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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3년 이상발(李祥發) 등 상서(上書)    
G002+AKS+KSM-XB.1813.4717-20101008.B001a_001_00168_XXX
 
분류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작성주체 발급: 신정주(申鼎周) , 이상발(李祥發) , 임직곤(任直坤) /수취: 암행어사(暗行御史)
작성지역 예안    /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작성시기 1813년 / 계유5월   
형태사항 크기: 135×127 / 낱장, 1장 / 종이 /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 안동 오천 광산김씨 후조당  / 현소장처 : 안동 오천 광산김씨 후조당  
비고 출판정보: 『고전자료총서 82-2 광산김씨 오천고문서』(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2) 본 번역문은 2014년 한국고문서 정서·역주 및 스토리텔링 연구사업 연구결과물임.
고문서집성 수록정보 『고문서집성』01 / 7. 소지류 / 상서3 / 82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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進士李祥發幼學申鼎周任直坤等謹百拜上書
繡衣閤下伏以忠義君子之大節而必以學問爲本 㫌褒 朝家之令典而必以搜訪爲先此
列聖所以礪世磨鈍之砥石也我 聖朝四百年來學問忠義之士前後輩出而鮮有兼而有之者 㫌褒搜訪之道大小畢擧而或有隱而不顯者此非 朝家之欠典而輿情之所慨鬱者乎禮安退陶李先生之鄕也當
時學行道義之賢咸被陶鑄之力而若其學問之積發之爲忠義者惟我故檢閱贈修撰近始齋金先生是已先生諱禮安鄕人祖雲巖公緣以經術直道爲 中廟朝名臣卽晦齋李先生所謂志契斷金者也父徵士後凋公富弼
淸公富儀
兄弟俱以退陶高第最受師門獎詡先生亦以童丱及門觀感師席擩染家庭早得淵源車輪鳥翼之工己自少日如太極陰陽之辨心性理氣之說歷代興廢之跡以至天文地誌兵謀師律無不貫穿剔抉窮其源流而一以存養
爲主其號近始者蓋朱夫子所謂爲學自近始之義而亦先生之居距陶山甚近也方理餘韻尋墜緖有興起斯文之志早登薦剡屢除不赴及其登第拆號百僚相賀于庭至欲奏聞 天朝時先生年三十有五望實之隆已可見矣
不幸龍蛇之變三京失守 鑾輿播越則先生倡起義旅爲一道之先時壬辰六月日也於是左道列邑以先生名賢重望推以爲大將安東義將裴龍吉李庭栢爲左右副大邱以上皆聽先生節制先生與書招諭使金文忠公誠
曰蠻獠猖獗 鑾馭西遷臣民之痛不如死之久矣糾合章甫僅得數百空弮未張血點垂臆兵孤勢弱恐難自濟然忠義之心出於性分守死致命昔所講聞誓心天地不與此賊俱生遂乃設機應會多所斬獲或陣安醴
之地或陣龍咸之境旣掃醴泉賊壘又於唐橋松峴之役與大軍追亡逐北殲滅殆盡生獲賊酋獻俘巡營一路之得免魚肉先生之力也其在醴泉也適當除日有詩曰孤燈旅舍鐵衣寒人道今宵歲已闌一日能添雙鬂白百年
惟有寸心丹其愛君憂國感憤敵愾之志溢於言表其陳龍咸也與高提督應陟講先天圖于陣中卽古人橫槊論道之遺意而亦天地風雲龍虎鳥蛇之妙皆從其出故也在軍有行軍須知一篇其施設之方井井不紊一以
誠信仁愛固結人心爲本古所謂文武全才者非先生之謂邪癸巳夏追賊南下行至慶州盡瘁疾作卒于陣中年三十九母夫人時在堂矣其臨絶之詩曰百年存社計六月着戎衣爲國身先死思親魂獨歸嗚呼斯豈不
淚千古人子人臣乎先生正學之發而爲忠義者大槩如是矣郭忠正公䞭誄文曰吾道旣晦絶學誰抗狡虜尙熾義伐誰將申梧峯之悌輓詩曰曾悼鶴峯逝又如達遠何書傳舊業遡餘波達遠二字先生表
德也陶山院儒祭文曰聳標儒林汲古修綆倡義討賊志在殉國豈非百世之公言乎至若軍功則非所輕重於先生而其時巡察使金公睟題報則謂斬將獻醎爲一道義兵之首右道義兵將金公沔復書則謂奮忠擧
義盡心討賊求之古人實不易得再從弟溪巖公坽龍蛇記事則謂孜孜忠勤夙夜不怠揀遣精銳過截賊路斬獲甚衆盖先生之於軍功輒讓與部曲不以自居故伊日褊裨或有 贈正卿者或有 贈堂上者而元帥之褒典不過
陞六而止耳此生等所謂 朝家之欠典而輿情之所慨鬱者也嗚呼先生之學問忠義兼全如此勉勉進德之工庶幾師門之嫡傳儒林之宗主而堂堂殉國之志亦可謂日月之爭輝秋霜之幷烈矣豈可與一朝感慨慕義者比邪
又其經學爲世業節義成家法若其胤梅園公光繼野逸齋公光岳兄弟俱以高弟早有重名 西宮之變梅園公遂謝公車 反正以後因不復就試當丙子之亂兄弟倡起義旅行至竹嶺聞和議已成西向慟哭
而歸兄則四 徵不起弟則遯跡終身先生所以啓迪之者有如此矣然則先生之遺風餘韻宜其爲後生之所景仰而今數百年隱而不顯又豈非 聖朝之遺典哉然而先生後裔以干澤爲嫌耻於自鳴斯亦無怪而公議所在
有不可泯黙者迺自陶山特定儒生往呈營門則營題曰忠義之士往往泯而不顯不勝慨然終當量處云云一道士林方袛竢量處之如何也適聞
閤下奉 命南來明臨本邑凡係道內之眞儒懿蹟泯而未顯者搜而訪之闡而褒之 閤下事也 閤下責也生等居在隣鄕夙聞輿論玆以仰籲於 繡節之下伏乞 閤下俯採公議仰達
天陛克盡表章之道則儒林增光世敎砥礪而 閤下亦永有辭於後世矣生等無任祈懇之至
癸酉五月 日
生員金宗駿權得仁幼學李宜渙朴春曄李宜燮金原進李知發申祖祐生員申冕朝李家發幼學李基發金宗贇柳崧祚朴宜銓任養坤李玄發李宜敏李浩發申海敎申鐸敎南正箕
任益坤金海進金霽進李志發李曾發申樂敎申瑞敎申鼎牧朴元赫朴元贇朴司銓金霽裕生員金淸進幼學金周進金曦進金庭進申冕憲申承烈南正宅權顯仁朴春景李思敬
李曾潤李復綱李俊民任鎭宅朴重吉李海發李魯奎李魯文申鼎恊軍威進士洪文豹李匡德幼學洪文虎洪錫疇洪宇煥生員李廷佑漆谷幼學李樹運李熙運李以升李以鼎生員李 錥
幼學李 鏵善山金持永金持鳳申致敎申勉敎仁同 進士張 鑄幼學張尹燮金鶴九申福應申宅重申永躋權時度權尙度大邱 進士崔奎鎭崔興洙崔 濼靑松趙龜燮趙英燮趙基永趙基鴻
慶州 進士李鼎儼幼學李泰祥李來祥崔 琇崔 {玉+彦}李集祥義興申鼎夢朴時發朴慶銓永川鄭台攝鄭裕壽鄭夢休曺顯九曺象九李仁興

題辭
臨危倡勇
卓卓乎有樹
立者得於平
日學問之工者
爲多不可以一
節一行而論
如斯人豈易
[署押]

〈背面〉
多得哉以若所存與堂堂忠義特因後承之耻於干澤尙今湮沒者大是欠典宜乎輿論之齎鬱而事係久遠啓聞難愼當爲量爲之事十二日在義城

암행어사에게 김해를 정려하는 일로 이상발 등이 연명하여 올린 청원서

진사(進士) 이상발(李祥發), 유학 신정주(申鼎周), 임직곤(任直坤) 등이 삼가 백번 절하며 어사또[繡衣] 합하께 상서를 올립니다.
삼가 충의(忠義)는 군자의 큰 절개이니 반드시 학문으로 근본으로 삼아야 하고, 정포(㫌褒)는 국가의 아름다운 법이니 반드시 찾아내는 것을 우선해야 합니다. 이것은 열성(列聖)께서 세상을 갈고 둔한 것을 연마하는 숫돌입니다. 우리 성조(聖朝) 4백년 이래로 학문과 충의를 갖춘 선비가 전후로 잇따라 배출되었으나 이 둘을 겸하여 갖춘 자는 드뭅니다. 정포의 대상을 찾아내는 방도에 대단한 사람이든 사소한 사람이든 모두 찾아내더라도, 혹시 숨겨져서 드러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면 이것이 국가의 흠전(欠典)이요 여정(輿情)이 강개하고 억울하게 여기는 점이 아니겠습니까.
예안은 퇴도(退陶) 이 선생(李先生 이황(李滉))의 고향입니다. 당시 학행과 도의를 갖춘 어진 선비들은 모두가 이 선생께서 인재를 길러주는 힘을 입었지만, 학문이 쌓여 충의로 발현된 사람은 오직 우리 고(故) 검열(檢閱) 증(贈) 수찬(修撰) 근시재(近始齋) 김 선생(金先生) 이 분 뿐입니다. 선생의 휘(諱)는 해(垓)이니 바로 예안 고을 사람입니다. 할아버지 운암공(雲巖公 김연(金緣))께서는 경술(經術)과 올곧은 도[直道]로써 중종(中宗) 조정의 명신이 되신 분이니, 바로 회재(晦齋) 이 선생(李先生)과 뜻이 잘 맞고 마음을 함께한 사이1)입니다.
아버지인 징사(徵士) 후조공(後彫公) 부필(富弼)과 읍청공(挹淸公) 부의(富儀) 형제는 모두 퇴도 이 선생의 고제(高弟)로서 스승의 칭찬과 인정을 가장 많이 받았습니다. 선생은 또한 어린 아이 때 문하에 들어가 스승을 보고 감동하였고 집안의 가르침에 흠뻑 젖어 일찍부터 연원 있는 학문2)을 터득하였으니, 새의 양 날개와 수레바퀴의 두 바퀴처럼 집안과 스승의 공로입니다.
이미 젊어서부터 태극음양(太極陰陽)의 논변과 심성이기(心性理氣)의 설이 역대로 흥하고 폐한 사적과 천문(天文), 지지(地誌), 병략(兵略), 군율(軍律)에 이르기까지 모두 관통하여 샅샅이 파헤쳐 그 원류를 궁구하였습니다. 한결같이 존양(存養)3)을 위주로 하셨으니, 그 호를 근시(近始)라고 한 것은 주부자(朱夫子 주희(朱熹))께서 학문을 할 때 가까운 데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했던 의미이고, 또 선생의 거처가 도산(陶山)과 매우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바야흐로 여운을 읊조리고 실추한 실마리를 찾아 사문(斯文)을 흥기시키는 뜻이 있습니다. 일찍 천거되어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4) 과거에 합격하여 급제자 명단을 발표[拆號]하자 모든 신료들이 뜰에서 축하 인사를 해주었고, 중국 조정에 아뢰고자 할 때에 선생의 나이 35세였으니 그의 높은 명망과 실제를 이미 볼 수 있습니다.
불행히 임진왜란으로 서울, 개성, 평양이 놈들의 수중에 들어가고 임금의 수레가 피난을 가니, 선생이 궐기하여 의병을 일으킨 것이 도(道)에서 가장 먼저였고, 때는 임진년 6월이었습니다. 이에 좌도(左道) 여러 고을에서 선생은 명현(名賢)이고 중망이 있다는 이유로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고, 안동 의병장 배용길(裴龍吉)과 이정백(李庭栢)을 좌우부장(左右副將)으로 삼아 대구(大邱) 위쪽이 모두 선생의 통제를 받았습니다.
선생께서 초유사(招諭使) 김 문충공(金文忠公) 성일(誠一)에게 서신을 보내 이르기를“오랑캐가 창궐하고 임금께서 서쪽으로 피난을 가셨으니 신하와 백성의 고통이 죽느니만 못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규합한 선비가 겨우 수백 명인데 빈 활조차 당겨보지도 못하니 핏방울만 가슴에 떨어집니다. 병세(兵勢)가 열악하여 뜻을 이루기 어려울까 두렵습니다만, 충의로운 마음이 천성에서 나오고 목숨 걸고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도리도 예전에 익히 익혔으니, 천지에 맹세컨대 이 왜적들과는 세상을 함께 살지 않을 것입니다.”5)라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전략을 세우고 적절히 대응하여 베어 죽이거나 사로잡은 적이 많았습니다.
혹은 안동과 예천에 진(陣)을 치기도 하고 혹은 용궁과 함창의 경계에 진을 치기도 하면서, 예천의 적진을 소탕하였습니다. 또 당교(唐橋)와 송현(松峴)의 전투에서 대군(大軍)과 함께 도망하는 적을 뒤좇아 북쪽으로 몰아서 거의 다 섬멸하였으며, 산 채로 사로잡은 왜적의 우두머리는 순영(巡營)에 바쳤습니다. 일로(一路)가 어육(魚肉)이 되는 것을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은 선생의 공력 때문이었습니다.
예천에 주둔하고 있을 때, 마침 섣달 그믐날이어서 시를 짓기를,“군막의 외로운 등불아래 갑옷은 차가운데 사람들 이 밤 지나면 한 해가 저문다 하네. 오늘이 지나면 귀밑머리는 더 희어지겠지만 백년이 지나도 일편단심은 그대로이리라.”6)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며 적에 대해 분개하는 뜻이 시어에 넘쳐납니다. 그가 용궁과 함창에 진을 치고 있을 때는 제독(提督) 고응척(高應陟)과 진중에서 선천도(先天圖)를 강하였으니, 바로 옛사람이 창을 비껴들고 도를 논하였다7)는 뜻이고, 또 천지풍운(天地風雲)과 용호조사(龍虎鳥蛇)8)의 오묘함이 모두 여기로부터 나온 까닭입니다.
공이 군막에 있으면서 쓴〈행군수지(行軍須知)〉1편이 남아 있는데 그 시행하는 방법이 정연하여 문란하지 않으며, 한결같이 성신(誠信)과 인애(仁愛)로서 인심을 단단히 단결시키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옛날에 이른바 문무(文武)의 재능을 온전히 하였다는 것이 선생을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계사년(1593, 선조26) 여름에 적을 쫒아 남쪽으로 내려와 행군하여 경주(慶州)에 이르렀을 때, 힘이 다하여 병에 걸려 진중(陣中)에서 돌아가셨으니, 향년 39세였고 모부인(母夫人)은 이때 생존해 계셨습니다. 임종하실 때에 시를 짓기를“목숨 바쳐 백년 사직을 지킬 생각으로 6월에 군복으로 갈아입었네. 나라를 위하다가 몸이 먼저 죽으니 어버이 그리워 혼백만 돌아가네.”9)라고 하였습니다. 아, 이 어찌 천고(千古)의 자식과 신하된 사람들이 눈물 흘리지 않겠습니까. 선생의 정학(正學)이 발현되어 충의가 된 대강의 내용이 이와 같습니다.
곽 충정공(郭忠正公) 준(䞭)10)이 지은 뇌문에 “우리 도의 앞날 이미 캄캄해지니 끊어진 학문 누가 다시 이으며, 교활한 오랑캐 여전히 강성한데 의로운 토벌은 누가 실행할까.”라고 하였습니다. 오봉(梧峯) 신지제(申之悌)11)가 만시(輓詩)를 짓기를“일찍이 학봉(鶴峯)의 죽음을 애도하였더니 또 달원(達遠 김해의 자(字))은 어디로 가시는가. 시서(詩書)로 구업을 전하고 이락(伊洛)12)의 남은 물결을 거슬러 오르는가.”라고 하였으니,‘달원’두 글자는 선생의 덕을 표현한 말입니다. 도산서원 유생이 지은 제문에 이르기를“유림의 우뚝한 푯대이고 성현의 샘물 길어 올릴 두레박줄이로다.13)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는데 뜻이 순국에 있었으니 어찌 백세의 공언(公言)이 아닌가.”라고 하였습니다.
군공(軍功)의 경우는 선생에게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만, 당시 순찰사 김수(金睟)가 써서 보고하기를“대장의 목을 베고 수급을 바쳤으니 한 도(道)의 의병 가운데 으뜸이다.”라고 하였고, 우도(右道) 의병장 김면(金沔)이 편지로 답장을 하면서“충을 떨치고 의를 일으켜 마음을 다해 적을 토벌하였으니 옛사람에게서 찾아봐도 실로 쉽지 않다.”라고 하였습니다. 재종제(再從弟)인 계암공(溪巖公) 김령(金坽)의 《용사기사(龍蛇記事)》에는“부지런하고 충근(忠勤)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게으르지 않았고 정예 군사를 가려서 보내 적의 진로를 차단하여 목을 베어 죽이거나 사로잡은 왜적이 매우 많았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생은 군공을 번번이 부곡(部曲)에 양보하여 자처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당시에 편배(褊裨)였던 사람 중에도 더러 정경(正卿)을 추증 받은 자가 있고, 더러는 당상직을 추증 받은 자도 있습니다. 그런데 원수(元帥)를 지낸 선생에 대한 포상의 은전은 6품으로 올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 이것이 실로 나라의 흠전(欠典)이요, 여정(輿情)이 개연히 억울하게 여기는 점입니다. 아, 선생의 학문과 충의가 이처럼 온전하게 겸비되셨으니 부지런히 힘써 덕에 나아간 훌륭함이 거의 사문(師門)의 적전(嫡傳)이고 유림의 종주(宗主)입니다. 당당하게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뜻은 또한 일월(日月)과 함께 빛을 다투고 가을 서리처럼 굳세다고 이를 만하니, 어찌 하루아침에 감개하여 의로움을 추모하는 것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또한 그의 경학(經學)은 세업(世業)이 되고 그의 절의는 가법(家法)이 되어, 맏아들 매원공(梅園公) 김광계(金光繼)와 야일재공(野逸齋公) 김광악(金光岳) 형제는 모두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고제(高弟)로 어려서부터 중망이 있었는데, 서궁(西宮)의 변이 일어나자 매원공은 마침내 공거(公車)14)를 그만 두었고, 인조반정 이후에는 더 이상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습니다. 병자호란을 당하여 형제는 의병을 일으켜 행군하여 죽령(竹嶺)에 이르렀는데, 화의(和議)가 이미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서쪽을 향하여 통곡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형은 조정에서 네 차례 불렀어도 나아가지 않았고, 아우는 종신토록 은둔하였으니 선생께서 길을 열어 인도함이 이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선생이 남긴 풍모와 여운은 후생(後生)이 경모하는 대상이 되었어야 마땅한데,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숨어 드러나지 않았으니 또 어찌 성조(聖朝)께서 물려주신 법이 아닙니까.
그러나 선생의 후손들은 은택을 요구한다[干澤]15)는 혐의가 될까봐 스스로 나서는 것을 부끄러워하니 이 또한 이상할 것 없습니다만, 공의(公議)는 가만히 침묵하고 있을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에 스스로 도산에서 특별히 정한 유생들이 순영에 가서 직접 상소를 올렸더니, 순영에서 처분하기를 “충성스럽고 의로운 선비가 왕왕 민멸되어 드러나지 못하고 있으니 개연함을 가누지 못하겠다. 마땅함을 따라 헤아려 처리할 일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온 도내의 사림이 처리가 어떻게 될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합하께서 명을 받들고 남쪽으로 내려와 본 고을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모든 도내의 진유(眞儒)의 아름다운 행적과 관련하여 민멸되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찾아내서 조정에 알려 포장의 은전이 내려지게 하는 것은 합하의 일이고 합하의 책무입니다. 저희들은 인근 향리에 살고 있으면서 일찍부터 여론을 듣고 있었기에, 이에 어사또께 우러러 호소하옵니다. 삼가 바라건대 합하께서 공의(公議)를 채택하시어 임금께 진달하여 포장 받을 수 있는 방도를 극진히 해주신다면 유림(儒林)에는 더할 수 없는 영광이요 세상의 교화가 연마될 것이며, 합하께는 또한 훗날까지 칭찬하는 말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들은 간절히 기원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계유년(1813, 순조13) 5월 일.

생원(生員) 김종준(金宗駿) 권득인(權得仁) 유학(幼學) 이의환(李宜渙) 박춘엽(朴春曄) 이의섭(李宜燮) 김원진(金原進) 이지발(李知發) 신조우(申祖祐) 생원 신면조(申冕朝) 이가발(李家發) 유학 이기발(李基發) 김종윤(金宗贇) 유숭조(柳崧祚) 박의전(朴宜銓) 임양곤(任養坤) 이현발(李玄發) 이의민(李宜敏) 이호발(李浩發) 신해교(申海敎) 신탁교(申鐸敎) 남정기(南正箕) 임익곤(任益坤) 김해진(金海進) 김제진(金霽進) 이지발(李志發) 이증발(李曾發) 신악교(申樂敎) 신서교(申瑞敎) 신정목(申鼎牧) 박원혁(朴元赫) 박원윤(朴元贇) 박사전(朴司銓) 김제유(金霽裕) 생원 김청진(金淸進) 유학 김주진(金周進) 김희진(金曦進) 김정진(金庭進) 신면헌(申冕憲) 신승렬(申承烈) 남정택(南正宅) 권현인(權顯仁) 박춘경(朴春景) 이사경(李思敬) 이증윤(李曾潤) 이부강(李復綱) 이준민(李俊民) 임진택(任鎭宅) 박중길(朴重吉) 이해발(李海發) 이노규(李魯奎) 이노문(李魯文) 신정협(申鼎恊) 군위(軍威) 진사(進士) 홍문표(洪文豹) 이광덕(李匡德) 유학 홍문호(洪文虎) 홍석주(洪錫疇) 홍우환(洪宇煥) 생원 이정우(李廷佑) 칠곡(漆谷) 유학 이수운(李樹運) 이희운(李熙運) 이이승(李以升) 이이정(李以鼎) 생원 이육(李錥) 유학 이화(李鏵) 선산(善山) 김지영(金持永) 김지봉(金持鳳) 신치교(申致敎) 신면교(申勉敎) 인동(仁同) 진사(進士) 장주(張鑄) 유학 장윤섭(張尹燮) 김학구(金鶴九) 신복응(申福應) 신택중(申宅重) 신영제(申永躋) 권시도(權時度) 권상도(權尙度) 대구(大邱) 진사 최규진(崔奎鎭) 최흥수(崔興洙) 최락(崔濼) 청송(靑松) 조구섭(趙龜燮) 조영섭(趙英燮) 조기영(趙基永) 조기홍(趙基鴻) 경주(慶州) 진사 이정엄(李鼎儼) 유학 이태상(李泰祥) 이래상(李來祥) 최수(崔琇) 최언(崔{玉+彦}) 이집상(李集祥) 의흥(義興) 신정몽(申鼎夢) 박시발(朴時發) 박경전(朴慶銓) 영천(永川) 정태섭(鄭台攝) 정유수(鄭裕壽) 정몽휴(鄭夢休) 조현구(曺顯九) 조상구(曺象九) 이인흥(李仁興) 이재찬(李載瓚) 등

〈제사(題辭)〉
나라의 위기를 보고 용감하게 의병을 일으켜 우뚝하게 공적을 세운 것은 평소 학문의 공부에서 얻어진 것이 많을 터이니, 한 가지 절개나 한 가지 행실로 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사람을 어찌 많이 찾기가 쉽겠는가. 이처럼 갖춘 바와 당당한 충의를 다만 후손이 은택을 요구하는 것에 부끄러워하여 지금까지 민멸되었다는 것은 큰 흠전이 마땅하다. 그러나 여론이 탄식하고 답답해하더라도 일이 시간적으로 너무 오래 된 일이므로 임금께 계문하는 것은 어렵고 신중히 해야 할 것이니 마땅히 헤아려야 하는 일이다. 12일 의성(義城)에서.
【착압】

[주석]

1) 마음을 함께하는 사이
원문의 단금(斷金)은 《주역》〈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두 사람이 마음을 함께 하니, 그 날카로움이 금(金)을 절단한다.[二人同心, 其利斷金.]”라고 하여, 깊은 우정을 나누는 사이라는 뜻에서 온 말이다.
2) 연원 있는 학문
연원지학(淵源之學)은 염락관민(濂洛關閩)의 학문을 말한다.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자(程子),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민중(閩中)의 주자를 통칭한 것으로, 곧 송대의 성리학을 뜻한다.
3) 존양(存養)
맹자가 말한 “그 마음을 보존하여 그 성을 기름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요.[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라는 말을 줄인 표현이다.《孟子 盡心上》
4) 일찍 천거되어 …… 않았습니다
1587년(선조20)에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광릉 참봉(光陵參奉)을 제수 받았지만 부임하지 않았고, 1588년에 다시 사직서 참봉을 제수 받아 잠시 부임했다가 귀향하고, 이후 1589년에 연은전 참봉(延恩殿參奉)을 제수 받았던 일이 있었다.《국역 대산집 권49 예문관 검열 증 홍문관 수찬 근시재 김 선생 행장(藝文館檢閱贈弘文館修撰近始齋金先生行狀)》
5) 선생께서……것입니다
이때 학봉(鶴峯) 김성일(金成一)이 초유사가 되어 도내에 격서(檄書)를 돌렸는데, 이에 답신을 보낸 내용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국역 대산집》권49〈예문관 검열 증 홍문관 수찬 근시재 김 선생 행장(藝文館檢閱贈弘文館修撰近始齋金先生行狀)〉에 보인다.
6) 군막의……그대로이리라
이 시의 제목은〈용궁과 함창의 진중에서 적의 보루를 바라보고 비분강개하여 읊다[龍咸陣中望見賊壘悲憤有吟]〉이며,《근시재집》 권1에 실려 있다.
7) 창을……논하였다
앞의 각주 5번 참조
8) 천지풍운(天地風雲)과 용호조사(龍虎鳥蛇)
앞의 각주 6번 참조
9) 임종하실……돌아가네
앞의 각주 7번 참조
10) 곽 충정공(郭忠正公) 준(䞭)
곽준(郭䞭, 1551~1597)은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양정(養靜), 호는 존재(存齋)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김면(金沔)이 의병을 규합하니 평소에 친히 지내던 교분으로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관찰사 김성일(金誠一)이 그의 현명함을 듣고 자여도 찰방(自如道察訪)에 임명하였다. 1594년에 안음현감에 임명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 때 안음현감으로 함양 군수 조종도(趙宗道)와 함께 호남의 길목인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키던 중, 가토(加藤淸正) 휘하의 왜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아들 이상(履常)·이후(履厚)와 함께 전사하였다.
11) 오봉(梧峯) 신지제(申之悌)
신지제(1562~1624)는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순부(順夫), 호는 오봉(梧峰)·오재(梧齋)이다. 1589년(선조22)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예안현감 재직 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대를 모집하여 적을 토벌하였다. 1601년 정언(正言)·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 등을 역임하고, 1613년(광해군5) 창원 부사로 나가 명화적(明火賊)을 토평하고 민심을 안정시켜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고, 인조반정초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죽었다.
12) 이락(伊洛)
앞의 각주 24번 참조
13) 성현의……줄이로다
원문의‘급고수경(汲古修綆)’은 옛 전적(典籍)을 연구하는 것을 깊은 우물에서 물을 푸는 것에 비유한 것으로, 한유(韓愈)의 〈추회시(秋懷詩)〉에“어리석음으로 돌아감에 평탄한 길 있음을 알겠고, 성현의 샘물 길어 올릴 두레박 줄을 얻었도다.[歸愚識夷塗, 汲古得修綆.]”라고 한 구절에서 유래하였다.《한창려집(韓昌黎集)》권1〈추회시(秋懷詩)〉 11수 가운데 다섯 번째 시에 나온다.
14) 공거(公車)
공가(公家) 즉 국가의 거마(車馬)를 이르는데, 한(漢) 나라 때 과거에 응시하러 가는 사람을 공거에 태워 보냈으므로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이르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15) 요구한다[干澤]
은택을 요구한다 :《맹자》〈공손추(公孫丑) 하〉에 “불가능함을 알고서도 왔다면 이것은 은택을 요구한 것이다.[識其不可, 然且至, 則是干澤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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