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고문서의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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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求福(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安承俊(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전문위원)
慶州市 江東面 良洞 소재 慶州孫氏家의 조사는 一九九四년, 一九九五년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조사자는 필자를 비롯, 李榮薰(成均館大), 金炫榮(國史編纂委員會) 선생 두 분이 수고하였다. 그후 一九九六년 봄, 鄭求福(韓國精神文化硏究院)이 미촬영 분재기를 촬영해옴으로써, 孫氏家의 모든 문서를 수집할 수 있었다. 조사 당시 宗孫이었던 孫東滿氏와 부인 固城李氏가 조사팀을 친절히 맞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귀중한 문서를 대여해 주었다. 高齡이었던 孫東滿氏는 一九九六년에 작고하였고, 현 종손인 孫成薰氏는 유업을 계승하여 당시 미처 촬영하지 못했던 자료와 신간 족보를 보내는 등 제반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본서는 이러한 모든 분들의 덕택에 간행될 수 있었다. 1)
손씨가문 소장 고문서는 古文書學史上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선 소장처별로 볼 때, 一六세기 이전에 작성된 문서로는 이 가문이 가장 많은 양을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손씨가 소장 자료는 고문서 용어 및 양식의 연구에 필수적이다. 뿐만 아니라 告身敎旨, 分財記, 明文, 立案 등의 자료는 조선시대 사회사, 경제사, 법제사 연구에 결정적 자료이다.
이 가운데 一五六〇년에 작성된 〈孫光晛·崔得忠 奴婢訴訟立案〉은 노비결송입안으로서는 오래된 것이다. 이외에도 孫昭(一四三三-一四八四) 影幀을 비롯, 數多한 문화재급 자료들이 많다. 이 중『通鑑續編』(二권 六책)은 國寶 二八三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古文書는 文化財 一三, 一四호, 그리고 大宗宅은 重要民俗資料 二三호로 각각 지정되어 있다.
고문서류 가운데 시기가 이른 것들을 중심으로 『慶北地方古文書集成』2) , 『嶺南鄕約資料集成』3) 에 소개되어 있으며, 이에 대한 해제도 李樹健 교수에 의해 연구되어 있다. 4)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에서는 역사, 철학, 문학, 민속학, 인류학 등 다각도에서 양동마을 전체를 조망하였는데, 그 결과물을 『良佐洞硏究』라는 단행본으로 출간하였다. 5) 한편 양동에는 손씨가와 쌍벽을 이루면서 활약한 驪州李氏 李彦迪家門이 世居하였다. 이에 대한 자료집도 출간되었는데, (사)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에서 간행한 『嶺南古文書集成』(Ⅱ)- 晦齋李彦迪家門古文書 6) 『玉山書院誌』7)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본서에 揭載한 문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 자료와 연구성과를 반드시 참고하여야 할 것이다.
본 자료집에는 그간 부분적으로 간행된 자료를 포함하여 이 가문 소장의 전체문서를 集大成하였다. 본 해제에서는 이들 자료집과 연구성과를 참고하되, 개별자료의 고문서학적 해제, 즉 자료의 가장 기초라 할 수 있는 문서의 作成年代, 授受者(撰者) 등을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고 서술하고자 한다.
良洞(良佐洞)의 慶州孫氏8) 는 李樹健이 지적하였듯이 「道班」으로서 조선초 이래 전형적인 兩班家였으나, 9)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그 世系는 분명하지 않았다. 10) 족보에 의해 世系가 밝혀지고 있는 시기는 고려말로서 中始祖 敬源 때부터이며, 그 손자인 登(承議郞 司憲府監察)에 이르러 身分, 配位, 墓所 등이 밝혀지고 있다. 『慶州孫氏族譜』 初刊本(甲戌譜, 一六九四) 서문에 「凡我內外之派別於一譜者 實自監察公始矣」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11) 족보상에 나타나는 登에 대한 기록만으로는 그의 사회 경제적 지위를 살펴는데 충분치 않다. 하지만 그의 妻父인 時愚(寧海朴氏)가 正朝戶長을 지낸 인물인 것으로 보아 孫氏家 또한 당시까지도 경주지역의 향리계층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12) 『慶州府戶長先生案』의 孫氏들이 이들 良洞派 손씨들과는 분명 연관성이 있었을 것이나, 世系上 분화과정을 추적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 조선초 登이 司憲府監察로 立身한 이후 그의 아들대인 土晟(一三九六-一四七七)대에 그가 문과를 거쳐 兵豊參議로 현달하면서 가문의 사회 경제적 기반을 다졌다고 할 수 있다. 登 당대에는 사환에서 뿐만 아니라 妻家인 안동권씨(權明利)로부터 노비 등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다. 손씨 가문의 最古의 분재기인 一四四三년 〈權明利分衿文記〉는 바로 그같은 재산수수관계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당시 權明利家는 노비 一三〇 여구를 보유하여 재력이 매우 풍부하였다.
당시 登은 그 시기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慶尙道 尙州府 동쪽, 현재의 中東面 悚村에 터전을 잡게 되었으며, 이후 累遷하여 그 아들인 士晟은 靑松府 安德縣에 정착하게 되었다. 손씨가의 중흥조라고 할 수 있는 孫昭(一四三三-一四八四)도 바로 이곳에서 출생하였다. 13)
그 이후 士晟의 아들대에서 장자 旭 계열은 비록 男系 혈손은 없었지만 永川 지역에 그 터전을 마련하였고, 次子 昭의 후손들은 本鄕인 慶州에 돌아와 양동 마을에 정착하였다. 그 이동에는 仕宦과 婚姻, 卜居 등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본서의 주인공인 孫昭 계열은 그가 一五세기 초에서 양동에 入鄕한 이후 현재까지 약 五〇〇여년간 세거하고 있다. 이들의 世系를 圖表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良洞의 경주손씨가 현달하고 사회 경제적 성장을 하게 된 시기는 孫昭(一四三三-一四八四)와 그 아들인 仲暾(一四六三-一五二九)대였다. 손소는 一四五九년(세조 五)에 生員試에 入格한 이후 承政院 漢文咨寫, 博士, 成均館注書를 지냈고, 一四六三년 文科를 거친 후 成均館主簿, 司憲府監察, 兵曹佐郞을 지냈다. 一四六七년(세조一三) 宗廟署令으로 있다가 이시애란이 일어나자 從事官으로 참여해 亂을 토벌하고 敵愾功臣 二등에 올랐다. 그 공로로 말미암아 많은 土地와 奴婢를 확보하는 한편 內贍寺正에 超授되었다. 이후 星州牧使, 工曹參議, 安東府使, 晉州牧使 등 큰 고을의 원을 지냈으며, 鷄川君에 封해졌다. 손씨가의 사회경제적 기반은 사실상 이때 형성되었고 대대로 후손들이 榮華를 누릴 수 있었던 것도 이에 기인한 바가 크다. 그의 妻家는 豊德柳氏로서 이들 柳氏들은 일찍이 양동에 터를 잡고 있었던 가문이었다. 분재기를 통해보면 柳氏家 또한 경제적으로 매우 풍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손소는 이같은 富를 이어받으면서 妻鄕인 良洞으로 이거하였던 것이다.
孫仲暾(一四六三-一五二九)은 二O세에 司馬試, 二七세에 문과에 등제하여 藝文館 奉敎를 지냈고, 一四九七년(연산군 三)에는 梁山郡守, 成均館 司藝, 司僕寺 正이 되었다. 중종이 즉위하자 尙州牧使에 제수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중종 四년에는 관품이 通政大夫에 올라 承政院 左承旨를 지냈다. 工曹參判, 禮曹參判, 工曹判書, 吏曹判書, 右參贊 등을 지냈다.
손소, 손중돈 양대 이후 손씨가문은 慶州李氏·慶州金氏·昌寧曺氏·迎日鄭氏·信川康氏·一直孫氏·平海黃氏·寧越辛氏 등 경주 인근의 영남사족과 혼인하면서 족적 기반을 유지해왔다.
한편 양동에는 경주손씨와 더불어 驪州李氏 李彦迪 가문이 세거하고 있었다. 이언적가문은 李權이 添設職(典書)을 갖고 李良佐(진사)의 사위가 되었을 때부터 興海, 迎日, 安康縣 일대에 일족이 분포하게 되었다. 이후 李權의 증손 李蕃이 손소의 사위가 되어 양동에 移居해 오면서 손씨와 함께 양동은 그들의 세거지가 되었다. 14) 본서의 洞案에는 사실상 孫氏, 李氏 兩姓이 그 구성원이다. 따라서 여주이씨문중 또한 이 가문소장 문서를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15)
이들 손씨가에는 손소, 손중돈을 위시하여 그들 祖先들을 위한 書院, 齋閣이 많다. 一四七五년 손소가 靑松으로부터 移居하면서 세운 大宗宅을 비롯하여 涑村齋(尙州 中東), 文居齋(靑松 安德), 耳谷齋舍(奉化 桃村), 上達菴, 下學齋, 觀稼亭, 그리고 涑水書院과 一六九五년 東江書院(江東面 有今里) 등이 있다.
본서에 실린 고문서 이외에 참고되는 자료로는 아래의 成册本 圖書가 있다. 이들 문서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도서관에 마이크로필름으로 촬영되어 있다. 16) 본서에 게재하지 않았지만 다음의 소개하는 文集 및 家系記錄은 이 가문을 이해하는데 반드시 참고해야 될 자료이다. 17)
특히 敎書, 兵曹契帖, 先世榜目 등은 고문서로서의 원형을 잃어버렸지만 그 성격은 고문서로서의 가치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자료이다.
孫氏家에서 소장한 고문서는 몇가지 점에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타가문에 비해 一五~一六세기에 걸치는 조선전기 자료가 풍부하다는 점이다. 敎旨(一一二점), 錄劵(一점), 所志(四점), 立案(一二점), 分財記(一五점), 奴婢明文文(三점), 士地明文(一二二점), 그리고 牌旨(三점), 尺文(一점) 등 전체 二七四점의 문서가 이 시기에 작성되었다. 소장처를 기준으로 볼 때 孫氏家는 우리나라에서 시기적으로 이른 문서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 손씨가에서 조선전기 문서를 많이 소장하고 있었던 것은 그들의 發身이 世祖功臣에서 비롯되었고, 또한 조선후기보다 前期에 高官을 지낸 인물이 많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둘째, 경제사, 사회사 자료가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서 열거한 조선전기 자료 대부분이 이같은 자료로서 자료의 집중도면에서 그 연구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또한 一六~一八세기에 작성된 所志, 戶籍(三三점), 完議(六), 士地明文(一二二점), 祭享錄과 一七세기 초~一八세기 말에 결쳐 작성된 二一건의 香約·洞案은 사회사적으로 매우 가치 높은 것들이다.
孫氏家所藏 문서는 그 사회 경제적 가치 뿐 만 아니라 고문서학적, 볍제사적으로 매우 가치있는 것들이 많다. 조선초기에 집중되어 있는 告身敎旨, 현존 最古의 決訟立案(一五六〇년 작성된 奴婢訴訟)이 이러한 것들이다.
수록된 고문서의 작성(편찬)연대, 發受給者(撥者), 規格 등을 도표하면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