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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7년 김순의(金純義)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G002+AKS+KSM-XE.1667.4717-20101008.B001a_001_00337_XXX
 
분류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작성주체 발급: 김명현(金命賢) /수취: 김순의(金純義)
작성지역 예안현    /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667년 / 정미2월초2일   
형태사항 크기: 50.2×30.6 / 낱장, 1장 / 종이 / 한자
서명(개) 착명:1
소장정보 원소장처 : 안동 오천 광산김씨 후조당  / 현소장처 : 안동 오천 광산김씨 후조당  
비고 출판정보: 『고전자료총서 82-2 광산김씨 오천고문서』(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2) 본 번역문은 2014년 한국고문서 정서·역주 및 스토리텔링 연구사업 연구결과물임.
고문서집성 수록정보 『고문서집성』01 / 10. 토지문기류 / 토지매매명문2 / 216 ~쪽
 
1667년 김명현이 김순의에게 밭을 판 매매계약서
   1667년(현종8)김명현김순의에게 밭을 팔면서 작성한 매매계약서이다. 김명현은 외가가 있는 의성에 살고 있었다. 그의 밭은 예안현 오천면에 있는 광산김씨 사우 앞에 있어 종손인 김순의가 여러 차례 팔라고 청하여 이번에 팔게 된 것이다.
 
1667년(현종8)김명현이 김순의에게 토지를 판 매매계약서.
내용 및 특징
   幼學 金命賢이 6촌 동생인 金純義에게 田地을 팔며 작성한 土地賣買文記이다. 김명현禮安 烏川面에 7斗落只의 田地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外鄕인 義城에서 사는 데다 해당 토지가 大宗家 祠宇 앞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宗孫인 金純義가 여러 차례 팔기를 청하여 放賣한다고 事由를 밝히고 있다. 방매된 土地는 7斗落只 중 祠宇 앞에 있는 밭 3斗落只이고 가격은 正木 2동으로 立標하여 放賣하였다.
   正木은 품질이 매우 좋은 무명이다. 同은 무명을 세는 단위로 50匹이며, 한 匹은 35尺이다. 斗落只는 곡식 한 말의 씨를 뿌릴 수 있는 넓이로 현대용어로는 마지기이다. '分叱不喩'는 '~뿐 아니라'는 의미의 이두자이다. 祠宇는 先祖 또는 先賢의 神主나 影幀을 모셔둔 장소를 말한다. 본문에서 祠宇라는 글자 앞에 자리를 비워둔 것은 祠宇를 존중하기 위한 것이다.
   金純義는 光山金氏 禮安派의 27대 宗孫으로 아들인 金岱1747년(英祖23)嘉善大夫가 됨에 따라 같은 해에 嘉善大夫 司憲府 大司憲으로 贈職되었다.
   筆執과 證人을 별도로 세우지 않고 賣渡人인 金命賢이 自筆로 작성하였으며 해당 토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 없이 면적만을 기록하였다.
   보물 제1018호 광산김씨예안파종가소장고문서
「朝鮮初期 5結字號의 成立過程」, 이영훈, 『古文書硏究』12, 1997
            『韓國法制史攷』, 박병호, 법문사, 1974
전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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康熙陸年丁未貳月初貳日同姓六寸弟幼學金純義明文
明文爲臥乎所事段矣宗家代田柒斗落只庫伏在禮安烏川
爲乎矣矣亦旣不能居生於厥基而來寓外鄕義城地{分+叱}不喩
亦且其田以其近於大宗家 祠宇之前是乎等以金純義亦再再
請買爲去乙矣亦其矣正木貳同依數凖捧爲遣同代田柒
只內 祠宇前參斗落庫乙立標放賣爲去乎後次雜談
爲去乙等用此文告官卞政事
田主自筆幼學金命賢[着名]
김명현이 김순의에게 가대전 7마지기를 6촌 아우에게 팔며 작성한 매매문서

강희 6년 정미년 2월 초2일 동성육촌동생 유학 김순의(金純義)에게 주는 명문(明文)
이 명문은 작성하는 일은 다음과 같다. 나의 종가(宗家) 소유의 대전(代田) 중 7마지기가 예안(禮安) 오천면(烏川面)에 소재하고 있는데, 내가 그 곳에서 거주할 수 없게 되어 고향 밖인 의성(義城)지역으로 나와 머물게 되었으며, 또한 그 대전의 근처에는 대종가(大宗家)의 사우(祠宇)가 위치하고 있는 연유로 위 김순의가 번번이 그 곳을 사들이고자 나에게 요청해왔었다. 그러므로 내가 김순의에게 정목(正木) 2동(同)으로 값을 정하여 수대로 정확히1) 받고 위 대전 7마지기 가운데 대종가 사우 앞의 3마지기를 입표(立標)하며 방매(放賣)하므로 차후에 이의를 제기한다면 이 문서를 이용하여 관청에 고하여 바름을 가릴 일이다.2)
전주(田主) 자필(自筆)3) 유학(幼學) 김명현(金命賢) (착명)4)

[주석]

1) 의수(依數)
방매인과 매득인 상호간에 정하게 된 확정금액을 정확하게 인지하였고, 그에 따라 매매대금으로 授受하는 금원의 액수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일이다.
명문의 말미에는 해당거래와 관련된 사람들이 차후에 본 거래에 대하여 이의나 분쟁을 제기할 경우 이 명문을 증빙문서로 삼아 관청에 신고하여 바로잡으라는 투식적인 기재가 있는데, 이를 추탈담보문언(追奪擔保文言)이라고 한다. 거래대상의 권원이나 매매이유에 따라 관련인의 부류는 달라지기도 하지만, 관행적으로 ‘자손족속(子孫族屬)’, ‘동생형제족속(同生兄弟族屬)’ 등 범칭하는 경우가 많다. ‘同生 子孫’은 해당 거래에 대한 방매인 측의 이해관계인이라고 할 것이다. 투식적으로 나오는 문구이기는 하지만, ‘子孫 族類’ 또는 ‘同生(형제) 子息’ 등등은 방매인과 혈연적 신분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이며, 해당 재산과는 법률적으로 상속, 증여, 교환, 매매 등의 관계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아울러 방매 인이 가족관계 및 신분관계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냐에 따라 지칭하는 이해관계인 또는 분쟁을 제기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의 범위가 변화할 수 있다. “지차문기고관변정사(持此文記告官卞正事)” 등의 담보문언이 명문말미에 항시 투식적으로 적혀있다는 사실은 명문(明文)이라는 거래문서가 단순히 거래의 기록을 남기는 용도로만 쓰였던 것이 아니라, 이 명문이 차후 분쟁시 재판에서 거증책임의 주요수단으로 자격을 갖춘 증거능력있는 증빙문서의 역할도 동시에 담당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시대의 공식적 사법행정에서는 물론 그 이외의 분쟁해결에 있어 철저히 증거주의를 채택하고 있었고, 또한 국가적 공공적 차원에서 작성되어지는 양안(量案)이나 노비안(奴婢案) 등에서 누수되는 부분을 보완하고 때로는 주도하는 관점에서 사인(私人)이 사적자치(私的自治)의 결과물로 작성한 개개의 문서가 얼마나 중요하게 관념되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추후의 분쟁에 대한 해결방안에 대해 상세한 기록을 하지 않고 관청에 신고하라고 한 이유는 관청에서 경국대전 등의 제반 거래법규에 의거하여 분쟁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시스템이 정립이 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이며 해당 명문만 확실히 존재한다면 분쟁에서 승소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렇듯 조선시대 거래에서 증빙문서의 여부에 따라 분쟁의 판가름이 나는 원칙을 법언(法諺)으로 “종문권 시행(從文券 施行)”이라고 하였으며 이 관행은 거의 절대적으로 준수되었다. 이는 곧 현대사회에서 매매계약 체결 후에 발생할 수 있는 매도물(賣渡物)의 하자담보책임(瑕疵擔保責任)에 관련한 분쟁의 경우에 그에 대한 해결을 관(官)의 처분에 귀속시키도록 한 것을 알 수 있다.
3) 자필(自筆)
이는 방매인인 물건의 주인이 별도의 필집을 거래에 참여시키지 않고 직접 해당 명문을 작성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답주자필(畓主自筆) 혹은 전주자필(田主自筆) 등의 경우가 있으며, 특이하게는 자수필집(自手筆執), 전주자필집(田主自筆執), 자필전주(自筆田主)의 경우도 다소 나타난다. 그리고 전답주가 유학(幼學) 등 양반층으로 필집없이 자필할 때에는 증인과 증보가 없는 경우도 상당히 있다. 이 경우 입안을 받는 형식조건인 증인이나 증보, 필집이 따로 없는 것으로 보아 그만큼 입안절차를 거치지 않는 소위 백문매매(白文賣買)가 관행화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 (착명)
명문이 계약증서이기 때문에 참여한 사람들의 진정성을 밝히는 서명을 하게 된다. 당시에는 명문의 말미에 기명(記名)을 한 뒤 수촌(手寸, 가운데 손가락의 본을 뜬 것)과 착명(着名, 이름자의 변형을 가하여 서명화한 것)을 주로 하였는데, 오늘날의 사인(signature)과 같은 의미와 효력을 지니는 것으로 그 신분과 지위의 고하에 따라 또는 문맹(文盲)여부에 따라 서명방식을 달리 하였던 것이다. 또한 성별에 따라 남자는 좌촌(左寸), 여자는 우촌(右寸)을 하기도 하였다. 수촌이외에도 손바닥의 본을 떠서 그리고 그 안에 ‘우장(右掌)’이나 ‘좌장(左掌)’이라고 써 넣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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