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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3년 김효로(金孝盧) 사헌부(司憲府) 계후입안(繼後立案)    
G002+AKS+KSM-XD.1483.1111-20101008.B001a_001_00088_XXX
 
분류 고문서-증빙류-입후성문 / 사회-가족·친족-양자문서
작성주체 발급: 사헌부(司憲府) /수취: 김효로(金孝盧)  
작성지역 한성부    / 서울특별시   
작성시기 1483년 / 성화19년8월29일   
형태사항 크기: 67×204.7 / 낱장, 1장 / 종이 / 한자, 이두
인장서명 17개(9×9cm, 적색, 정방형)
서명(개) 서압:4
소장정보 원소장처 : 안동 오천 광산김씨 후조당  / 현소장처 : 안동 오천 광산김씨 후조당  
비고 영인정보 『조선전기고문서집성-15세기편』(정구복 외 편, 국사편찬위원회, 1997) 정서본 『고문서집성 1: 광산김씨 오천고문서』(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2) 『조선전기고문서집성-15세기편』(정구복 외 편, 국사편찬위원회, 1997) 『朝鮮初期 古文書 吏讀文 譯註』(朴盛鍾,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본 번역문은 2014년 한국고문서 정서·역주 및 스토리텔링 연구사업 연구결과물임.
고문서집성 수록정보 『고문서집성』01 / 4. 입안(계후·노비·토지) / 계후입안2 / 14 ~쪽
 
1483년 김효로의 입양을 재차 허락하는 공문서
   1483년사헌부(司憲府)에서 김효로(金孝盧)의 입양을 재차 허락하는 공문서를 발급하였다. 김효로의 입양건은 이미 1480년에 이를 허락하는 예조의 공문이 있었다. 헌데 이를 다시 재심의한 것은 할아버지의 동생의 아들로 입양된 김효로의 경우와 같이 친족질서에 어긋나는 입양을 허락하지 말라는 왕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입양을 허락받아 양어머니의 상까지 치른 김효로의 건을 소급하여 고칠 수는 없는 까닭에 이를 예외적으로 다시 인정하는 본 문서를 발급한 것이다.
 
1483년(성종14)金孝盧를 종조부 金孝之의 繼後子로 재차 인정한다는 司憲府의 공증 문서.
내용 및 특징
   이 문서가 작성되기 3년 전인 1480년김효로를 종조부 김효지의 계후자로 허락하는 禮曹의 立案이 내려졌다. 헌데 다음해인 1481년成世忠을 종조부 成順性의 계후자로 삼고자하여 성순성의 처 이씨가 올린 上言에 대해 『경국대전』 입후조의 ‘적처와 첩에게 모두 아들이 없는 자는 관에 고하여 同宗의 支子를 세워 후사로 삼는다. 尊屬과 형제는 서로 후사가 되지 못한다.’는 규정에 위배된다는 수교가 내려졌다. 이로 인해 김효로의 계후건도 다시금 문제가 되었다. 1481년 수교를 소급적용한 예조에서는 김효로의 계후를 무효화시킬 것을 啓請하였고, 이에 김효로예조 입안에 사실과 다른 점이 있으며 소급적용의 부당함, 치상을 이미 마쳤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계후를 인정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렇게 되자 사헌부에서 재차 조사에 나서게 되었는데, 이는 풍속과 관계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사헌부에서는 1480년경예조에서 행한 조사과정에서 安東都護府使가 받은 양모 김효지黃氏와 생모 盧氏의 公緘答通을 검토하고, 김효로와 같이 손자 항렬로 계후한 사례가 있는지를 宗簿寺 물어 관련 사례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별도로 一宗을 만들면 衆子孫이 여기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므로 昭穆의 차례가 문란해지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김효로의 계후건을 예전대로 시행해 줄 것을 啓請하여 윤허를 얻었다. 이를 근거로 하여 1483년에 본 사헌부 입안이 발급된 것이다. 양모 황씨는 이미 사망하여 김효로 본인이 본 문서를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1018-3호 광산김씨예안파종가소장고문서-입양,입안문서(光山金氏禮安派宗家所藏古文書-入養․立案文書) 2. 성화십구년 사헌부입안(成化十九年 司憲府立案)
『조선전기고문서집성-15세기편』, 정구복 외 편, 국사편찬위원회, 1997
            『朝鮮初期 古文書 吏讀文 譯註』, 朴盛鍾,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조선시대 입안에 관한 연구」, 최연숙,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5
1차집필자: 박준호, 2차집필자: 권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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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頭缺)
亦數多繼後爲白如乎 ▣…▣
遵行爲白去乙禮曹敎是他矣受▣…▣
之九泉之靈 奉祀無人 痛悶哛不喩 於 國家繼後▣…▣
家翁同姓遠近族親中 立後可當人全無 不得已臣矣身▣…▣
矣身置 依法受立案 繼後爲白乎等用良蒙白行喪追薦至亦畢行後良中▣…▣
敎以破繼後爲白臥乎所悶望爲白良厼上項金孝之立後可當人有無 及臣矣繼後立案亦▣▣
敎前後與否 相考改正立案 永爲奉祀爲白只爲禮曹所志爲白乎亦中 同曹亦其司已防事是
向入便亦受理不冬退狀敎是而亦禮曹亦 臣矣身哛不喩 四六寸孫子等乙在前依大
典數多繼後 使人畢行三年喪後良中沙更良辛丑年受 敎並只追改爲白臥乎所 用法
不信 無所告處 至天悶望爲白良厼右良辭緣 及大典本意相考受敎前已立
事乙良 追改安徐爲白只爲司憲府所志退狀爲白臥乎所 無告之民亦加于悶望
良厼禮曹段 受 敎前分揀 不冬誤 啓事是白乎等用良 寃悶白活更良聽理不冬爲白
在果承政院司憲府僉議分揀辛丑年受
乙良 依他法頒降後以遷行爲白遣 矣受 敎前依大典立後行喪人等乙良 追改不冬 九泉孤魂以 不失祀事爲白只爲詮次▣▣▣啓向敎是事
上言爲白良在乙成化十九年四月初九日 啓下本曹敎等用良啓目粘連 ▣▣▣是白有亦
相考爲白乎矣向前金孝盧亦 去壬寅年分 右辭緣上言爲白▣▣▣曹受 敎 前矣
成順性李氏上言據 曹受 敎內大典立後條 嫡妾俱無子者 告官立同宗支子爲後
註 兩家父同命立之 父沒則母告官尊屬及兄弟 不相爲後亦爲白置有亦同宗與子內 昭穆當次
段 不限爲▣…▣乎喩在果向前成迪世▣成順性矣四寸孫子是白去等 以祖爲父
爲白▣…▣紊亂綱常▣置▣…▣理 安徐爲白乎矣其矣援例爲
▣…▣違理▣…▣根因分揀 四寸孫的只去等
▣…▣爲白置▣▣良厼上項
▣…▣以聽理未便▣…▣
關是白乎等用良 ▣…▣
白在李▣…▣
以改正亦爲白置▣…▣孫▣…▣
敎內皃如 改正亦爲白▣…▣曹乙 誤啓是如▣…▣
他司分揀何如 成化十▣…▣四月十二日 啓移司憲府爲良如敎味▣…▣
繼後事可考文案乙 輸送向事行移到付禮曹輸送慶尙道觀察使▣…▣
牒呈內節到付禮曹關內節呈道內禮安接 故別侍衛金孝之黃氏所志乙用良 及時相▣…▣
啓▣…▣事是等 同金孝▣…▣爲家翁同姓四寸▣…▣金孝盧矣身乙某條繼後
臥▣…▣僞備細相考安東接 故陰城縣監金淮▣…▣孝盧矣身乙某條以 某亦中
繼後▣…▣乎喩幷以推考移文向事關是白齊 使關內背書 關內辭緣備細 推考兩件 元關粘▣…▣
爲等如 關是白有良厼推考己亥五月二十三日 故陰城縣監金淮妻盧氏公緘答通內 家翁同姓
三寸叔 故別侍衛金孝之黃氏矣身茂火 說噵爲白乎矣 家翁亦得病臨終時 妾子置全無
同姓族親中可當人以立後 亦遺言別世 女矣身置 年老有病 家翁遺言內皃如 自矣次子金孝
矣身乙繼後爲良結云說爲白臥手等用良矣身亦孝源段承重長子是昆 次子孝盧繼後亦說
爲乎亦中禮曹良中 呈所志爲白乎味答通是白齊別侍衛金孝之黃氏當爲家翁四寸孫幼
金孝盧矣身乙某條繼後辭緣推考移文向事禮安縣移文 同縣守官文狀內 金孝之妻黃▣
亦中公緘問備答通捧上 監封輸送爲臥乎味 文狀是白齊 同縣接 故別侍衛金孝之黃氏公緘
答通內 家翁亦 妾子置無白乎等用良 得病臨終時 女矣身茂火 同姓族親中 可當人以 繼後亦說噵
癸亥四月十九日身故矣身置 年老有病乙仍于 立後可當爲在 家翁同姓四寸孫幼學金孝
矣身乙 家翁願意皃如 繼後爲良結孝盧母故陰城縣監金淮盧氏處 說噵爲白乎亦中
同盧氏段置 孝源段 長子是昆 次子孝盧繼後爲良結 答說乙仍于禮曹所志爲白乎味
答通是白齊爲等如 兩邊公緘答通是白乎味牒呈是白齊宗簿寺良中 廣平大君撫安君
山正於誠寧大君爲等如 幾寸親戚以 繼後爲有臥乎喩相考移文向事行移到付 同寺牒呈
相考爲乎矣廣平大君撫安君四寸孫列山正誠寧大君四寸孫以 各各繼後爲有臥乎味牒呈是白齊
生員金孝盧條目內 矣父段金淮 祖段崇之 崇之同生次第段 長坦之次貞之次崇之次孝之是白乎味
是白齊爲等如 關及牒呈條目是白有厼相考白乎矣金孝盧其矣祖崇之同生孝之繼後
爲白在如中其矣金淮 果於昭穆之次 是爲兄弟 疑若名分紊舛爲白在而亦凡立後之法 專是繼
絶之義哛不喩 先儒云 宗廟之次 左爲昭右爲穆 而子孫名以爲序 有事於大廟 則子姓兄弟群
昭群穆咸在 而不失其倫焉 卿大夫士家廟之禮 亦依此▣隆殺 然則於大宗家子孫合祭 自有昭穆
之次 至於支子立後別爲一宗 則衆子孫不與焉爲白去等 昭穆紊亂爲白乎不喩是白齊偏良廣平
大君則列山正等置 四寸孫以立後 已成前例 不可追改是白置有良厼向前金孝盧金孝之繼後
仍舊施行何如
啓目爲白乎亦中成化十九年八月二十九日 右副承旨金礪石次知
啓依允敎事是白有良厼合行立案者
▣▣憲(押)
▣執義(押)
掌 令
掌 令
行持平(押)
行持平(押)
            (官印. 方9cm 十二個)
사헌부에서 김효지의 처에게 발급한 공증문서

…(원문 결락)…
많이 계후하였으니 …(원문 결락)… 준행하였는데, 이번에 예조에서 다른 …(원문 결락)… 돌아가신 분의 영령을 봉사(奉祀)할 사람이 없으니 애통하고 민망할 뿐만이 아닙니다. 국가에서 계후 …(원문 결락)… 남편의 동성 친족 가운데 멀든 가깝든 후사로 세우기에 합당한 사람이 전연 없기에 부득이 신의 …(원문 결락)… 신도 법에 따라 입안을 받아 계후하였기 때문에 상복을 입고 상을 치루면서 명복을 빌고 3년상까지 마친 뒤에야 …(원문 결락)… 계후를 깨라고 하시니 민망합니다. 김효지의 후사로 삼기에 합당한 사람이 있는지의 여부와 신이 받은 계후 입안이…(원문 결락)… 수교(受敎)를 내리기 전인지 뒤인지 상고하시어 입안을 고쳐 영원토록 봉사할 수 있도록 해 주소서.」라는 내용으로 예조에 소지를 올렸는데, 예조에서는 해당 관사에서 이미 막은 일이라고 판단하여 수리하지 않고 돌려보냈습니다. 예조에서는 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4촌, 6촌 손자 등을 예전에는 대전(大典)에 따라 많이 계후하였는데, 사람들에게 3년상을 다 마치게 한 뒤에 다시 신축년(1481년, 성종 12)의 수교를 가지고 모두 소급해 고치니, 법 적용에 신뢰가 없는데도 호소할 곳이 없어 너무도 민망합니다. 이러한 내용과 대전의 본의를 상고하여 수교를 내리기 전에 이미 후사를 세운 일은 소급하여 고치지 말아달라는 내용으로 사헌부에 올린 소지를 돌려보내니 고할 데 없는 백성은 더욱 민망합니다. 예조에서 수교를 내리기 전의 것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잘못 입계(入啓)하였기 때문에 원통하고 민망한 마음으로 올린 발괄(白活)1)을 다시 수리하지 않으셨습니다. 승정원과 사헌부에서는 함께 논의하여 분간(分揀)한 신축년의 수교는 다른 법의 예에 따라 반포한 뒤에 준행하게 하시고, 수교를 내리기 전에 대전의 입후조에 따라 3년상을 치룬 사람들은 소급하여 고치지 마소서. 그래서 돌아가신 혼령이 제사를 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이러한 사연으로 잘 …(원문 결락)… 하실 일입니다.’라는 내용으로 올린 상언(上言)2)입니다. 성화 19년(1483년, 성종 14) 4월 9일에 본조에 계하(啓下)하셨으므로 본조의 계목을 점련(粘連) …(원문 결락)…
상고하였습니다. 김효로가 지난 임인년(壬寅年, 1482년)에 이러한 내용으로 상언 …(원문 결락)… 본조에서는 수교를 내리기 전에 성순성(成順性)의 처 이씨(李氏)가 상언한 것에 의거하여 본조에 내린 수교에 ‘『경국대전(經國大典)』 입후조(立後條)에 「적처와 첩에게 모두 아들이 없는 자는 관청에 고하여 동종(同宗)의 지자(支子)를 세워 후사로 삼는다.」고 하였는데, 그 주석에 「양쪽의 아비가 함께 명하여 후사를 세우되 아비가 없으면 어미가 관청에 고하고 존속(尊屬)과 형제는 서로 후사가 되지 못한다.」고 되어있다.’ 하였습니다. 동종의 지자 가운데 소목(昭穆)3)의 차례가 된 사람은 …(원문 결락)… 제한받지 않거니와 성적(成迪)의 아들 세충(世忠)은 성순성의 4촌 손자이기 때문에 할아비를 아비로 삼은 …(원문 결락)… 강상(綱常)을 문란하게 …(원문 결락)… 수리하지 않되, 그의 사례를 원용하여 …(원문 결락)…이치에 어긋나 …(원문 결락)… 원인을 제대로 살펴 4촌 손자가 확실하거든 모두 …(원문 결락)… 하더라도…(원문 결락)… 위의 …(원문 결락)… 수리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니 …(원문 결락)… 라는 관문(關文)이 있었다. …(원문 결락)… 이거니와 이(李) …(원문 결락)… 개정(改正)하였습니다. 손자 …(원문 결락)… 수교의 내용대로 개정 …(원문 결락)… 본조에서 잘못 입계(入啓)하였다고 …(원문 결락)… 다른 관사에서 살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성화 1 …(원문 결락)… 년 4월 12일 사헌부에 공문을 보내라고 계하하였습니다. …(원문 결락)… 그의 계후를 상고할 만한 문안(文案)을 보내라고 공문을 보냈는데 이번에 예조에서 경상도 관찰사에게 보낸 문서 …(원문 결락)… 부(府)의 첩정(牒呈)에 “이번에 도착한 예조의 관문에 ‘이번에 올린 도내 예안(禮安)에 사는 고 별시위(別侍衛) 김효지(金孝之)의 처 황씨(黃氏)의 소지에 의거하여 제때에 …(원문 결락)… 계(啓) …(원문 결락)… 일이니, 김효 …(원문 결락)… 남편의 동성 4촌 …(원문 결락)… 김효로(金孝盧)를 어떻게 계후 …(원문 결락)… 위(僞)를 상세하게 상고하라고 하였습니다. 안동에 사는 고 음성현감(陰城縣監) 김회(金淮) …(원문 결락)… 효로를 어떻게 아무개에게 계후 …(원문 결락)… 인지 모두 추고하여 이문(移文)할 일이다.’라는 내용을 보냈습니다. 관찰사 관문의 내용과 뒷면에 적은 관문의 내용을 자세하게 추고하고 두 건의 원래의 관문을 점련(粘連) …(원문 결락)… 이러한 모든 관문이 있었습니다. 추고하기 위해 기해년(1479년, 성종 10) 5월 23일에 고 음성현감 김회의 처 노씨(盧氏)의 공함 답통에 ‘남편의 동성 3촌 숙부인 고 별시위 김효지의 처 황씨가 저에게, 「남편이 병을 얻어 임종할 때에 적처뿐 아니라 첩에게도 아들이 전혀 없으니 동성의 족친 가운데에서 합당할 만한 사람으로 입후하라고 유언하고 죽었고, 나도 늙고 병이 있으니 남편의 유언에 따라 자네의 차자인 김효로를 계후하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도 효원(孝源)은 승중자(承重子)4)이므로 차자인 효로를 계후하라고 한 내용으로 예조에 소지를 보냈습니다.’라고 답하였습니다. 별시위 김효지의 처 황씨가 남편의 4촌 손자인 유학(幼學) 김효로를 어떻게 계후하였는지 사연을 추고하여 이문할 일로 예안현에서 본현의 수령에게 이문한 것에 ‘김효지의 처 황씨에게 공함으로 질문하여 답통을 받아 봉하여 보냈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예안현에 사는 고 별시위 김효지의 처 황씨의 공함 답통에 ‘남편에게 첩의 자식도 없기 때문에 병을 얻어 임종할 때에 저에게 동성의 족친 가운데에서 합당한 사람으로 계후하라고 하고 지난 계해년(癸亥年) 4월 29일에 죽었고, 저도 늙고 병이 있기 때문에 후사로 세우기에 합당한 남편의 4촌 손자인 유학 김효로를 남편의 바람대로 계후하고자 효로의 어미인 고 음성현감 김회의 처 노씨에게 말하였습니다. 노씨도 효원은 장자이므로 차자인 효로를 계후하라고 답하였기에 예조에 소지를 올렸습니다.’라는 내용을 보내왔습니다. 이것이 모두 양쪽의 공함 답통입니다.”라는 내용의 첩정입니다. 종부시(宗簿寺)에 광평대군(廣平大君)5)무안군(撫安君)6), 열산정(列山正)7)성녕대군(誠寧大君)8)이 모두 몇 촌간의 친척으로 계후하였는지 상고하여 이문하라고 공문을 보냈습니다. 이번에 도착한 종부시의 첩정을 상고하니, 광평대군은 무안군의 4촌 손자이고, 열산정은 성녕대군의 4촌 손자인데 각각 계후하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생원 김효로의 조목(條目)9)에 ‘저의 아비는 김회(金淮)이고, 할아비는 숭지(崇之)이며, 숭지의 형제는 첫째가 탄지(坦之), 둘째가 정지(貞之), 셋째가 숭지, 넷째가 효지(孝之)입니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관문과 첩정, 조목이 있기에 상고하니, 김효로는 그의 조부 숭지의 동생인 효지를 계후하여 아들이 되었으니, 그의 아비인 김회는 소목(昭穆)의 차례에 있어 형제가 되므로 명분을 어지럽히는 것 같습니다. 후사를 세우는 법은 전적으로 절사(絶嗣)를 잇는 데에 있을 뿐만 아니라 선유(先儒)들이 말한 종묘(宗廟)의 차례에도 왼쪽이 소, 오른쪽이 목이며 자손들도 그러한 순서로 대묘(大廟)에서 제사를 올립니다. 그 때문에 동성 형제들의 여러 소목이 다 함께 있으면서도 그 차례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경․대부․사(卿大夫士)의 가묘(家廟)의 예도 종묘의 예를 따라 내려가는 것이니, 그렇다면 대종가(大宗家)의 자손을 함께 제사를 지내는 데에는 자연 소목의 순서가 있습니다. 지자를 입후할 경우 별도로 일종(一宗)이 되니, 여러 자손들은 (대종가의 소목의 순서에) 들지 않기 때문에 소목이 문란해지지 않을 뿐만이 아닙니다. 특히 광평대군과 열산정도 4촌 손자로 후사를 세워 이미 전례가 되었으니 소급하여 고칠 수 없습니다. 김효로가 김효지를 계후하는 것은 그대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는 내용의 계목(啓目)이었다. 성화 19년 8월 29일에 우부승지 신 김여석(金礪石)10)이 담당하여 임금에게 보고하였는데 아뢴 대로 윤허한다고 하였다. 이에 입안한다.
…(원문 결락)… 헌[대사헌]11)【착압】
…(원문 결락)… 집의 【착압】
장 령
행지평【착압】
행지평【착압】

[주석]

1) 발괄(白活)
관청에 대하여 억울한 사정을 글이나 말로 하소연하는 일. 소지(所志).[정의:이두자료읽기사전.]
2) 상언(上言)
1. 신하가 사사로운 일로 임금에게 글을 올리던 일. 2. 백성이 임금에게 글을 올리던 일.[정의:국어대사전.] 3. 개인이 국왕에게 올리는 정려(旌閭), 정문(旌門) 등을 위한 문서. 상언은 효자, 충신, 열녀의 정려, 정문과, 효자, 충신, 학행의 증직(贈職)을 위하여 국왕에게 올리는 것이 대부분이다.[정의:韓國古文書硏究.]
3) 소목(昭穆)
종묘나 사당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차례. 왼쪽 줄을 소(昭)라 하고, 오른쪽 줄을 목(穆)이라 하여 1세를 가운데에 모시고 2세, 4세, 6세는 소에, 3세, 5세, 7세는 목에 모신다. 천자(天子)는 3소.3목의 칠묘가 되고, 제후(諸侯)는 2소ㆍ2목의 오며가 되며, 대부(大夫)는 1소ㆍ1목의 삼묘가 된다.[정의:국어대사전.]
4) 승중자(承重子)
돌아가신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제사를 받드는 사람.[정의:국어대사전.]
5) 광평대군(廣平大君)
1425∼1444. 이름은 여(璵). 자는 환지(煥之), 호는 명성당(明誠堂)이고, 시호는 장의(章懿)이다. 세종(世宗)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의 아들이다. 1432년(세종 14)에 광평대군으로 봉해지고 1436년에 신자수(申自守)의 딸과 혼인하였다. 1437년 무안군(撫安君) 방번(芳蕃)에게 입양되었다. 20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6) 무안군(撫安君)
1381~1398. 이름은 방번(芳蕃)이다. 태조(太祖)와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아들이다. 1392년(태조 1) 8월 무안군에 책봉되었다. 태조와 강비의 사랑을 받아 세자로 내정되었으나, 배극렴(裵克廉)·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의 반대로 아우인 방석(芳碩)에게 빼앗겼다. 1398년 8월 정안군(靖安君) 방원(芳遠)이 방석의 세자 책봉과 정도전 일파의 병권 장악에 반대하여 주동한 이른바 제1차 왕자의 난 때 세자 방석과 함께 피살되었다. 1406년(태종 6) 8월 공순군(恭順君)의 시호를 받았다. 1437년(세종 19) 6월 세종의 배려로 광평대군(廣平大君) 여(璵)를 후사로 정하면서 입묘봉사(立廟奉祀)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년) 10월 문종의 시호를 피하여 장혜(章惠)로 개시(改諡)되었다. 1680년(숙종 6) 7월에 무안대군으로 추증되었다.
7) 열산정(列山正)
이름은 이해(李偕)이다.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의 여섯째 아들인 이의(李宜)의 아들이다.
8) 성녕대군(誠寧大君)
1405∼1418. 이름은 종(種)이다. 태종(太宗)과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의 넷째 아들이다. 부인은 창녕성씨(昌寧成氏)로 판원사(判院事) 억(抑)의 딸이다. 처음에는 성녕군(誠寧君)에 봉하여졌다가 1414년(태종 14)에 대군(大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용모가 단정하여 부왕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1417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의 위계에 올랐으나 이듬해 14살의 어린 나이에 홍역으로 죽었다.
9) 조목(條目)
관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질문에 대한 진술서.[정의:이두자료읽기사전.]
10) 김여석(金礪石)
1445∼1493.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은경(殷卿),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강화 부사 수(洙)의 아들이다. 1465년(세조 11)에 진사, 그 해 가을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군자시 주부(軍資寺主簿)·병조 좌랑․사간․사복시 정(司僕寺正)을 거쳐 승정원의 동부승지·우부승지·우승지·도승지와 이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1487년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경상도·강원도의 관찰사, 호조·병조의 참판, 대사헌, 예조 참판, 형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11) 대사헌
사헌부의 입안이므로 그 수장임을 유추하여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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