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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8년 김약룡(金若龍) 결송입안(決訟立案)    
G002+AKS+KSM-XD.1768.4717-20101008.B001a_001_00093_XXX
 
분류 고문서-증빙류-입안 / 법제-소송·판결·공증-입안
작성주체 발급: 안동부(安東府) /수취: 김약룡(金若龍)
작성지역 안동부    /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768년 / 건륭33년1월   
형태사항 크기: 30.2×43.4 / 낱장, 1장 / 종이 / 한자, 이두
소장정보 원소장처 : 안동 오천 광산김씨 후조당  / 현소장처 : 안동 오천 광산김씨 후조당  
비고 출판정보: 『고전자료총서 82-2 광산김씨 오천고문서』(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2) 본 번역문은 2014년 한국고문서 정서·역주 및 스토리텔링 연구사업 연구결과물임.
고문서집성 수록정보 『고문서집성』01 / 4. 입안(계후·노비·토지) / 결송입안7 / 22 ~쪽
 
안동부에서 김약룡에게 발급한 공증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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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隆三十三年正月 日安東府決立案
右立案爲決給事 府居幼學張世衡等呈狀
矣徒七代祖訓導公 卽少監公曾孫之女婿
也 自少監以下連四世墳山 在於府南長仁山
無后絶祀是如乎矣 六代祖▣州牧使公金代之外孫
守護墳山是遣 仍爲繼葬訓導牧使公以下三四世
於金氏墓同麓 守護祭奠凡節 矣家世世擔當
是遣 自是以後 募入山直 購得人丁 開墾田畓 惟此
長仁洞壑一草一木片土尺地 莫非矣家世傳之物
是如乎 往在壬辰年禮安金師國金集枝孫
挈其妻孥 來接墓下 放逐山直 松楸位田 闖生橫
執之計 故矣祖父明言其萬萬不當 欲爲呈卞 則
師國
成表文 乞和矣 逮至庚子量田時 同位田
欲幻弄 改舊量案 張奴守永名書以山直命哲者
故矣祖父又欲呈卞 則彼又成給表文 因循以來矣 金師國身死亡之後 其子東一 無所顧忌 伐木斥土 而專
其財是乎矣 不幸矣等 適遭家禍 未遑呈卞
豈非萬萬寃鬱者乎 矣家古蹟踏印量記金師
兩度表文相考敎後 同墓位田四石落畓七
庫 依法推給亦爲有等以 使之兩造推卞是如乎
禮安金若龍等呈狀內 矣徒十一代祖少監
墳山 在於魯林長仁洞 而十代祖備置畧干田土
定爲墓位 不廢香火 今至三百餘年之久 不意今者 山下近地居張哥 以其先塋亦在於少監公墳墓同
麓之地 乃以矣等十餘代傳來位田 稱以其矣位田
敢生橫奪之計 若此誣訴 極爲無據是齊 所謂
先祖 卽張晋州 而乃少監公之外裔也 古俗淳朴
許葬同麓 其後張哥 以其居在墓所近地 故時或
以外裔來參祭奠時 而矣徒家則所居肖間 至於
位田穀收穫之節 每多疎濶矣 曾於五十餘
年前 張哥忽地生梗 欲爲橫占 故矣等父兄 一審
訟卞 打破奸狀 而更不敢希覬矣 今乃不悛舊習 爲
起訟 極爲無據是乎旀位田營主 自弘治癸
崇禎甲戌以至庚子 皆以矣等山直名懸主是乎
矣 二去壬申年分 矣等先代猶慮山直之或生謀
聯名呈出立旨 據此可知位田之非他人可覬之物
也 彼若有一分自直之端 則何無一辭於累百餘年
而中間落訟之後 一不訟卞之理乎 究其所爲 萬萬
駭憤 細細洞燭後 嚴訟其無理妄作之罪公正決給
亦爲有臥乎所 取考兩度所納文紀 則張世衡
家田或區處文券成於癸巳三月 而末端只以長
仁寺墓田四石落 畓十斗落張哥墓位是如
是遣 元無字號次第詳細開錄事是旀 甲
戌所成田畓私置付記末端書 長仁洞位田 而並
字號第次是乎矣 較准於金若龍等所納 二去
壬申呈出立旨後錄 則畧相似 而至於覇字八十三
之二卜五束田漏落不入是乎所 事生百餘年之前 起訟
百餘年之後 其勢不得以文券爲重 事理參看
是如乎張世衡則雖謂之兩度文書 如是斑斑兩度
受表 至今尙在 明是其矣世傳之物是如爲乎矣
謂文書 或無字號次第 而泛稱墓位田畓幾石落
斗落云云是遣 或書次第字號 而漏落卜數
錄古紙 私自相傳 此其大違文書格式 而虛疎無憑
之甚者是旀金若龍等叚 雖無傳來買得文書
現納之事 而二去壬申呈出立旨中 字號第次
及田畓卜數 斑斑開錄 經官踏印 至今次知 則此其
憑信之緊語哛不喩 以墓山言之 金哥先爲入
葬 二世三世至于四世 則培植松楸 布置田土 欲永
世不替之基者 亦人事之必有 而彼張哥不過以
金哥外裔 借用山地 同力守護 居在近地 來參
墓祭 荏苒多年漸次干涉於墓下土地者 亦明若
觀火是在如中 論以山地 則主客之勢若是係
焉 考諸文券 則眞假之卞 又若是昭昭如此 而謂
張哥墓位者 其可成說乎 且張哥金師國
兩度表文 爲得訟之{木+覇}柄是乎矣 所謂表文措語
不過以先塋之同在一麓 彼此善處 勿爲私自干與
云云 其在同山所共守護之義 不欲煩作鬧端 有
此姑安之計 此不足大爲此訟立落之端是遣
況旀兩度表文中 其所着押 大相不同 金師國
之親自書給 亦未可知是如乎訟理旣如此 則前後量案中 母論張奴
山直迭相懸主 尤非可論於訟之肯緊是乎等以張哥白文置付記中
所謂墓位田云云者 一倂墨抹是遣 所爭田畓叚 依
決給金若龍等處是乎矣字號之更字覇
字 卽今量案中 改以貽字厥字乙仍于 後錄中
從時用書塡以給去乎 以憑後考次合行立案者

行府使(押)
後長仁洞員 眙字五十八田貳拾負貳束
    五十九田玖負玖束
    六十田玖負陸束
    六十一田伍負玖束
    六十二畓參負貳束
    厥字十七田拾肆負壹束
    十六反畓肆負伍束
    卅七田壹束

          (官印, 方9cm 二五個)

건륭(乾隆)1) 33년(1768년, 영조 44) 1월 일 안동부 결송 입안
이 입안은 결급(決給)2)에 관한 일이다. 본부에 사는 유학 장세형(張世衡) 등이 올린 소지에 “저희들의 7대조인 훈도공(訓導公)은 바로 소감(少監) 김공(金公) 증손의 사위입니다. 소감부터 아래로 연이은 4대의 산소가 본부 남쪽 장인산(長仁山)에 있는데 후사가 없어 제사가 끊어졌습니다. 6대조인 □[진]주 목사공(□[晉]州牧使公)은 김씨 문중의 외손으로 산소를 수호하고 이어 훈도공과 목사공 이하 3, 4대를 김씨 묘와 같은 산기슭에 계장(繼葬)3)하였으므로, 산소를 수호하고 제사 지내는 일들은 저희 집에서 대대로 담당하였습니다. 이 뒤로 산지기를 모집하여 들이고 인부를 사서 전답을 개간하였으니, 이 장인동 산의 풀 한 포기 나무 하나 한 줌 흙은 모두 저의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온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임진년(壬辰年)에 예안(禮安)에 사는 김사국(金師國)이 김집지(金集枝)의 손자로서 그 가솔들을 거느리고 산소 아래와 와서 살면서 산지기를 내쫒고 틈을 노리며 송추(松楸)와 위전(位田)4)을 멋대로 차지할 계획을 내었습니다. 그 때문에 저의 조부께서 분명하게 만부당하다고 말씀하시며 소지를 올려 밝히고자 하였더니 김사국이 표문(表文)을 작성해 화해를 청하였습니다. 경자년(庚子年) 양전(量田)할 때가 되었을 때 위의 위전에 대해 몰래 농간을 부려 옛 양안(量案)5)을 고치고 노 장수영(張守永)의 이름을 산지기 명철(命哲)이라고 썼습니다. 그 때문에 저의 조부께서 또 소지를 올려 밝히고자 하니, 저 사람이 또 표문을 작성해 주어 그대로 지금까지 왔습니다. 김사국이 죽은 뒤에 그 아들인 동일(東一)이 아무 거리낌없이 나무와 베고 흙을 치우며 그 재산을 독점하였습니다. 불행하게도 마침 그때 저희들이 집안의 재앙을 당해 소지를 올려 변별할 겨를이 없었으니 어찌 너무도 원통하고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저희 집안에 있는 옛 문서로 관인이 찍힌 양안과 김사국이 준 두 통의 표문을 살피신 뒤에 동 묘위전(墓位田) 4섬지기[石落]와 논 7마지기[斗落]를 법에 따라 찾아서 제출하라고 하고 저희 양쪽 사람들을 나와 변론하게 하셨습니다.” 하였다. 예안에 사는 김약룡(金若龍) 등이 올린 소지에 “저희들 11대조인 소감공(少監公)의 산소가 노림(魯林) 장인동에 있는데, 10대조께서 약간의 토지를 마련하여 묘위(墓位)로 정하고 제사를 폐하지 않은 지 지금 3백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산 아래 근처에 사는 장가가 자기네 선영이 소감공의 산소와 같은 산기슭에 있다는 이유로 곧장 저희들 10여 대 동안 전해온 위전을 자기네 위전이라고 하면서 감히 멋대로 빼앗을 계획을 내고 이처럼 무고하니 너무도 근거가 없습니다. 이른바 장가의 선조는 바로 장 진주(張晉州)로 소감공의 외손입니다. 옛 풍속이 순박하여 같은 산기슭에 장사 지내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그 뒤에 장가는 자기가 묘소 근처에 살고 있기 때문에 때때로 외손으로 제사를 지낼 때 와서 참여하였습니다. 저희들 집은 사는 곳이 조금 떨어져 있기 때문에 묘위전의 곡식을 수확하는 일은 매번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50여년 전에 장가가 갑자기 분란을 만들어 그곳을 멋대로 차지하고자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저희들 부형이 한 번 소송을 하여 간교한 실상을 타파하여 다시는 감히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옛 습성을 고치지 못하고 이렇게 송사를 제기하여 너무도 근거없는 짓입니다. 게다가 위전을 경영하는 사람은 홍치(弘治)6) 계축년(1493년, 성종 24), 숭정(崇禎) 갑술년(1634년, 인조 12)부터 경자년(1660년, 현종 1)까지 모두 저희들의 산지기 이름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지지난 임신년(1692년, 숙종 18)에 저희들 선대에서도 산지기가 혹 차지할 계획을 세울까 염려하여 연명으로 소지를 올려 입지(立旨)7)를 받았으니, 이것을 근거하면 위전은 다른 사람이 바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들이 만약 조금이나마 자신들이 맞다는 단서가 있다면 어찌 수백여 년이 지나는 동안 말 한마디 없었겠으며, 패소한 뒤에 한 번도 소송해 변론하지 않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들이 한 행동을 따져보면 너무도 해괴하고 분통합니다. 세세하게 살피신 뒤에 그들의 도기에 안 맞게 함부로 행동한 죄를 엄격하게 따져 공정하게 결급해 주십시오.” 하였다. 그들이 납부한 두 통의 문기를 가져다 살펴보니, 장세형의 종가 밭에 대해 혹 처리한 문기를 계사년 3월에 작성하였는데 마지막에 다만 ‘장인사(長仁寺) 묘전(墓田) 4섬지기와 논 10마지기는 장가의 묘위이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을 뿐이고, 자호(字號)8)를 차례대로 상세하게 기록한 일은 애초에 없다. 갑술년에 개인적으로 작성한 전답치부기(田畓置付記)의 말단에는 ‘장인동 묘위전’이라고 쓰고 자호의 순서도 아울러 기록하고 있다. 김약룡 등이 제출한 지지난 임신년에 소지를 올려 받은 입지의 후록(後錄)과 비교해보니, 대략 유사하긴 였는데 핵(覇) 자 83의 2복(卜) 5속(束) 밭이 누락되어 들어가 있지 않다. 일은 1백여 년 전에 발생했고, 소송을 1백여 년이 지난 뒤에 하니, 형편상 문권을 가지고 중요도를 따질 수는 없고 사리로서 참작해 보아야 한다. 장세형은 비록 두 통의 문서라고는 하지만 이처럼 얼룩덜룩한 두 통의 표문을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대대로 전해오는 물건임에는 틀림없다. 이른바 문서에 혹 자호의 차례가 없고 범범하게 묘위전답 몇 섬지기 몇 마지기라고 있거나 혹은 자호의 차례를 있지만 복수(卜數)를 누락시키고 오래된 종이에 몰래 기록하여 사사로이 전하고 있으니, 이는 문서의 격식에서 크게 벗어나고 매우 허술하여 증빙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김약룡 등은 비록 전래된 매매문서를 현납(現納)한 일은 없지만 지지난 임신년에 소지를 올려 입지를 받은 것 가운데 자호의 차례와 전답의 복수를 뒤섞어 수록하고 관의 입안을 거쳐 관인을 찍은 것을 지금까지 가지고 있으니, 이는 증빙자료로서 긴요한 것일 뿐만 아니라 산소를 가지고 말한다면 김가가 먼저 장사를 지냈고, 2대 3대를 지나 4대에 이르러서는 송추를 재배하여 전답에 심어 영원토록 바뀌지 않을 터전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또한 인간사에 반드시 있는 일이다. 장가는 불과 김과의 외손으로 산지를 빌려 쓰고 함께 수호하였으며, 산소 근처에 살면서 묘제(墓祭)에 와서 참여하였을 뿐이었는데, 어느덧 오랜 시간이 지나 점차 묘 아래의 토지를 간섭하게 된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산지(山地)로서 논한다면 주객의 형세가 이처럼 구분되고, 문권으로 살펴보면 진위가 이처럼 분명한데 장가의 묘위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게다가 장가는 김사국이 준 두 통의 표문을 가지고 승소한 중요 물건으로 삼고 있는데 이른바 표문에서 한 말은 ‘선영이 한 곳에 함께 있으니 피차간에 잘 처리하여 사사로이 간여하지 말자’는 것이다. 산을 같이 쓰는 이들이 함께 수호하는 의리에 있어서 번거롭게 분란의 단서를 만들고자 하지 않고 이처럼 잠깐 편안한 계획을 세웠으니, 이것은 이 소송에 있어 패소의 단서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더구나 두 통의 표문 가운데 착명착압한 것이 크게 서로 같지 않고, 김사국이 직접 써서 주었다는 것도 알 수 없는 바이다. 소송의 이치가 이미 이와 같으니 전후의 양안 가운데 장노와 산지기가 번갈아 주인으로 이름을 올린 것을 따지지 말 것이다. 특히 소송의 중요도에서는 논할 바가 아니기 때문에 장가의 백문 치부기 가운데에서 이른바 묘위전 운운한 것을 일체 먹으로 지우고, 분쟁 대상인 전답은 법에 따라 김약룡 등에게 결급한다. 자호 중에서 경(更) 자와 핵(覇) 자는 바로 지금의 양안 가운데 이(貽) 자와 궐(厥) 자로 고쳤기 때문에 후록한 것에서 당시의 용도에 따라 써서 채워 주고, 후일 상고할 때 증빙이 되도록 입안한다.
행부사【착압】

장인동원(長仁洞員) 이(眙) 자 58전 20부(負) 2속(束)
     59전 9부 9속
     60전 9부 6속
     61전 5부 9속
     62답 3부 9속
     궐(厥) 자 17전 14부 1속
     16번답(反畓) 4부 5속
     37전 1속

[주석]

1) 건륭(乾隆)
중국 청(淸)나라의 제6대 황제인 고종(高宗, 1711~1799)의 연호이다.
2) 결절(決折)
결정하여 줌. 곧 소송에 대하여 판결을 내려 줌.[정의:국어대사전/특수용어용례사전.]
3) 계장(繼葬)
조상의 묘 바로 아래에 이어 자손을 장사(葬事)하는 것을 말한다.
4) 위전(位田)
수확을 향사(享祀) 등의 일정한 목적에 쓰기 위하여 장만한 전토(田土).[정의:특수용어용례사전.]
5) 양안(量案)
토지 측량의 결과를 기재하는 장부. 곧 논, 밭의 소재지(所在地), 자호(字號), 위치, 등급, 형상(形狀), 면적, 사표(四標), 소유주(所有主) 등을 기록한 원장(原帳).[정의:특수용어용례사전.]
6) 홍치(弘治)
중국 명(明)나라의 제9대 황제인 효종(孝宗, 1488~1505)의 연호이다.
7) 입지(立旨)
신청서(申請書) 또는 원서(願書)의 말미(末尾)에 신청 또는 원하는 사실을 입증하는 뜻을 부기(附記)한 관아의 증명.[정의:특수용어용례사전.]
8) 자호(字號)
전답(田畓)의 번호(番號). 번호를 붙이는데 [천자문(千字文)]의 글자 순위를 이용하였기 때문에 자호(字號)라고 함.[정의:특수용어용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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