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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년 유학 이기순(李基淳) 외 상서(上書)    
G002+AKS+KSM-XB.1812.4717-20101008.B001a_001_00166_XXX
 
분류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작성주체 발급: 김성련(金星鍊) , 이기순(李基淳) /수취: 경상도(慶尙道)
작성지역 예안    /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작성시기 1812년 / 임신11월   
형태사항 크기: 108.8×125.2 / 낱장, 1장 / 종이 /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 안동 오천 광산김씨 후조당  / 현소장처 : 안동 오천 광산김씨 후조당  
비고 출판정보: 『고전자료총서 82-2 광산김씨 오천고문서』(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2) 본 번역문은 2014년 한국고문서 정서·역주 및 스토리텔링 연구사업 연구결과물임.
고문서집성 수록정보 『고문서집성』01 / 7. 소지류 / 상서1 / 78 ~쪽
 
관찰사에게 김해와 임흘의 추증을 위해 선비 232명이 연명하여 올린 청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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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安幼學李基淳榮川幼學金星鍊等謹齋沐再拜上書
巡相閤下伏以忠義者有國之元氣也是以遠而前代帝王近而我
列聖莫不嘉尙之褒獎之以爲維持世道之方非以榮其人也所以礪人臣之節也然苟非平日積學得聖賢門路之正而一朝慷慨以就死者古人謂之一節若其正學之深而
發之爲忠義者禮安故檢閱贈修撰近始齋金先生是已先生諱({王+亥})[垓]雲巖公用經術直道與晦齋李先生道合心同爲 中廟朝名臣父後彫挹淸兄弟公
俱遊退陶李先生門得聞學大方而先生又以童丱及門自幼已涵濡庭訓觀感師席早自有得於爲己之方德性學問鳥翼車輪其號近始者盖取爲學自近
始之義也方理餘韻尋墜緖有興起斯文之志不幸島夷猖獗三京失守 鑾輿播越先生慷慨奮義糾合同志與諸將士約曰 主上蒙塵吾輩不如死之久矣若
不幸而事不濟則有死而已聽者改容增氣於是左道列邑儒生以先生名賢重望推爲大將安東義將裴龍吉李庭栢左右副而各邑義兵皆聽先生節制先生
貽書招諭使言起兵狀有云獨張空拳恐難自濟然忠義之性根於天得守死致命曾所講聞誓心天地不與此賊俱生遂設機應會多所斬獲或陣于安醴或陣于龍
咸之境旣破醴泉賊壘又於唐橋松峴之役殲滅殆盡生獲賊酋獻巡察營左上道之得免魚肉先生之力也而其陣龍咸也一日逢高提督應陟與部下將士講先天圖于陣
中盖古人橫槊論道之意而亦天地風雲龍虎鳥蛇之妙皆從此出故也癸巳追賦南下將與大陣合行慶州盡瘁疾作卒于陣中得年三十九母夫人在矣其臨絶之詩
曰百年存社計六月着戎衣爲國身先死思親魂獨歸嗚呼斯固不足以淚千古之人子人臣乎今若謂先生之死有異立殣者云爾則非篤論也特其所遇之會異耳先生正學
之發之爲忠義者大抵如此矣若軍功則非所輕重於儒者而當時巡察使金公睟題報則謂斬將獻馘爲一道義兵之首右道都大將金公沔復書則謂奮忠擧義盡心
討賊求之古人而不易得玆豈非百世之公言乎盖先生之於軍功輒讓與部曲不以自居故伊日褊裨或有 贈正卿者或有 贈堂上者而元帥之 褒典不過陞六而止此實
後學輿情之所慨然處耳生等抑有一說故徵士龍潭任先生屹本以京師世冑南徒安東樂從先輩長者習聞道義之說及至龍蛇之亂自以世祿子弟不宜坐視國難
贈參議柳公宗介偕擧義旅柳公爲大將公爲副將設伏于薩夫嶺下多所斬獲翌日賊添兵蹂躪柳公死之公召聚散卒歸合于近始金公義陣聞慶唐橋
役皆有功勩及近始卒公代領其衆與大軍合方誓死向前矣未幾丁父憂去此又公起義之大畧也迨夫制關以後靜居林泉溫理舊業大爲寒岡鄭文穆公所推
重卒以行誼 聞徵而不起此則北人當國之日也噫公不過林下一布衣耳當賊勢充斥之日出者肝腦塗地處者竄伏林藪而乃奮不顧身欲以一死殉國柳公之敗而
志猶未已金公之卒而又復不懈其萬折必東之志吁亦烈矣而晩年不仕又可見其濁世之淸風矣雖然 上不聞其名下無以揄揚之者今至二百年寥寥也士
固行其義而已世之知不知固無所加損而此遂湮滅不彰則亦安得爲衰世之爲人臣者勸哉兩公後裔以干 澤爲嫌不欲自鳴而公議則有不當然者矣生等玆以相率
仰籲于 旬宣之下搜訪幽隱謦效 冕旒之下者 閤下事也伏願 閤下俯採輿論轉達 天陛俾得以追擧欠典則儒林增光世敎砥礪而 閤下亦永有辭於
一方矣生等不勝祈懇之至
壬申十一月日
禮安幼學李鍾淳李鎭斗金匡鍊李龜裕李民淳琴汝玉李師愚南日躋尹 褘吳周顯金是瓘金震儒李彙瑾李元淳南命龜金 橚申聖烈金元敬李龜孫琴汝根李師侗李時敬金良鍊琴箕錫李程淳李保淳李汝迪金黃鍊
金養元琴汝模權時標申應龍李汝文李彙陽琴鍾夏李漢燮琴汝栻李彙成李能淳李行淳金是珩李龜獻李龜泳李師延金夏根琴汝宅金朝玉李晦淳琴熙述李啓淳李龜洙琴汝極李師恒李時靖琴象熙申宗黙琴汝稷李龜章李好淳李林淳李龜晦
李龜煥李溟淳李始淳李大淳李龜恒 進士李老淳李彙遠幼學琴汝岳琴泰烈李謙淳李龜熽吳世顯李日淳李 洙李龜升李彙寧安東幼學金南運金南壽金鎭綱李柟秀李樟秀李庭寶生員金羲壽金亨壽 進士李宗周李之慶李宗休幼學李秉夏李秉殷生員李有白
幼學安 愿生員安爾龍金道孫金星袞金星說裴贊周裴晟周裴顯世裴翰周柳致覺柳致學柳炳文柳致晦權時度鄭在汶鄭來楨權溥仁朴之喆禹龜燮金星冕金星奎裴顯忠李光栗李宇斗柳家祚柳懿睦柳秉祚柳顯祚柳觀祚柳華祚幼學柳宗睦 進士柳璧祚李敬簡李養中幼學李晩白
榮川生員李雲燮幼學李勉行金革鍊李 彙李▣奎金▣▣朴▣中金永羲順興幼學權赫祖權亨祖朴春穆 進士徐聖烈幼學朴春亨朴春正朴春明豊基生員黃▣敏幼學黃▣鱗李▣淳李彙璋李彙珪金鼎九醴泉幼學鄭昌熙鄭光天權泰運鄭昌遠鄭昌奎龍宮生員李章瑀幼學李▣瑗李▣璠姜▣睦李尙翼李尙愚
崔{氵+觀}幼學崔興洙大邱進士崔奎鎭金邦儒金敏儒李 鋧幼學李 鏵漆谷生員李 錥張秉孝金宗泰鄭東九幼學宋能欽鄭 煥星州生員金俊宅權尙度權時度申永躋申宅重申福應金鶴九張東韻張一燮幼學張尹燮仁同進士張 鑄生員金弼敎申勉敎申致敎金泗儒金喆儒善山幼學金持永幼學姜世德生員姜喆欽柳寔春幼學金顯鏞金顯奎尙州生員琴英澤
崔汲義城進士李祥發幼學李知發李玄發金養鱗申祖祐金陽進金堂進金海進生員申冕朝李家發權得仁寧海幼學李相殷李光文權度禹朴濬永朴基永南毅陽慶州進士李鼎儼幼學李泰祥崔 璲李來祥永川幼學鄭台攝鄭裕壽曺見九曺象九李仁興英陽幼學趙居信趙居讓南泰益軍威進士洪文豹李匡德生員李廷佑眞寶幼學申興烈申致道李相運

題辭
忠義之士往往有
行使[署押]

〈背面〉
泯而不顯者誠
可慨歎從當量
處之向事
初十



예안(禮安)에 사는 유학(幼學) 이기순(李基淳), 영천(榮川)에 사는 유학 김성련(金星鍊) 등이 삼가 목욕재계하고 두 번 절하며 순상(巡相 순찰사(巡察使)) 합하(閤下)1)께 상서(上書)를 올립니다.
삼가 충성스럽고 의로운 자는 국가의 원기(元氣)입니다. 이 때문에 멀리는 전대(前代)의 제왕을, 가까이는 우리 열성(列聖)을 모두 칭찬하고 권장하여 세도(世道)를 유지하는 방법으로 삼는 것은 그 사람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신하의 절개를 힘쓰게 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나 만일 평소 학문을 축적하여 성현(聖賢)의 바른 문로(門路)를 얻은 것이 아니라, 하루아침에 강개(慷慨)하여 사지(死地)로 나아가는 것을 옛 사람이 한 구절로 말하기를 “올바른 학문이 깊어지면 충(忠)과 의(義)로 발현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안의 고(故) 검열(檢閱) 증(贈) 수찬(修撰) 근시재(近始齋) 김 선생(金先生)이 이런 분이시니, 선생의 휘(諱)는 해(垓)입니다. 할아버지 운암공(雲巖公 김연(金緣))께서는 경술(經術)과 올곧은 도[直道]로써 회재(晦齋) 이 선생(李先生 이언적(李彦迪))과 도(道)가 합하고 마음이 맞아 중종(中宗) 조정의 명신이 되신 분입니다. 아버지 후조공(後彫公 김부필(金富弼))과 읍청공(挹淸公 김부의(金富儀)) 형제는 모두 퇴도(退陶) 이 선생(李先生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학문하는 큰 방도를 배웠습니다. 선생 또한 어린 아이 때 문하에 들어갔는데 어려서부터 이미 집안의 가르침[庭訓]을 듬뿍 받은 데다 스승을 보고 감동하였으니, 일찍부터 스스로 위기지학(爲己之學)2)의 방도를 터득하여 새의 날개나 수레바퀴처럼 덕성과 학문을 겸비하였습니다. 그의 호가 근시(近始)인 것은 대개 학문을 할 때 가까운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를 취한 것입니다. 바야흐로 여운을 읊조리고 실추한 실마리를 찾아 사문(斯文 유교(儒敎))을 흥기시키는 뜻이 있습니다.
불행히 왜적이 창궐하여 서울, 개성, 평양이 놈들의 수중에 들어가고 임금의 수레가 피난을 가니, 선생이 강개하여 의로움으로 떨쳐 일어나 동지를 규합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장사(將士)와 맹약하기를 “주상께서 몽진(蒙塵)을 가셨으니 우리들은 죽느니만 못한 지 오래되었다. 만일 불행하여 일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죽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자, 듣는 사람들이 얼굴빛을 고치며 사기가 앙양되었습니다. 이 때 좌도(左道) 여러 고을의 유생들이 선생은 명현(名賢)이고 중망이 있다는 이유로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고, 안동의 의병장 배용길(裴龍吉)과 이정백(李庭栢)을 좌우부장(左右副將)으로 삼아, 각 고을의 의병들이 모두 선생의 통제를 받게 되었습니다.
선생께서 초유사(招諭使)에게 서신을 보내 기병(起兵)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맨주먹만으로는 아마도 일을 이루기 어려울듯합니다. 그러나 충의의 본성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니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것은 예전에 익히 들었습니다. 하늘과 땅에 맹세컨대 이 왜적과는 함께 살지 않을 것입니다.”3)라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전략을 세우고 적절히 대응하여 베어 죽이거나 사로잡은 적이 많았습니다. 혹은 안동(安東)과 예천(醴泉)에 진(陣)을 치기도 하였고 혹은 용궁(龍宮)과 함창(咸昌)의 경계에 진을 치기도 하였는데, 이미 예천의 적진을 쳐부쉈고 또 당교(唐橋)와 송현(松峴)의 싸움에서 거의 다 섬멸하였으며, 산 채로 사로잡은 왜적의 우두머리는 순찰영(巡察營)에 바쳤습니다. 좌상도(左上道)가 어육(魚肉)4)이 되는 것을 모면했던 것은 선생의 공력 때문이었습니다.
용궁과 함창에서 진을 치고 있을 때, 어느 날 제독(提督) 고응척(高應陟)과 부하 장사(將士)들을 만나 진중에서 선천도(先天圖)를 강하였으니, 대개 옛사람이 창을 비껴들고 도를 논하였다5)는 뜻이고, 또 천지풍운(天地風雲)과 용호조사(龍虎鳥蛇)6)의 오묘함도 모두 여기로부터 나왔던 까닭입니다.
계사년(1593, 선조26)에 적을 쫒아 남하하여 대진(大陣)과 합류하여 행군해서 경주(慶州)에 이르렀을 때 힘이 다하여 병에 걸려 진중(陣中)에서 돌아가셨습니다. 향년 39세였으니 모부인(母夫人)이 생존해 계셨습니다. 임종하실 때에 시를 짓기를 “목숨 바쳐 백년 사직을 지킬 생각으로 6월에 군복으로 갈아입었네. 나라를 위하다가 몸이 먼저 죽으니 어버이 그리워 혼백만 돌아가네.”7)라고 하였습니다. 아, 이 어찌 천고(千古)의 자식과 신하된 사람들이 눈물 흘리기에 부족하겠습니까.
지금 만일 선생의 죽음에 대해서 입근(立慬 : 절개를 위해 목숨을 버림)에 특이함이 있다고 말한다면 독실한 논의가 아니니, 다만 만난 바의 기회가 달랐을 뿐입니다. 선생의 올바른 학문이 발하여 충의가 된 것은 대체로 이와 같습니다. 군공(軍功)의 경우는 유자(儒者)에게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만, 당시 순찰사 김수(金睟)가 써서 보고하기를 “대장의 목을 베고 수급을 바쳤으니 한 도(道)의 의병 가운데 으뜸입니다.”라고 하였고, 우도(右道) 도대장(都大將) 김면(金沔)이 편지로 답하면서 “충을 떨치고 의를 일으켜 마음을 다해 적을 토벌하였으니 옛사람에게서 찾아봐도 쉽지 않으니, 이 어찌 백세의 공언(公言)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선생은 군공을 번번이 부곡(部曲)에 양보하여 자처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당시의 편배(褊裨)였던 사람 중에도 더러 정경(正卿)을 추증 받은 자가 있고, 더러는 당상직을 추증 받은 자도 있습니다. 그런데 원수(元帥)를 지낸 선생에 대한 포상의 은전은 6품으로 올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8) 이것이 실로 후학들이 마음속에 개연(慨然)히 여기는 점일 뿐입니다.
저희들은 또 다른 한 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고(故) 징사(徵士) 임흘(任屹)9) 선생은 본래 서울의 세주(世冑 대대로 녹을 이어받는 집)로서 남쪽 안동으로 이사하여 선배 장자(長者)들을 즐거이 따르면서 도의(道義)의 설을 익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당하여 스스로 대대로 녹을 받는 집안의 자제로서 국난을 좌시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증(贈) 참의공(參議公) 유종개(柳宗介)와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약속하고, 유공은 대장이 되고 공은 부장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살부령(薩夫嶺) 아래에서 매복하여 목을 베고 사로잡은 왜적이 많았습니다. 다음날 더 많은 수의 적병이 유린하여 유공이 죽고, 공은 흩어진 병졸을 불러 모아 근시재 김공의 의병진에 합류하여 문경(聞慶)과 당교(唐橋)의 두 전투에서 모두 공훈을 세웠습니다. 근시재가 죽은 후, 공이 그 무리를 대신 이끌어 대군(大軍)과 합류하고서 죽기를 맹세하고 앞을 향해 나아가는데 얼마 안 있어 부친상을 당해 돌아갔습니다. 이것이 또 공이 의병을 일으킨 대략입니다.
제관(制關)한 이후에 조용히 임천(林泉)10)에서 지내며 구업(舊業)을 더욱 연마하여 한강(寒岡) 정 문목공(鄭文穆公 정구(鄭逑))에게 추중(推重)을 받았고 마침내 행의(行誼)로써 알려져 조정에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니, 이때는 북인(北人)이 국정을 잡고 있던 때였습니다.
아, 공은 임하(林下)의 한 포의(布衣)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왜적의 기세가 온 나라에 퍼진 때를 당해 싸움에 나아간 자는 간과 뇌를 땅에 바르며 참혹하게 죽었고 그대로 있던 자는 숲 속에 엎드려 숨었습니다. 그런데 이내 떨치고 일어나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한번 죽음으로써 나라를 위해 순절하고자 하여, 유공(柳公)이 패했는데도 오히려 나라를 위하려는 의지를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김공의 죽음에도 또 다시 만절필동(萬折必東)11)의 뜻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아, 또한 훌륭합니다. 그리고 만년에는 벼슬하지 않았으니 또 혼탁한 세상의 맑은 품격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위에서는 그 이름을 듣지 못하고 아래에서는 그를 추켜올리는 자가 없는 채로 지금까지 2백 년 동안 쓸쓸하였습니다. 선비는 진실로 그 의(義)를 행할 뿐 세상이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고는 진실로 도움이 되거나 손해될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라져버리고 드러나지 않는다면 또 어찌 쇠잔한 세상의 신하된 자에게 권면할 수 있겠습니까.
두 공의 후예가 은택을 요구한다[干澤]12)는 혐의가 될까봐 스스로 나서려고 하지 않았지만, 공의(公議)는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이에 서로 이끌어 순선(旬宣)13)의 아래에 우러러 호소하오니, 숨어있는 훌륭한 사람을 찾아내 면류(冕旒 임금)의 아래에 말씀드리는 것이 합하의 일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합하께서 여론을 굽어 채택하시어 전하께 아뢰어 흠전(欠典)을 추거(追擧)할 수 있게 해주신다면, 유림(儒林)에는 더할 수 없는 영광이요, 세상의 교화가 연마될 것입니다. 그리고 합하께는 또한 길이 한 지방에 칭찬하는 말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들은 간절히 기원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임신년(1812, 순조12) 11월 일.

예안(禮安) 유학(幼學) 이종순(李鍾淳) 이진두(李鎭斗) 김광련(金匡鍊) 이구유(李龜裕) 이민순(李民淳) 금여옥(琴汝玉) 이사우(李師愚) 남일제(南日躋) 윤위(尹褘) 오주현(吳周顯) 김시관(金是瓘) 김진유(金震儒) 이휘근(李彙瑾) 이원순(李元淳) 남명구(南命龜) 김숙(金橚) 신성렬(申聖烈) 김원경(金元敬) 이구손(李龜孫) 금여근(琴汝根) 이사동(李師侗) 이시경(李時敬) 김양련(金良鍊) 금기석(琴箕錫) 이정순(李程淳) 이보순(李保淳) 이여적(李汝迪) 김황련(金黃鍊) 이구회(李龜晦) 이임순(李林淳) 이호순(李好淳) 이구장(李龜章) 금여직(琴汝稷) 신종묵(申宗黙) 금상희(琴象熙) 이시정(李時靖) 이사항(李師恒) 금여극(琴汝極) 이구수(李龜洙) 이계순(李啓淳) 금희술(琴熙述) 이회순(李晦淳) 김조옥(金朝玉) 금여택(琴汝宅) 김하근(金夏根) 이사연(李師延) 이구영(李龜泳) 이구헌(李龜獻) 김시형(金是珩) 이행순(李行淳) 이능순(李能淳) 이휘성(李彙成) 금여식(琴汝栻) 이한섭(李漢燮) 금종하(琴鍾夏) 이휘양(李彙陽) 이여문(李汝文) 신응룡(申應龍) 권시표(權時標) 금여모(琴汝模) 김양원(金養元) 이구환(李龜煥) 이명순(李溟淳) 이시순(李始淳) 이대순(李大淳) 이구항(李龜恒) 진사(進士) 이노순(李老淳) 이휘원(李彙遠) 유학 금여악(琴汝岳) 금태렬(琴泰烈) 이겸순(李謙淳) 이구소(李龜熽) 오세현(吳世顯) 이일순(李日淳) 이수(李洙) 이구승(李龜升) 이휘녕(李彙寧) 안동(安東) 유학 김남운(金南運) 김남수(金南壽) 김진강(金鎭綱) 이남수(李柟秀) 이장수(李樟秀) 이정보(李庭寶) 생원 김희수(金羲壽) 김형수(金亨壽) 진사 이종주(李宗周) 이지경(李之慶) 이종휴(李宗休) 유학 이병하(李秉夏) 이병은(李秉殷) 생원 이유백(李有白) 유학 이만백(李晩白) 이양중(李養中) 이경간(李敬簡) 진사 유벽조(柳璧祚) 유학 유종목(柳宗睦) 유화조(柳華祚) 유관조(柳觀祚) 유현조(柳顯祚) 유병조(柳秉祚) 유의목(柳懿睦) 유가조(柳家祚) 이우두(李宇斗) 이광률(李光栗) 배현충(裴顯忠) 김성규(金星奎) 김성면(金星冕) 우구섭(禹龜燮) 박지철(朴之喆) 권부인(權溥仁) 정래정(鄭來楨) 정재문(鄭在汶) 권시도(權時度) 유치회(柳致晦) 유병문(柳炳文) 유치학(柳致學) 유치각(柳致覺) 배한주(裴翰周) 배현세(裴顯世) 배성주(裴晟周) 배찬주(裴贊周) 김성열(金星說) 김성곤(金星袞) 김도손(金道孫) 생원 안이룡(安爾龍) 유학 안원(安愿) 영천(榮川) 생원 이운섭(李雲燮) 유학 이면행(李勉行) 김혁련(金革鍊) 이휘(李彙) 이■규(李■奎) 김■■(金■■) 박■중(朴■中) 김영희(金永羲) 순흥(順興) 유학 권혁조(權赫祖) 권형조(權亨祖) 박춘목(朴春穆) 진사 서성렬(徐聖烈) 유학 박춘형(朴春亨) 박춘정(朴春正) 박춘명(朴春明) 풍기(豊基) 생원 황■민(黃■敏) 유학 황■린(黃■鱗) 이■순(李■淳) 이휘장(李彙璋) 이휘규(李彙珪) 김정구(金鼎九) 예천(醴泉) 유학 정창희(鄭昌熙) 정광천(鄭光天) 권태운(權泰運) 정창원(鄭昌遠) 정창규(鄭昌奎) 용궁(龍宮) 생원 이장우(李章瑀) 유학 이■원(李■瑗) 이■번(李■璠) 강■목(姜■睦) 이상익(李尙翼) 이상우(李尙愚) 상주(尙州) 생원 금영택(琴英澤) 김현규(金顯奎) 유학 김현용(金顯鏞) 유식춘(柳寔春) 생원 강철흠(姜喆欽) 유학 강세덕(姜世德) 선산(善山)유학 김지영(金持永) 김철유(金喆儒) 김사유(金泗儒) 신치교(申致敎) 신면교(申勉敎) 생원 김필교(金弼敎) 인동(仁同) 진사 장주(張鑄) 유학 장윤섭(張尹燮) 장일섭(張一燮) 장동운(張東韻) 김학구(金鶴九) 신복응(申福應) 신택중(申宅重) 신영제(申永躋) 권시도(權時度) 권상도(權尙度) 성주(星州) 생원 김준택(金俊宅) 정환(鄭煥) 유학 송능흠(宋能欽) 정동구(鄭東九) 김종태(金宗泰) 장병효(張秉孝) 칠곡(漆谷) 생원 이육(李錥) 유학 이화(李鏵) 이현(李鋧) 김민유(金敏儒) 김방유(金邦儒) 대구(大邱) 진사 최규진(崔奎鎭) 유학 최흥수(崔興洙) 최관(崔{氵+觀}) 최급(崔汲) 의성(義城) 진사 이상발(李祥發) 유학 이지발(李知發) 이현발(李玄發) 김양린(金養鱗) 신조우(申祖祐) 김양진(金陽進) 김당진(金堂進) 김해진(金海進) 생원 신면조(申冕朝) 이가발(李家發) 권득인(權得仁) 영해(寧海) 유학 이상은(李相殷) 이광문(李光文) 권도우(權度禹) 박준영(朴濬永) 박기영(朴基永) 남의양(南毅陽) 경주(慶州) 진사 이정엄(李鼎儼) 유학 이태상(李泰祥) 최수(崔璲) 이래상(李來祥) 영천(永川) 유학 정태섭(鄭台攝) 정유수(鄭裕壽) 조견구(曺見九) 조상구(曺象九) 이인흥(李仁興) 영양(英陽) 유학 조거신(趙居信) 조거양(趙居讓) 남태익(南泰益) 군위(軍威) 진사 홍문표(洪文豹) 이광덕(李匡德) 생원 이정우(李廷佑) 진보(眞寶) 유학 신흥렬(申興烈) 신치도(申致道) 이상운(李相運) 등

〈제사(題辭)〉14)
충성스럽고 의로운 선비가 왕왕 민멸되어 드러나지 못하는 것은 진실로 개탄할만하니, 마땅함을 따라 헤아려 처리할 일이다. 10일.
행사(行使)【착압】

[주석]

1) 합하(閤下)
합하는 존귀한 사람에 대한 경칭(敬稱)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친구 사이에 이야기를 하거나 편지를 보내는 상대방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2) 위기지학(爲己之學)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공부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에 상대되는 말로, 오직 자신의 덕성을 닦기 위해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논어》〈헌문(憲問)〉에,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한 공부를 하였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남을 위한 공부만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라는 말이 나온다.
3) 선생께서……것입니다
이때 학봉(鶴峯) 김성일(金成一)이 초유사가 되어 도내에 격서(檄書)를 돌렸는데, 이에 대한 답신에 있는 내용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국역 대산집》 권49〈예문관 검열 증 홍문관 수찬 근시재 김선생 행장(藝文館檢閱贈弘文館修撰近始齋金先生行狀)〉에 보인다.
4) 어육(魚肉)
항우의 진영인 홍문(鴻門)의 술자리에서 목숨의 위협을 느낀 유방이 빠져나와 망설이고 있을 때, 번쾌가 유방에게 큰일을 할 때는 자질구레한 예절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만류하면서“지금 저들이 바야흐로 칼과 도마가 되고, 우리는 그 위에 놓인 물고기 신세가 된 지경에 무슨 인사를 하려고 합니까?[如今人方爲刀俎, 我爲魚肉, 何辭爲?]”라고 하였다. 어육은 침해를 받거나 목숨이 위기에 처하는 것을 가리킨다.《史記 卷7 項羽本紀》
5) 창을……논하였다
말 위에서 창을 가로로 비껴 잡고 담론을 나눈다는 말로, 문무(文武)를 겸비했다는 뜻이다. 《남제서(南齊書)》권28〈원영조열전(垣榮祖列傳)〉에“조조와 조비는 말에 타면 창을 가로로 비껴 잡고서 시를 읊고, 말에서 내리면 담론하였다.[曹操曹丕, 上馬橫槊, 下馬談論.]”라고 하였다.
6) 천지풍운(天地風雲)과 용호조사(龍虎鳥蛇)
삼국시대 촉(蜀)의 제갈량이 만들었다는 진법인 팔진법(八陣法)을 말한다.
7) 임종하실 때에……돌아가네
이 시의 제목은〈절명시(絶命詩)〉로,《근시재집(近始齋集)》권1에 실려 있다.
8) 6품으로……않았으니
1595년(선조28)에 조정의 신하들이 김해가 나라를 위해 죽은 사실을 보고하자, 임금이 특명을 내려 옛 관직을 회복시키고 6품직인 홍문관 수찬을 추증하였던 일을 가리킨다.《국역 대산집 권49 예문관 검열 증 홍문관 수찬 근시재 김 선생 행장(藝文館檢閱贈弘文館修撰近始齋金先生行狀)》
9) 징사(徵士) 임흘(任屹)
징사는 학문과 덕행이 높아 임금이 초빙하여도 나아가 벼슬하지 않은 은사를 말한다. 임흘(1557~1620)의 본관은 풍천(豊川), 자(字)는 탁이(卓爾), 호(號)는 용담(龍潭)이다. 1582년(선조15)에 진사가 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종개(柳宗介)와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문경전투에서 많은 적을 사살하였다. 그 공으로 전옥서 참봉(典獄署參奉)이 되었으나 동인과 서인의 격심한 당쟁에 실망하여 그들을 규탄하는 소를 올리고 사직하였다. 광해군 때 동몽교관으로 기용되었으나,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 일당이 나라를 망치리라 하여 사직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저서로는 《임란일기(壬亂日記)》 4권, 《용담잡영(龍潭雜詠)》 등이 있다.
10) 임천(林泉)
산림천석(山林泉石)의 준말로, 은거하는 곳을 뜻한다.
11) 만절필동(萬折必東)
중국의 지면은 동쪽이 낮아 물줄기가 일만 번 꺾이더라도 반드시 동해로 흘러들어간다는 데서 나온 것으로, 여기서는 아무리 수많은 역경을 겪더라도 나라를 위하는 정성은 변함이 없다는 뜻으로 사용하였다.《荀子 宥坐》
12) 요구한다[干澤]
은택을 요구한다 :《맹자》〈공손추(公孫丑) 下〉에 “불가능함을 알고서도 왔다면 이것은 은택을 요구한 것이다.[識其不可, 然且至, 則是干澤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13) 순선(旬宣)
순선지하(旬宣之下) :‘순선(旬宣)’은 《시경》〈강한(江漢)〉에“왕께서 소호를 명하사 와서 두루하며 와서 베풀게 하시다.[王命召虎, 來旬來宣.]에서 온 말로, 임명받은 지역을 두루 다스려 왕명을 펼치는 지방관을 가리킨다.
14) 제사(題辭)
제김[題音]이라고도 하며, 처분, 지시, 판결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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