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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지방 양반가 고문서로서 시기가 올라가는 것으로는 1354년(공민왕 3)의 해남윤씨가 尹光琠의 노비분재기1) , 1421년(세종 3) 1421년(세종 3) 宣仲義 戶口帖2) , 그리고 1458년(세조 4)에 작성된 영암 場岩 남평문씨가의 文孟和의 承陰取才 敎旨3) , 1509년(중종 4)의 영암 구림의 함양박씨 朴成乾 분재기4) 등이 있다. 이들 가문의 특징은 지방의 토착세력으로서 고려말 이래 同正職 檢校職을 武官職을 입신의 발판으로 삼은 전형적 토착양반이라는 점이다.
여말선초 이래로 사족들의 上京從仕는 대세를 이루는 가운데 在京 사족이 낙향하는 경우도 흔하였다. 이 경우는 대개 관직을 지낸 뒤 임지에 남거나, 혼인을 통한 卜居가 그 주된 양상이다. 이 경우 중앙에서의 엄청난 부를 그대로 가지고 가는 경우가 많다. 경상도 영해 仁良의 재령이씨 이애, 안동 水谷의 전주유씨 柳義孫의 경우가 그 대표적이다.
남원의 순흥안씨는 서울과 경기 廣州 등지에 근거를 둔 조선 초, 중기의 대표적 사족이었다. 조선 중기에는 성리학으로 무장하고 조광조의 개혁 정치에 동참한 이른 바 기묘명현의 일원이었다. 이들 안씨는 기묘사화 직전에 落南함으로써 기묘사림 중 다른 가문과 달리 문중이 온전히 유지되는 한편 이들이 주고받은 詩文과 簡札, 고문서를 남겼다. 안씨 집안에 소장한 16세기 고문서 또한 재경사족 시절에 작성된 것이었다. 남원의 안씨는 `6세기 초반 落南하여 남원과 곡성 등지에 세거해왔으며, 본 고문서는 南原 金池面 宅內里에 세거해온 순흥안씨 安處順 종가에 보관되어오던 것이다.
안씨가에 소장된 고문서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에서 3차례에 걸쳐 조사하였다. 1차, 2차 조사는 2004년, 3차 2007년에 실시하였다. 3차 조사분은 약 150여 책의 고서가 대부분이다. 5) 2차분까지 조사한 내역은 다음과 같다.
현재 안씨가의 문서 원본은 본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보관되어 있다. 2004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조사에 응해주시고 편의를 제공해주신 안창섭·안노섭·안용섭·안도섭 전 현직 종친회 회장님을 비롯한 문중 인사, 그리고 소장 고문서 대여해 주신 안태수·안태수 선생님께도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조사도니 자료 가운데 보물 제1197호, 1198호로 지정된 󰡔己卯諸賢手筆󰡕과 󰡔己卯諸賢手帖󰡕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의해 탈초, 번역되어 영인본과 함께 출간되었다. 6)
〈남원 순흥안씨가 고문서 내역〉
○ 古文書 35種 328點,
○ 成冊古文書: 10種 21點
○ 古書:14種 23冊(고서 150여 책 정리 중)
남원의 순흥안씨는 文成公 安珦의 직계 자손으로서 15세기 말 - 16세기 安處順(1492,성종 23∼1534,중종 29)의 아버지 安璣(1451∼1497)가 妻家인 兆陽林氏를 따라 호남에 정착함에 따라 그 경제적 기반이 형성되었다. 7)
安璣는 綾城縣令 林玉山의 딸과 혼인하여 5남 3녀를 두었는데, 그들은 장수현감인 處經, 생원 處權, 진사 處常, 處健·處順 등으로서, 모두 등과하여 이름을 떨쳤다. 1472년(성종 3)에 생원이 되고, 그뒤 과거에 급제하여 成均館典籍에 제수되고 南學敎授를 겸직하였다. 儒家의 가풍을 확립하여 후세에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47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남원 흑성산(黑城山)에 안치되었다. 8)
안기의 아들 안처순이 그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구례현감에 임명됨으로써 남원의 대표적 사족이 되었다. 호남으로 落南하기 전 안씨가는 전형적인 서울 양반이었다. 낙향전 안씨가의 대표적 인물은 安瑭(1461,세조 7∼1521, 중종 16)이었다. 安瑭은 조광조와 더불어 士林의 대표적 인물이었으며 안처순의 사촌인 安處謙 安處諴 安處謹 등은 모두 賢良科 출신이었다.
안씨 가문에는 많은 고문서들이 소장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는 15세기말-16세기초 안처순 당대에 작성된 것이 3점이다. 1460年(天順 4, 世祖 6) 安瑚(1437-1503)의 奴婢推刷要請 所志 및 1513, 1514년에 작성된 안처순의 백패 홍패가 그러한 예이다. 안씨 가문의 사회 경제적 배경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라 하겠다.
현재 남원 안씨 가문에는 사제당과 함께 호남의 대표적 정자인 永思亭을 관리 유지하고 있다. 사제당은 안처순의 서재이며 永思亭은 그의 아들 竹巖 安瑑이 지은 정자이다. 竹巖은 17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줄곧 이곳에 거주하였다. 또 그의 손자 梅潭 安昌國이 김천도찰방을 사임하고 돌아와 영사정을 중수하였다. 家系를 圖示하면 다음과 같다.
〈順興安氏 安處順 家系〉
安昌國은 자는 彦升, 호는 梅潭이다. 조부는 安處順, 아버지는 竹巖 安瑑이다. 一齋 李恒(1499∼576)의 문인이다. 才行으로 천거되어 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많은 자금을 써서 의병을 도와서 그 공으로 남원 楡川祠에 제향되었다. 9) 安璛(안숙, 1680- 1754)은 자가 子柔, 호가 松巖이다. 어려서부터 뜻이 크고 도량이 넓었다. 아들 극효가 문과, 그것도 장원으로 급제하자, ‘誠孝傳家 盡忠報國’이라는 8자를 친히 써 주었을 정도로 효과 충 등 유교적 가풍을 이어가는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남들이 등과하면 등과별급이라 하여 일정한 재산을 분재하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10)
안씨가 인물 가운데 전기에는 안처순이 활약하였다면, 후기에는 安克孝(1699~?)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그는 영조 17년(1741) 신유년 식년시 甲科 제 1인, 즉 壯元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병조좌랑·병조정랑·태안군수·사헌부지평 등의 관직을 지냈다.
안씨가의 고문서는 매우 특이하게 京居士族이었던 때에 작성된 15세기 고문서와 기묘제현수필, 수첩을 비롯 안처순의 과거 합격 관련된 16세기 초반의 고문서가 매우 주목된다. 본고에서는 15~16세기 고문서를 중심으로 소개하며, 17세기 ~ 19세기 문서는 각각의 고문서 목록을 참고하기 바란다.
외방에 거주하는 노비의 추쇄는 양반 사족의 인적 조직과 내외의 관료시스템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는 조선시대 양반제를 유지하는 기본 골격이 되었다. 노비의 추쇄는 이른 바 원방에 거주하는 納貢 노비와 農庄노비에 집중되어 있었다. 14, 5세기의 노비문서는 추쇄관련 문서가 많다.
순흥안씨가에 노비 추쇄소지가 전하는 것도 이같은 사족의 부의 축적과 유지라는 사회 경제적 관계와 무관하지 않다. 남원의 安處順 종가에 전하는 노비 추쇄문서는 서울에 거주하는 京班이 지방의 노비를 어떻게 관리하고 있었는 가하는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소유주 安瑚(1439∼1503)는 安珦의 직계 후손으로서 1459년(세조 5) 진사, 1466년에는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듬해 史官으로 梁誠之·朴安性·李克基 등과 함께 여러 문적 가운데 표시된 중요지명을 뽑아 北征錄을 편찬하였다. 1473년(성종 4) 사헌부지평, 1479년 의정부 사인, 1483년 사재감부정을 지냈다. 1487년 홍문관부제학, 1488년 대사간, 1489년 좌부승지, 1490년 병조참지로 승진되었다. 그뒤 1492년 중추부사·대사간· 守全州府尹을 지냈다. 1497년(연산군 3) 예조참의, 1498년 형조참의를 거쳐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병조참지·대사간을 지내고 1502년 예조참의가 되었다. 11) 현재 그의 묘는 성남시 분당 율동공원에 인근에 있다. 옛 地名으로는 廣州 突馬 望月洞이다.
安瑚(1437∼1503)는 서울에 거주하면서 경기도 廣州 일대에 農舍를 두고 이 일대의 토지를 경작하고 있었다. 이때 農舍는 農幕이라고도 하는데 이른바 양반의 지주 경영의 중심이었다. 이 농막의 舍音으로 있던 婢 毛乙介 일가족이 도망한 것은 세종 18년(1436)이었다. 양반입장에서는 소유 노비의 도망이었지만, 이들 노비 입장에서는 거주지를 옮긴 것이다 이들이 옮겨 간 곳은 전라도 靈光 땅이었다. 安瑚의 안씨가에서 노비의 추쇄를 시작한 것은 1460年(世祖 6)이었다.
추쇄의 방법은 관료시스템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안호는 全羅道觀察黜陟使에게 議送을 올려 다음과 같은 민원을 제기하였다. 우선 도망한 노비 4구의 현재의 위치, 더 구체적으로는 영광지역 내에서의 그들의 去處를 파악하는 일과 아울러 도망 기간 동안 수취하지 못한 노비의 役價 즉 신공을 계산해 납부토록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즉 이들의 상세 거주지 파악, 그리고 노비 役價의 수취에 대한 협조 요청을 한 것이었다. 전라도 관찰사는 題辭를 통해 노비 所在官인 영광군수에게 안씨가의 賤籍을 상고하여 그 사실이 추쇄에 협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단편적 문서로는 그 경위를 다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안호는 이 민원을 통해 노비의 추쇄에 성공한 한듯하다. 하지만 이같은 사실은 16세기 초에 남원 구례지방으로 낙향하는 안처순 가문에 이 문서가 전하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따라서 이 노비 문서의 傳存은 그 1460년 추쇄이후 상황과 관련이 있다. 안처순의 아버지 안기와 안호는 친형제 사이이며, 이들의 서울 경기에서의 거주지가 동일하다. 따라서 유추해볼 수 있는 추정은, 16세기 초 안기 또는 안처순이 구례현감으로 임명되면서 이 문서도 함께 서울에서 가져왔을 가능성이다. 요컨대 지속적인 노비 소재지의 인근 수령을 맡고 있었던 안기와 안처순에게 노비의 관리, 즉 거주지 파악과 신공수납 협조하는 과정에서 본 문서가 안씨가에 전해준 것으로 보여진다.
안처순이 안기의 장남이 아니라는 점에서 추쇄에 대한 협조가 안처순까지도 이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안처순은 1518년(중종 13) 求禮縣監에 임명되어 안씨 일족 가운데 본 노비추쇄건을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현직에 있었기 때문에 관을 통한 정상적인 추쇄 뿐만 아니라 중앙 정계 등에서 명망이 높아 稱念 등을 통해 노비추쇄가 용이한 위치에 있었다. 이에 백부 안호는 안처순에게 관련 문서를 주어 그 처리를 맡겼던 것으로 보여진다. 안처순 종가에 그의 伯父 安瑚 관련 문서가 전해지는 것은 이같은 이유로 추정된다.
① 文書 槪要
ㅇ 年代 : 1460年(天順 4, 世祖 6)
ㅇ 所藏處 : 漢城府 安氏宗家 → 全北 南原(安處順 宗家)
ㅇ 크기 : 64.5Ⅹ57Cm
ㅇ 發給 : 進士 安瑚의 戶奴 儉佛(漢城府 都城內에 居住)
ㅇ 受取 : 全羅道觀察黜陟使(題辭의 受取는 靈光官)
② 判讀文
01 進士安瑚戶奴儉佛 (左寸)
02 右所陳爲白內等奴矣段□□祖母追贈貞夫人李氏12) 敎是父邊傳來奴崔富矣所生婢毛乙介同婢矣夫婢夫隱(?)□
03 矣所生奴鄭松等乙廣□□□舍13) 舍音主以使用敎是如可去丙辰年14) 分同夫妻亦所生奴婢幷四口率良
04 旀逃亡爲去乙推尋不得爲白有如乎節婢毛乙介及所生奴二口亦靈光地居生爲白去乙执捉付官爲白有臥□
05 事是良尒其矣夫奴鄭松及所生婢二口去處果一時逃亡爲在婢同加矣所生婢九月及所生奴一口果奴□
06 內隱三等矣去處乙良幷以推考計年役價生徵支給爲只爲靈光官良中議送15)
07 行下濟拔16) 向敎是事望白內臥乎事是亦在所陳
08 都觀察黜陟使17) 處分
09 天順四年十一月 日所志
10 使[署押] 都事
(題辭)
11 十一月十三日
12 執捉付官的是
13 去等 傳傳賤籍相
14 考依法公當施
15 行向事 靈光
「官印 2개(7.5Ⅹ7.5Cm)」
16 卄八日18)
17 到刑
---------(粘連部分)---□□□婢毛乙介□□□□□--------
(磨損, 脫落)
조선중기 안씨가는 安瑚 安瑭 등을 비롯한 구슬 玉자와 處謙·處諴 등 處자 行列에서 그 극성기를 맞이하였다. 안처순의 사마, 문과 합격증인 백패 홍패 또한 이러한 京班으로서의 안씨가의 위상을 전해주고 있다. 안처순은 중종 8년(1513)의 癸酉 式年試에서 進士 1등 5위에, 그 이듬해 문과에서는 別試 丙科 16위로 급제하였다. 호남에서 현존하는 교지로서는 매우 희귀한 편이다.
◯ 1513년 安處順 白牌
敎旨
幼學安處順進士一等第五人□
格者
正德八年九月 日
◯ 1514년 安處順 紅牌
敎旨
成均進士安處順文科
丙科第十六人及第出
身者
正德九年十月 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