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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6년 김시진(金是珍) 등 상서(上書)    
G002+AKS+KSM-XB.1826.4717-20101008.B001a_001_00169_XXX
 
분류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작성주체 발급: 김시진(金是珍) , 김인교(金鄰敎) /수취: 예안현(禮安縣)
작성지역 예안    /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작성시기 1826년 / 병술12월   
형태사항 크기: 100×60.5 / 낱장, 1장 / 종이 /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 안동 오천 광산김씨 후조당  / 현소장처 : 안동 오천 광산김씨 후조당  
비고 출판정보: 『고전자료총서 82-2 광산김씨 오천고문서』(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2) 본 번역문은 2014년 한국고문서 정서·역주 및 스토리텔링 연구사업 연구결과물임.
고문서집성 수록정보 『고문서집성』01 / 7. 소지류 / 상서4 / 84 ~쪽
 
성주에게 광산김씨 문중의 사우를 훼손한 이노순 등에 대한 징치를 요청한 청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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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安化民金是珍金鄰敎等謹再拜齋沐上書
兼城主閤下伏以此鄕兩姓之相持今已過二年矣初以謚號之同首發風色擯斥之搆揑之無所不至甚至於
英廟正廟朝之不爲請 謚而乃於
當宁朝請 謚爲罪案又以渠輩有言不可遵行之成命而趂卽延 謚爲大罪以至今日之變而極矣請試陳本末伏願 閤下垂察焉 老先生祖父 贈判書公隱於 景泰時有趙漁溪之節民等先祖 贈參判公
亦早歲上舍仍卽廢擧自處篠簣者流故幷祀于鄕賢者今近數百年中間因廟內有變移奉先祖于洛川祠而百餘年同堂合享之位不可異同故李先生並爲移奉者今又三
十有八年而洛川祠者鄙家 陶山門下諸賢妥靈之所而後彫先生又居第三位矣李氏發怒於師弟同 謚飛通道內呈書于 謚狀作家誣衊先輩凌踏本家必欲破削爵 謚百般經營事不諧
意則以斯文罪人斥之不共戴天絶之而乃作新祠於啓賢祠傍將爲分奉李先生則民等數次呈單責之此無他近數百年同堂合享之位以後孫之爭端而一朝分張事甚可駭且書院前例不
可合享者或配享焉或從享焉其不及於此者乃爲傍祠焉則元廟之於傍祠其大小輕重爲如何哉民等之呈單持重不但道理當然乃爲李先生地也彼輩不顧前後不念事理特以永絶
洛川之計乃於再昨夜李老淳李汝迪李師延李晩受李彙炳等率其徒黨數百人列炬齊進民等亦已入去昨日則終日相持乃於今日因民等朝飯數百人踰墻亂跳突入廟庭民等追入禁之則其拳法若拔
釰若打碎衣冠猶爲不足負門少年則踢墜致傷首任則破冠歐曳打破廟壁畢竟以諸般鐵物打拔門鎖奉出李先生位版此何變怪此何駭擧彼輩自於其先作此變怪民等亦當任之而先輩
廟壁之撞破門鎖之打拔乃是士林間極變玆不得已敢此仰龥于 嚴明按法之下伏願 閤下俯賜覽察特爲摘奸報司嚴處使大家後人永懲駭悖之習不勝幸甚
丙戌十二月日
金是瑗金魯翼金是玹金興儒金亮儒金魯敎金彝敎金秉儒金憲敎金是琓金衡敎
金晩儒金致敎金碩儒金是瑨金程敎金義敎金進儒金復儒金履儒金顯儒金朝玉金汝玉金渭玉
金光玉金 璋金 垸金 垶金鍾久金濟說金濟寧金濟漢金鍾萬金門儒金濟進金是珌
題辭
此非一時兼
任所可決處者
向事 初四日
[署押]


예안의 화민(化民)1) 김시진(金是珍)과 김인교(金鄰敎) 등이 삼가 목욕재계하고 두 번 절하며 겸성주(兼城主)2) 합하께 상서를 올립니다.
삼가 이 고을에는 두 성(姓)이 서로 버틴 지 지금 2년이 넘었습니다. 당초 시호(諡號)가 같다는 이유로 맨 먼저 소문을 내더니, 배척과 모함이 이르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심지어는 영묘조(英廟朝)와 정묘조(正廟朝)에 시호를 청하지 않고 이내 당저조(當宁朝)가 되어서 시호를 청한 것으로 죄안(罪案)을 삼았습니다. 또 저들은 임금의 명을 준행할 수 없다고 말하고 서둘러 즉시 연시(延諡 시호를 맞이함)한 것은 대죄(大罪)라고 하면서 오늘의 변고에 이르렀으니 극에 달한 것입니다. 청컨대 본말(本末)을 아뢰고자 하오니, 삼가 합하께서 살펴주시기 원합니다.
노선생(老先生 이황(李滉))의 조부인 증(贈) 판서공(判書公 이계양(李繼陽))3)은 경태(景泰) 4)에 은둔하였으니 조어계(趙漁溪 조려(趙旅))의 절개가 있습니다.5) 저희들의 선조인 증 참판공(參判公 김효로(金孝盧)) 또한 이른 나이에 성균관에 올랐다가 이어서 곧 과거를 접고 스스로 대바구니나 삼태기를 멘 부류6)로 자처하였으니, 이 때문에 향현사(鄕賢祀)에서 이 두 분을 아울러 향사한 것이 지금 수백 년이 되었습니다.7) 중간에 사당 안에 변고로 인해 낙천사(洛川祠)에 선조를 옮겨 봉안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여 년 동안 동당(同堂)에서 합향하던 위패가 달라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 선생의 위패도 함께 옮겨 봉안한 것이 지금 또 38년이 되었습니다. 낙천사는 저희 집안과 도산(陶山) 문하 제현(諸賢)들의 타령지소(妥靈之所 신주(神主)를 섬겨 모시는 곳)이고, 후조(後彫) 선생은 또 세 번째 위차(位次)에 있습니다.
이씨(李氏)는 스승과 제자가 시호가 같다는 것에 분노하여 도내(道內)에 통문(通文)을 돌리고 시장(諡狀)을 쓴 사람8)에게 편지를 올리면서, 선배를 무함하고 무시했으며 본가(本家)를 능멸하고 짓밟았습니다. 기어코 관작과 시호를 부수려고 온갖 방법으로 일을 꾀하다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사문(斯文)의 죄인이라고 배척하고 같은 하늘 아래서 살 수 없는 원수[不共戴天]라고 절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내 계현사(啓賢祠) 옆에 새 사당을 만들어 장차 이 선생을 나누어 봉안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저희들이 여러 차례 단자(單子)를 올려 꾸짖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근래 수백 년 동안 동당(同堂)에서 합향(合享)한 위패가 자손들의 쟁단(爭端)으로 하루아침에 분리되는 것이니 일이 매우 놀랄만합니다. 또 서원의 전례에, 합향할 수 없는 경우 혹은 배향(配享)하기도 하고 혹은 종향(從享)하기도 하며, 여기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우에 방사(傍祠)합니다. 그렇다면 원묘(元廟)가 방사에 비하여 대소와 경중이 어떠합니까. 저희들이 단자를 올리고 지중(持重)9)한 것은 도리의 당연함일 뿐만 아니라 바로 이 선생을 위하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전후 상황을 돌아보지 않고 사리(事理)를 생각하지도 않고 다만 낙천을 영원히 끊을 계획인 것입니다.
그저께 밤에 이노순(李老淳), 이여적(李汝迪), 이사연(李師延), 이만수(李晩受), 이휘병(李彙炳) 등이 그들 무리 수백 명을 이끌고 횃불을 나란히 하고 한꺼번에 왔습니다. 저희들도 이미 들어가 있었는데 어제는 종일 서로 버티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저희들이 아침을 먹고 있는 중에 수백 명이 담을 넘어 어지러이 뛰어 들어와 사당 뜰로 돌입하였습니다. 저희들이 뒤쫓아 들어가 막았더니, 주먹질을 하고 칼을 빼어들며 옷을 찢는 것으로도 오히려 부족하여 등으로 문을 밀고 있던 소년은 발로 차서 넘어뜨려 다치게 하고, 수임(首任)은 관(冠)을 부수고 구타하며 질질 끌고 다녔습니다. 사당의 벽을 쳐부수고 결국에는 온갖 쇠붙이로 자물쇠를 뜯어내 이 선생의 위판(位版)을 받들고 나갔으니, 이것이 무슨 변괴이고 이것이 무슨 놀라운 짓입니까. 저들은 스스로 자기의 선조에게 이런 변괴를 저지른 것입니다. 저희들 역시 마땅히 저항했습니다만, 선배들이 사당 벽을 쳐부수고 자물쇠를 뜯어냈으니 이는 사림(士林) 사이의 극심한 변고입니다.
이에 부득이하여 감히 이렇게 엄정하고 분명하게 법에 따라 처리하시는 합하께 우러러 호소하옵니다. 삼가 원하건대 합하께서 굽어 헤아리시어 특별히 적간(摘奸)하고 보고하여 엄히 처리하시어, 대가(大家)의 후손들로 하여금 해괴하고 패악스런 습속을 길이 징계하여 주신다면 이보다 더 큰 다행이 없겠습니다.
병술년(1826, 순조26) 12월 일.

김시원(金是瑗) 김로익(金魯翼) 김시현(金是玹) 김흥유(金興儒) 김량유(金亮儒) 김로교(金魯敎) 김이교(金彝敎) 김병유(金秉儒) 김헌교(金憲敎) 김시완(金是琓) 김형교(金衡敎) 김만유(金晩儒) 김치교(金致敎) 김석유(金碩儒) 김시진(金是瑨) 김정교(金程敎) 김의교(金義敎) 김진유(金進儒) 김부유(金復儒) 김리유(金履儒) 김현유(金顯儒) 김조옥(金朝玉) 김여옥(金汝玉) 김위옥(金渭玉) 김광옥(金光玉) 김장(金璋) 김완(金垸) 김성(金垶) 김종구(金鍾久) 김제열(金濟說) 김제녕(金濟寧) 김제한(金濟漢) 김종만(金鍾萬) 김문유(金門儒) 김제진(金濟進) 김시필(金是珌) 등

〈제사(題辭)〉
이 사안은 한 때의 겸임(兼任)의 입장에서 처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4일.
【착압】

[주석]

1) 화민(化民)
화민은‘교화(敎化)를 받는 백성’이라는 뜻으로, 《古法典用語集》에서는‘조상의 산소가 있는 자기 고장의 원에게 일컫는 자칭(自稱)’이라고 하였고,《한국한자어사전》(단국대학교 부설 동양학연구소 간행)에서는‘자기 고장의 원에 대하여 자기를 가리켜 이르는 말’이라고 하였다.
2) 겸성주(兼城主)
성주(城主)는 고을의 원을 달리 이르는 말인데, 겸성주는 이웃 고을의 수령이 겸임하는 성주이다.《한국한자어사전》
3) 노선생(老先生)의……판서공(判書公)
노선생은 이황(李滉)이다. 이황의 할아버지인 이계양(李繼陽, 1424~1488)의 자는 달보(達父)이며, 호는 노송정(老松亭), 본관은 진성(眞城)이다. 단종(端宗)이 왕위를 선위한 뒤에 도산면(陶山面) 온계리(溫溪里)에 있는 국망봉(國望峯) 아래에 들어와 은거하였다.
4) 경태(景泰) 때
경태는 명(明)나라 경제(景帝)의 연호인데, 이 시기는 조선의 문종(文宗)과 단종(端宗) 그리고 세조(世祖) 2년까지의 시기에 해당한다. 여기에서는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던 시기를 가리킨다.
5) 조어계(趙漁溪)의……있습니다.
조려(趙旅, 1420~1489)의 자는 주옹(主翁), 호는 어계(漁溪),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1453년(단종 1)에 성균관 진사가 되어 당시의 사림 사이에 명망이 높았으나, 1455년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禪位)하자 함안으로 돌아와 벼슬하지 않고 시냇가에서 낚시질로 여생을 보냈기 때문에 스스로 호를 어계라고 하였다. 이계양도 조려처럼 단종에 대한 의리를 이유로 낙향하였다는 의미이다.
6) 대바구니나……부류
원문 소궤(篠簣)의‘소(篠)’자는‘조(蓧) 자와 통용하는 글자로,《논어》 〈미자(微子)〉에 “자로가 따라가다가 뒤에 처져있었는데 지팡이로 대바구니를 멘 장인을 만나…[子路從而後, 遇丈人以杖荷蓧…]”라는 대목에 대바구니[蓧]가 바로 은자가 메는 바구니이다. 그리고‘궤(簣)는《서경(書經)》〈여오(旅獒)〉에“산을 아홉 길을 만드는데, 성공이 흙 한 삼태기 때문에 무너진다.[爲山九仞, 功虧一簣].”라는 대목에 나오는 글자이다. 여기에서 소궤는 시골에 은둔해 살면서 학문에 정진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의미로 쓰인듯하다.
7) 향현사(鄕賢祀)……되었습니다
예안(禮安)에 있는 향현사는 만력(萬曆) 임자년(1612, 광해군4)에 세워졌는데, 이곳에서 이조 판서에 증직된 이계양과 이조 참판에 증직된 김효로(金孝盧)를 제사지냈다.《국역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서원》
8) 시장(諡狀)을 쓴 사람
김조순(金祖淳, 1765~1832)으로, 자는 사원(士源), 호는 풍고(楓皐), 본관은 안동,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시장은 《후조당선생문집(後彫堂先生文集)》 부록 제1권에 실려 있다.
9) 지중(持重)
상제(喪祭)나 종묘사직 및 사당의 제사지내는 일을 주관하는 것을 말한다. 《의례(儀禮)》 〈상복(喪服)〉에 “인후가 된 사람은 그 부모를 위해서 기년복(期年服)으로 보답한다.[爲人後者, 爲其父母報.]”라는 경문(經文)이 나오는데, 이를 해설한 전문(傳文)에 “대종(大宗)의 후계자가 된 사람은 어째서 자기 부친에 대하여 기년복을 입어야 하는가. 부친에 대한 참최복(斬衰服)을 두 번 입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두 번 입을 수 없는 것인가. 대종의 중한 자리를 잇는 책임을 맡은 경우, 소종에 대해서는 상복의 등급을 낮춰야 하기 때문이다.[何以期也, 不貳斬也. 何以不貳斬也, 持重於大宗者, 降其小宗也.]”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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