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고문서의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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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에 수록한 고문서는 인동장씨 여헌 장현광(張顯光) 종택의 진장 문헌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여헌종택 소장의 고문서를 조사한 것은 2003년으로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 선생의 후손 이원희(李元熙) 선생의 주선이 그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2001년 우리 연구에서는 상주 연안이씨 식산종택의 고문서를 조사·수집하는 과정에서 이원희 선생으로부터 여헌종택에도 방대한 분량의 고문서가 소장되어 있고, 종손(張哲洙)을 비롯한 후손들이 국가적인 관리방안을 모색하고 있다는 말을 전해듣게 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조사 요청이 있었으나 본원의 사무가 분주하여 착수하지 못하다가 2003년 여헌종손의 거주지인 대구시 남구 대명동으로 방문하여 조사·수집하게 되었다. 당시의 조사자는 김학수(본원 전문위원), 정수환(본원 전문원), 심영환, 손계영(이상 국학진흥연구사업 연구원)이었고, 종손의 아우 정동수 선생과 식산 후손 이원희 선생이 동석하였다.
여헌가문 고문서의 원소장처는 경북 구미시 인의동에 소재한 여헌종택이지만 관리상의 편의에 따라 현재 종손이 거주하는 대구로 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조사 당시 대부분의 고문서는 유형별로 정리되어 있었고, 보존 상태 또한 매우 양호하였다. 특히, 집안에서 이미 목록을 작성해 둔 터라 조사가 한결 용이하였으며, 상당수의 문서에는 간략 내용을 수록한 별지가 부착되어 있어 내용 확인에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수집된 고문서는 약 8개월의 정리기간을 거쳐 2004년 2월 목록 및 마이크로필름 촬영이 완료되었고, 주요 자료는 슬라이드필름으로 촬영해 두었다.
여헌종택 고문서의 수집은 기탁을 전제로 이루어졌다. 세가의 종손으로 대학에서 유학을 전공한 장철수 선생은 고문서의 학술적 가치를 익히 알고 있었고, 이것이 집안의 진장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으로 관리되고, 활용되기를 여망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 본원의 고문서사업에 공감하여 자료의 정리와 관리를 위임하게 된 것이다. 2004년 4월 우리연구원에 공식 기탁된 여헌종택의 전적은 고문서 1,561점, 고서 821책, 성책고문서 18점, 유물 18점을 포함하여 총 2,416점이다. 이들 자료에 대한 세부 목록은 『고문서 기증·기탁목록2-인동장씨 여헌종택 기탁전적』(2004,한국학중앙연구원)을 참조하기 바란다. 이상과 같은 절차를 통해 기탁된 자료는 현재 장서각에 마련된「기탁자료실」에 보관되어 있다.
본서에 수록한 고문서는 2,416점의 전적 중 고문서의 형태를 갖추고 사료적 가치가 뛰어난 자료를 엄선한 것이며, 여기서 누락된 자료들은 자료적 특성에 따라 『한국간찰자료선집』이나 『한국학자료총서』등을 통해 연차적으로 발간할 계획에 있음을 밝혀 둔다.
마지막으로 일가의 400년 진장을 기탁하여 자료집으로 발간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여헌종손 장철수 선생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여헌가문은 선조~인조조의 산림학자 여헌 장현광을 현조로 하는 가문으로 인동장씨의 여러 계파 중에서도 가장 현달한 가계의 하나였다. 이들은 득성 이래로 인동에 세거하였고, 16세기 중후반부터 장현광이 학자로 대성하면서 영남사림의 주요 가문으로서 확고한 지위를 다질 수 있었다. 장현광 이후에도 여헌가문에서는 장응일(張應一), 장영(張{金+永}), 장만기(張萬紀) 등 학자·관료를 통해 가성을 이어나가는 한편 한말에는 장지영(張志永)을 중심으로 한 일문의 여러 인사가 독립운동에 투신함으로써 애국지사도 다수 배출되었다.
시조 장금용(張金用)은 고려조에 삼중대광 신호위상장군을 지낸 인물이지만 남아 있는 사적이 극히 드물고, 묘소 또한 실전되었다. 다만 집안의 시조라는 위상으로 인해 후손들로부터 무한한 존경을 받았고, 1634년 장현광은 동종의 화합을 다지고 시조에 대한 경모의 마음을 더하기 위해 지패 봉사를 주관키도 했다. 당시 장현광은,
또 우리 동성 종중에서 불행한 것은 시조의 묘소를 아득히 모르는 점이다. 딴 성씨들은 세대가 비록 멀더라도 혹 묘소를 기억하여 알아서 제때에 제사를 올려 정을 펴고 있는데, 지금 우리 장씨는 선조의 봉분이 어디에 계신지를 알지 못하여 정성을 올릴 곳이 없으니, 이 때문에 오늘 이 제사를 올리게 된 것이다 1)
고 하여 시조묘의 실전에 따른 애석한 심경을 토로한 바 있는데, 현재까지도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2) 장금용 이후에도 한동안은 자손들에 대한 행적이 자세하지는 않다. 다만『인동장씨대동보』에 따르면 3) , 상장군, 교위, 내사령, 직장, 검교군기감, 판통례문사, 밀직사사 등 비록 고관은 아니지만 고려시대 내내 관직이 꾸준히 이어졌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인동장씨는 여말선초의 격변기에는 장안세(張安世)라는 절신을 배출하면서 문호의 신장을 기하게 되었다. 고려말에 덕녕부윤을 지낸 장안세는 아호가 송은(松隱)으로 조선왕조가 개창되자 배상지, 김충한, 차원부 등과 함께 두류산 아래 배록동에 은거하여 4)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 두문동 72현의 한사람으로 칭송되었다. 더구나 그는 태조 이성계가 구의를 바탕으로 여러 차례 서찰을 보내 입조시키려 했지만 끝내 이를 사양함으로써「이씨 조선에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여 (불사이군의) 뜻을 이루었다」고 행적이 특서되었다. 5) 그는 12년 동안 함흥부사에 재임하며 경세제민을 몸소 실천하였는데, 만세교의 건립은 여러 치적 중에서도 으뜸으로 일컬어지며 두고 두고 회자되었다.
장안세의 절의와 목민관으로서의 치적은 조선왕조에서는 크게 현창되지 못하다가 순조연간인 1831년에 가서야 시호가 논의되었고 6) , 이로부터 3년이 지난 1834년 충정의 시호가 내렸다. ‘임금을 섬김에 절개를 다하였고(사군진절왈충), 청백으로서 스스로를 지켜나갔다(淸白自守曰貞)’는 시주는 장안세의 삶에 대한 적실한 평가라 여겨진다. 두문동서원과 인동의 옥계사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이 외에도 지금의 구미시 인의동에는 그를 제향하는 경절묘와 시적을 기록한 유허비가 남아 있는데, 비문의 찬자는 영남의 석학 이상정이 찬했다.
장안세는 아들 4형제[중양·백·중일·중익]을 두었는데, 장자 장중양이 여헌의 7대조이다. 장중양은 고려조에 김해부사를 지냈고 7) ,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한성좌윤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사후에는 비갈에 전조의 직함을 쓰게 함으로써 아버지에 이어 고려조에 대한 신절을 지켰다. 장중양은 장안세를 시종하는 과정에서 태조와 교유가 있었다. 태조는 즉위 이전에 고향 함흥을 자주 찾는 과정에서 그를 벗으로 대하며 교유하였고, 즉위 후에도 어찰을 내리며 8) 군신간이기보다는 고구(故舊)로 대하였지만 의리를 굽히지는 않았다. 장중양의 산소는 인동과 가까운 성주 초전면 소성동 소야산에 소재하고 있는데, 거주지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미상이다.
장중양의 아들 장수(張修)는 조부와 아버지와는 달리 조선조에 출사하여 지평, 집의, 장령 등을 역임했다. 그의 출사는 친명에 의한 것이었고, 선대와는 달리 고려조에 신절을 지켜야 할 의리도 없었다. 이는 정몽주⇒길재의 학통을 이은 김종직(金宗直)의 출사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성품이 단중하고 강직했던 그는 오래도록 대간의 직임에 있으면서 직간을 통해 국정을 쇄신코자 했으나 여의치 않자 인동 옥산에 낙향하여 자적하였다.
장수는 두 아들[俌·俣]을 둘을 두었다. 풍저창승을 지낸 장자 장보는 1460년(세조 6)에 좌익원종공신에 입록된 것으로 9) 보아 훈구적 성향을 띠었음을 알 수 있다. 10) 사천진병마첨절제사를 지낸 차자 장우가 곧 여헌의 5대조이다. 장우는 무관직을 수행했고, 당시로서는 크게 현달하지는 않았지만 인동의 남산에 정착하여 세거의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집안 내에서는 남산파의 파조로 인식된 중요한 인물이다. 부인 양성이씨는 공소공(共昭公) 李思儉(이사검)의 따님이다. 이사검은 무과에 급제하여 판의금부사, 중추원부사,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1435년 정조사(正朝使)로서 명나라에까지 다녀온 현달한 인물이었다. 사실 장우만 하더라도 무반직을 수행한 점이 확인되는 바 양성이씨와의 통혼 역시 당시 인동장씨가 가지는 무반적 색채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런 추세는 장우의 아들 장승량(張承良), 손자 장준(張俊)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장승량은 서반 정3품 당하관인 어모장군의 품계를 지니고 있었고, 활쏘기(騎射)에 능하여 일시에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특히, 내금위로 재직하던 1470년(성종 1)에는 성종이 친임한 활쏘기 대회에서 90명 가운데 1등을 차지하여 활 1장을 하사받은 전적도 있었다. 11) 장준 역시 서반직인 내금위를 지냈다는 사실은 당시 인동장씨의 사회적 지위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장승량 대에 이루어진 변화 중의 하나는 거주지의 이동이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인동장씨는 장우 대에 인동의 남산에 입거하게 되었으나 세거의 기반이 다져진 것은 이로부터 몇 대를 더 기다려야 했다. 우선 아들 장승량이 인동의 인근 지역이 성주 岩浦로 다시 이주했기 때문이다. 장승량, 장준, 張繼曾 3대의 묘소가 암포·월곡 등지에 조성된 것으로 보아 한동안 이곳을 주거의 기반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지만 12) 장계증(張繼曾)의 아들 장열(張烈)·장희(張熙) 형제가 경성에서 출생했다는 족보의 기록은 여헌의 선대가 서울에도 일정한 기반을 갖추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추측컨대, 경거의 기반은 장계증의 부인 문화유씨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처부 유인호(柳仁{氵+豪})는 찬성 윤동의 5세손으로 이조참의를 지낸 인물이다. 효성이 지극했던 유씨 부인을 “경족 대가에서 생장했다(夫人生長京族大가)”라고 한 점에서 장계증의 처가는 서울에 기반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종전까지 서울과 별다른 연고가 없었던 여헌 선대에 있어 장열·장희의 서울 출생은 외가, 즉 문화유씨와의 관련성 외에는 뚜렷한 설명의 논거를 찾기 어렵다.
하지만 장열의 서울생활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나이 20세 무렵인 1530년 그는 낙향을 단행하여 선대의 전장이 있던 성주 암포를 거쳐 인동의 남산으로 돌아온 것이다. 장우가 남산에 터를 잡은지 4대만에 정착이 이루어진 것이다. 남산 일대가 여헌가문의 세거지로 확립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다만 장열의 아우 장희는 남산으로 돌아오지 않고 암포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1554년 생인 여헌이 인동의 인선방(人善坊)에서 태어난 반면 그보다 9년 뒤에 태어난 장희의 아들 장현도가 암포 출생이라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13)
장열은 벼슬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경학에 밝았고, 지조가 있어 사람들이 그를 외경했다고 한다. 특히, 그는 9촌숙 張蠶과 더불어 族契를 설립하여 종족간의 결속을 도모하는 한편 족보 간행이나 선영의 제례를 꼼꼼히 챙기는 등 위선 사업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무엇보다 집안의 자제들의 학업을 독려함으로써 후일 인동장씨 가문에서 여헌을 비롯한 학자들이 다수 배출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
〈여현종택 가계도〉
여헌은 1554년 장열과 성산이씨 사이에서 장자로 태어나 1637년 영천 입암(入岩)에서 향년 84세로 사망하기까지 한 시대의 사표로서 당대를 풍미했고, 인조반정 이후에는 산림(山林)으로서 일국의 추앙을 받았다.
그러나 여헌이 출생할 때만 해도 집안에는 학자나 고위관료가 없었으므로 가격은 그다지 높지 않았지만 혼인관계나 田庄의 분포를 볼 때 인동·성주 일대에 재지적 기반만큼은 탄탄하게 갖추고 있었다.
7세에 학업을 시작한 여헌은 9세부터 노수함(魯守諴)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학문의 토대를 넓혔다. 노수함은 송당(松堂) 박영(朴榮)의 문인으로 여헌에게는 자형이었다. 박영이 한훤당문인 정붕(鄭鵬)의 제자였으므로 여헌은 김종직→김굉필→정붕→박영→노수함으로 이어지는 학맥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14) 더욱이 정붕의 아들로 박영에게는 사위가 되었던 정각이 여헌의 학식과 인품에 감동을 받아 말을 선물한 일화는 15) 여헌의 학자적 면모와 신당 집안과의 세교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여헌은 14세 경에는 장순(張峋)을 종학하며 학문의 외연을 넓혔다. 장순은 여헌의 11촌숙으로 16) 학행이 순독하여 명성이 있었고, 1561년 사마시에 입격한 뒤로는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여헌이 장순의 문하에서 얼마간 수학했는지는 자세하지 않으나 여헌이 학자로 대성하는데 장순의 역할은 매우 컸다.「여헌연보」에 의하면, 여헌은 15-16세 경에 장순의 책상에서 성리대전 황극편(皇極篇)을 발견하고는 이를 차람하게 되면서 17) 학문에 더욱 빠져 들게 되었고, 이로부터는 더 이상 명사를 편방하지 않고 독학하게 되었다. 여헌을 두고 ‘불유사승(不由師承)’18) 이라 하여 뚜fut한 사승관계가 없는 것으로 인식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독학(篤學)의 결과 여헌은 18세에 최초의 저술로 우주의 중요한 진리를 포괄하여 나타낸 19) 을 작첩하게 되는데, 10첩인 〈반궁첩(反躬帖)〉에는 ‘능히 천하의 제일 사업을 본받는 자가 바로 천하의 제일 인물이다’는 구절을 수제(手題)하여 학자로서의 포부를 드러내었다.
이 시기 여헌은 위선과 동종의 교육에도 각별한 관심을 보여 문로들과 상의하여 매달 종가의 사당을 참배하고, 강독과 제술을 연마하는 것을 상규로 삼기도 했다. 20세에 관례를 올린 여헌은 한동안 과업에 종사하여 21세 때인 1573년(선조 6)에는 안동과 청도에서 실시된 고과(考課)에서 학식과 문장의 우수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여헌이 침식을 잊으며 학업에 열중한 것은 23세 경이었다. 특히, 그는 하학(下學)·상달(上達)의 차서와 천덕(天德)·왕도(王道)의 요체를 궁구하는데 노력을 다했고, 후일 그의 학문의 요체가 된 역학(易學) 공부에 심취하고, 학행(才行卓異)으로 피천된 것도 이 때였다.
한편 여헌은 26세 되던 1579년(선조 12) 청주정씨와 혼례를 치루게 된다. 당시로서는 만혼이었지만 이 혼사는 퇴계·남명의 고제 정구(鄭逑)의 주관하에 이루어졌고 20) , 특히 양인은 17세기 초중반 성주·인동일대를 중심으로 태동을 보인 이른바 ‘한려학파(寒旅學派)’의 양대 구심점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여헌연보」에 의하면, 허잠(許箴)이 성주목사로 부임하여 남중의 호학하는 선비를 묻자, 한강은 여헌을 두고 ‘학문을 구하고 도에 뜻을 두었으며, 덕성이 순숙하여 후일 나의 스승이 될 이는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다’고 21) 하며 극찬했다고 한다.
여헌은 38세 되던 1591년(선조 24) 겨울 전옥서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마침 이 해 10월에 어머니 이씨 부인의 상을 당해 부임하지 못했다. 이로부터 4개월이 지난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여헌은 피난을 떠나 금오산, 도촌(道村)의 처가(야로송씨)를 거쳐 동년 10월에는 매부 여륜(呂倫)과 함께 성주 증산(甑山)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듬해에는 다시 의성 구지산(龜智山)의 매부 임이중의 집에 우거하였고, 이듬해인 1594년에는 소백산으로 이우(移寓)하는 등 전란에 따른 역정이 기구하였다.
그러나 여헌은 피난 중에도 백운동서원을 심방하는가 하면 학문에도 힘써 소백산 백운암에서 역경을 전사하였고, 잠시 환가한 뒤에는 평설(平說)을 탈고했다. 이 무렵 예빈시참봉과 제릉참봉이 주어졌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그러나 42세 되던 1595년(선조 28) 가을 출육(出六)의 특전을 입어 보은현감에 제수되자 여헌은 입경하여 사은숙배하고 부임하였다. 당시의 천거는 유성룡의 주관으로 이루어졌고 22) , 종전까지 어떤 관직도 수락하지 않았던 여헌의 변화된 모습을 본 문인 정사진(鄭四震)은 선생에게 출처의 도를 질문하자 여헌은 수시처중(隨時處中)에 바탕한 자신의 출처관을 자세하게 피력한 바 있다.
보은에 부임한 여헌은 일향을 권계하는 글을 23) 내리는 한편 군정(郡政)을 꼼꼼히 챙기며 선정을 베풀기 위해 노력하였다. 군정의 여가에는 성운(成運)의 묘소를 찾아 장문의 제문을 지어 24) 선학에 대한 예를 다했다. 조식(曹植)·서경덕(徐敬德)과 교유가 깊었던 성운은 여헌의 선생 노수함이 사사한 박영의 문인이기도 했다.
여헌의 보은 생활은 길지 않았다. 부임하던 그 해 12월에 감사에게 사직서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자 이듬해인 1596년 2월 재차 사직서를 올린 뒤 족손 장경우에게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구송케하며 귀향해 버린 것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추고하라는 명이 내렸지만 김홍미(金弘微) 등이 선비를 예유해야 한다는 명문으로 적극 옹호하여 간신히 모면할 수 있었다. 25) 김홍미가 여헌을 옹호한 것은 당초 여헌을 천거했던 유성룡이 그의 처남이라는 점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고향 인동으로 돌아 온 여헌은 선산 고곡의 친구 박수일 집에 거처하다 여름에 문인 정사진의 요청으로 영천 입암에 복거하였고, 1597년 역시 정사진 형제의 주선으로 청송 속곡에 우거하게 되었다. 26) 여기서 여헌은 청송 송생에 우거하던 내암문인(來庵門人) 박성(朴惺)과 더불어 회화(會話)하였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후일 여헌은 박성과 인거(隣居)할 계획을 세울 정도로 27) 가까워졌고, 박성의 사후에는 행장을 지었다. 28) 이 무렵 여헌은 비로소 여헌으로 자호하게 되는데, 그 사연은 「여헌설(旅軒說)」에 잘 서술되어 있다.
“나는 이미 이러한 말로 거절하고 인하여 헌호를 갖지 않은 지가 지금 40여 년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 비로소 여헌(旅軒)이라고 호하였으니, 내 스스로 생각하건대 이 호를 나에게 가함은 참람함이 되지 않고 또 그 실제에 합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헌(軒)은 어느 곳에 있는가? 일정한 곳이 없다. 어찌하여 여(旅)라고 하였는가? 나는 항상 나그네[旅]가 되었기 때문이니, 나그네란 남의 손님이 됨을 이른다. 내가 《주역(周易)》을 보니, 여괘(旅卦)는 이(離)가 위에 있고 간(艮)이 아래에 있는바, 간(艮)인 산(山)은 멈추어서 옮기지 않고 이(離)인 화(火)는 가고 머물지 않아 떠나가고 머물지 않는 상(象)이 된다. 그러므로 괘의 이름을 여(旅)라 한 것이니, 만약 일정한 거처가 있어 밖에 돌아다니지 않는다면 어찌 나그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29)
일생을 나그네처럼 살아 온 자신의 삶을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말이 여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후 여헌은 1598년 봉화 도심촌에 우거하다 마침 근처에 살고 있던 유성룡을 방문하게 된다. 유성룡은 여헌의 성명을 익히 알고 있었고, 조정에 천거까지 한 바 있었지만 상면하기는 처음이었다. 한 눈에 대유의 풍모를 알아 본 유성룡은 아들 유진을 여헌문하에 보내 수학케 하였으며 30) 여헌은 후일『서애집(西厓集)』의 발문을 쓰게 된다. 31)
여헌의 나그네 생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599년 선산의 월파촌(月派寸)으로 돌아왔다가 1600년에는 다시 입암으로 들어갔고, 1601년에는 인동으로 돌아와 문인 장내범의 집에서 기거하며 족계를 중수하게 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족계는 선고 장열이 장잠과 더불어 창설하였으나 난리를 겪는 과정에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다가 이 때에 와서 여헌이 일문의 결속을 도모하기 위해 중수한 것이다.
여헌의 표현에 따르면, 전란 이후 고향에 돌아와 보니 집안 사람 중에 남아 있는 자가 어른은 채 열 명이 되지 않았고, 아이들도 예닐곱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들 또한 곤궁하여 형세가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에 여헌은 위선, 동종의 화합과 상조, 강신을 골자로 하여 족계를 중수하고, 문인 장내범과 장광한(張光翰)에게 운영을 맡겼던 것이다. 32)
이로부터 여헌은 한동안 유람을 줄이며 집안이나 가정 경영에 집착하게 되었고, 조정의 소명에도 일부 부응하였다. 그리하여 50세 되던 1603년(선조36) 9월에는 의성현령으로 부임하였으나 그 해 12월에 실화로 향교의 위패가 소실되는 사고가 있어 1604년 2월에 파직되고 말았다. 33)
이 때 여헌은 인동으로 돌아가지 않고 선산의 월파촌에 머물렀는데, 고향에는 마땅한 거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생질 노경임과 문인들이 협모하여 1605년 선산 원당에다 강학지소인 원회재를 건립하자 여기서 생도를 가르치며 자적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 해는 종제 현도의 아들 장응일을 양자로 맞는 경사가 있었다. 34)
1606년 여헌은 비로소 인동 남산으로 돌아오게 된다. 왜란으로 소실된 구허에 모원당(慕遠堂)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모원당은 문인 장경우와 여러 종인들의 노력과 인동부사의 협조를 바탕으로 건립되었다. 건물이 낙성되자 여헌은 선조를 추념하는 마음에서 모원당이라 명명하였다. 35) 이후 모원당은 인동장씨 여헌종택(남산종택)의 본당으로 기능하면서 오늘에까지 유지·관리되고 있다.
한편 1606년 가을에는 입암에 만활당(萬活堂)이 건립됨으로써 여헌은 영천에 확고한 우거처를 마련하게 되는데, 후일 영천 지역에 다수의 문인이 배출된 것도 만활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강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여헌이 강학활동을 통해 인동·성주·의성 등 경상도 중부지역을 중심으로 문인을 규합하며 하나의 학단을 이루게 된 기점은 부지암정사가 낙성되던 1610년(광해군 2) 경이었다. 물론 장씨 일문의 자제 및 조임도(趙任道)·신열도(申悅道)처럼 선친을 따라 소시적에 입문하거나 신열도처럼 여헌의 의성현령 재임기에 입문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부지암정사의 건립 이후에 입문 활동이 활발해졌다. 부지암정사(不知岩精舍) 상량문에 등장하는 15현을 여헌의 초기문인으로 칭하는 배경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부지암정사는 문인 장경우가 향중의 선비들과 협모하여 여헌의 독서 강학지소로 건립한 것인데, 낙동강 연안에 경관이 수려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여헌은 기문에서, 당 아래에 흐르는 낙동강이 송나라 유학의 근원지 이수(伊水)·낙수(洛水)와 부합되고, 서쪽으로는 길재의 은거지 금오산이 있음을 특서한 바 있다. 36) 여헌의 사후 이 곳에는 부지암서원이 건립되었고, 1675년(숙종1)에는 동락으로 사액되었는데, 37) 동방의 이락(伊洛)을 뜻하는 ‘동락(東洛)’은 여헌의 부지암정사 기문에 근거한 명칭이다.
부지암정사 외에도 여헌의 강학처는 인동·선산 일대에 두루 분포하였다. 문인들이 여헌의 언행을 기록한 〈취정록(就正錄)〉, 〈배문록(拜門錄)〉 등의 각종 언행록에 38) 따르면, 여헌의 강학처는 선산의 원회당 및 원당(元堂), 인동향교, 남산정사, 성주 암포, 금오서원, 영천 입암 등 매우 다양하였지만 중심을 이룬 곳은 역시 부지암정사와 입암이었다.
특히, 입암은 여헌의 43세 되던 1596년에 처음 입거한 이후 1637년 사망하기까지 40년 동안 끊임없이 왕래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강학의 여건이 조성되었으며, 여헌의 고종처도 입암의 만욱재(晩勖齋)였다.
이후 여헌은 영천 우항 39) 에 거주하던 누이를 누차 방문하는 과정에서 1596년 5월 정사진의 주선으로 입암을 찾게 된 것이다. 입암은 지세가 험하여 예로부터 피난처로 주목을 받아 왔다. 임란이 발발한지 3년째인 1595년 정사진은 정사상·권극립·손우남 등과 함께 입암에 복거할 계획을 세운 바 있었고, 때마침 여헌이 방문하자 초청한 것이다. 이 네사람은 여헌으로부터 입암4우(立巖四友)로 지칭되며 40) 영천지역 여헌문인의 핵심을 이루었다.
입암사우를 통해 여헌과 영천과의 관계는 점차 강화되는 가운데 1599년 입암정사41) , 1606년에 만활당이 건립됨으로써 강학의 기반이 완비되었다. 42) 이를 계기로 영천일대의 사족들이 대거 입문하게 되었다.
영천지역 여헌문도의 결성과 확산에 있어 정사진이 중심이 된 연일정씨 일문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정사진은 척분과 학연을 바탕으로 여헌의 입암 복거를 적극 주선하는 한편 여헌을 임고서원의 강장으로 초빙하여 경내의 학풍을 진작시키고 43) , 임고서원의 중건과 제향의식 등 매사를 여헌에게 품질하여 처리하였다. 44)
바로 이런 역할에 힙입어 여헌은 1643년(인조 21)에 임고서원에 추향되었고, 1657년(효종 8)에는 입암서원에 주벽으로 봉안되었다. 임고서원은 정몽주의 주향처로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사액을 받았으며, 건립 과정에서는 이황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 45)
여헌의 임고서원 추향은 탄탄했던 문인 기반을 바탕으로 발론되었는데, 추향을 주도했던 정사물·김각·장학 등 여헌문인들은 배향이 아닌 병향을 주장함으로써 커다란 분쟁을 야기하기도 했다. 46) 여헌은 정몽주에 대해 사제나 후학으로서의 의리가 없다는 입장에서 주창된 병향론은 사림의 공론과 정몽주의 본손의 반대에 부딪혀 47)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영천지역에 그에 대한 추존의 분위기가 크게 고조되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17세기 초반 영천 사족들은 크게 정구(1543-1620), 조호익(1545-1609), 장현광(1554-1637)과의 학연을 맺고 있었다. 정구와 조호익은 이황의 문인이었으므로 영천 사족들은 이들을 통해 퇴계학맥을 잇고 있었던 것이다. 영천은 정몽주의 생장지였음에 비해 16세기 중반까지 사림파의 성장은 활발하지 못하다가 일부 인사가 이황의 문하를 출입하게 되면서 사풍이 크게 진작되었다.『도산급문제현록』에서 확인되는 영천지역 퇴계문인은 김응생, 김몽귀, 서인원, 정윤량, 노수 등 5인이었다. 이 중 김응생, 정윤량, 노수는 임고서원 건립을 주도하였고, 특히 김응생 황준량 등 퇴계문하의 고제들과 교유하는 한편 자양서당48) 을 건립하여 후학양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황 사후 영천 사족들은 조목·유성룡·김성일 등 안동권의 퇴계문인보다는 정구·조호익·장현광 등의 문하를 출입하며 퇴계학맥을 계승해 나갔다. 정구의 문인록인「회연급문록」에서 확인되는 영천 인물은 9명에 지나지 않지만「봉산욕행록」등 여타 기록에 의거할 때 정구와 사제에 준하는 관계를 유지한 인물은 20여명에 이르며, 이 중 상당수는 장현광·조호익의 문하를 동시에 출입한 것으로 나타난다.
정구와 영천 문인들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봉산욕행록이다. 정구는 1617년 7월부터 9월초까지 정구는 성주→현풍→창원→밀양→양산→김해를 경유하여 동래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경주→영천→신녕을 거쳐 환가한 적이 있었다. 49) 이 해 9월 3일 정구가 경주를 거쳐 영천에 이르자 박돈·박점을 비롯한 20여명의 문인과 종유인들이 회합하였으며, 대부분의 경비는 임고서원에서 판비한 바 있었다. 당시 정구의 영접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사람은 박점·박돈·박문효·박사신 등 밀양박씨 일문의 인사들이었다. 이는 이들이 영천지역 한강문인의 주축을 이루었음을 말해주는 것인데, 영접을 주관한 임고서원 원장은 박점이었다. 특히, 박씨 일문은 여헌문하에는 거의 입문하지 않은 대신 조호익의 문하를 출입함으로써 여헌문인과는 일정한 차별성을 보이게 되었다. 1643년 임고서원 병배논쟁에서 박돈 등이 병향의 부당성을 강변한 것도 사승관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편 여헌은 인조반정 이후에는 인조와 서인정권으로부터 일국의 원로로 예우되었다. 특히, 서인들은 반정 직후에 산림을 높이고 등용하자는 숭용산림(崇用山林)의 기치 아래 은일들의 징소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이에 여헌은 김장생·박지계와 함께 전격 징소되어 조야의 신망을 받았다. 50) 당시 영남은 조목·유성룡·김성일·정구 등 퇴계의 제자들이 사거함으로써 성주·인동·의성·영천 등 영남일원에 광범위하게 문인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던 여헌에게로 신망이 쏠리게 되었다. 특히, 유성룡의 고제로서 인조조 영남 남인의 영수로 인식된 정경세가,
인재에 대해서는 신이 본도에 있었으면서도 견문이 넓지 못해서 갑자기 하나하나 꼽아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현저하게 드러난 자로는 장현광(張顯光)을 첫손에 꼽을 수 있는데 이미 거두어 기용하셨고, 그 다음으로 문위(文渭)란 이가 있는데, 정인홍(鄭仁弘)의 득세시 두문불출하고 독서만 하며 전혀 왕래하지 않았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유진(柳袗)이 재주와 덕행이 있는 아름다운 선비인데 어제 정사에서 수령으로 임명 되었습니다. 유진은 바로 고(故) 정승 유성룡(柳成龍)의 아들입니다.” 51)
라고 하며 여헌을 적극 추천함으로써 징소가 더욱 가속화 되었다. 이에 1623년 5월 성균관사업에 임명된 이래 1637년 사망하기까지 약 15년 동안 산림으로서 지우를 입었다. 물론 여헌은 남진이퇴의 입장을 고수하여 좀체 입조하지는 않았지만 1624년 3월과 1626년 4월에는 입조하여 군왕의 예우에 부응하기도 했다. 52) 이 과정에서 인조는 상경시에 교통편의를 제공함은 물론 약물이나 음식을 하사하여 임하숙덕에 대한 예우를 다했다. 53)
【표】〈인조조 여헌의 환력〉

관직

비고

1623

3

징소논의

4

징소

박지계와 함께

5

원자보양관

김장생과 함께

성균관사업

박지계·김장생과 함께 징소

8

사헌부지평

1624

2

장령

3

자정전인견

입조

집의

공조참의

4

환향

일마지급

8

이조참의

1625

8

동부승지

1626

4

형조참판

입조

대사헌

5

부호군

1627

1

경상우도호소사

정경세(영상좌도호소사)

김장생(양호호소사)

1628

3

이조참판

1629

4

부호군

1631

6

행호군

1632

3

대사헌

10

부호군

12

호군

1634

1

자헌대부

5

공조판서

1635

5

우참찬

1636

6

지중추

산림으로서의 여헌의 역할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은 정묘호란에 따른 창의활동이었다. 1627년 1월 조정에서는 각 지방의 명망 인물을 호소사로 임명하여 의병활동을 독려하였는데, 이 때 여헌은 정경세(鄭經世:慶尙左道號召使), 김장생(金長生:兩湖號召使)과 함께 경상우도 호소사에 임명되어 54) 근왕에 노력하였다. 여헌을 호소사로 임명한 것은 견고한 문인집단을 염두에 둔 조처로 실제로도 근왕활동은 문인집단을 통해 착실히 이루어졌다. 여헌문인 중 정묘호란 당시에 창의를 주도한 인물은 박민(朴敏:嶺右義兵將), 조종악(趙宗岳), 김명, 조종대(趙宗岱), 이민성(李民宬), 배상룡(裵尙龍), 신적도(申適道:義兵將), 조준도(趙遵道:義兵將), 장경우(인동의병장), 여욱, 이지화, 손기업, 정호신 등 10여명에 이르며 55) 이들 외에도 창의에 가담한 인물은 매우 많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위탁보관된 여헌종택 소장 전적은 고문서·성책고문서가 1579점, 고서가 821책, 유물이 16점이다. 56) 본서에서는 이들 자료 중 낱장으로 된 전형적인 고문서를 수록하였다.
2003년 필자 등이 조사할 당시 여헌종택 고문서는 종손(장철수)에 의해 초벌정리가 이루어져 있었다. 전문적인 분류는 아니었지만 교지류, 서간류, 제문류, 소지류 등으로 유형화하여 성첩해 두었고, 시권·호적 등 일부 문서만 개별적으로 보관되어 있었다. 특히, 상당수의 문서에는 작성자나 작성목적 등의 설명이 첨부되어 있어 문서를 정리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여헌종택 소장본에서 가장 자료적인 집적도가 높은 것은 교령·간찰·시문(제문·시권)류이고, 영남지역에서 흔히 보이는 계안·도록이나 분재기·명문과 같은 경제관련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여헌집안인 인동장씨 남산파는 여헌의 5대조 장우가 대종가에서 분파하였고, 여헌 이후로도 15대를 내려왔으므로 전후 대수를 합하면 21대를 장자계열로 내려왔고, 그 역사는 500년에 이른다. 이런 세가에서 경제관련 기록이 빈약한 것은 임진왜란, 한국전쟁 등 전란에 따른 여파 때문으로 파악되며, 그나마 이 정도의 문서를 지금껏 보존한 것도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1) 백패·홍패류(白牌·紅牌)
여헌집안에 전하는 백패·홍패류는 1666년(현종 7) 장만기가 식년 사마시에서 진사 3등 76인으로 입격하고 받은 백패가 유일하다. 여헌가의 과거출신자는 1629년(인조 7)에 별시문과에 합격한 장응일, 1662년(현종 3) 증광사마시에 입격한 장영 등 총 3명이다. 이 중 장응일의 홍패, 장영의 백패는 전하지 않는데, 그 경위는 자세하지 않다.
(2) 유지류(有旨類)
여헌종택 소장의 유지는 총 38건인데, 여헌에게 내린 것이 37건, 아들 장응일에게 내린 것이 11건이다. 한 집안에 이렇게 많은 유지가 남아 있는 예는 흔치 않으며, 특히 여헌의 경우는 사림으로서의 위상과 군왕의 지우를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여헌이 산림으로 주목을 받은 것은 인조반정 이후지만 선조조에도 여헌은 학행이 알려져 국가의 각종 서적 간행사업의 적임자로 선발된 바 있었다. 1601년의 유지는 경서교정청 낭청에 임명된 여헌의 상경을 독촉하는 내용이고, 1602년에 발급된 두 건의 유지도 경서언해 간행과 관련된 것이다.
인조반정 이후 여헌은 김장생·박지계와 함께 산림으로서 조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되면서 입조를 종용하는 유지도 폭주하게 되었다. 당시 인조와 집권서인들은 여헌을 관직에 임명할 때마다 유지를 내려 상경을 독려하였다. 1623년 4월 14일 사헌부지평 장현광에게 내린 인조의 유지는 그 내용이 자못 정중하다.
“국가가 만약 유도를 숭신하지 않는다면 어찌 나라라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전에 잠저에 있을 때 그대가 노성한 숙유로서 오래도록 임하에 있다는 말을 듣고 간절히 생각하고 경모함이 마음 속에서 한시도 느슨해지지 않았다. 국사를 함께 논의코자 하니, 그대는 가교를 타고 올라오도록 하라”(1623, 사헌부지평 장현광에게 내린 인조의 유지)
유신을 초빙하기 위해 가교(駕轎), 즉 왕과 왕세자가 장거리 행차 때에 사용하던 가마를 교통 수단으로 제공하고 있다. 이처럼 인조는 1623년 한 해만도 총 10건의 유지를 내렸으나 여헌은 부임하지 않았고, 소명이 내린지 1년이 지난 1624년 4월 입조하여 자정전에서 인조를 알현하고는 곧바로 귀향하였다.
여헌에게 내린 유지 중에는 입조를 종용하고, 음식물과 약물을 내리는 예우적 차원의 문건이 대다수를 차지하지만 공식 업무를 지시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정묘호란에 따른 호소활동과 관련된 문건이 그것이다. 왕조실록에 의하면, 여헌이 경상우도 호소사에 임명된 것은 1627년 1월 19일이지만 이보다 한 달전인 1626년 12월 인조는 여헌을 호소사로 임명하여 의병활동을 독려한 사실이 유지를 통해 확인이 된다. 사실 관계에 있어 왕조실록과의 착간을 바로잡을 수 있는 귀중한 사례라 하겠다. 또한 1627년에 발급된 두건의 유지는 청군의 퇴각에 따른 군병의 해산을 거듭 지시하는 내용인데, 이는 왕조실록의 내용을 보완하는 의미에서 중요성이 있다.
유지류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1627년 세자가 소호사 장현광에게 발급한 영지이다. 영지(令旨)는 왕세자가 내리는 고신으로 휘지라고도 한다. 왕세자가 대리청정할 때 4품 이상의 관료에게 내리는 것이 원칙이다. 조선시대에 대리청정한 예는 문종·경종·장헌세자 등에 지나지 않으며, 소현세자가 대리청정한 기록은 확인할 수 없다. 영지의 내용은 병으로 분문하지 못한 것에 대해 대죄하지 말라는 내용인데, 이보다 앞서 여헌은 병으로 분문하지 못한 것에 대해 대죄한다는 내용의 서목을 시강원에 올린 바 있었는데, 세자의 영지는 이 서목에 대한 답변에 해당한다. 이 사례를 통해 본다면 영지가 반드시 왕세자의 대리청정기에 사용하는 문서 형식만은 아니며, 임진왜란기의 광해군처럼 소현세자 역시 정묘호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군병들을 안무하기 위해 영지를 발급했던 것이다. 발급의 대상이 호소사 장현광인 것도 이 때문이다.
장응일에게 내린 유지는 관직 제수후 상경·입조를 종용하는 내용의 것이 대부분이다.
(3) 고신류(告身類)
고신류는 통상적인 관직 임명과 추증, 추시를 합하여 약 200점에 이르며, 장현광·장응일·장영·장만기·장지덕·장윤종·장시추·장수륜·장지영과 관련된 것이다. 고신류의 현황은 가문의 환력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는데, 후대로 내려갈수록 환력이 퇴조함을 알 수 있다.
고신류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역시 장현광·장응일 부자의 고신이다. 「여헌연보」에 따르면, 여헌은 38세 되던 1591년(선조 24)에 전옥서참봉, 1594년에 예빈시·제릉참봉에 임명된 바 있으나 당시의 고신은 남아 있지 않다. 고신류 중 시기가 가장 오래된 것은 1595년 보은현감에 임명될 때 발급된 것이다. 여헌은 선조 후반부터 관계와 연관을 가진 이후 1635년에는 자헌대부 의정부 우참찬에 임명되었지만 행공한 직책은 보은현감(1595), 공조좌랑(1602), 의성현감(1603) 등 극소수의 관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헌의 고신류는 산림에 대한 불차탁용의 사례를 원본의 문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여헌가에서 배출된 전형적인 문신·관료는 장응일이다. 장응일은 1629년 문과에 합격한 이후 1676년 사망하기까지 50년 가까이 관계에 몸을 담았고, 졸관은 가선대부 행 성균관대사성이다. 현재 여헌종택에는 장응일 관련 고신류가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는데, 그 수가 100점에 이른다. 장응일은 문재가 탁월하여 함경도도사(1640), 전라도도사(1642), 삼척부사(1653), 밀양도호부사(1657), 금산군수(1660) 등의 외직을 제외하고는 주로 중앙에서 문한직에 종사하여 1675년(숙종 1)에는 문신들이 선망하는 홍문관부제학을 지냈다.
장응일의 고신 중에서 고문서학적으로 특이한 것은 중국 연호를 표기하지 않고 간지만 기록한 12검의 고신이다. 시기적으로는 1637년에서 1641년에 이르는 4년간으로 명청교체라는 국제정세를 고려하여 명의 숭정이나 청의 숭덕 대신에 간지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1643년에는 인조가 특명으로 제문과 축첩에 청나라 연호를 쓸 것을 지시하였는데 57) , 장응일의 예를 보면 고신은 1642년에 이미 청의 연호인 숭덕을 사용했음이 확인된다.
(4) 시호교지(諡號敎旨)
두 건의 시호교지 중 하나는 1648년 여헌에게 문강의 시호를 내리는 내용이고, 하나는 1910년(순종4) 장응일에게 문목의 시호를 내리는 내용이다. 둘 다 문자 시호이지만 시주의 내용에 따라 차등이 존재하였다. 여헌 시호(문강)의 문자에 대한 시주는 ‘도덕이 널리 알려졌다’는 뜻의 도덕박문(道德博聞)이고, 장응일 시호(文穆)의 문자에 대한 시주는 ‘배움에 힘쓰고 묻기를 좋아했다’는 뜻의 근학호문(근학호문)이다. 조선시대에는 같은 문자라도 근학호문보다는 도덕박문을 우위로 여겨 후자를 더욱 선호하였다. 숙종 연간 이현일 등이 김성일 시호(文忠)의 문자 시주를 근학호문에서 도덕박문으로 고치기 위해 노력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58)
조선시대의 증시는 원칙적으로 실직 정2품 이상관을 대상으로 하였다. 따라서 졸관이 좌찬성인 여헌은 법전에 규정된 증시 대상자지만 장응일은 졸관이 자헌대부 행성균관대사성이므로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장응일은 1689년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증됨으로써 추시 대상에 들게 되었고 이로부터 230년이 지나서야 추시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시호교지는 시기에 따라 문서 양식이 조금씩 달랐다. 양식의 차이는 시호 글자의 표기 위치와 시주의 표기여부와 관련이 있다. 두 교지를 비교해보더라도 여헌의 교지는 시주가 생략된 반면 장응일의 교지에는 시호 글자 아래에 쌍행으로 시주(勤學好問曰文, 中情見貌曰穆)가 기록되어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시호 교지와 관련하여 한가지 아쉬운 것은 관련문서가 전무하다는 점이다. 시호를 받기 위해서는 수증 대상자의 행적을 기록한 시장을 봉상시에 올려야 행정이 진행되었다. 봉상시에서는 시호 행정에 따른 각종 절차를 거쳐 그 결과를 이조를 통해 의정부에 보고하면 의정부에서 왕의 재가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인사와 마찬가지로 시호도 양사의 서경을 받아야 공식적인 시호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사헌부·사간원에서 수증인물의 행적과 시호의 적합성 여부를 심사하여 적합 판정이 났을 때 발부하는 것이 시호서경완의이다. 시호서경완의는 통상 수증인의 후손가에 반려되는 것이 원칙인데, 현재 여헌종택에는 완의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5) 녹패(祿牌)
녹패는 녹봉지급증명서로 인사규정과 마찬가지로 문관은 이조에서, 무관은 병조에서 왕명을 받아 발부하였다. 조선시대의 녹봉제도는 과록체계나 지급 방식에 있어 시기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여왔으나 1671년(현종12)부터는 사맹삭(四孟朔), 즉 분기별로지급에서 매월 지급으로 바뀌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을 토대로 과별 녹봉현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관료들의 매월 녹봉현황〉(대전회통)

과별

품계

지급량

지급일자

쌀(米)

콩(黃豆)

1과

정1품

2석 8두

1석 5두

25일

2과

종1품

2석 2두

1석 5두

3과

정2품

2석 2두

1석 5두

4과

종2품

1석 11두

1석 5두

5과

정3품(당상관)

1석 9두

1석 5두

정3품(당하관)

1석 5두

1석 2두

26일

6과

종3품

1석 5두

1석 2두

7과

정·종4품

1석 2두

13두

8과

정·종5품

1석 1두

10두

9과

정·종6품

1석 1두

10두

27일

10과

정·종7품

13두

6두

11과

정·종8품

12두

5두

28일

12과

6정9품

10두

5두

29일

13과

종9품

10두

5두

여헌종택에 남아 있는 녹패는 총 6건이다.
①은 1626년 4월 이조에서 가선대부 형조참판 장현광에게 발급한 녹패이다. 가선대부는 종2품이므로 제4과록에 해당하며 실제 문서에도 그렇게 적기되어 있다. 문서 형식에 있어서도 법전의 〈녹패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의 녹패식〉
某曹奉
敎, 賜具官某, 某年第幾科祿者
年印 月 日
判書臣 某 參判臣 某 參議臣 某
正郞臣 某 佐郞臣 某
〈1626년 장현광의 녹패〉
吏曹奉
敎賜嘉善大夫刑曹參判張顯光
今丙寅年第肆科祿者
天啓六年四月 日
②는 1653년 1월 병조에서 절충장군 행용양위사직 장응일에게 발급한 녹패이다. 병조에서 녹패를 발부한 것은 절충장군이 무산계이기 때문이며, 제8과록을 부여받은 것은 직책에 기준하는 녹봉제도와 관계가 있다. 위의 표에서도 나타난 것처럼 녹봉의 등급(科)은 품계를 기준으로 산정되어 있지만 해당 권원의 현재 품계가 아닌 수행하고 있는 관직이 어느 품계에 해당하는가에 따라 녹봉이 지급되는 것이다. 절충장군은 정3품 당상관의 무산계품계이지만 사직은 정5품의 직책이므로 제8과에 해당하는 것이다.
③은 1675년 7월 이조에서 통정대부 예조참의 장응일에게 발급한 녹패이다. 과차에 대한 기록이 생략되어 있으나 예조참의는 정3품 당상관의 직책이므로 제5과에 해당한다.
④는 1689년 통훈대부 행의금부도사 장만기에게 발급한 녹패이다.
⑤는 1689년 윤3월 이조에서 통훈대부 행호조좌랑 장만기에게 내린 녹패이다. 이 역시 녹과 등급이 명기되어 있지는 않지만 좌랑은 6품직이므로 제9과에 해당한다.
⑥은 1691년 이조에서 통훈대부 행호조좌랑 장만기에게 발급한 녹패이다.
(1) 소초(疏草)
제목은 〈고부학증이판장공청시상언(故副學贈吏判張公請諡上言)〉이라 되어 있으나 내용상 청시소의 초본에 해당한다. 언두 정동기(鄭東驥)는 상주 출신으로 본관은 진주, 정경세의 후손이다. 그가 장응일 청시를 주도한 것은 양가의 세의와 관련이 깊다. 정경세는 정현광을 적극 추천할 정도로 교유가 깊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정경세의 현손 정주원(鄭胃源)은 장현광의 현손 장대유의 사위가 되었다. 정동기는 정주원의 6세손으로 장현광에게는 외손이 된다. 장응일은 1689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나 시호를 받지는 못하다가 이 때에 이르러 본손과 외손을 비롯한 사림들의 청원이 있게 된 것이다. 장응일에게 1910년 문목의 시호가 내렸다.(시호교지 참조)
(2) 계(啓)
1755년 6월 2일 장현광 후손의 녹용 문제를 거론한 계. 영조는 장현광에게 후손이 있는지를 하문한 뒤 전직 참봉을 지낸 장수륜의 녹용을 지시하는 내용이다. 장수륜(1698-1775)은 장현광의 6세손이다. 이로부터 3개월이 지난 9월 7일 장현광의 봉사손을 녹용하라는 명을 내렸다. 59) 왕조실록에는 녹용 사실만 나올 뿐 구체적인 관직은 보이지 않는다. 영조는 평소 장현광의 학덕을 높이 평가해 왔고, 봉사손의 녹용을 ‘한나라에서 포덕후를 봉한 뜻이다’고 한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포덕후는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 사람인 탁무(卓茂)를 말하는데, 왕망(王莽)이 한나라를 빼앗아 자립(自立)하고 탁무에게 높은 벼슬을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광무제가 왕망을 멸하고, 탁무의 절의를 가상히 여겨 그에게 태부(太傅)의 벼슬을 주고 포덕후에 봉하였다.
(3) 호적류(戶籍類)
여헌종택 소장의 호적류는 호구단자와 준호구를 합해 모두 52건이다. 시기적으로는 1657년에서 1890년까지 약 250년이며, 호주는 장응일·장영·장옥·장만기·장지덕·장수륜·장윤종·장석호·장석묵·장성원(장계원)·장건식·장문원·장지영 등이다. 이 중 장옥·장석묵·장문원은 여헌의 종손계열이 아니다. 장영의 아우이고, 장석묵은 장석호의 아우이며, 장문원은 장석호의 아들이다. 대부분 여헌종손의 동생이거나 사촌관계에 있는 지친들임을 알 수 있다.
호적류에서 나타나는 한가지 특징적인 현상은 종손계열의 거주지 문제이다. 지금의 여헌종택(모원당)은 조선시대의 행정구역으로는 인동부 읍내면 남산리이다. 장응일의 경우 1657년 호구단자는 주소지 부분이 결락되어 거주지를 알 수 없으나 1672년 준호구에는 인동부 읍내면 남산리로 표기되어 있어 지금의 종가에 거주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아들 장영의 경우는 현존하는 9건의 호적류 모두 거주지가 성주목 북면 유등동방(柳等洞坊) 월곡리(月谷里)로 기재되어 있다. 또한 장응일과 장영은 부자간이면서도 각기 인동과 성주로 분적해 있었는데, 장응일이 사망하던 1676년 이전까지의 호적류 중 장영의 분적 사실이 확인되는 것은 1666(호구단자), 1669년(호구단자·준호구), 1672년(호구단자)이다. 이처럼 부자 분적의 현상이 발생한 것은 출계·입양관계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장현광은 1617년에 장응일을 양자로 들여 후사를 잇게 했는데, 당시 장영의 나이는 6세였다. 장영의 호적류에 나타나는 성주 월곡리는 장응일의 생부 장현도의 거주지 암포와는 인근한 지역이다. 따라서 월곡 일원에는 장응일 생가측의 기반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장영이 이곳에 거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헌 종계의 월곡 거주는 장영의 아들 장만기 대에도 지속되었다. 1669년에 작성된 장만기의 호구단자와 준호구에는 거주지가 월곡리로 기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675년 준호구에는 인동의 남산리로 거주지가 변동되었고, 그 이후로는 1890년 장지영에 이르기까지 거주지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았다.
(4) 소지류(所旨類)
소지류는 형태별로는 크게 소지, 상서, 의송류로 구성되어 있고, 주제별로는 여헌의 사직관련, 한려시비관련, 산송관련 소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 여헌 관련 소지
여헌관련 소지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관직을 사작하는 내용이다. 원본이 대부분이지만 일부 초본도 포함되어 있으며, 여헌의 친필도 적지 않게 눈에 띈다.
㊀ 1604년 정월 순찰사에게 올린 것으로 문묘를 위해 분실에 따른 사직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여헌은 1603년 9월에 의성현령에 부임하였는데, 이 해 11월 28일 공자를 비롯한 일부 위패가 분실되는 사고가 있었다. 이에 여헌은 감사 이시발에게 경위를 보고했고, 감사가 이 사실을 조정에 치계하여 추고의 명이 내리게 되었다. 60) 이에 여헌은 추고의 명은 부당하며 자신을 파출시킬 것을 소청하게 된 것이다. 이 소지에 대해 감사는 아직 파직·유임에 대한 조정의 분명한 처분이 없으므로 일단은 안심하고 직무를 살필 것을 지시하고 있다.
㊁ 내용은 앞의 소지와 거의 동일하다. 앞의 소지의 제사 날짜가 1월 5일이고, 이것이 10일인 것으로 보아 5일 간격을 두고 진정했음을 알 수 있다. 조정의 처분이 결정되지 않았으므로 안심하고 직무를 살피라는 의례적인 답변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로부터 약 1개월이 지난 2월 15일 여헌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의성현감에서 파직되었다. 「여헌연보」에 따르면, 의성현령에서 물러난 여헌은 선산의 월파촌과 원당에서 머물다 1606년 인동의 본가로 돌아왔다.
㊂ 1602년 여헌을 경서언해교정청의 낭청으로 임명하고 부임을 종용하는 유지가 내리자 병으로 부임할 수 없음을 진정하는 내용이다. 원본이 아닌 초본이며, 노비명으로 되어 있으나 여헌이 직접 초한 문서로 보인다. 연도가 표기되어 있지 않으나「여헌연보」에 근거하여 1602년으로 추정하였다. 소지에 따르면, 당시 여헌은 풍현의 징후가 있고 왼쪽 귀가 머는 등 건강이 극도로 악화돼 있었지만 조정의 명에 따라 부임하다 중도에 병이 악화되자 이 소지를 올린 것이다. 수정·가필한 흔적이 뚜렷한 여헌의 칠필 초본이다.
㊃ 1610년 8월 1일 인동부사에게 올린 소지의 초본. 사헌부지평 사직 의사를 감사를 통해 조정에 보고해 달라는 내용이다. 호노 말동(唜同) 이름으로 올려진 이 소지 역시 여헌의 친필초본이다. 관계 문서인 유지(사헌부지평)는 교령류 유지를 참조하기 바란다.
㊄ 1623년 5월 장현광이 호노 애남을 시켜 인동부사에게 올린 소지. 신병이 있어 사헌부지평에 부임할 수 없음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보고해 달라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부사는 ‘원하는 바대로 첩보했다’는 제사를 내리고 있다. 여헌의 친필이다.
㊅ 1623년 7월 장현광이 호노 애남을 시켜 인동부사에게 올린 소지. 신병으로 인해 성균관 사업에 부임할 수 없음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보고해 달라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부사는 ‘즉시 첩보하겠다’는 제사를 내리고 있다. 여헌의 친필이다.
㊆ 1623년 10월 인동부사에게 올린 소지. 병으로 입조할 수 없음을 보고해 달라는 내용이다. 인조는 여헌을 사헌부지평에 임명하고 입경을 독려했으나 병으로 승소하지 못하자 조리한 뒤에 입경하라고 재차 유지를 내린 바 있었다. 이 소지는 쾌차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으므로 응명할 수 없음을 분명히 피력하기 위해 올린 것이다. 이 역시 노 애남 이름으로 올려졌는데, 이에 대해 부사는 ‘관찰사에 보고했다’는 뜻인 ‘보사(報使)’ 두 자를 제사로 내리고 있다.
㊇ 1625년 8월 장현광이 호노 애남을 시켜 인동부사에게 올린 소지. 노환으로 인해 동부승지에 부임할 수 없음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보고해 달라는 내용이다.
㊈ 1627년 3월 16일 장현광이 아들 응일을 시켜 인동부사에게 올린 소지. 병으로 호소사의 직임을 감당키 어려워 사양한다는 내용이다. 이보다 앞서 장현광은 인신(印信)을 상송한 바 있는데, 다시 조정에서 유지를 내려 호소활동을 명하자지 이 소지가 있게 되었다.
㊉ 1630년 4월 장현광이 호노 애남을 시켜 인동부사에게 올린 소지. 새로이 임명된 대사헌에 부임할 수 없음을 보고해 달라는 내용이다.
㊀㊀ 1632년 3월 25일 장현광이 아들 응일을 시켜 인동부사에게 올린 소지. 대사헌에 부임할 수 없음을 보고해 달라는 내용이다.
나. 장응일 관련 소지
󰄾 1653년 정월 절충장군 용양위사직 장응일이 호노를 시켜 호조에 올린 소지. 계사년(1653) 춘등(春等) 녹봉을 제급할 것을 해창(諧倉:廣興倉)에 지시분부에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이 소지가 있게 된 배경은 자세하지 않으나 관료의 녹봉과 관련된 소지로는 매우 드물게 보이는 문서이다. 당시의 녹봉제도는 분기별로 지급하되 일종의 선불제였으므로 계산년 춘등 녹봉 즉, 1653년 1~3월치 녹봉에 대해서는 1652년 12월 25일 경에 녹패가 발부되어야 한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누락이 됨으로써 제급을 요청하는 소지를 올린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호조에서는 제급하겠다는 답을 내렸고, 실제로도 이런 절차를 통해 발급받은 녹패가 남아 있다.(교령류. 녹패 2번 참조)
다. 장만기 관련 소지
󰄿 1694년 11월 전군수 장만기가 순찰사에게 올린 의송. 산송과 관련된 내용이다. 장만기는 1691년 인동부 동쪽의 신촌 독산에 장자 대유를 안장하는 과정에서 조씨 집안과 송사를 수반하게 되었다. 장만기의 의송을 토대로 경위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1691년 장만기가 신촌 독산에 아들 대유의 장지를 정함
◆ 조씨들이 이 곳을 자신들의 금양처라 주장하며 장대유 장지 근처에 투장함
◆ 장만기가 감영에 진정하여 투장묘를 이굴케 함
◆ 이 과정에서 감사 이담명이 개입하여 장씨를 옹호하고 조씨들을 치죄했다고 함(조씨들의 주장)
◆ 이후 1694년 송사가 다시 재기되어 장만기를 착수하라는 명이 내림
◆ 이에 장만기가 소지를 올려 그 간의 경위를 설명하고 자신에 대한 착수 명령은 부당함을 주장
이상의 정황을 종합하면 조씨들은 장만기가 경상감사 이담명(李聃命)의 지위에 의지하여 자신들의 금양처에 아들을 입장하였고, 이 과정에서 일부 인물들이 수형하는 곡절이 있었는 바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장만기는 경상감사 이담명이 자신과는 외사촌간이기는 하지만 송사를 공정하게 처리했을 뿐 편사의 혐의는 없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 사건은 단순 송사이기보다는 당시의 정치적 동향과도 관계가 있어 보인다. 1694년은 남인이 실각하는 갑술환국이 일어나던 해로서 이담명을 비롯한 대부분의 남인들이 축출되었고, 장만기도 파직되었다. 이처럼 시사가 일변하게 되자 조씨들은 숙원을 갚기 위해 송사를 일으켜 장만기가 착수되는 단계로까지 진전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경상감사 이인환은 이담명의 파직을 주장한 정언 이인병과는 4촌간이었다. 장만기의 진정에 대해 감사 이인환은 당시의 실상을 상세히 조사하여 처결하겠다는 제사를 내리고 있는데, 추가 문서가 남아 있지 않아 결과는 알 수가 없다. 이 문서는 산송에 따른 소지에 지나지 않지만 갑술환국 이후 남인과 서인이라는 정치 권력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향촌사회의 동향과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는 중요 자료이다.
라. 기타소지: 부록참조
(5) 서목(書目)
서목은 하관이 상관에게 올리는 원장에 구비하는 문서로 여헌종택에는 총 3건이 소장되어 있는데, 모두 호소사 업무와 관련된 것이다. ①은 1627년 정월 28일 경상도호소사 장현광이 승정원에 올린 것이다. 3개의 절목이 있는데, 상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첫째, 호소에 따른 사무가 급하여 전승지 이언영(李彦英)과 이민성(李民宬)을 참모로 활용하며, 둘째, 전군수 조형도(趙亨道)를 별장으로 삼으며, 셋째, 전도사 이지화(李之華), 전별좌 박종남(朴宗男)을 모량관으로 삼는다는 내용이다. 즉, 호소활동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참모진을 구성한 사실을 보고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점은 각종 참모에 임명된 인물들은 대부분 여헌의 문인들인데, 이는 조정에서 여헌을 호소사에 임명한 목적과도 부합된다. 이언영은 성주 출신으로 본관이 벽진이고, 이민성은 의성 출신으로 본관이 영천이며, 이지화는 고령출신으로 본관이 전의이다. 조형도는 여헌문인은 아니지만 여헌의 고제 조임도의 종제이고, 박종남은 정인홍의 문인 박종주와 관련이 있어 보이나 구체적인 인적 사항은 미상이다. 여헌의 호소활동에 문인들의 역할이 컸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공문서 원본을 통해 당시의 실상이 확인되기는 이 문서가 처음이다.
②는 1627년 3월 13일 역시 승정원에 올린 서목으로 병세가 위중하여 직임을 수행치 못하므로 인신(印信)을 전별좌 박종남 편에 상송한다는 내용이다.
③은 1627년 3월 13일 시강원에 올린 서목이다. 병으로 분문하지 못함을 대죄한다는 내용인데, 여기에 대해 세자는 영지를 통해 대죄하지 말 것을 지시한 바 있다.(☞유지 참조)
(1) 관문(關文)
1623년 4월 16일 장현광의 가교 호송과 관련하여 경상감사가 인동도호부사에게 보낸 공문. 인조는 동년 4월 13일 장현광을 사헌부지평에 임명하고, 입조의 편의를 돕기 위해 가교 호송을 명하는 유지를 내린 바 있는데, 이 관문은 호송에 따른 실무 절차를 보여주는 중요 문서이다. 관문에 따르면, 감사는 유지의 내용에 입각하여 인동부사에게 호송 사실을 통보하는 한편 본가에도 이 사실을 숙지시킬 것을 아울러 지시하고 있다. 가마 등 호송장비는 인근의 김천역에 지시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 관문이 여헌종택에 보존된 것은 감사가 인동부사에 이첩한 것을 부사가 다시 본가에 통지했기 때문인데, 조선시대 행정 실무의 양태를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참고로 장현광은 인조의 각별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이 때는 입조하지 않았고, 이로부터 1년이 지난 1624년 4월에 입조하여 자정전에서 인조를 알현하게 된다.
(1) 계후입안(繼後立案)
1617년(광해군9) 10월 장현광이 장응일을 입양하여 계후한 사실을 인준하는 예조의 입안. 현존하는 계후입안 중에서는 시기가 올라가는 자료이다. 장현광은 초배 청주정씨와의 사이에서 후일 박진경에게 출가한 딸 하나만 두었고, 후배 여로송씨에게서는 자녀를 두지 못했다. 당시 64세의 노년이었던 여헌은 종제 현도의 아들 응일을 입양하여 후사를 잇게 한 것이다. 장현도는 슬하에 다섯 아들[봉일(奉一)·응일(應一)·우일(遇一)·회일(會一)·유일(有一)]을 두었는데, 응일은 그 중 차자였다. 여헌에게 입양된 장응일은 장우(張俁) 이래의 남산파의 가통을 계승하는 한편 1629년 문과에 급제하여 부제학에 오르는 등 매우 현달하였다.
입안에 따르면, 노경륜(盧慶倫)과 이청(李淸)이 증인으로 등장하는데, 노경륜은 장현광의 생질이고, 이청은 장현도의 족친으로만 기록되어 있어 더 이상의 인적사항은 미상이다. 입안발급을 주관한 예조참의는 이명남(李命男)이다.
(2) 고음
갑신년 9월 25일 이선약(李先約)의 공초.
(1)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661년(현종 2) 장여간이 장만기에게 답 4두락지를 정목 4동 10필을 받고 방매하는 문서. 해당 전답의 전래 및 소유 경위가 매우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사대부들이 매매시에 노비 이름으로 명문을 작성하는 것이 관례지만 전래 및 소유 경위에 사실 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 재주 자필로 명문을 작성했음도 밝히고 있다.
(1) 혼서(婚書)
㊀ 1678년 4월 27일 장만기(1639-1720)가 광주이씨가에 보낸 납폐문서. 아들 대재(大載, 개명 大猷)의 혼사에 따른 것으로 상대는 이윤협(李允協)이다. 당시 장대재의 나이는 19세이고, 처부 이윤협은 한음 이덕형(李德馨)의 현손이다. 영남남인과 근기남인 상호 간의 통혼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장대재는 광주이씨와의 사이에서 아들 장지덕(張趾德)과 정주원(鄭冑源)에게 출가한 딸을 두었으나 1691년 31세로 사망하였다.
㊁ 1696년 9월 29일 장영(1622-1705)이 경주김씨가에 보낸 납징문서. 장증손 숙(䎘, 개명 趾德, 1680-1748)의 혼사에 따를 것으로 상대방 혼주는 김세평(金世平)이다. 김세평은 여헌문인 김종일(金宗一)의 아들로 경주에 세거하였으며, 벼슬은 현감을 지냈다. 혼서 모두에 상대를 〈김남원집사(金南原執事)〉라 쓴 것은 김세평이 남원현감을 지냈기 때문이다.
㊂ 1718년 11월 장만기가 영천이씨가에 보낸 납징문서. 장증손 장수륜(張壽崙, 1698-1775)의 혼사에 따른 것으로 상대는 이지수(李墀秀)이다. 장수륜의 처부 이지수는 여헌문인 이민성(李民宬)의 후손으로 의성 산운(山雲)에 세거하였으며, 생원을 지냈다. 산운의 이씨가는 여헌학맥의 핵심가문으로 여헌의 빙계서원(氷溪書院) 입향 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혼맥을 통해 세의를 이어나갔다.
㊃ 1739년 11월 장지덕이 연안이씨가에 보낸 납징문서. 손자 장윤종의 혼사에 따른 것으로 장윤종은 초취로 연안이씨 이지빈(李之彬)의 딸을, 재취로 양주조씨 조영오(趙永五)의 딸을 맞았는데, 당시 17세였던 장윤종의 나이를 고려한다면 초혼시의 문서임을 알 수 있다. 장윤종의 처부 이지빈은 식산 이만부(李萬敷)의 아들로 상주 노동(魯洞)에 세거하였다. 노동의 연안이씨는 이관징(李觀徵)⇒이옥(李沃)⇒이만부로 이어지는 근기남인의 명가로 17세기 후반 이만부가 상주로 이거하면서 영남사람이 되었다.
㊄ 1766년 5월 16일 장수륜이 진성이씨가에 보낸 납징문서. 손자 시추(時樞)의 혼사에 따른 것으로 상대는 이세택(李世澤)이다. 장시추의 처부 이세택(1716-1777)은 이황의 8대손으로 1753년 문과에 합격하여 대사헌을 지낸 명사이다. 현재 여헌종택에는 이세택의 간찰이 여러 건 소장되어 있다.
㊅ 1790년 11월 장윤종이 전주유씨가에 보낸 납징문서. 손자 석경(錫慶, 개명 錫祜)의 혼사에 따른 것으로 상대는 유범휴(柳範休)이다. 장석경의 처부 유범휴는 안동 무실(水谷) 출신으로 부사를 지냈다. 학식이 뛰어나 『호곡집(壺谷集)』을 남겼다. 피봉에 〈유첨지집사(柳僉知執事)〉라 하여 수신처가 기록되어 있는데, 유첨지는 첨지중추부사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던 유범휴를 말한다.
㊆ 1790년 7월 장윤종이 진성이씨가에 보낸 손자 장석경의 사성단자. 앞 혼서의 관련문서이다.
㊇ 1878년 장조원(張祚遠)이 진성이씨가에 보낸 납징문서. 장병오(張炳五)의 혼사에 따른 것으로 상대는 이만윤(李晩胤)이다. 장조원은 장석호의 조카로 장병오에게는 재종조부가 된다. 장병오(張志永)의 아버지 장건식(張健植)이 생존해 있었음에도 장조원이 혼주가 된 것이 다소 이채롭다. 이만윤은 이황의 후손으로 예안출신이며, 1865년 생원이 되었다.
㊈ 1890년 10월 장조원이 야로송씨가에 보낸 납징문서. 장지영이 송래흠(宋來欽)의 딸을 재취로 맞이할 때 작성된 것이다.
㊉ 1910년 정월 장지구(張志求)가 청주정씨가에 보낸 납폐문서. 장세명(張世明)의 혼사에 따른 것으로 상대는 정주익(鄭柱瀷)이다.
(2) 통문(通文)
㊀ 1663년 장학(張學) 등 인동·선산 사림들이 영천사림에게 보낸 통문의 초본. 여헌문인 중 입암사우(立岩四友)로 명성이 높았던 정사진(鄭四震)을 입암서원에 종향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입암은 여헌의 강학·고종처로서 여헌 사후인 1643년 문인들에 의해 입암서원이 건립되었고, 1646년에는 영정을 봉안하다 1663년부터는 여헌의 위패를 봉안하고 향사하게 되었다. 이 통문에 따르면, 정사진의 종향론은 여헌의 입향과 동시에 발론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실제 정사진이 입암서원에 종향된 것은 1703(숙종 29)년이었다.
입암에는 여헌 생전에 만활당, 입암정사 등 각종의 강학·거주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고, 서원은 만활당과 조금 떨어진 곳에 건립되었다. 입암서원은 고종처에 세워진 대표적 서원으로 꼽히고 있다.
통문의 제명록에 따르면, 생원 신유 등 23인이 연명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실명이 표기된 장매(張{每+永})·박혜(朴憓)·장학(張學)·박협(朴悏)은 인동·선산지역의 여헌문인들이다. 장매·장학은 장내범의 손자이며, 장경우의 아들로 조손 3대가 여헌문하에 입문한 경우였고, 박협은 박진경(朴晉慶)의 아들로 여헌에게는 외손자가 된다. 특히, 장학은 입암에서 여헌의 임종을 지켜 본 문인으로 부지암서원 입향이나 임고서원(臨皐書院) 배향 등 여헌의 추모사업에 헌신한 인물이다.
㊁ 1702년 황도홍(黃道洪) 등 선산 사림들이 영천사림에게 보낸 통문의 초본. 이 역시 정사진의 입암서원 종향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정사진의 종향론은 1663년에 발론되어 한동안 잠복기에 들어갔다가 이 때에 이르러 재론되면서 사림의 공론이 귀일되어 이듬해인 1703년에 종사의 예를 거행하게 되었다. 정사진의「수암연보(守庵年譜)」는 이 통문으로 인해 종향(從享)이 이루어졌음을 특기하였고, 주도한 인물은 정만양(鄭萬陽)·정규양(鄭葵陽)·전근천(全近天)·신덕형을 들고 있다. 정만양·규양은 여헌문인 정호인(鄭好仁)의 증손이고, 신덕형은 정호인의 차자 정시연(鄭時衍)의 사위였다.
㊂ 1712년 김수경(金守慶) 등 영천사림이 인동사림에게 보낸 통문의 초본. 서간의 형식을 띄고 있으나 내용상 통문에 해당하여 이에 포함시켰다. 정사진의 입암서원 종향 이후 야기된 제반 곡절을 전달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내용이다. 정사진의 위패를 봉안한지 채 10년이 되지 않아 제향의절에 있어 무축단헌(無祝單獻)으로 하자는 논의가 있는가 하면, 정사진의 자손에 대해 불만을 가진 일각에서는 출향론을 제기함으로써 사단이 일게 되자 인동·선산사림들에게 대안을 강구하게 된 것이다.
통두 김수경은 영천 황강(黃岡) 출신으로 호가 가산(佳山)이다. 이 가계는 조부 김취려(金就礪)61) , 백부 김고(金{土+高}), 중부 김배(金培), 아버지 김각(金{土+學})에 이르기까지 양대 4부자가 여헌문하를 출입했는데, 특히 중부 김배는 1663년 당시 정사진 입향론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김수경 등의 입장은 사태를 적절히 무마하는데 있었는데, 이에 대한 답통이 남아 있지 않아 자세한 정황은 알기 어렵다. 비록 초본이기는 하지만 입암서원의 묘향(廟享)에 따른 향촌사회의 갈등상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㊃ 장선흥 등 인동·선산사림들이 영천사림에게 보낸 통문의 초본. 연도가 분명치 않으나 내용으로 보아 1712년 김수경 등의 통문에 대한 회답으로 보인다.
㊄ 1920년 장규환 등 학림정(鶴林亭) 유림들이 동락서당에 보낸 통문. 여헌집을 중간하는 과정에서 논의가 갈라져 간역(刊役)이 중단되자 간역의 재개를 촉구하는 내용이다. 1920년으로 연도를 추정한 것은 수신처가 동락당중으로 표기된 점에서 동락서원(東洛書院) 훼철 이후가 분명하므로 경신년은 1920년이 되어야 한다. 중간이 중단된 사유와 이후의 결과는 자세하지 않다.
(3) 간찰(簡札)
〈여헌선생수찰(旅軒先生手札)〉은 여헌이 권극립(權克立)·권봉(權{艸/封}) 부자 및 입안 제생에게 보낸 간찰을 모아서 꾸민 간찰첩이다. 이 중 권극립에게 보낸 것이 28건(제문 1건), 권봉에게 보낸 것은 13건, 입암 제생에게 보낸 것은 10건이다. 이를 합하면 총 51건이 된다.
권극립의 자는 강재(强哉), 호는 동봉(東峯), 본관은 안동이다. 정사진·정사상(鄭四象)·손우남(孫宇男)과 함께 입암사우의 한사람으로 여헌이 영천 입암에 입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평생을 도의로서 사귀었다. 이 과정에서 아들 권봉과 손자 권진민(權晉敏) 형제 모두 여헌의 문하에 입문하여 영천지역 여헌학맥의 핵심을 이루었다. 현재까지도 그의 자손들은 입암에 세거하고 있는데, 행정구역의 변동으로 지금은 포항시에 편입되어 있다.
권봉은 권극립의 아들로 자는 흥서(興瑞), 호는 성재(省齋)이다. 여헌의 애제자의 한 사람으로 스승을 부형처럼 섬겨 여헌이 입암에 우거할 때는 시강하며 학문에 정진했다. 여헌이 사망한지 5년째 되던 1642년에는 여러 문인들과 함께 입암서원을 건립하여 여헌의 위패를 봉안할 것을 주장키도 했다.
권극립·권봉 부자에게 보낸 편지는 안부를 묻고 자신의 근황을 전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아울러 정사진 형제, 손우남 등의 근황을 묻는 내용이 자주 등장하는 점에서 사우에 대한 여헌의 각별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입암 제생에게 보낸 편지의 수신인은 흥서, 시가(試可), 김생원, 권생원으로 표기된 것이 많다. 흥서는 권봉의 자이고, 시가는 문인 김취려(金就礪)의 자이다. 단정키는 어렵지만 김생원은 김취려의 아들인 김각, 권생원은 권봉의 아들 권진민을 지칭했을 가능성이 큰데, 김각 62) 과 권진민 둘 다 여헌문인이다.
이 간찰첩은 현존하는 여헌의 서첩 중에서는 형태가 가장 완벽하고, 수록된 간찰수도 많다. 무엇보다 여기에 수록된 간찰 중의 상당수가 『여헌집』에는 빠져 있어 자료적 가치 또한 높다. 현재 〈여헌선생수찰〉은 여헌종손의 주관하에 간이 책자로 묶어져 일부 연원가에 반질된 바 있는데, 탈초·번역(장재한) 등의 가공이 이루어져 열람에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
(1) 시고{詩稿}
㊀ 여헌의 잡저 좌벽소제(座壁所題)를 필사한 것. 여헌은 심법(心法) 12목을 정리하여 좌벽에다 쓰고는 이를 좌벽제성(座壁題省)이라 한 바 있는데, 앞의 글은 서문에 해당한다. 이 글은 『여헌집』권6에 〈좌벽소제(座壁所題)〉라는 제하에 그대로 실려 있고, 좌벽제성은 도식되어 있다. 다만 이것은 여헌의 친필은 아니고 후손 중 누군가가 쓴 것으로 추정된다.
㊁ 효종연간에 별묵병제(別墨病弟)가 장응일에게 증정한 시고. ‘월곡신와(月谷新窩)에 봉정한다’는 표현에 미루어 볼 때 당시 장응일이 성주 월곡에 새로이 거처를 마련했음을 알 수 있다. 별묵병제는 장응일의 지인으로 추정되나 자세한 인적사항은 미상이다.
㊂ 1659년(효종 10) 별묵병제가 장응일(1599-1676)에게 증정한 시고. 수연을 축하하는 7언배율이다. 참고로 장응일의 생일은 정월 15일이다.
㊃ 장지덕(張趾德)이 4계절, 즉 춘하추동에 누리는 8가지 즐거움을 노래한 시. 제목인 〈사이팔락(四而八樂)〉은 사이당(四而堂)에서 맛보는 여덟가지 즐거움이란 뜻이다. 일찍이 장지덕은 사이당운을 짓고, 이로써 자호한 바 있다. 사이는 곧 〈일출이작(日出而作)〉, 〈일입이식(日入而息)〉, 〈경전이식(耕田而食)〉, 〈착정이음(鑿井而飮)〉을 말하는데, 선비의 소박한 삶의 즐거움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 시는 친지나 지기 간에 애송되는 과정에서 허다하게 차운되었다.
㊄ 1734년(영조 10) 유제우(柳濟雨)가 차운한 장지덕(1680-1748)의 사이당운(四而堂韻). 장자덕은 여헌의 5세손으로 호가 사이당이다. 그는 사이팔락(四而八樂)을 노래한 사이당운을 짓고 이로써 자호하였는데, 사이당운은 총론을 비롯하여 이 역시 그 중의 하나이다.
㊅ 1736년(영조 12) 신릉(申{王+夌})의 사이당 차운. 신릉의 인적사항은 미상이다.
㊆ 안경중(安景中)의 사이당 차운시.
㊇ 1734(영조 10)) 하옹(霞翁)이 차운한 사당당시. 하옹의 인적사항 역시 미상이다..
㊈ 남계취은(南溪醉隱)이 차운한 사이당운.
㊉ 1737년(영조 13) 유방(柳雨/滂)이 차운한 사이당운.
㊀㊀ 1743년(영조 19) 김태화(金兌和)가 차운한 사이당운. 서문이 붙어 있다.
㊀㊁ 장한용(張漢用)이 차운한 사이당운. 스스로를 종말(宗末)이라 칭한 것으로 보아 인동장씨 일문의 인사임을 알 수 있다.
㊀㊂ 최혜(崔惠)가 차운한 사이당운. 경우(庚友)라 한 것으로 보아 장만기와 동갑의 지인임을 알 수 있다.
㊀㊃ 장사백(張斯伯)이 차운한 사이당운.
㊀㊄ 박희천(朴希天)이 차운한 사이당운.
㊀㊅ 1783년(정조 7) 종말 장익수(張翊洙)가 차운한 사이당운.
㊀㊆ 1744년(영조 20) 장지덕이 정읍 현감으로 부임할 때 김용(金鎔)이 증정한 송별시고. 영조실록에 따르면, 장지덕은 인품이 순실하고 경학에도 밝아 6품으로 승진시켜 목민관에 부임시키자는 영의정 김재로의 건의에 의해 63) 이듬해인 1744년 정읍 현감에 부임하게 된 것이다.
㊀㊇ 1744년 12월 이맹휴(李孟休)가 장지덕의 정음 임소에 보낸 글로 원제는 〈작평설봉송장장지정읍임소(作坪說奉送張丈之井邑任所)〉이다. 평설을 지어 보낸 것은 목민관으로서 선정을 당부하기 위함이며, 실학자로서의 애민정신 또한 잘 드러나 있다. 이맹휴(1713-1750)는 성호 이익의 아들로 1742년 문과에 장원하여 예조정랑 등을 역임했고, 저서로 춘관지(春官誌)를 남겼다. 이를 통해 성호가와 여헌가 사이에 교유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맹휴는 38세로 사망하여 필적이나 유문이 많지 않는데, 이것은 그의 친필 중 매우 드물게 보이는 귀중본이다.
(2) 시권(試券): 부록참조
(3) 제문(祭文): 부록참조
(1) 여헌초상화(旅軒肖像畵)
1633년(인조 11)에 그려진 여헌 장현광의 초상화. 화자는 미상이다. 당시 여헌의 나이는 80세였다. 문인 김응조(金應祖)의「학사연보(鶴沙年譜)」〈계묘조(1633)〉에 따르면, 김응조는 이 해 9월 선산도호부사로 부임해서는 스승을 위해 화공을 시켜 진상을 그리게 했다는 64) 기록이 있다. 또한 〈임오조〉(1642)에는 부지암에다 사우를 건립하고는 여헌의 유상을 봉안했다는 65) 기록도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여헌연보」〈임오조(1642)〉에는 ‘문인 김응조가 일찍이 선산부사가 되어 화사를 청하여 진상을 그려 원당·부지암·입암에 나누어 모셨다.’는 66) 기록이 있다.
이를 종합하면 여헌영정은 당초 김응조의 주선하에 제작되었고, 후일 이를 바탕으로 2본을 더 전모하여 원당·부지암·입암에 모셨다는 말이 된다. 원당은 곧 선산의 원회당을, 부지암은 부지암정사를, 입암은 입암정사(후일의 입암서원)를 말한다.
그러면 이 3본 중 어느 것이 가장 원본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임고서원지』「고왕록(考往錄)」〈신사조〉(1641)에 “5월 초하루에 인동의 장응일, 박황, 장학 세 사람이 화사 유명길을 청하여 함께 왔다. 다음날 입암에 들어가 머물면서 여헌선생 화상을 전모했다”는 67) 기록이 있다. 68) 장응일이 입암 소재 영정을 전모하러 온 1641년은 원회당과 부지암에 영정을 봉안하기 바로 1년 전이다. 이런 정황을 고려한다면, 입암에 있었던 영정이 원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원회당이나 부지암에 영정이 있었다면 굳이 오지인 입암에까지 와서 전모할 까닭이 없는 바 장응일 등은 입암에서 전모한 것을 다시 전모하여 하나는 원회당에, 다른 하나는 부지암에 봉안했다는 추정이 가능한 것이다.
유명길은 호가 만옹(漫翁)으로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과 교유가 깊었으며, 말그림에 능했다고 전해질 뿐 69) 더 이상의 인적사항이나 작품은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가 김창업과 교유가 있었다는 점에서 중앙에서는 비교적 잘 알려진 인물로 여겨지며, 여헌영정을 통해 말그림 뿐만 아니라 초상화에도 조예가 깊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여헌종가에서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한 영정은 원회당본과 부지암본 중 어느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부지암본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선산 원회당에서는 유엄당(有儼堂)을 지어 1642년부터 영정을 봉안하였으나 1868년 사당이 훼철되자 영정을 남산의 여헌종가로 이안한 바 있다. 그러다 1887년 원회당을 중건하여 잠시 협실에 환안하였다가 1933년 영당을 중건하고 이듬해인 1934년에 본래의 자리로 이안한 뒤로는 계속 여기에 봉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종가 소장본은 부지암본이 될 수 밖에 없는데, 그 경위는 자세하지 않다.
한편 입암본은 여헌영정의 원본으로 영천의 입암에 소장되어 오다가 1913년 입암사변 당시 분실하였으나 이듬해인 1914년 후손 장기상, 장익상이 부산항 경무소(警務所)에서 되찾아 봉안한 바 있다. 70)
필자가 열람한 두 본의 여헌영정(부지암본, 원당본)에는 화상찬이 없으나 여헌의 문인 김휴(金烋)가 스승의 언행을 기록한 경모록에 찬이 있어 이를 소개한다.
선생의 화상(畵像)에 공경히 찬(贊)하다. 71)
마음은 이치를 간직하여 / 心涵乎理
달을 비추는 가을물과 같고 / 貯月秋水
덕(德)은 용모에 나타나 / 德發於容
온 방안에 봄바람이었네 / 滿室春風
태산(泰山)의 높음과 같아 / 如岳之喬
그 높음을 알 수 없고 / 莫知其高
바다에 임한 듯하여 / 如海是臨
그 깊음을 헤아릴 수 없노라 / 莫測其深
행하고 감춤은 자신에게 있고 / 行藏在己
나아가고 물러감은 의리를 따랐으니 / 進退惟義
염계처럼 깨끗하고 / 濂溪灑落
소자처럼 안락하였네 / 邵子安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