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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6년 김양수(金良鐩) 등 상서(上書)    
G002+AKS+KSM-XB.1826.4717-20101008.B001a_001_00173_XXX
 
분류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작성주체 발급: 김양수(金良鐩) /수취: 예조(禮曹)
작성지역 예안    /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작성시기 1826년 / 병술12월   
형태사항 크기: 101.5×127.2 / 낱장, 1장 / 종이 /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 안동 오천 광산김씨 후조당  / 현소장처 : 안동 오천 광산김씨 후조당  
비고 출판정보: 『고전자료총서 82-2 광산김씨 오천고문서』(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2) 본 번역문은 2014년 한국고문서 정서·역주 및 스토리텔링 연구사업 연구결과물임.
고문서집성 수록정보 『고문서집성』01 / 7. 소지류 / 상서8 / 86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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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尙道禮安幼學金良鐩等謹齋沐再拜上書
大宗伯閤下伏以生等以先祖節惠事橫被李龜星輩所誣辱悲念不欲生星已再周而又此罔測之誣至及先系{骨+亶}膽掉尤不容一刻按住玆不得不抆血號籲惟
閤下細察焉生等八世祖父文純公富弼謚命旣下涓日祗受之際龜星輩逞不干之宿憾包至憯之詭計造倡邪說力詆成命曰師弟之不可同謚也曰太常之狀未克稱停也盖寓諷三字顯有誣逼之意也曰朋友
之少長之說隱然計校也曰講論時侃侃守己見爲不有師訓也曰爲勢所狀至以三文字擬入也曰退溪詩之非爲先生節也曰栗谷書之壯撰也曰山雲詩也戴於拾溪集也種種悖說非書出於一時先倡一說卽被辨折則又倡一說愈
出愈悖期於誣衊乃已及夫正論大發太學之荅安東通文條分縷析責其回遹肆恣之狀則彼乃膽落氣沮無所洩忿忽復拈出謚狀中爲嗣二字以生等老系顚倒變幻搆出一書潛誘生之族人庭敎輩若而人借名投示
又使之爲文告墓改易先系是豈頂天履地圓顱橫目者所可忍爲之事乎所謂庭敎生而痴蠢旣不識禮刀錐之利昌趍如鶩彼豈知此書之爲何事此文之爲何術乎唆赤子以詈其祖先是豈人理之所可忍爲乎悖書中許
多句語誠不忍泚筆論辨而事屬先系必辨其誣卽又天理人情之所不能已也故此詳陳生等九世祖觀察使有二子長卽文純公生員富儀文純公無子生員公翰林公翰林公未浹旬而失所恃觀察
使
夫人曺氏卽命文純公取而子之以鞠養之恩兼傳系之重故生員公別給文書書以生父生員文純之傳系書曰汝爲承宗重明白一心敬承宗祀兩父手蹟俱在宗家班班可考可按退溪先生有與孫純道書曰後凋翁使其子
以試遠停擧汝亦停擧又有荅後凋堂書曰賢胤朴秀才同來講學李良齋德弘詩註曰 金垓後凋之子師友間文字皆以親父子稱之又何疑乎至於喪服輕重則盖有厥由生員公則以宗事之重斷以大義自稱以生父
文純公則不忍弟後之無託也使翰林公承以宗重而自處以養父遂乃傳系故翰林公之所以承服文純公以心喪三年仍以兩考同奉一廟偕祭四代其不敢以從父服之而又不敢以班祔祭止兄弟孫之禮行之者亦由於鞠育之
恩兼傳系之重故也斯禮也出於義起而亦有寒岡旅軒兩先生講定之論及退溪先生質正之敎斯可以別二本之嫌而不失天倫之重矣渠何敢以謚狀中爲嗣二字作爲話{木+覇}乎翰林公則以文純公之遺意雖服文純
之心喪然文純公旣是宗子而又以母夫人之命取而子之仍爲傳系則嗣文純公者非翰林而誰也尤非後孫之曰是曰非則庭敎輩此言自陷於誣先亂倫之科翰林公旣不以從父視文純公則爲翰林公之孫者焉敢以傍祖視文純乎庭敎父祖俱不
文純爲傍祖而至於庭敎之身絶之是則天地之所不容王法之所必誅也所可哀者特受嗾於諸李耳李之攘臂怒目必欲亂人先系者其所設心不仁之甚矣先正李文純公旣稱以後凋父子而先正後孫之必欲變亂者是
誣先正也其唆庭敎以誣先亂倫又何足怪乎此非但生等一門罔極之變卽
聖世化理之所不容者窃惟閤下旣掌邦禮明倫裨化必將深惡而痛斥之玆將前後文蹟及寒岡旅軒相質相講之書聯錄呈覽伏願俯賜詳悉仰達
天聽亟下該道先覈庭敎査出指嗾諸人並施當律俾 王章立而私痛伸焉千萬祈懇之至
丙戌十二月 日 金良鐩金是珍金是瑗金良鑌金良鋧金良鍰金良臣金進儒金顯儒金頣儒金堂儒金趾儒金鼎儒金良玉金良銑金良鎬金良鐥金良錡金良鏶金濟龍金濟獜金毅敎金時敎金中敎金彦敎金碩敎金象敎金宇敎金受敎金洛敎金安敎金觀敎金斗敎金五敎金致敎金伯敎金彛敎金憲敎金魯敎金濟龜金濟駉金濟駿金濟鵬金濟萬金濟說金濟寧金濟亨


後凋堂宗系事實
金監司雲巖公有二子長後凋挹淸亭
後凋公無子挹淸公有一子卽近始齋翰林公翰林公生未七日母氏下世監司公夫人曺氏翰林公後凋公收養之嘉靖己未挹淸公別給翰林公奴婢有文書 詳見挹淸公水墨
別給文書書以生父着署證某某謹按挹淸公旣自處以生父則使之入承宗統可知也隆慶丁卯後凋傳系于翰林公有傳系書詳見後凋公水墨傳系書畧曰汝將承宗
重云云權氏{翰林公生母}以産疾捐世云云母貞夫人曺氏以襁褓裏汝親自抱來泣謂予曰汝等無子而有子此兒無母而得母云云又曰予聞國法三歲前收養雖路人卽同己子則雖無
文券必無後患第以世末俗薄人心不淑訟起錙銖爭出毫末防微杜漸不可不慮玆以吾夫婦兩邊衿得家舍田民無遺傳系汝明白一心敬奉宗祀云云其下書以養父養母證人立旨印帖
先賢問荅
張旅軒問曰娣夫有一弟而亦有獨子族中又無可後者所謂一弟之獨子自其未離乳時就養於姊其將爲奉祀欲不以班附例之他日入廟與生父母作一行連安正位使其子孫世守之至於代盡
而同之此事於義何如鄭寒岡荅曰先伯氏未立後時與仲氏相議若未立後則必欲如是處之矣因幸立後而不果於禮可否則不敢知而私情之切則有不得不已也盛問亦符鄙見不敢止也
謹按寒岡嘗以此事上書退溪先生則答以甚合禮意謹按當時諸賢多有此禮兄弟一子傳之後嗣則所生之祖不可曰非祖也奉祀之祖不可曰無後也退溪先生之意誠亦如是故書
牘中多有信蹟先生書見原狀謹按後凋挹淸之傳系實出於情誼篤好兄弟無間之意而近始之處義固已難矣挹淸則所生考矣後凋則承祀親矣盖家無二親人無二斬故於居喪之際不
得歸重於後凋而用爲人後者服本生父母之制以終三年於挹淸則服斬衰而後凋公主面書以養考傍題書以奉祀子某乃以二公神位共安一廟待代盡而祧再去丙子同日埋于墓所而墓
所時祀則至今以宗子行之祝式某代孫某云云

題辭
觀此傳家文蹟則旣
曺夫人定倫之擧所
後之地則稱養父所生
之地則稱生父世焉有
不系後而稱養父向己
子而稱生父者乎況退陶
先生
之書稱其父子者非
止一再則今人雖自謂
盡人之倫孰有加於先生
者乎然則翰林公之爲
文純嗣聖人復起不能

〈背面〉
易今此嘵嘵之說 皆不合理之說 自當寢息 何至於上煩 天聽乎向事 十三日

禮曺[押]
예조에 김부필의 종계(宗系)와 관련하여 올린 청원서

경상도 예안의 유학 김양수(金良鐩) 등이 삼가 목욕재계하고 두 번 절하며 대종백(大宗伯 예조 판서) 합하께 상서를 올립니다.
삼가 저희들은 선조의 절혜(節惠 시호(諡號))의 일로 이구성(李龜星)1) 무리에게 무함과 모욕을 마구 당하여 슬픈 생각에 그만 살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시일이 벌써 2년이 지났는데 또 이번에 망측한 무함이 선계(先系)에 미쳤으니 뼈에 사무치고 간담이 떨려 더욱 한시도 편히 지낼 수가 없습니다. 이에 부득불 피눈물을 닦으며 호소하오니 합하께서 세세히 살펴주소서.
저희들의 8대조 문순공(文純公) 휘(諱) 부필(富弼)의 시명(諡命)이 이미 내려와 택일하여 공경히 받들 때,2) 이구성 무리가 막아내지 못한 묵은 유감을 드러내고 지극히 참람하고 간사한 계략을 품고서 간사한 말들을 만들어 퍼뜨리면서 성명(成命)을 힘껏 비방하였습니다. 그 내용에 ‘스승과 제자가 같은 시호를 쓰는 것은 불가하다’라고 하였고,‘태상시(太常寺 봉상시(奉常寺))의 시장(諡狀)은 걸맞지 못하다’라고 하였으니, ‘개우풍(盖寓諷)’ 세 글자는 무함하여 핍박하는 뜻을 현저히 담고 있는 것입니다. 또‘벗 가운데 젊은이와 어른’이라는 이야기는 은연중에 견주어 따진 것입니다. ‘강론할 때 굳세게 자기 의견을 고수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무시하였다’라고 하였고, ‘사세가 두려워 세 글자를 집어넣었다’고 하였습니다. 또 ‘퇴계(退溪) 시는 선생의 절의(節義)를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고,‘율곡(栗谷)의 글은 엉터리다’라고 하였으며, ‘산운(山雲)의 시가 송계집(松溪集)에 실려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온갖 패악스런 말은 한꺼번에 다 나온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이야기를 먼저 말하면 곧바로 이러쿵저러쿵 따지고 또 한 가지 말을 하면 할수록 더욱 패악스러워져 기어이 무함하고 멸시한 다음에야 그칩니다.
올바른 논의가 크게 발하여 태학(太學 성균관)에서 안동 통문에 대한 답장을 보냈는데 거기에 조목별로 세밀하게 분석하여 간사하고 방자한 그들의 글을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저들은 이내 낙담하고 기가 꺾여 분을 쏟아내지 못하다가 홀연 시장 가운데 ‘후사로 삼다’라는 ‘위사(爲嗣)’ 두 글자를 끄집어내어 저희들의 선계(先系)가 뒤집어지고 변환을 부렸다고 하여 한 편의 글을 엮어냈습니다. 그리하여 몰래 저희 족인(族人)인 정교(庭敎)와 같은 사람들을 꾀어 이름을 빌려서 보냈습니다. 또 그들을 시켜서 글을 지어 고묘(告墓)하고 선계를 바꿨으니, 이 어찌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사는 사람[圓顱橫目]3)이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이른바 정교(庭敎)는 나면서부터 어리석고 멍청해서 이미 예(禮)를 알지 못하고 털끝만한 이익을 좇아 집오리마냥 달리는 사람이니, 그가 이 글이 무슨 일을 하는 것이며, 이 글이 무슨 술책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갓난아이를 부추겨서 조상을 욕하는 격이니, 이 어찌 사람의 도리로 차마 할 수 있는 짓입니까.
패악스런 그 글 가운데 허다한 구절은 참으로 붓을 적셔 논변하는 것을 차마 할 수 없습니다만, 일이 선계에 관한 일이니 반드시 그 거짓을 분변해야 하고, 또한 천리(天理)와 인정(人情) 상 그만 둘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상세히 아뢰고자 합니다.
저희들의 9대조로 관찰사를 지내신 휘(諱) 연(緣)은 두 아들을 두셨는데, 장자는 바로 문순공(文純公)이고, 차자는 생원(生員) 휘 부의(富儀)입니다. 문순공은 아들이 없고, 생원공은 한림공(翰林公) 휘 해(垓)를 낳으셨는데, 한림공은 태어난 지 열흘도 되지 않아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관찰사의 부인 조씨(曺氏)께서 곧바로 문순공에게 거두어 양자로 들이도록 명하였으니 기른 은혜와 전계(傳系)의 막중한 책임을 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원공의 별급(別給) 문서에는 ‘생부(生父) 생원 모(某)’라고 쓰여 있고, 문순공의 전계문서에서는 “너는 종가의 막중한 책임을 계승하여 한 마음을 밝고 깨끗하게 하여 종가의 제사를 공경히 받들도록 하여라.”라고 하였으니, 두 아버지의 수적(手蹟)이 모두 종가(宗家)에 있어서 명백하게 상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퇴계(退溪) 선생께서 손자인 이순도(李純道)에게 준 편지에 “후조옹(後凋翁)이 아들 해(垓)에게 오래 정거(停擧)4)하도록 했다는데 너도 해를 본받아서 정거하도록 하여라.”라고 하였고, 또한 후조당에게 답장한 편지에 “현윤(賢胤 상대방 아들에 대한 존칭)이 박수재(朴秀才)와 함께 와서 강학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으며, 양재(良齋) 이덕홍(李德弘)이 쓴 시의 주석에 “김해는 후조의 아들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우(師友) 사이에 주고받은 문자에 모두 친부자(親父子)로 일컫고 있으니 또 무엇을 의심하겠습니까.
상복(喪服)의 경중에 있어서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생원공께서는 종사(宗事)의 중함으로 대의(大義)로써 결단하여 스스로 생부(生父)라고 칭하였고, 문순공께서는 차마 동생의 뒤를 의탁할 곳이 없게 할 수 없었으므로 한림공에게 종중(宗重)을 잇게 했지만 스스로 양부(養父)로 자처하여 마침내 전계(傳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림공이 문순공에게 심상(心喪) 3년의 복을 입었던 까닭입니다. 이어서 두 아버지[兩考]를 함께 한 사당에 봉안하고 같이 4대(代)를 제사하여 감히 종부(從父)의 복을 입지 않았고 또한 감히 반부(班祔)5)의 제사도 그만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형과 아우와 손자의 예를 행한 것은 또 길러준 은혜와 전계의 중함에 연유한 때문이니, 이 예는 의(義)가 일으키는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또 한강(寒岡)과 여헌(旅軒) 두 선생이 강구하여 정한 논의 및 퇴계(退溪) 선생께서 질정(質正)한 가르침이 있으니6) 이것으로 두 근본[二本]의 혐의를 구별할 수 있고 천륜의 중함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가 어찌 감히 시장 가운데 ‘위사(爲嗣)’ 두 글자를 가지고 얘기꺼리를 만든단 말입니까.
한림공은 문순공의 남긴 뜻을 따라 문순공에게 심상을 입었습니다만, 문순공은 이미 종자(宗子)이고 또 모부인(母夫人)의 명으로써 거두어 자식으로 삼아 이어서 전계하였으니, 문순공의 후사가 한림공이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후손이 옳네 그르네 할 일이 더더욱 아니니 정교 무리의 이 말은 선조를 무함하고 인륜을 어지럽힌 죄과에 스스로 빠진 것입니다. 한림공은 문순공을 종부(從父)로 견주지 않았으니 한림공의 손자뻘 되는 자가 어찌 감히 문순공을 방조(傍祖)로써 견준단 말입니까. 정교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모두 문순공을 방조로 여기지 않았는데 정교의 몸에 이르러 끊었으니, 이는 천지간에 용납하지 못할 바이고 왕법(王法)이 반드시 주벌해야 할 바입니다.
슬퍼할만한 점은 다만 이씨(李氏)들에게 사주를 받았다는 것뿐입니다. 이씨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눈을 부라리면서 반드시 남의 선계를 어지럽히고자 한 것은 그 심보가 매우 불인(不仁)합니다. 선정(先正) 이 문순공(李文純公 이황(李滉))께서도 이미 ‘후조 부자(父子)’라고 일컬었는데 선정의 후손이 반드시 바꿔서 어지럽히려고 하는 것은 바로 선정을 무함하는 것입니다. 정교를 부추겨서 선조를 무함하고 인륜을 어지럽히려는 것이 또 무슨 이상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는 저희들 한 가문의 망극한 변고일 뿐 만 아니라, 이치로 교화하는 성세(聖世)에 용납하지 못할 바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합하께서는 나라의 예법을 관장하여 인륜을 밝히고 교화를 도우시니 반드시 깊이 미워하여 통렬히 배척하실 것입니다. 이에 전후의 문적(文蹟) 및 한강(寒岡)과 여헌(旅軒)께서 서로 질문하고 강론한 편지를 나란히 기록하여 보시도록 올립니다. 삼가 원하건대 상세히 다 굽어 살피시고 성상[天聽]께 우러러 진달하여 빨리 해당 도(道)로 하여금 먼저 정교(庭敎)를 추핵(推覈)하고 손가락질하며 사주한 사람들을 조사해내서 합당한 율을 시행하시어 왕법을 세우시고 사적인 통분을 펼 수 있게 해주시기를 천만번 간절히 기원합니다.
병술년(1826, 순조26) 12월 일.

김양수(金良鐩) 김시진(金是珍) 김시원(金是瑗) 김양빈(金良鑌) 김양현(金良鋧) 김양환(金良鍰) 김양신(金良臣) 김진유(金進儒) 김현유(金顯儒) 김신유(金頣儒) 김당유(金堂儒) 김지유(金趾儒) 김정유(金鼎儒) 김양옥(金良玉) 김양선(金良銑) 김양호(金良鎬) 김양선(金良鐥) 김양기(金良錡) 김양집(金良鏶) 김노교(金魯敎) 김헌교(金憲敎) 김이교(金彛敎) 김백교(金伯敎) 김치교(金致敎) 김오교(金五敎) 김두교(金斗敎) 김관교(金觀敎) 김안교(金安敎) 김락교(金洛敎) 김수교(金受敎) 김우교(金宇敎) 김상교(金象敎) 김석교(金碩敎) 김언교(金彦敎) 김중교(金中敎) 김시교(金時敎) 김의교(金毅敎) 김제린(金濟獜) 김제룡(金濟龍) 김제구(金濟龜) 김제경(金濟駉) 김제준(金濟駿) 김제붕(金濟鵬) 김제만(金濟萬) 김제열(金濟說) 김제녕(金濟寧) 김제형(金濟亨) 등

후조당 종계 사실(後凋堂宗系事實)

김감사(金監司) 운암공(雲巖公 김연(金緣))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후조(後凋)이고, 차자는 읍청정(挹淸亭)입니다. 후조공은 자식이 없고, 읍청공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바로 근시재(近始齋) 한림공(翰林公)입니다. 한림공이 태어난 지 7일도 안 되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감사공의 부인인 조씨(曺氏)7)가 한림공을 후조공의 후사로 거두어 길렀습니다[收養].
가정(嘉靖) 기미년(1559, 명종14)에 읍청공께서 한림공에게 노비를 별급(別給)한 문서가 있는데, 거기에 읍청공의 필적이 상세히 보입니다. 별급문서에는 ‘생부(生父)’라고 쓰고 착명(着名) 착압(着押)을 했으며, 증인 아무개 아무개가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읍청공께서 이미 생부로 자처하였으니 들어가 종통을 잇게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융경(隆慶) 정묘년(1567, 명종22)에 후조공께서 한림공에게 전계(傳系)하는 전계문서가 있으니8) 후조공의 필적을 상세히 볼 수 있습니다. 전계문서의 대략은 “너는 장차 종가의 중한 책임을 계승하니”라고 운운하였고, “권씨(權氏)-한림공의 생모-가 출산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라고 운운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조씨가 강보에 쌓인 너를 몸소 안고 오셔서 내게 울며 말씀하기를 ‘너희는 아들이 없다가 아들이 생겼고, 이 아이는 어미가 없다가 어미를 얻었다’”라고 운운하였습니다. 또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국법(國法)에 ‘세 살 이전에 거두어 기르면 비록 길가는 사람의 자식일지라도 곧 자기 아들과 같다’고 하였으니, 비록 문권(文券)이 없어도 뒷날의 근심이 없을 것이다. 다만 말세의 풍속이 경박하고 인심이 좋지 않은 까닭에 소송이 아주 작은 데서 일어나고 다툼은 터럭 끝만한 것에서 생겨나니 조짐을 미연에 방지하려니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우리 부부가 양쪽 집에서 상속 받은[兩邊衿得] 집과 전답 및 노비를 빠짐없이 너에게 전계한다. 너는 한 마음을 밝고 깨끗하게 하여 종가의 제사를 공경히 받들도록 하여라.”라고 운운하였습니다. 그 아래에 양부(養父)와 양모(養母), 증인(證人)을 써서 입지(立旨)에 관인을 받아 첩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선현문답(先賢問答)9)
장여현(張旅軒)10)이 묻기를 “자부(姊夫)에게 아우가 하나 있는데 그도 역시 독자(獨子)를 두었습니다. 친족 중에도 후사로 삼을만한 자가 없습니다. 한 아우의 독자라고 말씀드린 사람은 젖을 떼기 전부터 누나의 품에서 자랐습니다. 그가 장차 제사를 받들기 위해 반부(班附)11)의 관례를 따르지 않고 훗날 신주가 사당에 들어갈 때 생부모와 한 줄로 만들어 정위(正位)에 나란히 봉안하고서 그 자손들로 하여금 대대로 지켜 대수(代數)가 끝날 때까지 똑같이 하고자 합니다. 이 일이 의리에 어떠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정한강(鄭寒岡)이 답하기를 “나의 선백씨(先伯氏 정괄(鄭适))께서 후사를 세우기 전에 중씨(仲氏 정곤수(鄭崑壽))와 상의하여 만일 끝내 후사를 세우지 못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조처하려고 하였는데 다행히 후사를 세웠기 때문에 그대로 하지 않았었네. 이것이 예법에 옳은 것인지는 감히 모르겠지만 간절한 사정(私情)으로 보면 어쩔 수 없는 점이 있네. 그대의 질문도 내 의견과 서로 부합되니 감히 제지하지 못하겠네.”라고 하였습니다.
삼가 상고하건대, 한강(寒岡)은 일찍이 이 일을 가지고 퇴계(退溪) 선생에게 글을 올렸는데 예법에 매우 합당하다는 뜻으로 답장을 받았습니다. 삼가 상고하건대, 당시의 여러 유현들은 이런 예(禮)가 많이 있어서, 형제가 한 아들로 후사를 전하게 되면 낳아준 할아버지를 할아버지가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되고, 제사를 받드는 할아버지를 후사가 없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퇴계 선생의 뜻이 진실로 이와 같기 때문에 편지 가운데 신적(信蹟)이 많고, 선생의 편지가 원장(原狀)에 보입니다.
삼가 상고하건대, 후조공과 읍청공의 전계(傳系)는 실로 정의(情誼)가 독실히 좋고 형제가 우애가 좋은 뜻에서 나왔으니, 근시재의 처신이 의리상 진실로 어렵습니다. 읍청공은 낳아준 아버지이고, 후조공은 제사를 받드는 아버지입니다. 대개 한 집에 두 어버이가 없고 사람은 두 번 참최복(斬衰服)을 입지 않기 때문에, 거상(居喪)할 때에 후조공에게 귀중(歸重)할 수 없어서 양자[人後]가 된 자의 복제를 썼습니다. 그리고 본생부모(本生父母)의 복제로써 읍청공에게 3년을 마쳤으니 참최복을 입은 것입니다. 후조공 신주의 면(面)에 ‘양고(養考)’라고 쓰고 방제(傍題)12)에 ‘봉사자모(奉祀子某)’라고 써서 두 공(公)의 신위를 한 사당에 함께 봉안하고 대수가 다하기를 기다려서 조천(祧遷)13)하였습니다. 두 번 지나간 병자년 같은 날에 묘소에 묻었고, 묘소에서 지내는 시사(時祀)는 지금까지 종자(宗子)가 거행하며, 축식(祝式)은 ‘모대손 모운운(某代孫某云云)’이라고 씁니다.

〈제사(題辭)〉
이 전계문적을 보니 이미 조씨 부인이 윤기(倫紀)를 정한 일이 있어서 양자로 들인 쪽에서는 양부라고 칭하고, 낳아준 쪽에서는 생부라고 칭하였다. 세상에 어찌 양자[系後]가 아닌데 (자기를) 양부라고 칭하고, 자기 자식을 향해서 (자신을) 생부라고 칭하는 자가 있단 말인가. 더구나 퇴도(退陶) 선생의 편지에서 ‘부자(父子)’라고 칭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니, 지금 어떤 사람이 자기는 인륜을 다한다[盡人倫]고 스스로 말하더라도, 누가 선생보다 훌륭하단 말인가. 그렇다면 한림공이 문순공의 후사인 것은 성인이 다시 나온다고 해도 바꿀 수 없다. 지금 이 시끄러운 말들은 모두 이치에 맞지 않는 말들이니 저절로 잦아들어 조용해질 것이다. 어찌하여 위로 천청(天聽)을 번거롭게 하겠는가. 13일.
예조(禮曺)【착압】

[주석]

1) 이구성(李龜星)
이구성(1756~1835)은 자(字)는 은서(恩瑞), 호는 속은재(俗隱齋)이며, 본관은 진성(眞城)이다. 1790년(정조14)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고, 응교(應敎)에 뽑히기도 했으며 1800년에 원릉 참봉(原陵參奉)이 되었고, 이후 지례현감 등을 역임하다가 1819년에 풍기군수로 사직하였다. 《속은재문집(俗隱齋文集)》이 전한다. 이 문집에 이황과 김부필의 시호가 같은 문제에 대해 오천 김씨(烏川金氏) 문중과 주고받은 편지 2편이 전한다.《俗隱齋文集 卷3 與烏川金氏, 答烏川金氏》
2) 8대조……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살펴보면, 1816년(순조16), 1817년, 1822년에 걸쳐 여러 차례 경상도 유생들이 김부필의 시호 요청 상소를 올렸다. 그리하여 1822년(순조22)에 홍문관 부응교 이언순(李彦淳)이 김부필에게 시호를 내려줄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고, 윤3월 25일에 증시(贈諡) 허락을 받았다. 이후 1824년 10월 19일에 문순(文純)으로 시호를 결정하고, 다음 해 1825년 4월 22일에 김부필의 연시(延諡)가 5월 4일에 경상도 예안에서 치러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3) 사람
원문의 ‘원로(圓顱)’와 ‘횡목(橫目)’은 모두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원로’는 ‘원로방지(圓顱方趾)’에서 온 말로 《회남자(淮南子)》에, 둥근 머리는 하늘을 형상한 것이고 네모난 발은 땅을 형상한 것으로 사람을 가리킨다고 풀이되어 있다. ‘횡목’은 사람의 눈이 가로로 찢어졌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는 것으로, 《장자》 〈천지(天地)〉에 “선생님은 횡목의 백성에게 뜻이 없습니까? 성인의 정치를 듣고자 합니다.[夫子無意於橫目之民乎? 願聞聖治.]”라고 하였다.
4) 정거(停擧)
유생에게 가하는 형벌의 한 가지로, 얼마의 연한(年限) 동안 과거(科擧)에 응시할 자격을 정지시키는 벌이다.
5) 반부(班祔)
제사를 받들 자식이 없는 사람의 신주를 할아버지 항렬의 다른 신주에 붙여서 종위(從位)로서 합사(合祀)하는 제례이다.
6) 한강(寒岡)과……있으니
이 상서에 후록(後錄)된 ‘선현문답(先賢問答)’에 있는 내용을 가리킨다.
7) 조씨(曺氏)
김부필의 어머니인 창녕 조씨(昌寧曺氏)로, 진사 조치당(曺致唐)의 딸이며, 1556년에 사망하였다.
8) 융경(隆慶)……있으니
《후조당선생문집(後彫堂先生文集)》 권3 〈傳系子老眉垓文〉에 보인다.
9) 선현문답(先賢問答)
이 문답은 《한강집(寒岡集)》 권6 〈답장덕회(答張德晦)〉에 실려 있다.
10) 장여현(張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으로, 호가 여헌(旅軒)이며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정구(鄭逑)에 비해 11년 연하인데, 정구의 큰형 정괄(鄭适)의 사위이며 정구에게는 질녀사위 관계이다.
11) 반부(班附)
대를 이을 아들이 없는 사람의 신주를 조상의 사당에 함께 모시는 일을 말한다.
12) 방제(傍題)
신주의 아래 왼쪽에 쓰는 봉사자(奉祀者)의 이름이다.
13) 조천(祧遷)
친진(親盡)한 조상의 신주를 원조(遠祖)의 사당으로 옮기는 것이다. 왕가(王家)에서는 친진한 신주를 원조의 사당으로 옮기지만 사가(私家)에서는 일반적으로 묘소(墓所) 옆에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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