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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년 김무암(金戊巖)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G002+AKS+KSM-XE.1792.4717-20101008.B001a_001_00353_XXX
 
분류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작성주체 발급: 김시영(金是瑛) /수취: 권범흥(權範興) , 김무암(金戊巖)
작성지역 예안현    /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792년 / 건륭57년 임자 11월 13일   
형태사항 크기: 39×46.7 / 낱장, 1장 / 종이 / 한자, 이두
서명(개) 착명:2
소장정보 원소장처 : 안동 오천 광산김씨 후조당  / 현소장처 : 안동 오천 광산김씨 후조당  
비고 출판정보: 『고전자료총서 82-2 광산김씨 오천고문서』(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2) 본 번역문은 2014년 한국고문서 정서·역주 및 스토리텔링 연구사업 연구결과물임.
고문서집성 수록정보 『고문서집성』01 / 10. 토지문기류 / 토지매매명문18 / 219 ~쪽
 
1792년 김시영이 김무암에게 밭을 파는 매매계약서
   1792년(정조16)김시영김무암에게 밭을 파는 매매계약서이다. 파는 이의 이름은 "김"이라고만 기록되었다. 광산김씨가에 전하는 다른 매매계약서인 '1792년 권의겸 토지거래 계약서'의 파는 이 김시영도 동일한 서명을 남겨 두 사람이 같은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서명은 본인을 확인하는 중요한 기록방식이었다.
 
1792년(정조16)김시영이 김무암에게 토지를 파는 매매계약서.
내용 및 특징
   이 문서의 거래는 1792년(正祖16)에 성립되었다. 여기에서 田主는 이라고 만 기록되어 있으나 1792년 權義謙 토지매매명문의 방매자 金是瑛과 착명이 동일하여 양 인이 동일인임을 확인할 수 있다.김시영은 간절히 쓸 일이 있는 까닭으로 집안에 전해져 오던 江亭洞員 厥字 17田 內 5負 2斗落只의 곳을 錢 22兩을 받고, 방매하였다. 또 후에 이 일로 인하여 族類 중에 문제를 제기하는 자가 있거든, 本價를 환불하고 田을 다시 돌려받겠다고 덧붙이고 있다. 田主 스스로 문서를 작성하고, 業儒 權範興이 증인을 섰으며, 각각 姓名 기입 후 着名하였다.
   厥字畓 17田에 대한 또 다른 매매사건을 광산김씨가에 전하는 金是瑛 방매 토지매매명문 2점에서 또한 찾아 볼 수 있다.
『광산김씨오천고문서』, 韓國精神文化硏究院,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2
            「朝鮮初期 5結字號의 成立過程」, 이영훈, 『古文書硏究』 12, 1997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崔承熙, 지식산업사, 1989
            『韓國法制史攷』, 朴秉濠, 法文社, 1983
유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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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隆五十七年壬子十一月十三日金戊巖
明文
右文爲切有要用事傳來田江亭洞
厥字十七田內伍負二斗落
庫乙價折錢文貳拾貳兩依數
捧上爲遣右人處放賣是乎矣日後
族類中或雜談是去等還本價還退
事持此文告 官卞正事
田主自筆幼學[着名]
證業儒權範興[着名]
김시영이 김무암에게 전 2마지기를 전문 22냥에 팔며 작성한 매매문서

건륭 57년 임자년 11월 13일 김무암(金戊巖)에게 주는 명문
이 명문을 작성하는 것은 긴히 쓸 곳이 있기 때문이다. 조상으로부터 전래되어 오던 강정동원(江亭洞員)에 소재한 궐자(厥字) 17번 밭 중에 결부수가 5부인 곳으로 면적이 2마지기인 곳을 전문 22냥으로 값을 정하여 수대로 정확히 받고자 하고 위 사람에게 방매한다. 차후에 나의 가족 중에 혹시라도 이의가 있을 경우에는 해당 금액을 돌려주고 환퇴(還退)하도록1) 환퇴는 일반적으로 ‘되물린다.’라는 뜻으로 해석되며, 현대사회의 환매(還買, 넓은 의미로 매도인이 한 번 매도한 물건을 대가를 지급하고 다시 매수할 것을 약정하는 계약)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물건의 매매계약을 체결할 당시에 환퇴의 특약을 한다는 것은, 일정기한이 도래하거나 일정조건이 성취되면 방매했던 목적물에 대하여 약정가액(約定價額)을 지불하고 다시금 돌려받을 수 있음을 약정하는 것을 말하게 된다. 특히 토지의 매매는 원칙적으로 영구적, 무조건적이며 명문에도 반드시 ‘영영방매(永永放賣)’의 문구를 기재하였다. 그러나 한편 토지는 소유자에게는 명맥(命脈)이며 애착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부득이 한 이유로 방매하였더라도 후일에 자력(資力)이 생길 때에는 반드시 환퇴하고자 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며 국가 측에서 보더라도 납세의무자인 소유권자의 변동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나아감이 당시의 정책이었다. 또한 부득이한 경우에 방매하는 측은 대부분 빈천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정책적으로, 매매된 토지를 원소유자에게 복귀하도록 노력하였다. 아울러 농경사회였던 조선시대의 상황에서는 자신의 사유 토지는 당시 소유자와 일체로 여길 정도로 매우 중요한 재산으로 관념되었다. 그러므로 실제 이를 영구히 방매한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부채나 빈한(貧寒)이나 생계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생명을 유지해 나가기 위한 자금이 절실할 경우에 한하여 잠시 동안만 방매하고 차후 여력이 생기면 이를 다시 매입하여 자신의 지배와 이용권역내로 들이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몇 달 혹은 1~2년 정도의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만 잠시 방매한다는 의미에서 권매(權賣)나 차후에 되물려 산다는 환퇴가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토지는 물론이고 일단 매매를 하여 소유권을 득하게 되는 매득인 측으로서는 방매인 측이 거래목적물을 자신에게 영구히 팔아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관념이 조선시대 매매명문에도 기재사항으로 자리 잡게 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러므로 ‘영영방매’라는 문구는 처음에는 매득인 측에서 방매인 측에 요구하여 문구를 넣게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그러한 문언 기재의 관행이 조선시대 전반동안 지속적이면서도 강력하게 유지되어 왔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영구 매도 문구는 거래 당시 및 일정기간뿐만 아니라, 차후 거래행위의 취소나 매매목적물의 반환을 방매인 측 혹은 이해관계인이 제기를 하더라도 재판 시 이 문구로 인해 환퇴, 반환을 요구하는 측은 패소할 수밖에 없는, 매우 투식적인 듯 보이지만 법적 효력면 에서 중요한 기재사항이 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즉 명문에 나타나는 영매문구은 해당 거래목적물이 영구적 매도를 약속하는 문구인 동시에 조선시대 혹은 그 이전의 일정시기부터 전체적으로 점점 발달하게 된 사유의식의 징표이며, 각종 재산의 소유권이전에 있어 거래의 안전을 보장하는 표현이었음을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할 일이며, 아울러 이 문서를 가지고 관청에 신고하여 바로잡을 일이다.
전주(田主) 자필(自筆) 유학(幼學) 김(金) (착명)
증인(證人) 업유(業儒) 권범흥(權範興) (착명)

[주석]

1) 환퇴(還退)
토지 등에 대한 매매 거래에 있어서 목적물을 영구적으로 상대방에게 넘기는 것이 아니라 일정기한을 약정하여 해당 기한이 만료되는 시점에서 다시 목적물에 대해 가액을 지불하고 반환받는 것이다. 임시로 잠깐 팔았다가 다시 되사서 물건을 돌려받는 것으로 ‘권매(權賣)’라고도 한다. 이는 방매인 측이 금전이 필요할 때 목적물을 담보로 금전을 빌리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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