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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초(報草)    
G002+AKS+KSM-XC.0000.0000-20101008.B003a_003_01198_XXX
 
분류 고문서-첩관통보류-보장 / 정치·행정-보고-보장
형태사항 낱장, 1장 / 종이 /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 해남 연동 해남윤씨 녹우당  / 현소장처 : 해남 연동 해남윤씨 녹우당  
비고 출판정보 : 『고문서집성 3 -해남윤씨편 정서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 본 이미지는 원본 소장처인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의 협조에 의해 촬영되었음. 본 번역문은 2016년-2017년 한국고문서 정서·역주 및 스토리텔링 연구사업 연구결과물임.
고문서집성 수록정보 『고문서집성』03 / 17. 보장 / 보장3 / 436 ~437쪽
 
보길도의 해남윤씨 집안에서 수령의 횡포를 전라도 순찰사에게 보고하기 위해 일자별로 기록한 기초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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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准數而送之 幷親錄其名 項封而囚之 旋送
使令 又令捉金鎖洞壯婢十五名 若言金鎖
無婢之故 則必百倍其怒 故又不得已乞得叔母主
宅及司果家婢子准十五而送之 又幷囚之 又卽差
一吏 各曰假刑房 令捉甫吉島壯婢二十名 吏言係
是越海之處 本無津船 且是他官地云 則又益
怒曰 船格令渠家備送 而婢子令渠家捉給云 又不
得已 整給船格 作牌性敬以送之 其日夕冰米五
十石輸進 則又不捧曰 成服 後當親捧云 十三
日問於倉吏曰 米色如何 若不甚白 則當大杖而退之
云 又不得已加備應縮之數 幷乞洞力改舂之 十五
日成服後 親監量捧五十石後 招飢民各給三斗
盡十三石之後 飢民不至 又令其外之米 仍逢▣▣
待逐日飢民之來 旋旋納之云 其苦可勝爲▣▣
倉吏及監官善辭令 畢入官庫 斯亦幸矣 ▣
時又極高量所備六十二石之米 菫充五十石也 五
十白米三日內准備 依其令改舂極白 又依其令接
置城中 使人直守 待成服後 畢數以納 而所囚杖
奴一名婢子三十名無意放之 連督甫吉婢子至▣
去吏之妻 此前杖奴之後 構報巡營 有尹某父
子家 百物陳陳 相因等語 而皆稱鄕所及大同監營
文報內云云 又曰 捉其兩奴而問之 以無穀爲對 書納
皮牟四石 言辭不恭 或稱無事目 官前揚惡
幷笞杖六十度 令米五十石輸納云云 十七日刑
吏捉甫吉婢七名而來 又以外村散在婢子准其
二十之數送之 又幷囚之十八日成貴致斃
憐慘何量 十九日令先出放囚十五婢 各杖十五
六或二十三十而放之 當其杖時 伏縛於刑板
以大杖杖其脚後吾古音底 故十五名脚肉幷
裂破而腐 脛膝着板幷傷 腰背皆浮 其
中應有兩三死者 而幸而不死者 亦終此歲決
不得運身也 二十日罷衙 日沒後 令自獄中
盡放 餘囚婢三十五名 此則未知其故也 令一吏
傳語於諸婢曰 汝輩亦當盡杖 而爲農極而减之
吾情汝其知之云云 二十三日夕 令約長抄錄家內
使喚及籬底壯奴二十名以納云 卽令盡所見錄
去云云 則渠言非不知家內籬底不能滿卄 而勢
必到死 罔知所措云云 當其杖二奴捉五十婢之時 戶
下奴婢驚怯禠魄 逃走殆盡 所存未滿四五 不
得已令盡錄現存之數 添以近村散在之奴婢滿
其卄數以去 其夜奴婢輩聞之 幷卽逃散 其隣
其族 其隣之隣 其族之族 合一洞百餘戶 一時
奔散 眞如山崩水潰之勢 無計止遏 近村奴
婢 亦皆如是 其隣其族又幷如是 外庄之奴婢及其隣其族幷又如此 失其家産 棄其農業 吾家奴僕之在境內者 不過數十戶 而幷其隣之隣族之族 則失業者殆至千餘家 此豈小變哉 脚腐不動
之婢十五名外 更無遺類 或言欲捉二十名分用
使令門直云 或言成貴致斃 慮其切屬 告
狀囚此卄奴 以爲恐喝箝制 使不得動云 未知其
意何居 而窃念卄奴捉納而更無餘禍 則雖戶
奴不足而添以他官之奴亦所甘心 而卄名之後必
又卽捉四五十或六七十名 有如金鎖甫吉
婢子之爲 則此不可 乞諸隣族之家 從何辨得乎
此固難堪 而非徒此也 方飢餓乞食 不得鋤芸之
奴 猝然捉致 驅供官役 則豈有不逃之理 逃則
輒責於主家 囚次知刻督童羖 此苦尤何以
堪 況獨坐空家 全沒手足 逃散之奴 無計推得 而
事己至此 殊不可以常理揆之 禍之及己 慮在
卽目 故不得已單騎脫身 將向洛下親庭 渾
家眷聚棄之如遺 門外使令 叫呼不絶 家中
粮料 掃絶己久 哭聲干雲 願念憐惻 而亦復
奈何 傳聞追後之音 嚴督鄕所及下輩 期覓我之
去處而告之 不然則當幷重刑云 又聞官差絡
繹 而無奴可捉 只見腐脚之婢而棄去云 又聞
卄七日前者報狀書目始到 題曰 尹家之富 名於一
國 皮牟四石書納 實是玩弄 自本官痛徵爲可
但令納米則必以舂正爲苦 何不以牟或租數
百石取用乎云云 使家何由察此至寃之狀
此尤極悶者也 書目到後 囚奴愛順不更杖卽放
送云 盖慮其又斃耶 未知其故 又聞吾家
戶籍謄出 構我報狀發送云 而未知其措
語云何

…(원문 결락)… 숫자에 맞게 보내니, 아울러 그 이름을 친히 적은 다음, 목을 묶어 가두어 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그 사령을 보내어 또 금쇄동(金鎖洞)의 장성한 여종 15명을 잡아오게 하였다. 만약 금쇄동에 여종이 없는 연고를 말하기라도 하면 반드시 백배나 더 노여워하였다.
그래서 또 부득이 숙모님 댁 및 사과(司果) 집에 애걸하여, 여종으로 15명을 맞추어 보냈는데, 또 모두 가두었다. 또 즉시 아전 하나씩을 차출하여 각각 가형방(假刑房)이라고 하고, 보길도(甫吉島)의 장성한 여종 20명을 잡아오게 하였다. 아전이 “바다 건너에 있는 곳인지라 본래 나룻배가 없는데다, 다른 관원의 땅이기도 하다.”고 말하면, 또 더욱 노하여 “선격(船格)은 그의 집에서 마련해 보내게 하고, 여종은 그의 집에서 잡아 공급하게 하라.”고 하였다. 또 할 수 없이 선격을 정비하여 공급하고 ‘성경(性敬)’이라는 패(牌)를 만들어 보냈다. 그날 저녁에 빙미(氷米) 50가마니를 실어 보냈는데, 또 받지 않고, “성복 후에 마땅히 친히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13일. 창고의 아전에게 “쌀 색깔이 어떠하냐? 만약 아주 하얗지 않으면 큰 장을 때리고 퇴짜를 놓을 것이다.”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래서 또 부득이 줄어드는 수를 감안하여 더 준비하고, 아울러 동네의 힘을 빌려서 새로 방아를 찧었다.
15일. 성복한 뒤에, 친히 쌀 양을 감독하여 50가마니를 받아, 굶주린 백성들을 불러서 각자에게 3말씩을 지급하였다. 13가마니를 다 나누어 주고 나서 굶주린 백성들이 더 이상 오지 않자, 또 그 밖의 쌀은 그대로 가지고 있다가 매일 굶주린 백성들이 올 때마다 그때그때 바치게 하였다고 한다. 그 괴로움을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다만 창고의 아전 및 감관(監官)이 좋은 말로 모조리 관고(官庫)에 넣어 보관하게 해주니, 그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바칠 때는 또 아주 꼼꼼히 점검해야 해서, 준비한 62가마니의 쌀로 겨우 50가마니를 채울 수 있었다.
50가마니 백미를 3일 내에 준비하고, 그 명령에 따라 다시 방아를 찌어 극히 희게 만들고, 또 그 명령에 따라 성 안에 놓아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였으며, 성복이 끝난 뒤에 전체 수량을 납부하였는데도, 장을 때리고 가두어 둔 남종 1명과 여종 30명은 풀어줄 뜻이 없이, 계속해서 보길도(甫吉島)의 여종이 오기를 독촉하였다. 지난 아전의 처에게 ▣(들으니), 이전에 남종에게 장을 때린 후에 순영에다 날조하여 보고한 내용 중에, “윤아무개 부자의 집에는 온갖 물건이 끝없이 늘어져 있다.”는 등의 말이 있었는데, 모두 향소(鄕所) 및 대동감영(大同監營)의 문보(文報)에서 인용한 것처럼 언급하였다고 한다.
또, “그 두 종놈을 붙잡아 물어보니, 곡식이 없다고 대답하면서, 피모(皮牟) 4가마니를 편지로 납부하였는데, 그 언사가 공손하지 못하고, 더러 사목(事目)에 없다고 칭하는 등, 관원 앞에서 행악을 부리기에, 모두 태장(笞杖) 60대를 때리고 쌀 50가마니를 바치게 하였습니다. 운운.”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17일. 형리(刑吏)가 보길도의 여종 7명을 잡으러 왔다. 그래서 또 외촌(外村)에 산재되어 있는 여종으로 그 20명의 수를 채워서 보냈는데, 또 모두 가두었다.
18일. 성귀(成貴)가 죽어버렸다. 가련하고 슬픈 마음이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19일. 갇혀 있던 15명의 여종을 먼저 풀어주게 하면서, 각각 장(杖) 15,6대나 20, 30대를 때린 후 풀어주었다. 그 장을 때릴 때, 형판에 엎어서 포박한 뒤에 큰 장으로 그 다리의 뒤쪽 오금 아래를 때렸다. 그래서 15명의 다리 살이 모두 갈라져 썩고, 정강이와 무릎이 형판에 부딪혀 모두 손상되었으며, 허리와 등은 모두 떠버렸다. 그 중에 응당 두서너 명은 죽을 자가 있을 것이며, 요행히 죽지 않은 자도 또한 연말까지 결코 몸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20일. 관아의 업무를 파하고, 해가 진 뒤에 옥중에 가둔 자들을 모두 석방하게 하였다. 여종 35명은 그대로 가두어 두었는데, 그렇게 한 이유는 모르겠다. 한 아전을 시켜 여러 여종들에게 말을 전하기를, “너희들도 또한 모두 장을 맞아야 할 것이나, 농번기라서 감해주는 것이니, 나의 마음을 너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운운.”이라고 하였다.
23일. 저녁에 약장(約長)에게 집안의 사환(使喚) 및 이저(籬底)의 장성한 종 20명을 초록하여 들이라고 명하였다고 한다. 즉시 눈으로 본 것을 모조리 적어 가라고 하였더니, 그가 말하기를, “집안의 사환과 이저로 20명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안 그러면 형세 상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니,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운운.”라고 하였다. 두 종에게 장을 때리고, 50명의 여종을 잡아들일 때, 호하(戶下)의 노비들이 놀라서 혼비백산 거의 다 도주해버렸고, 남은 자는 4,5명이 되지 않았다. 부득이 현재 남아 있는 수를 모두 기록하게 하고, 가까운 마을에 산재해 있는 노비를 더하여 20명의 수를 채워서 보냈다. 그날 밤에 노비들이 그 소식을 듣고서, 모두 즉시 도망하여 흩어졌다. 그 이웃, 그 일족(一族), 그 이웃의 이웃, 그 일족의 일족을 합하여 한 동네 100여 호가 일시에 도망쳐 흩어지니, 참으로 산이 무너지고 가둔 물이 터지는 기세와 같아 막을 길이 없었다.
가까운 마을의 노비들도 모두 그러하였다. 그 이웃, 그 일족이 또 모두 그러하였다. 외장(外庄)의 노비 및 그 이웃, 그 일족도 모두 또 그러하였다. 그 가산을 잃고, 그 농업을 버렸다. 우리 집의 노복 중에 경내에 있는 자는 수십 호에 불과한데, 그 이웃의 이웃, 일족의 일족까지 모두 아우르면 실업자가 거의 천여 가에 이르는 셈이니, 이것이 어찌 작은 변고이겠는가?
다리가 썩어 움직이지 못하는 여종 15명 외에 더 이상 남은 자가 없었다. 혹자는 20명을 잡아들이는 것을 사령(使令), 문지기에게 분담시키고자 한다고도 하고, 혹자는 성귀(成貴)가 죽어버리자 그 절친한 무리들이 고소장을 올릴까 염려하여 이 20명의 종들을 가두어 공갈하면서 제갈을 물려서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고도 한다.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겠으나, 속으로 생각하기를, 20명의 종을 잡아 바쳐서 더 이상 남은 화가 없게 될 수 있다면, 비록 호노(戶奴)가 부족하여 다른 관원의 종까지 더하더라도 또한 감지덕지할 것이다. 그러나 20명 뒤에 필시 또 즉시 금쇄동, 보길도의 여종들의 경우처럼 4,50, 또는 6,70명을 잡아들일 것이니, 이는 이웃 족속의 집안에서 빌릴 수도 없으니, 어디에서 마련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진실로 난감하거니와, 이것뿐만 아니다. 바야흐로 굶주려서 걸식하며 경작을 하지 못하는 종이 갑자기 잡혀가 관역을 제공하도록 내몰린다면, 어찌 도망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도망치면 문득 주인집에 책임을 지워, 차지(次知)를 가두고서 없는 것을 내 놓으라고 각박하게 독촉하니, 이 괴로움은 더더욱 어떻게 감내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홀로 빈 집에 앉아 수족이 전혀 없고, 도망치고 흩어진 종은 추쇄할 길이 없으니,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게 되면 전혀 일상적인 이치로 헤아릴 수 없게 된다. 나 자신에게 화가 미쳐, 당장 눈앞에 닥치게 될까 염려가 되었다. 그래서 부득이 단기(單騎)로 탈출하여 서울의 친정으로 향하려고 하였는데, 온 집안의 식솔들을 버리듯이 떠나게 되니, 문 밖에서 사령의 울부짖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집안의 양식은 비로 쓴 듯 떨어진 지 이미 오래니, 곡성이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생각하자면 가련하고 슬프지만 또한 더 어찌 하겠는가?
그 후의 소식을 전해 들으니, 향소(鄕所) 및 하인배들을 엄히 독촉하여 내가 간 곳을 기어코 찾아내어 고하게 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마땅히 아울러 중형에 처하겠다고 하였다고 한다.
또 듣기로 관청에서 파견된 사람이 계속 이어졌는데, 잡아갈 만한 종은 없고 그저 다리가 썩은 여종만 보이므로, 버리고 갔다고 한다.
또 듣기로 27일에 비로소 이전에 올린 보장(報狀)에 대한 서목(書目)이 이르렀는데,
“윤씨 집안의 부유함은 온 나라에 이름이 나 있는데, 피모(皮牟) 4가마니를 편지로 납부하겠다고 하는 것은, 실로 놀리는 것이다. 본관이 엄하게 징계해야 하겠다. 다만 쌀을 납부하게 하였으니, 필시 찧느라고 고생이 많을 것이다. 차라리 모(牟)나 조(租) 수백 가마니를 대신 받아쓰는 것이 어떻겠는가? 운운.”
이라고 제(題)하였다고 한다. 순찰사께서 무슨 수로 이런 지극히 원통한 정상을 살피실 수 있겠는가? 이것이 더욱 심히 답답한 이유이다.
서목(書目)이 도착한 뒤에 갇혀 있던 종 애순(愛順)을 더 이상 장을 때리지 않고 즉시 풀어주었다고 한다. 그가 또 죽을까봐 염려해서인가? 그 이유를 모르겠다. 또 듣기로, 우리 집의 호적을 베껴 내고, 나를 모함하는 보장(報狀)을 발송하였다고 하는데, 무슨 말을 해댔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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