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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6년 윤덕훈(尹德熏) 완의(完議)    
G002+AKS+KSM-XD.1746.0000-20101008.B003a_003_01294_XXX
 
분류 고문서-증빙류-완의 / 사회-조직·운영-완의
작성주체 발급: 윤덕훈(尹德熏)   , 윤화(尹㦊) , 윤덕희(尹德熙)  
작성시기 1746년 / 병인11월   
형태사항 크기: 53×112 / 낱장, 1장 / 종이 /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 해남 연동 해남윤씨 녹우당  / 현소장처 : 해남 연동 해남윤씨 녹우당  
비고 출판정보 : 『고문서집성 3 -해남윤씨편 정서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본 번역문은 2016년-2017년 한국고문서 정서·역주 및 스토리텔링 연구사업 연구결과물임.
고문서집성 수록정보 『고문서집성』03 / 23. 완의 / 완의1 / 453 ~454쪽
 
1746년(영조22) 종손 윤덕희(尹德熙)와 형제들이 모여 백포동(白浦洞)의 재산 등에 대한 규약을 정한 완의(完議)
 
주제
   종손 尹德熙(1685~1766) 등 9형제가 모여 백포동의 자산에 대한 앞으로의 소유권을 종가로 귀속해야 한다는 논의이다. 문서의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백포동의 가옥 터, 전답, 사면산의 산림 및 사면산 주위의 私田 등은 선조부터 종가의 소유물, 소유지로 하여 연동의 것과 하나로 하였다. 우리 형제 때 와서 토지가 이미 적어져 처음으로 백포의 전답을 분파했는데 이는 선조의 본의가 아니고 일시적인 방편이었다. 전답은 이미 나누었으니 논외로 할지라도 그 외의 祭位田, 牛谷山, 두무포 자산, 숙사동 방축 등을 종가의 소유로 한다. 자손 중 백포동에 살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100세라도 가옥에서 살수 있으나, 이거를 하면 종가에 환속하고 임의로 매각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이를 어기면 형제일지라도 관에 고발하기로 한다. 또한 사면산 산림이 민둥산이 되었으니 산지기를 두어 착실히 관리하며, 산소의 나무지기(田民)를 각 형제들이 함부로 부려서는 안 되고 이후부터 혼인 등 大事 외에는 사역할 때마다 각 가정에서 양식을 주는 등 여러 집에서 함부로 부리는 것을 방지한다. 두무포의 어선세나 염분세 또한 종가에서만 받아들이고, 숙사동 방축도 종물로 관리하기로 한다.'
/ 작성일:2004-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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右文爲完議事 白浦局內家基村基及田畓 以至四面山麓與內外坪私田地外 自祖先以來 定爲宗物宗基 不爲分給於支波與蓮洞爲一軆 及我兄弟田土旣少 故始以白浦田畓分派 雖非祖宗本意 亦一時之權道然田畓則雖己分裂 其外祭位田畓與牛谷山及外野頭椒寺谷斗茂浦長命山望丘蟻島諸防 築此爲宗家所主 此後則雖宗孫 不敢分給支子者也 後來兄弟子孫漸至踈遠 或有不肖者 則恐有爭競難處之事 故今立此條約 俾令後世子孫 知宗物之重大 不敢生意侵犯之意耳
兄弟子孫有願居局內者 則許其營屋居住 雖至百世可矣 而及其移去之後 則所居基址還屬宗家 有任自買賣者 諸子孫皆禁之 雖呈官可也 四面山麓今已濯兀 非但所見愁慘 戶底之人 亦難支保 一依舊例別定勤幹山直 着實禁斷 令山木茂養 諸兄弟不見癸巳匈歲 先考許木爲一村營生之意乎
局內之地 家基及四山原野 雖不耕不家之地 爲支子孫者 不可任意糸私量 雖己糸量 不得仍作己物 畢竟還屬于宗家
諸山所樹木 比之田民 尤爲重大 人人不可任意取用柴炭 此後則雖兄弟 不得任自斫伐使喚之規 孤山先祖垂訓 昭載文集 而今則不問彼此 奴婢作者一倂混同使役 至有合村 收財雇人 以應其役 而猶不勝其煩 戶下之年年離散 未必不由於此 況至蓮洞奴婢作者 有事使役 尤甚不可 此後則昏喪大事之外 其餘種種使役 各家各使其奴婢作者 而各家給粮 母使汎濫貽獘於諸處 罷村底雇人之規 以除一村之無限巨獘大患
斗茂浦魚柵稅與漁船稅及鹽盆稅 亦不可人人作主 此後則令宗家以官奴一一收納
椒寺洞防築 亦雖宗物 灌漑宗物 灌漑之法 可以公共行之 且有灌漑之次第 而古之水道廢而不用 多有爭競 此後則復修古水道 從自然次第而轉注 使無爭競 如不循此令 敢有橫決水道 專利於己田者摘發重治之意 明白知委於各家奴輩作者
後世法令煩密 盖緣人心不古 奸巧百出 難於禁勸 故後世之人 用法如此者 亦不得已也 諸葛武后(侯)之治蜀是也 吾兄弟去古未遠 親承先考之敎者 如在目前 不必强立此規 以懲其不犯之過 而後奴屬漸至踈遠 則必當預定家法 以示來世雲仍 以今觀之 雖似迫阨 古人所謂防微杜漸之意 有知者必不以我爲貪吝而爲罪案 明明在上 何敢誣也
宗孫德熙(手決)七弟德廉(手決)
二弟故代子 (手決)八弟德顯(手決)
三弟德熏(手決)九弟德烋(手決)
四弟德煦(手決)十弟德烝(手決)
五弟故代子(手決)
丙寅十一月 日

이 문서는 완의(完議)를 위한 것이다. 백포(白浦)1)의 구역 안에 있는 집터와 마을 터 및 논밭, 네 면의 산록(山麓)과 안팎 평지에 이르기까지 사전(私田)인 땅을 제외하고는 선조로부터 종가의 물건과 종가의 터로 정하여 지파(支派)에게 나누어주지 않고, 연동(蓮洞)과 한가지로 다루었다. 우리 형제에 이르러서 전토(田土)가 이미 적어졌으므로 비로소 백포의 논밭을 지파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조상의 본뜻은 아니지만 또한 일시적인 임시방편이었다. 그렇지만 논밭이 이미 찢어져 갈라졌다고 하더라도 그 밖의 제위전답(祭位田畓)과 우곡산(牛谷山) 및 외야두(外野頭)2), 초사곡(椒寺谷), 두무포(斗茂浦)3), 장명산(長命山), 망구(望丘)4), 의도(蟻島)5) 등의 여러 방축(防築)은 모두 종가의 소유이다. 이후로는 종손이라고 하더라도 감히 지파의 자손에게 나누어 주지 못한다. 나중에 형제와 자손이 점차 소원해지고 혹시 불초한 자손이 생긴다면, 서로 다투고 난처한 일이 있을까 걱정이 되므로 지금 이 조약을 세워서 후대의 자손으로 하여금 종가 물건의 중대함을 알고 감히 침범할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

형제와 자손 가운데 구역 안에서 살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그 집을 짓고 사는 것을 허락한다. 백대에 이르더라도 좋지만, 그 이사한 후가 되면 살던 터를 종가에 돌려주어야 한다. 마음대로 매매하는 자가 있으면 여러 자손이 모두 금지할 것이며, 관(官)에 소장(訴狀)을 올려도 좋다.

네 면의 산록이 지금 이미 민둥산이 되어 보기에 근심스럽고 참담할 뿐만이 아니라, 집에 거느리고 사는 하인들도 지탱하기 어렵다. 하나같이 옛 규례를 따라서 따로 부지런한 산지기를 정하여 착실히 금단(禁斷)하여 산의 나무를 무성하게 기르도록 하여 여러 형제들이 계사년(癸巳年)의 흉년을 당하지 않게 하라.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나무를 베도록 허락한 것은 온 마을이 살아가도록 하는 뜻이었으리라.

구역 안의 땅에 있는 집터와 사방 산의 언덕과 들은 비록 경작하거나 집을 짓지 않은 땅이라고 해도 지파의 자손인 자가 마음대로 개인적으로 경작하거나 양안에 등록해서는 안 된다. 이미 경작하거나 양안에 등록했더라도 그대로 자기 물건으로 삼을 수 없고 끝내 종가에 돌려주어야 한다.

여러 산소의 나무는 논밭이나 노비에 비하여 더욱 중대하다. 사람마다 마음대로 땔나무와 숯을 취하여 써서는 안 된다. 이후로는 형제라고 하더라도 마음대로 벨 수 없다.

사환(使喚)의 규정은 고산(孤山)6) 선조의 수훈(垂訓)이 문집(文集)에 실려 있는데, 지금은 이쪽저쪽을 불문하고 노비와 소작인을 모두 섞어서 일을 부리고, 온 마을이 재물을 거두어 사람을 고용하여 그 일에 응하도록 하는 데 이르렀는데, 오히려 그 번거로움을 이길 수 없게 되었다. 집안에 거느리고 살던 하인들이 해마다 흩어지는 것이 반드시 여기에서 말미암는 것이다. 더구나 연동(蓮洞)의 노비와 소작인의 경우에는 일이 있을 때마다 일을 부리니, 불가함이 더욱 심하다. 이후로는 혼인과 상사(喪事) 같은 큰일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는 종종 일을 시킬 때 각 집에서 각기 그 노비와 소작인을 부리고, 각 집에서 식량을 주도록 한다. 지나치게 하여 여러 곳에 폐를 끼치게 하지 말고, 마을에서 사람을 고용하는 규정을 혁파하여 온 마을의 무한한 거대한 폐단과 큰 우환을 없애도록 할 것이다.

무포의 어책세(魚柵稅)와 어선세(漁船稅) 및 염분세(鹽盆稅)도 사람마다 주인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이후로는 종가로 하여금 관노(官奴)를 시켜 일일이 거두어 바치도록 한다.

초사동(椒寺洞)의 방축도 비록 종가의 물건이지만 관개(灌漑)의 법은 공공(公共)으로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관개하는 데 차례가 있고, 옛 물길은 폐하고 쓰지 않아서 다투는 일이 많다. 이후로는 다시 옛 물길을 수리하고 자연의 차례에 따라서 돌아가면서 물을 대어 다툼이 없도록 한다. 만약 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감히 함부로 물길을 터서 오로지 자기 논을 이롭게 하는 자가 있다면 적발하여 무겁게 다스리겠다는 것을 각 집의 노비들과 소작인에게 분명히 알릴 것이다.

후대의 법령이 번잡하고 촘촘한 것은 대체로 인심이 예전 같지 않고 갖가지 간교함이 나와서 금하고 권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대의 사람이 이와 같이 법을 쓰는 것은 또한 부득이한 것이다. 제갈량(諸葛亮)이 촉(蜀)을 다스린 것이 이것이다. 우리 형제는 옛날과 멀지 않아 돌아가신 아버지의 가르침을 직접 받든 것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과 같아서 억지로 이러한 규정을 세워서 그 범하지 않은 잘못을 경계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여러 대가 지난 뒤의 자손은 점차 소원하게 될 것이니, 반드시 미리 가법(家法)을 정해 후대의 후손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지금 보면 옹색한 것 같더라도 옛 사람의 이른바 ‘일이 번지기 전에 미리 막는다(防微杜漸)’라는 뜻이니, 아는 자는 반드시 나를 탐욕스럽고 인색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며, 죄안(罪案)이 분명하게 위에 있으니 어찌 감히 속이겠는가.
종손(宗孫) 덕희(德熙)7)[착명] 7제(七弟) 덕렴(德廉)8)[착명]
2제(二弟)9)는 죽고 대자(代子) 화(㦊)[착명] 8제(八弟) 덕현(德顯)10)[착명]
3제(三弟) 덕훈(德熏)11)[착명] 9제(九弟) 덕휴(德烋)12)[착명]
4제(四弟) 덕후(德煦)13)[착명] 10제(十弟) 덕증(德烝)14)[착명]
5제(五弟)15)는 죽고 대자 경(憬)16)[착명]
병인년(1746) 11월 일

[주석]

1) 백포(白浦)
지금의 전라남도 해남군 현산면(縣山面) 백포리(白浦里) 지역. 백방포(白房浦)에서 유래하였는데, 줄여서 백포(白浦)라고도 하였다. 포구의 이름은 백방산(百房山)에 기원을 두고 있다. 백포만(白浦灣)도 같은 기원의 지명이다.
2) 외야두(外野頭)
해남군 현산면(縣山面) 백야지(白也只)의 외야두원(外野頭員)을 가리킴.
3) 두무포(斗茂浦)
해남군 현산면(縣山面) 백포리(白浦里)의 두모포.
4) 망구(望丘)
현산면(縣山面) 백야지(白也只)의 망구원(望丘員)을 가리킴.
5) 의도(蟻島)
현산면(縣山面) 백야지(白也只)의 의도원(蟻島員)을 가리킴.
6)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호.
7) 덕희(德熙)
윤두서(尹斗緖)의 맏아들 윤덕희(尹德熙: 1685~1776).『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참조.
8) 덕렴(德廉)
윤덕렴(尹德廉: 1702~1754). 여섯째는 일찍 죽었음.
9) 2제(二弟)
윤덕겸(尹德謙: 1688~1733).
10) 덕현(德顯)
윤덕현(尹德顯: 1705~1772).
11) 덕훈(德熏)
윤덕훈(尹德熏: 1694~1757).
12) 덕휴(德烋)
윤덕휴(尹德烋: 1710~1753).
13) 덕후(德煦)
윤덕후(尹德煦: 1696~1745).
14) 덕증(德烝)
윤덕증(尹德烝: 1714~1778).
15) 5제(五弟)
윤덕렬(尹德烈: 1698~1745). 정약용(丁若鏞)의 외조부.
16) 경(憬)
윤경(尹憬: 1723-1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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