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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시
권이진
권상희
권용전
권영수
  권시(權諰, 1604∼1672)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 자는 사성(思誠), 호는 탄옹(炭翁). 아버지는 좌랑 득기(得己)이고,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도정(都正) 첨(瞻)의 딸이다.
 
  권이진(權以鎭, 1668∼173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정(子定), 호는 유회당(有懷堂) 또는 수만헌(收漫軒). 공주 출신. 아버지는 현감 유(惟)이며, 외할아버지는 송시열(宋時烈)이다. 윤증(尹拯)의 문인이다.유회당(有懷堂) 권이진(權以鎭)선생은 이 시기의 대표적인 학인(學人)으로서, 또 국정의 개혁과 복리증진에 노력했던 경세관료로서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살다간 인물이다. 그를 둘러 싼 남인·노론·소론의 척분과 학연은 그가 한 시대를 풍미하는 학자요 경세가로 굴기하는데 자양분이 되었지만 정쟁의 와중에서 감수해야 했던 수난과 곡절은 결코 심상한 것은 아니었다.호서지역 또는 남인 명가를 얘기할 때, 안동권씨 유회당 가문을 입론의 대상으로 삼는데 주저할 논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 까닭은, 조야를 풍미했던 탄옹(炭翁)·우암(尤庵)의 내외 혈손이라는 가문적 배경 때문만도 아니고, 과거를 거쳐 정경의 반열에 올랐다는 정치적 현달 때문만도 아니다.만회 ·탄옹가의 의자손으로 양질의 교육을 받고 자란 그는 가정에서는 효제충신의 도를 익혔고, 사회적으로는 명사를 편방하여 유학적 소양과 경세가로서의 조예와 식견을 연찬·온축함으로써 치가는 물론이고 국가 경영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27세에 용문에 올라 67세로 고종하기까지 꼬박 40년 세월을 환해(宦海)에서 부침하며 영욕을 교감하면서도 보본(報本)사업에 혈성을 다하고, 밀암(密庵) 이재(李栽),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등 당대 석학들과의 난상토론을 통해 퇴계학의 유연성을 강조하였으며, 동래부사 재임시의 외교적 치적, 어전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재정 관료로서의 지론과 엄정한 실무 집행은 분명 동시대의 여느 식자들과 구별되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유회당에 대한 인간적·역사적 평가의 초점도 정치사적 관점보다는 학인으로서, 경세관료로서의 면모에 맞춰져야 할 것이다.만회에게서 망울을 맺어 유회당에 이르러 화려한 꽃을 피운 유교적 실천의식은 이후 하나의 가풍으로서 전승·발전되었는데, 유희당 사후 10여 대에 이르기까지[현종손 權兌遠선생에 기준하면 9대] 그의 자손들이 무실에 바탕하여 시대 사조와 학풍을 선도하며 청신(淸新)한 가풍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도 여기에 있었다. 성호 이익이 유회당의 묘지를 찬하여 그의 행덕을 기렸고, 성호의 손자 이구환(李九煥)이 유회당의 증손서가 되어 통가지의(通家之誼)를 맺은 것에서도 실학 정신에 바탕한 소통의 구조를 확인 할 수 있다.한편 유회당의 선대는 대대로 서울에 세거하며 양주 및 광주낙생 일대에 분묘를 조성하였으나 1627년(인조5) 조부 탄옹이 탄방(炭防) 복거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호서사림에 편입되기에 이르렀고, 40세 되던 1707년(숙종33) 유회당이 다시 탄방에서 2O리 떨어진 무수동(無愁洞)으로 솔가 이주 하였다.이후 무수동은 단순히 주거의 공간을 넘어 보본추원(報本追遠), 돈친목족(敎親睦族), 학문연마의 기능을 성실히 수행하며 유회당 가문의 백세터전으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본고에서 살펴 볼 대부분의 고문헌도 이 곳 무수동에서의 삶의 궤적을 담은 소중한 정신 유산인 것이다.유회당의 학문적 성장과 정치적 현달은 탄옹가문의 가격(家格) 신장에 기여하는 한편 「유회당가문」이라고 하는 새로운 문호의 형성을 수반하였다. 이후 그의 자손들은 만회⇒탄옹⇒유회당으로 이어지는 가학 연원에 바탕하여 문로(門路)를 확립하였고, 사환·학문·문화 등 제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가성(家聲)의 유지와 발전에 노력하였다.
 
  권상희(權尙熺, 1734∼180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증조는 권유(權惟)이고, 조부는 유회당(有懷堂) 권이진(權以鎭)이며, 아버지는 권세억(權世檍)이다. 외조는 부사(府使) 이익형(李益炯)이고, 처부는 진사 동소(桐巢) 남하정(南夏正)이다. 유회당을 제외한 그 자손들 중에 정경의 반열에 오른 인물은 없었지만 증손 상희(尙熺)는 선대의 음덕에 힘입어 한성서윤, 돈녕부판관, 용안(龍安)·신창(新昌) 현감 등 내외의 요직을 두루 거쳤고, 도량이 굉후(宏厚)하고 문아(文雅)한 인물이었던 6세손 영수(永秀)는 1844년(헌종10) 문과에 합격하여 형조·호조참판을 지내는 등 매우 현달했다. 비록 사환에 몸담지는 않았지만 현손 감(堪)은 시명(詩名)이 자자하여 후진 양성에도 크게 기여하였고, 5세손 용전(用銓)은 일생 처사로 살았지만 그 인품이 청결하기가 빙옥(氷玉)과 같아 조야의 신망이 컸다고 한다. 또 7세손 경채(景采) 역시 진사에 입격한 뒤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으나 효우가 돈독하고 법도를 준수한 아정(雅正)한 선비로 명성이 높았다.
 
  권용전(權用銓, 1785∼?)   
용전(用銓)은 일생 처사로 살았지만 그 인품이 청결하기가 빙옥(氷玉)과 같아 조야의 신망이 컸다고 한다.
 
  권영수(權永秀, 1808∼186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현보(賢甫). 증조는 태창수(太倉守) 권상희(權尙熺)이고, 조부는 통덕랑(通德郞) 권감(權堪)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된 진사(進士) 권용전(權用銓)이다. 외조는 이화연(李華延)이고, 전처는 전주이씨 진사 이백영(李百榮)의 딸이고 후처는 진주강씨 강도흠(姜道欽)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