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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7년 김헌교(金憲敎) 등 상서(上書)    
G002+AKS+KSM-XB.1827.4717-20101008.B001a_001_00172_XXX
 
분류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작성주체 발급: 김우교(金雨敎) , 김헌교(金憲敎) /수취: 예안현(禮安縣)
작성지역 예안    /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작성시기 1827년 / 정해2월   
형태사항 크기: 113×79.2 / 낱장, 1장 / 종이 /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 안동 오천 광산김씨 후조당  / 현소장처 : 안동 오천 광산김씨 후조당  
비고 출판정보: 『고전자료총서 82-2 광산김씨 오천고문서』(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2) 본 번역문은 2014년 한국고문서 정서·역주 및 스토리텔링 연구사업 연구결과물임.
고문서집성 수록정보 『고문서집성』01 / 7. 소지류 / 상서7 / 85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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化民 金憲敎金雨敎等齋沐再拜上書
城主閤下伏以世降俗渝吾林之變怪雖無窮而豈有如近日洛川事乎洛川陶山門下諸賢妥靈之所而老先生祖父贈判書公民等先祖贈參判公俱以鄕賢幷祀
于鄕射堂之傍者將數百年矣中間因廟內有變移奉先祖于洛川社而百餘年合享之傳不可異同故李先生幷爲移奉此則一鄕前輩之所講定兩家子孫之所遵奉
者于今三十有八年李氏以 金後彫先生謚號之同於退陶先生發怒作氣飛通道內而詭破老先生文集誣衊後彫先生又一邊呈書于謚狀作家一邊投通于太學
以爲破削爵謚之計百般經營事不諧意則以斯文罪人斥之以不共戴天絶之而乃作新祠於啓賢祠傍將爲分奉李先生民等數次呈單於鄕中明言其不然盖以數百年合享
之位不可以子孫之爭端而一朝分張也且啓賢祠乃是依倣太學啓聖祠而設焉則乃陶山之別祠也別祠之傍又作別祠而以安啓賢位所出之位者甚無義也非禮也民等之呈單
持重不但道理當然乃爲李先生地也彼輩以同謚之故而憎疾子孫以子孫之故而誣辱祖先此而不足必欲分離其以上先位號令鄕中他姓以爲羽翼而使不得接迹於洛川
一年矣忽於昨年十一月三十日夜半李老淳李汝迪李師延李晩受李彙炳等率其徒黨數百人列炬齊進民等亦會于廟門外爲控護之計彼輩乃於初二日乘民等
之朝飯踰墻亂跳突入廟廷以鐵棒等諸般器械壤壁拔鎖民等欲爲禁止則其拳法也拔釰也敺曳也毁裂衣冠蹴傷支體無所不至畢竟奉出李先生位版顚之倒之
由東夾門而出盛輿飄然而去此固士林間所無之變也況廟壁之撞破門鎖之打拔民等不勝駭惋赴訴于兼官城主則以謂此便亂離題音則以爲此乃變怪待本官呈
狀云云玆敢迎籲於路次伏願閤下俯賜覽察特爲摘奸捉治作變諸人報使嚴懲以爲正士風衛賢祠之地千萬血祝祈懇之至
丁亥二月 日 金是瑗金魯翼金是珍金興儒金亮儒金朝玉金汝玉金渭玉金履儒金道儒金進儒金是玹金復儒金覲玉金元玉金是瑨金致敎金碩儒金晩儒金衡敎金是琓金秉儒金彛敎金魯敎金墇金埦金垶金顯儒金程敎金義敎金永敎金是珌金是琰金是珹金鍾久金鍾萬金思敎金五敎金斗敎金中敎金鄰敎金方敎金莊敎金周敎金殷敎金正敎金文敎金安儒金端儒金羲儒金門儒金鍾遠金濟亨金濟漢金濟說金孟儒金上儒金章儒金鍍金鈿金海儒金楨儒金海敎金箕敎金濟鼎金濟東金濟臣金濟宅金濟進金濟殷金濟謙金濟讓金舜敎金重敎金震敎金甲儒金雅儒金一儒金質儒

題辭
兩家擧措可
謂無前之變
怪事當論
報準繩而
已屬過境更
勿煩聒宜當向事
初一日

官[押]
성주에게 진성이씨 문중과 김부필 시호 청원문제에 대한 분쟁에 대한 청원서

화민 김헌교(金憲敎), 김우교(金雨敎) 등이 목욕재계하고 두 번 절하며 성주 합하께 상서를 올립니다.
삼가 세도(世道)가 낮아지고 풍속이 변하여 우리 유림의 변괴가 끝이 없습니다만 어찌 근래 낙천(洛川)의 일만 하겠습니까. 낙천은 바로 도산(陶山) 문하 제현(諸賢)들의 영령을 모신 사당입니다. 노선생(老先生 이황(李滉))의 조부인 증(贈) 판서공(判書公 이계양(李繼陽))과 저희들의 선조인 증 참판공(參判公 김효로(金孝盧))이 함께 향현(鄕賢)으로서 향사당(鄕射堂) 곁에서 아울러 제사 드린 지 수백 년이 되었습니다.1) 그런데 중간에 사당 내에 변고가 있어서 낙천사로 선조를 옮겨 봉안하였고, 백여 년 동안 합향(合享)한 위패가 달라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 선생(李先生)도 함께 옮겨 봉안하였습니다. 이는 한 고을 선배들이 강구하여 정하고 두 집안 자손들이 받들어 지킨 것으로 지금 38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씨(李氏)들이 후조(後彫) 김 선생의 시호가 퇴도(退陶) 선생과 같다는 이유로 화를 내고 기세를 부리며 도내(道內)에 통문(通文)을 돌려 노선생의 문집을 헐뜯고 부쉈으며 후조 선생을 무함하고 멸시하였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시장(諡狀)을 쓴 사람2)에게 편지를 올리고, 한편으로는 태학(太學 성균관)에 통문을 보내 관작과 시호를 부수어 없앨 계책으로 삼았습니다. 온갖 방법으로 일을 꾀하다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사문(斯文)의 죄인’이라고 배척하고 ‘같은 하늘 아래서 살 수 없는 원수[不共戴天]’라고 절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내 계현사(啓賢祠) 옆에 새 사당을 짓고 이 선생을 나누어 봉안하려고 하였습니다.
저희들이 여러 차례 향중(鄕中)에 단자(單子)를 올려 그렇지 않음을 분명하게 말했던 것은 대개 수백 년 동안 합향한 위패가 자손들의 쟁단(爭端)으로 하루아침에 분리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또 계현사는 성균관의 계성사(啓聖祠)를 그대로 본떠서 세운 것이니 바로 도산(陶山)의 별사(別祠)입니다. 별사의 곁에 또 별사를 만들고, 계현(啓賢)의 위패가 나온 바의 위치에 봉안하는 것은 매우 의리에 어긋나고 예법에도 어긋나는 일입니다. 저희들이 단자를 올리고 지중(持重)3)한 것은 도리의 당연함일 뿐만 아니라 바로 이 선생을 위하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시호가 같다는 이유로 자손들을 미워하고, 자손이라는 이유로 조상을 무함하고 욕보였습니다. 이것으로도 부족하여 반드시 위 선조의 위패를 분리하려고 합니다.
향중(鄕中)을 호령하고 타성(他姓)을 우익으로 삼아 낙천에 접근조차 못하게 한 것이 1년입니다. 그런데 홀연 작년 11월 30일 밤중에 이노순(李老淳), 이여적(李汝迪), 이사연(李師延), 이만수(李晩受), 이휘병(李彙炳) 등이 그들 무리 수백 명을 이끌고 횃불을 나란히 하고 한꺼번에 왔습니다. 저희들도 사당 문 밖에 모여서 막아 지킬 계획을 세웠습니다. 저들은 초2일에 저희들이 아침을 먹고 있는 틈을 타서 담을 넘어 사당 뜰로 어지러이 돌입하더니 쇠몽둥이 등 갖가지 기구로 벽을 부수고 자물쇠를 뜯어냈습니다. 저희들이 금지시키려고 했지만 그들은 주먹질을 하거나 칼을 뽑아들고 몰아서 끌어당겨 의관(衣冠)을 찢고 온 몸을 발로 차서 상처를 입히는 등 하지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결국 이 선생의 위판(位版)을 받들고 나와 뒹굴고 뒤집히며 동쪽 협문(夾門)으로 나오더니 수레에 싣고 표연히 갔습니다. 이는 진실로 사림 사이에 없던 변고입니다. 더구나 사당 벽을 쳐부수고 문 자물쇠를 쳐서 뜯어냈으니 저희들은 놀라고 원통한 심정을 가누지 못하여 겸성주께 달려와 호소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는 바로 난리라고 말씀하였고 처분을 내리시기를 “이는 변괴(變怪)이니 본관(本官)을 기다려서 소장을 올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감히 노차(路次 순행(巡行)할 때의 도중)에서 우러러 호소하옵니다. 삼가 원하건대 합하께서 굽어 살펴주시어 특별히 적간(摘奸)하고 변란을 일으킨 사람들을 붙잡아 다스려서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엄히 징계함으로써 사풍(士風)을 바로잡고 현사(賢祠)를 지킬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천만번 간절한 심정으로 바라옵니다.
정해년(1827, 순조27) 2월 일.

김시원(金是瑗) 김로익(金魯翼) 김시진(金是珍) 김흥유(金興儒) 김량유(金亮儒) 김조옥(金朝玉) 김여옥(金汝玉) 김위옥(金渭玉) 김리유(金履儒) 김도유(金道儒) 김진유(金進儒) 김시현(金是玹) 김부유(金復儒) 김현유(金顯儒) 김성(金垶) 김완(金埦) 김장(金墇) 김로교(金魯敎) 김이교(金彛敎) 김병유(金秉儒) 김시완(金是琓) 김형교(金衡敎) 김만유(金晩儒) 김석유(金碩儒) 김치교(金致敎) 김시진(金是瑨) 김원옥(金元玉) 김근옥(金覲玉) 김정교(金程敎) 김의교(金義敎) 김영교(金永敎) 김시필(金是珌) 김시염(金是琰) 김시성(金是珹) 김종구(金鍾久) 김종만(金鍾萬) 김사교(金思敎) 金五敎(金五敎) 김두교(金斗敎) 김중교(金中敎) 김린교(金鄰敎) 김방교(金方敎) 김장교(金莊敎) 김장유(金章儒) 김상유(金上儒) 김맹유(金孟儒) 김제열(金濟說) 김제한(金濟漢) 김제형(金濟亨) 김종원(金鍾遠) 김문유(金門儒) 김희유(金羲儒) 김단유(金端儒) 김안유(金安儒) 김문교(金文敎) 김정교(金正敎) 김은교(金殷敎) 김주교(金周敎) 김도(金鍍) 김전(金鈿) 김해유(金海儒) 김정유(金楨儒) 김해교(金海敎) 김기교(金箕敎) 김제정(金濟鼎) 김제동(金濟東) 김제신(金濟臣) 김제택(金濟宅) 김제진(金濟進) 김제은(金濟殷) 김제겸(金濟謙) 김제양(金濟讓) 김순교(金舜敎) 김중교(金重敎) 김진교(金震敎) 김갑유(金甲儒) 김아유(金雅儒) 김일유(金一儒) 김질유(金質儒) 등

〈제사(題辭)〉
양 집안의 거조(擧措)가 전에 없던 변괴라고 할 만한 일이다. 응당 논보(論報)하여 법대로 처리할 뿐이고, 이미 경계를 지나왔으니 다시 번거롭게 떠들지 말아야 마땅할 일이다. 1일.
관【착압】 관인을 인계하지 못하였음.[未交印]4)

[주석]

1) 노선생(老先生)의……되었습니다
노선생은 이황이며, 판서공은 이황의 조부인 이계양(李繼陽)을 가리킨다. 그리고 참판공은 김효로(金孝盧)이다. 향현사에서 이 두 분을 합향하고 있었다. 앞의 각주 47번, 51번 참조
2) 시장(諡狀)을 쓴 사람
김조순(金祖淳, 1765~1832)으로, 자는 사원(士源), 호는 풍고(楓皐), 본관은 안동,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시장은 《후조당선생문집》 부록 제1권에 실려 있다.
3) 지중(持重)
상제(喪祭)나 종묘사직 및 사당의 제사지내는 일을 주관하는 것을 말한다. 《의례(儀禮)》 〈상복(喪服)〉에 “인후가 된 사람은 그 부모를 위해서 기년복(期年服)으로 보답한다.[爲人後者, 爲其父母報.]”라는 경문(經文)이 나오는데, 이를 해설한 전문(傳文)에 “대종(大宗)의 후계자가 된 사람은 어째서 자기 부친에 대하여 기년복을 입어야 하는가. 부친에 대한 참최복(斬衰服)을 두 번 입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두 번 입을 수 없는 것인가. 대종의 중한 자리를 잇는 책임을 맡은 경우, 소종에 대해서는 상복의 등급을 낮춰야 하기 때문이다.[何以期也, 不貳斬也. 何以不貳斬也, 持重於大宗者, 降其小宗也.]”라는 말이 나온다.
4) 관인을 인계하지 못하였음
원문의‘미교인(未交印)’은 관리가 체직될 때 선임자와 후임자 사이에 관인을 아직 인계하지 못하였다는 뜻이다. 안동 부사가 체직되어 전임 안동 부사는 떠나고 신임 안동 부사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이 상서에는 관인이 답인되어 있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심영환의 연구를 참고할 수 있다.(심영환,「朝鮮時代 所志類의 着官 硏究」 『장서각』 14,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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