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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년 현감(縣監) 보장(報狀)    
G002+AKS+KSM-XC.0000.0000-20101008.B003a_003_01196_XXX
 
분류 고문서-첩관통보류-보장 / 정치·행정-보고-보장
작성주체 발급: 현감(縣監) /수취: 순영(巡營)
작성시기 임인12월초9일
추정시기 임인년
형태사항 크기: 25.5×220 / 낱장, 1장 / 종이 /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 해남 연동 해남윤씨 녹우당  / 현소장처 : 해남 연동 해남윤씨 녹우당  
비고 출판정보 : 『고문서집성 3 -해남윤씨편 정서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본 번역문은 2016년-2017년 한국고문서 정서·역주 및 스토리텔링 연구사업 연구결과물임.
고문서집성 수록정보 『고문서집성』03 / 17. 보장 / 보장1 / 434 ~435쪽
 
임인년에 해남현감이 전라도 순찰사에게 민간 묘소의 무단 훼손과 관련한 사항을 보고한 첩보의 사본
 
/ 작성일:2004-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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牒報事 去十一月卄日縣監
牒報事 去十一月卄日縣監靈岩郡梨津倉前洋點船時 海南縣居幼學尹▣白活其矣祖父與前後室祖母三合葬於治下波下大面德井里所在 其矣十一代祖先山餘麓矣 千萬不意 治下居同宗尹興亳去夜 矣身祖父母塚 私自掘冢 露出三棺 斧痕狼藉是如乙仍于 聞甚驚駭 縣監自點船所摘奸次 將欲發行之際 本縣留鄕所文狀內 寶岩面居尹再興挺身來告內 以爲尹▣祖父塚 其矣身私自掘出是如 枚擧牒報等以 同掘塚元犯是在尹再興使之捉待於其矣所掘山處 兩隻所見處 縣監親審摘奸 則尹▣祖父進士贈參判墓外棺橫坮下邊斧破 日下方拔棺移置于北邊堦內七步之地是遣 內棺上邊方板斧痕一處 長一寸廣三分 天板左邊上有剝脫一處 長三寸五分廣八分 左邊板有剝脫一處 長一寸廣四寸 左邊板下邊有椎鑿傷處 長一寸廣二分 右邊地板有剝削一處 長八寸廣一寸二分 左前室露棺 三尺七寸 內下拔一尺四寸 外棺橫帶半以下片片斧破 右後室露棺三尺二寸 內下拔 一尺四寸 外棺橫帶半以下片片斧破 掘土處 長四步半廣五步深四尺五寸內 階所埋誌石破碎無餘是乎所 其在所見 極爲慘愕 再興私掘之罪 旣有當律 則若無論斷之事是乎矣 大抵此訟段 日有委折 去九月日 海南縣居尹德贊等呈狀內 尹▣移葬其祖父母於其矣十代祖與妣兩塚之間是如摘奸掘移亦有所呈狀乙仍于縣監親往摘奸 則尹▣所占新葬處 果是德贊十代祖母塚三十步之上 而於尹▣爲十一代祖母塚是如乎 盖此山一洞自尹▣十一代祖入葬 而仍爲世葬之山 尹▣之九代祖母墳 壓葬於其十代祖母塚上 尹▣十代祖母 又爲壓葬於其十一代祖母塚上 子壓母墳 婦壓姑墳 其爲倒葬 己成其門法 而尹▣之十代九代 卽德贊之九代八代是乎旀 尹▣之新葬在於去五月日 而其時其矣門長尹道緖 以自先世倒葬之致 許葬於尹▣是遣 其外諸尹 同是子孫 半許半禁是如可 其葬日尹德贊等 又爲齊會 因尹▣之哀乞 咸議許葬之後 同爲看役護葬爲有如乎 至於九月日 卒然呈議者 事甚訝惑 同尹道緖與德贊等處 許葬與否擧首尾發問 則道緖德贊等 果因尹▣之哀乞 許葬的實是如 有所納招是乎所其矣宗中旣己許與過葬 則揆以事勢 實難掘移是遣 且是倒葬非止一再 己成其門法 則不必以此執頉乙仍于 不可掘移之意 有所決給矣 月前尹興亳 忽呈議送使題音摘奸公決事 山在官是如題送敎是乎所 今此山訟 旣經親審 摘奸處決 故前後委折 方欲論報矣 尹興亳等 有此私掘之擧 而掘塚擔當是在尹再興段不入於議送列名之中 則其非首倡 明若觀火 故多般探問 則果是興亳收斂於其矣宗中 與再興約以一百兩後 先給五十兩之說 人皆傳播狼藉載路 以此觀之 再興之捧賂 昭難可掩是乎旀再興本以 無依無賴之類 貪其百金之賂 而有此私掘擔當之擧是乎乃 此非再興之設計 實是興亳之首倡指揮是遣再興若不受賂 則其麗不億之子孫 獨何有爲先之誠 而作此人所不忍爲之擧乎 初旣許葬 則過五朔後末乃發掘 究其心膓 萬萬回測󰜄不喩 一鍤之頭 掘人三棺 斧破外棺 至及於內棺 斧痕狼藉 此則不可以尋常掘移 循例處斷是乎等以尹再興尹興亳等乙 並只着枷嚴囚後 前後大略枚擧牒報爲去乎 其罪狀若加嚴勘事爲敎是參商處分行下爲只爲
壬寅十二月初九日 報巡營

첩보할 일. 지난 11월 20일. 현감.

첩보할 일은 아래와 같습니다.
지난 11월 20일 현감(縣監)인 제가 영암군(靈岩郡) 이진창(梨津倉) 앞 바다에서 선박을 점고(點考)할 때, 해남현(海南縣)에 거주하는 유학(幼學) 윤○이 발괄[白活]을 올렸는데,
“저의 조부(祖父)와 전후 조모(祖母), 총 3위를 합장한 곳이 치하(治下)의 파하대면(波下大面) 덕정리(德井里)에 소재하고 있는데, 저의 11대조 선산의 기슭입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도 치하에 함께 거주하는 동종(同宗) 윤흥박(尹興亳)이 지난밤에 저의 조부모의 무덤을 사사로이 파헤쳐서, 3위의 관이 드러나고 도끼질 자국이 낭자하였습니다.”
라는 내용이라서, 듣고서 매우 경악하였습니다.
제가 선박을 점고(點考)하던 곳에서 그 사실을 적간(摘奸)하기 위해 출발하려던 즈음에, 본 현의 유향소(留鄕所)에서 문장(文狀)을 보내왔는데,
“보암면(寶岩面)에 거주하는 윤재흥(尹再興)이 전격적으로 와서, 윤○ 조부의 무덤을 그 자신이 사적으로 파내었다고 고하였습니다.”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상세한 내용으로 첩보하였기에, 해당 무덤을 파헤친 원범인 윤재흥을 그가 산소를 파낸 곳의 양척(兩隻)이 볼 수 있는 곳에 잡아다 대기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직접 살펴서 적간해 보니, 윤○의 조부인 진사 증(贈) 참판 묘 외관의 횡대(橫坮) 아래쪽이 도끼로 파손되어 있었으므로, 그날 바로 관을 빼내서 북쪽의 섬돌 안 일곱 걸음 정도 되는 땅에 옮겨 두었습니다.
내관(內棺)의 위쪽 방판(方板)에 길이 1치, 너비 3푼 정도의 도끼 흔적이 한 곳 있었으며, 천판(天板)의 왼쪽 위에 길이 3치 5푼, 너비 8푼 정도 벗겨진 곳이 한 곳 있었습니다. 왼쪽 판에 길이 1치, 너비 4치 정도 벗겨진 곳이 한 곳 있었고, 왼쪽 판 아래쪽에 길이 1치, 너비 2푼 정도 정에 찍힌 곳이 있었으며, 오른쪽 지판에 길이 8치, 너비 1치 2푼 정도 벗겨져 깎인 곳이 한 곳 있었습니다.
왼쪽 전실(前室)의 드러난 관은 3자 7치 크기인데, 관의 안쪽 아래 부분이 1자 4치 정도 뽑혀져 있었고, 외관 횡대(橫帶)의 반 이하가 조각조각 도끼로 부서져있었고, 오른쪽 후실(後室)의 드러난 관은 3자 2치 크기인데, 관의 안쪽 아래 부분이 1자 4치 정도 뽑혀져 있었고, 외관 횡대의 반 이하가 조각조각 도끼로 부서져있었습니다.
흙을 판 곳은 길이 4보 반, 너비 5보, 깊이 4자 5치이고, 내계(內階)에 묻어 둔 지석(誌石)은 파쇄(破碎)되어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보는 처지에서는 극히 참담하고 경악스러웠습니다. 재흥(再興)이 사사로이 무덤을 파낸 죄는 이미 해당하는 법률이 있으니, 따로 논단(論斷)할 일은 없을 듯합니다.
대개 이 송사는 나름대로 곡절이 있습니다. 지난 9월 ○일에 해남현(海南縣)에 거주하는 윤덕찬(尹德贊) 등이 소장을 올렸는데, 그 내용에 윤○가 그 조부모를 자신의 10대조와 조모 두 무덤 사이로 이장하였다고 하고, 또한 적간한 뒤 파내서 옮겨 달라고 소장을 올린 바가 있었으므로, 제가 직접 가서 적간해 보니, 윤○가 점유한 새 장사 터가 과연 덕찬의 10대 조모의 무덤에서 30보정도 위쪽에 있었는데, 윤○에게는 11대조모의 무덤입니다.
대개 이 산 한 동은 윤○의 11대조 때 들어와 장사를 지낸 뒤로부터 그대로 세장(世葬)하는 산이 되었습니다. 윤○의 9대조모의 봉분을 그 10대 조모의 무덤 위쪽에 압장(壓葬)하였으며, 윤○의 10대조모를 또 그 11대조모의 무덤 위에 압장하였습니다. 자식이 어머니의 봉분을 위에서 누르고,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위에서 누르는 것은 도장(倒葬)이 되는데, 이미 그 문중의 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윤○의 10대, 9대는 곧 덕찬의 9대, 8대이오며, 윤○이 새로 장사지낸 것이 지난 5월 일에 있었는데, 그 당시 그의 문장(門長)인 윤도서(尹道緖)가 선세(先世) 때부터 도장했다는 이유로 윤○에게 장사 지내는 것을 허락하였으며, 그 밖의 여러 윤씨들은 같은 자손들인데, 반은 허락하고 반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장사지내는 날에 윤덕찬(尹德贊) 등이 또 함께 모임을 가졌는데, 윤○이 애걸하였기 때문에 모두 장사 지내는 것을 허락한 다음, 함께 장사 지내는 일을 살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놓고서 9월 ○일에 이르러 갑자기 정의(呈議)한 것은 매우 의아한 일입니다.
해당 윤도서(尹道緖)와 윤덕찬(尹德贊) 등에게 장사 지내는 것을 허락하였는지 여부에 대해 전후 사정을 일일이 물어보았더니, 윤도서와 윤덕찬 등은 과연 윤○가 애걸하는 바람에 장사 지내는 것을 허락하였던 것이 확실하다고 진술한 바가 있습니다. 그의 종중(宗中)에서 이미 과장(過葬)을 허락하였다면, 사세로 헤아려보건대 실로 파내서 옮기기 어려운데다, 또 도장(倒葬)을 한 것이 비일비재하여 이미 그 문중의 법이 되어버렸으니, 굳이 이것을 가지고 문제를 삼을 필요가 없겠기에, 파내서 옮기기 않아도 된다는 취지로 결정하여 증서를 발급해 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달 전에 윤흥박이 홀연히 의송(議送)을 올렸고, 적간(摘奸)하여 공결(公決)하라는 순찰사의 제음(題音) 내용을 산재관(山在官)이 제송(題送)해 주었습니다.
이번 산송(山訟)은 이미 제가 직접 살펴서 적간하여 처결한 것이므로, 전후의 곡절을 바야흐로 따져서 아뢰고자 합니다.
윤흥박 등이 이처럼 사사로이 묘를 파내는 짓을 하였는데, 무덤을 파내는 일을 담당하였던 윤재흥(尹再興)은 의송(議送) 속에 열거한 명단에는 들어 있지 않으니, 그가 앞장서서 주도한 자가 아니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방면으로 탐문해보았더니, 과연 흥박이 그의 종중(宗中)에서 돈을 거두어 재흥과 100냥으로 약정한 후, 먼저 50냥을 지급했다는 설이 사람들마다 전해져서 도로에 자자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건대, 재흥이 뇌물을 받은 것은 명백하여 감출 수 없습니다. 재흥은 본래 의지할 곳이 없는 부류로서, 그 100냥의 뇌물을 탐내어 이처럼 사사로이 무덤을 파내는 짓을 맡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재흥의 설계가 아니라 실로 흥박이 앞장서서 주도하여 지휘하였던 것이고, 재흥이 만약 뇌물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 수많은 자손들이 유독 무슨 조상을 위하는 정성이 남달라서 이처럼 남들이 차마 하지 못하는 짓거리를 했겠습니까?
애초에 이미 장사를 허락하였으면, 5개월이 지난 뒤에 마침내 파내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심술이 너무나도 불측할 뿐더러, 삽 하나를 가지고 남의 세 관을 파헤치고, 외관을 도끼로 부수었고, 내관에까지 도끼 흔적이 낭자하게 만들었으니, 이는 일반적으로 무덤을 파헤쳐서 옮긴 경우의 관행에 따라 처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해당 윤재흥, 윤흥박 등을 모조리 목에 칼을 채워 엄히 가둔 후, 전후의 대략을 낱낱이 들어서 첩보(牒報)합니다. 그 죄상으로 볼 때 만약 더 엄히 다스려야 할 것 같으면 참작하여 처분하시어 통지해 주십시오.

임인년 12월 초9일에 순영(巡營)에 보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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