안동주촌(周村) 진성이씨(眞城李氏) 집안의 계문서이다. 1583년에 이 계가 처음 결성되었기 때문에 그 설립 취지를 밝힌 서문과 운영 규칙 및 참여인물명단이 수록되었다. 당시 진성이씨가의 종손인 이정회(李庭檜: 1542∼1613)의 고조부인 이철손(李哲孫: 1441~1498)의 친손 및 외손들이 계원이고, 대개 이철손의 증손자 집마다 한 명씩 참여하였다. 증손 대 인물이 이미 사망한 경우는 이정회와 같이 그 아들이 이름을 올렸다. 또한 모두 주촌을 중심으로 인근 마을에 살고 있었다. 즉, 인근에 사는 동고조 내외손들이 함께 친목을 다지고 혼인과 상이 있을 때 서로 돕기 위해 계를 결성한 것이다. 봄가을로 정기모임을 갖고, 혼인이 있는 계원의 집에 각인은 닭이나 꿩 가운데 한 마리씩을 보내고 계금에서는 벼 두 섬을 내어준다는 등의 규약을 1583년에 12개 항으로 만들었고, 1596년에는 여기에 8개 항을 추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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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72년 박대립(朴大立) 혼서(婚書)
    혼인과 제사
    1572년(선조5) 11월 초2일, 박대립(朴大立: 1512~84)이 아들 지술(知述)의 혼사를 위해 사돈댁인 조천상(趙天祥) 집에 보낸 혼서이다. 아들이 이미 장성하였으나 아직 배필이 없는데 일찍이 댁의 따님이 현숙하다는 소문을 들었으므로 이에 혼인을 하고자 삼가 납채(納采)의 예를 행하고자 하니 굽어 살펴봐 달라는 내용이다. 납채는 조선시대 혼인 의식 가운데 하나로, 신랑집에서 혼인을 하고자 예를 갖추어 청하면 신부집에서 이를 받아들이는 절차를 말한다. 본 혼서는 신랑집에서 보내는 예를 갖춘 편지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 과정에서는 이미 중매자를 통해 혼인을 허락받은 후에 치르는 의식이므로 청혼과 이에 대한 허락이라는 본래의 의미보다는 이를 공식화하는 의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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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42년 인종(仁宗) 서간(書簡)
    편지 한 장, 시 한 수
    1542년(중종37) 세자시절 인종(仁宗: 1515~1545)이 사부 이언적(李彦迪: 1491~1553)에게 보낸 답장이다. 인종은 1520년 세자에 책봉되어 1544년에 즉위하였으니, 당시는 세자로 있을 때이다. 이언적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며 오랫동안 세자의 교육에 힘써왔다. 그러나 이때에는 고향에 있는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자 수차례 내려진 관직을 사양하고 지방관으로 가기를 청하여 마침내 이해 12월에 안동부사(安東府使)에 임명되었다. 이에 임지로 내려가기 전 인종에게 인사와 당부의 글을 올렸고, 인종은 직접 본 편지를 내려 그에 대한 돈독한 마음을 표시하였다.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공이 지방관에 임명되었으니 효도를 할 수 있게 되었소. 그러나 나는 공의 아름다운 말과 격론(格論)을 오랫동안 듣지 못할까 염려하던 차에 특별히 지극히 절실한 말을 해주니 마음 깊이 감격하였소. 내 이것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할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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