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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9년 윤선도(尹善道) 윤선도소장전답문권(尹善道所藏田畓文券)    
G002+AKS+KSM-XG.1649.0000-20101008.B003a_003_01129_XXX
 
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전답안 / 경제-농·수산업-전답안
작성주체 발급: 윤선도(尹善道)   /수취: 이성(李垶)   , 윤선도(尹善道)   , 엄정구(嚴鼎耈)  
작성시기 1649년 / 기축년5월29일   
형태사항 크기: 91×60 / 낱장, 1장 / 종이 /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 해남 연동 해남윤씨 녹우당  / 현소장처 : 해남 연동 해남윤씨 녹우당  
비고 출판정보 : 『고문서집성 3 -해남윤씨편 정서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본 번역문은 2016년-2017년 한국고문서 정서·역주 및 스토리텔링 연구사업 연구결과물임.
고문서집성 수록정보 『고문서집성』03 / 9. 문권류 / 아. 묘위답 / 묘위답1 / 416 ~418쪽
 
1649년(효종 즉위) 윤선도 외 해남윤씨 가문에서 묘위답을 마련하고 작성한 입의(立議) 성격의 문권
 
주제
   이 문서는 고산 윤선도가 작성한 것으로, 집안 선대 조상들의 묘산 수호와 香火 不絶을 위해 만든 일종의 立議와 비슷한 내용의 문서이다. 즉 조상의 묘소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親盡한 후 墓祀도 끊어지는 등 조상에 대한 사후봉양이 소홀해지자 묘직을 세워 영구히 관리할 조처를 세웠다. 그것은 내외손 중 성인이 된 이들이 모두 正木 1필, 正米 1두씩을 갹출하고, 매년 9월 15일에 제사를 설행토록 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각기 논 약간씩을 내어 묘위답으로 삼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묘위답 설정의 취지를 기록한 후 윤선도를 필두로 이러한 立議에 뜻을 같이한 이들을 列錄하였다. 그리고 文記가 閪失될 것에 대비하여 15장의 문기를 만들어 각자 所藏하기로 하고 문기 소장처도 기록하고 있다. 이 문서는 그 중 "參議 尹善道宅"에 소장되었던 문서이다. 말미에는 각각이 내놓은 묘위답을 재록하고 각자 수결을 하여 이를 명문화하고 있다. 조선후기 성리학적 가계계승과 조상 봉양에 대한 의식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용어
   묘위답이란 조상의 분묘 관리와 향화를 위한 財用의 마련을 위해 설정해 놓은 토지를 말한다.

인물
   윤선도(1587~1671)는 호가 孤山 또는 海翁이다. 30세 때 이이첨의 전횡에 대해 임금에게 상소하였다가 함경도 경원에 유배되었고, 이듬해 경상도 기장으로 移配되었다가 37세가 되자 인조반정으로 解配되어 고향인 해남으로 돌아왔다. 42세에 문과초시에 장원급제하였고,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師傅가 되었다. 병자호란으로 우여곡절 끝에 보길도에 들어가 부용동에서 오래 머물렀으며, 그 후 당쟁의 여파로 유배와 탄핵을 거듭 당한 끝에 81세에야 유배에서 풀려났다. 공조정랑, 예조참의, 공조참의 등 다양한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산중신곡 등 가사 작품으로도 알려진 인물이다. 시호는 忠憲이다.
/ 작성일:2004-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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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參議善道宅所藏文券
己丑年五月二十九日坡山 先祖墓位畓立券
坡山 六代祖考 贈通訓大夫通禮院左通禮府君墓 祖妣 贈淑人宋氏墓 五代祖考 贈通政大夫兵曺參議府君墓 祖妣 贈淑夫人李氏墓 祖妣 贈淑夫人鄭氏墓宗家親盡主祀無人內
外諸孫幾過千餘人而香火永絶樵牧不禁坐視 墳墓頹毁漫滅則豈人情天理也哉是以諸孫相議義起限內外孫成人者各出正木一疋正米一斗輪定近 墓姓孫歲二人主管米布每歲九
月十五日設 祭 六代祖考墓前祔 妣一位共一卓 山神一卓 五代祖考墓前祔 妣兩位共一卓 山神一卓定規此盖倣古禮歲率宗人一祭之意亦依我 國名家近例也當初欲令每歲主管
有司給貸取息以永其事而亦恐歲久則弊生又謀貿置 祭位畓於近 墓之處而地貴價踊卒難如意不得已諸孫相議量宜受價於有司各出好畓若干斗而畓錄則各自筆書之着
署一樣爲券十五道分送表表諸孫家以備兵火閪失久後畓主子孫或有雜言則現在諸孫相率告官重論事
一左錄 墓位畓每歲主管有司親自監收元數上冊 祭用後遺在上冊徭役種子則與翌年有司交遞時量宜議除永爲千秋恒式事
證參立議諸孫
通訓大夫前行世子侍講院文學尹善道[着名]
前行兵曺正郞李垶
通訓大夫前行吏曺正郞嚴鼎耈[着名]
幼學尹善繼[着名]

幼學尹善覺[着名]
尹俊慶[着名]
尹應慶[着名]
尹東老[着名]
尹邦壽[着名]

幼學李榮仁[着名]
尹一遇[着名]
尹再遇[着名]
白明憲[着名]
尹回天[着名]

文記分藏諸孫家
前文學尹善道家一道
前正郞李 垶家一道
前正郞嚴鼎耈家一道
幼學尹善繼家一道
尹善昌家一道

幼學尹善覺家一道
尹俊慶家一道
尹東老家一道
尹邦壽家一道
生員尹仁美家一道
幼學李榮仁家一道

幼學尹一遇家一道
尹再遇家一道
白明憲家一道
尹回天家一道

畓錄 坡之大 墓下柿木員伏知字畓正種五斗落十六卜五束庫 六代孫通訓大夫前行世子侍講院文學尹善道[着名][署押]
六代祖 五代祖兩代奉祀條田畓必多而宗孫尹致敬代盡 祠堂香火久絶則其奉祀田畓理當沒數推出以爲 墓祭
之用而尹致敬旣歿只有其孫七歲兒無蹤可問故不得已隨所聞尹致敬家奉祀條尹哲成放賣畓五斗落
推出以補 墓祭之用立議諸子孫同議定奪而煩不衆署以簡文券
筆執幼學尹善徵[着名]
靈巖八馬里乭毛老醎字畓四夜未正種陸斗落拾玖卜玖束量必山
尙白畓南川
西朴判官畓北山
同員同字畓參夜未正種伍斗落拾柒卜捌束量必山
東守陽畓南
吐西北必山畓
可作洞淡字畓伍夜未正種玖斗落一庫中二作拾卜四束拾捌卜參
束合貳拾捌卜柒束量必山
注叱介畓南
西吐北必山陳畓
已上正種貳拾斗落
善道家業優於
諸族故不受價
畓主六代孫通訓大夫前行 世子侍講院文學尹善道[着名][署押] 筆執子生員仁美[着名]
康津波之大面貴出里店洞鳳字畓八夜未正種捌斗落二作幷貳拾貳卜量李春
東中峯畓南山
西八世畓北渠
正木捌拾疋受畓主自筆六代孫從仕郞尹善覺[着名][署押]
康津波之大支石下五字畓六夜未陸斗落肆負貳束二作肆負肆束三作陸負捌束壹負伍束又伍束量玉世
得老畓北山
南吐西僧幸順
正木伍拾伍疋受畓主自筆六代孫幼學尹善昌[着名]
康津波之大中山下男字畓七夜未正種陸斗落二作幷拾肆負伍束量順喜
東同人畓南厚奉畓
北太同畓西道
正木肆拾疋受畓主自筆八代孫幼學尹回天[着名]
康津波之大兵峙下大字畓參夜未正種參斗落捌卜量丁立
成卜畓南男金
西於屯金畓北山
正木參拾疋受畓主自筆七代孫幼學尹邦壽[着名]
靈岩種子坪闕字畓陸斗落內下邊參斗落三夜未拾貳卜內陸卜量德金
東西同人畓
南北莫難畓
正木參拾疋受畓主七代孫幼學尹應慶[着名] 筆執幼學尹商弼[着名]
靈岩玉泉面薪橋坪大字畓二夜未正種伍斗落拾捌卜玖束量每男
㖙金南信
男畓西吐北同人畓
正木參拾疋受畓主七代孫幼學尹一遇[着名] 筆執前司果尹善養[着名][署押]
靈巖玉泉面所乙山洞員成字畓五夜未正種伍斗落二作幷拾卜柒束量貴金
東南大道西太
日畓北每男田
正木肆拾疋受畓主自筆七代孫幼學尹百遇[着名]
靈巖玉泉面代山下冬字畓二夜未正種參斗落二作幷玖卜量亇入里
乭屎南善卜
西乭屎畓北禮山
正木參拾疋受畓主六代孫幼學尹遭[着名] 筆執幼學尹百遇[着名]
康津波之大伏在毁字畓正種參斗伍升落只二作竝拾卜二方千卜畓西同人畓北渠量莫斤價正木貳拾貳疋受畓主自筆七代孫幼學尹磻老[着名]
康津波之大伏在及字畓參斗落只東吐西祥錢畓南同人畓北金朴畓量 價正木參拾疋受畓主七代孫幼學尹義哲[着名]筆八代孫幼學尹時邁[着名]
給價正木伍拾疋鄭亨道處買得靈岩玉泉爭江洞伏在芥字畓正種陸斗落貳拾伍卜參束庫 文記有司櫃藏 筆執幼學尹百遇[着名]
給價正木一同五疋崔沃丁酉四月十八日買得靈岩玉泉革登伏在潤字畓四斗落九卜七束庫文記有司櫃藏 癸丑十月十二日追錄 筆執幼學尹天厚[着名]
給價正木二同三十疋尹時望乙未四月初三日買得靈岩玉泉後洞伏在水字畓九斗落二十七卜一束庫文記有司櫃藏 癸丑十月十二日追錄 筆執幼學尹天厚[着名]
畓在於坪而文記以後洞書之未知誤書也

참의(參議) 윤선도댁(尹善道宅) 소장 문권
기축년(1649) 5월 29일 파산(坡山) 선조(先祖) 묘위답(墓位畓) 문권
파산 6대 할아버지 증(贈) 통훈대부 통례원 좌통례(通訓大夫通禮院左通禮) 부군(府君) 무덤과 할머니 증(贈) 숙인(淑人) 송씨(宋氏) 무덤, 5대 할아버지 증 통정대부 병조참의(通政大夫兵曹參議) 부군 무덤과 할머니 증 숙부인(淑夫人) 이씨(李氏) 무덤과 할머니 증 숙부인 정씨(鄭氏) 무덤은 종가에서 친진(親盡)1)하여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이 없다. 내외의 자손이 거의 천여 명이 넘는데도 제사가 영영 끊어지고 나무꾼과 목동을 금하지 않아 분묘가 훼손되고 없어지는 것을 마냥 앉아서 보고 있으니, 어찌 이것이 인정(人情)이고 천리(天理)이겠는가.
이 때문에 여러 자손들이 상의하여 의기(義起)2)해서 내외손(內外孫) 가운데 성인이 된 사람으로 제한해서 각각 정목(正木) 1필과 정미(正米) 1말[斗]씩 내고, 묘에서 가까운 곳에 사는 후손을 1년에 두 사람씩 돌아가며 정하여[輪定] 미포(米布)를 주관하게 한다. 매년 9월 15일에 제사를 설행하는데 6대 할아버지 묘 앞에 할머니 한 분을 합해서 한 상[卓]과 산신(山神) 한 상, 5대조 할아버지 묘 앞에 할머니 두 분을 합해서 한 상과 산신 한 상을 차리는 것으로 규칙으로 정하였다. 이는 고례(古禮)에 “해마다 종인(宗人)들을 인솔하고 한 번씩 제사 지낸다.”3)는 뜻을 따르고, 또한 우리나라 명가(名家)들의 근래 규례를 따른 것이다.
처음에는 해마다 주관하는 유사(有司)가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서 그 일을 영영 지속하려고 했지만 또한 햇수가 오래되면 폐단이 생길까 염려스러웠고, 또 묘와 가까운 곳에 제위답(祭位畓)을 사두려고 도모했지만 땅이 귀하고 땅값이 비싸서 결국 생각처럼 하기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여러 자손들이 상의하고 헤아려서 유사에게 값을 받고 각자 좋은 논 약간 마지기를 내는 것으로 정하였다.
논 목록은 각자 스스로 쓰고 착명 서압해서 같은 내용으로 문권 15통[道]을 만들어 두드러진[表表] 여러 자손 집안에 나누어 보냄으로써 병란이나 분실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추후에 논 주인의 자손 가운데 혹 잡담을 하는 일이 있으면 현재 여러 자손들이 서로 이끌고 관에 아뢰어 다시 논할 일이다.
일. 다음에 기록한 묘위답(墓位畓)은 매년 주관하는 유사가 직접 원래의 수량[元數]을 감수(監收)해서 상책(上冊)한다. 제사에 사용하고 난 뒤에 남은 것도 상책한다. 요역(徭役)과 종자(種子)는 다음해 유사를 교체할 때에 헤아려서 의논하여 제(除)하는 것으로 영구히 천추의 항식(恒式)으로 삼는다.

증인으로 참석하여 입의(立議)한 여러 자손
통훈대부 전(前) 행(行) 세자시강원 문학(世子侍講院文學) 윤선도[착명]
전 행 병조 정랑 이재(李垶)
통훈대부 전 행 이조 정랑 엄정구(嚴鼎耈)[착명]
유학 윤선계(尹善繼)[착명]
유학 윤선각(尹善覺)[착명]
윤준경(尹俊慶)[착명]
윤응경(尹應慶)[착명]
윤동로(尹東老)[착명]
윤방수(尹邦壽)[착명]
유학 이영인(李榮仁)[착명]
윤일우(尹一遇)[착명]
윤재우(尹再遇)[착명]
백명헌(白明憲)[착명]
윤회천(尹回天)[착명]

문기를 나누어 간직한 여러 자손 집
전 문학(文學) 윤선도 집 1통[道]
전 정랑 이재(李垶) 집 1통
전 정랑 엄정구(嚴鼎耈) 집 1통
유학 윤선계(尹善繼) 집 1통
윤선창(尹善昌) 집 1통
유학 윤선각(尹善覺) 집 1통
윤준경(尹俊慶) 집 1통
윤동로(尹東老) 집 1통
윤방수(尹邦壽) 집 1통
생원 윤인미(尹仁美) 집 1통
유학 이영인(李榮仁) 집 1통
유학 윤일우(尹一遇) 집 1통
윤재우(尹再遇) 집 1통
백명헌(白明憲) 집 1통
윤회천(尹回天) 집 1통

논 목록
파지대면(坡之大面) 묘 아래 시목원(柿木員)에 있는 지자답(知字畓)4) 정종(正種) 5마지기 16복(卜) 5속(束) 곳. 6대손 통훈대부 전 행 세자시강원 문학(通訓大夫前行世子侍講院文學) 윤선도(尹善道)[착명][서압] 【6대조와 5대조 양대 봉사조(奉祀條) 전답은 분명 많을 텐데, 종손(宗孫) 윤치경(尹致敬)이 대가 다하여[代盡] 사당 제사가 오래도록 끊어졌으니, 봉사조(奉祀條) 전답은 이치상 모조리 숫자대로 추심해서 묘제(墓祭) 용도로 삼아야 한다. 그렇지만 윤치경은 이미 죽고 그의 일곱 살짜리 아이만 있는데 그나마도 종적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부득이 들은 이야기에 따라서 윤철성(尹哲成)에게 방매한 윤치경의 봉사조 논 5두락만을 추심해서 묘제 용도에 보태기로 입의(立議)하여 여러 자손이 함께 의논하여 결정하였다. 번거롭게 여럿이 서압하지 않고 간략하게 문권으로 작성한다.】
필집 유학 윤선징(尹善徵)[착명]

영암(靈巖) 팔마리(八馬里) 돌모로(乭毛老)에 있는 함자답(醎字畓) 4배미[夜味]5) 정종(正種) 6마지기 19복 9속. 양안(量案)에는 필산(必山)의 이름으로 올라있다. 【동쪽은 상백(尙白)의 논, 남쪽은 내[川], 서쪽은 박 판관의 논, 북쪽은 산】 같은 들[員],6) 같은 자(字) 논 3배미 정종 5마지기 17복 8속. 양안(量案)에는 필산(必山)의 이름으로 올라있다. 【동쪽은 수양(守陽)의 논, 남쪽은 토(吐),7) 서쪽과 북쪽은 필산(必山)의 논】 가작동(可作洞) 담자답(淡字畓) 5배미 정종 9마지기 곳 가운데 2작(作) 10복 4속과 18복 3속을 합하여 28복 7속. 양안(量案)에는 필산(必山)의 이름으로 올라있다. 【동쪽은 주질개(注叱介)의 논, 남쪽과 서쪽은 토(吐), 북쪽은 필산의 진답(陳畓)】 이상, 정종(正種) 20마지기.【선도(善道)의 가업(家業)은 여러 집안 가운데 넉넉하기 때문에 값을 받지 않았다.】
답주(畓主) 6대손 통훈대부 전 행 세자시강원 문학 윤선도[착명][서압]
필집(筆執) 아들 생원 인미(仁美)[착명]

강진 파지대면 귀출리(貴出里) 점동(店洞) 봉자답(鳳字畓) 8배미, 정종(正種) 8마지기 2작(作) 22복. 양안(量案)에는 이춘(李春)의 이름으로 올라있다.【동쪽은 중봉(中峯)의 논, 남쪽은 산, 서쪽은 팔세(八世)의 논, 북쪽은 도랑[渠]】 값은 정목(正木) 80필을 받았다.
답주 자필(自筆) 6대손 종사랑(從仕郎) 윤선각(尹善覺)[착명][서압]

강진 파지대면 지석리(支石里) 아래 오자답(五字畓) 6배미 6마지기 4복 2속 2작(作) 4복 4속, 3작(作) 6부 8속, 1복 5속, 또 5속. 양안(量案)에는 세옥(世玉)의 이름으로 올라 있다.【동쪽은 득노(得老)의 논, 북쪽은 산, 남쪽은 토(吐), 서쪽은 승(僧) 행순(幸順)의 논】 값은 정목 55필을 받았다.
답주 자필 6대손 유학 윤선창(尹善昌)[착명]

강진 파지대면 중산(中山) 아래 남자답(男字畓) 7배미 정종 6마지기 2작(作)을 아울러 14복 5속. 양안(量案)에는 순희(順喜)의 이름으로 올라 있다.【동쪽은 같은 사람의 논, 남쪽은 후봉(厚奉)의 논, 북쪽은 태동(太同)의 논, 서쪽은 길】 값은 정목 40필을 받았다.
답주 자필 8대손 유학 윤회천(尹回天)[착명]

강진 파지대면 병치(兵峙) 아래 대자답(大字畓) 3배미 정종 3마지기 8복. 양안(量案)에는 정립(丁立)의 이름으로 올라 있다.【동쪽은 성복(成卜)의 논, 남쪽은 남금(南金)의 논, 서쪽은 어둔금(於屯金)의 논, 북쪽은 산】 값은 정목 30필을 받았다.
답주 자필 7대손 유학 윤방수(尹邦壽)[착명]

영암 종자평(種子坪) 궐자답(闕字畓) 6마지기 가운데 아래쪽 3마지기, 3배미 12복 가운데 6복. 양안(量案)에는 덕금(德金)의 이름으로 올라 있다.【동쪽과 서쪽은 같은 사람의 논, 남쪽과 북쪽은 막난(莫難)의 논】 값은 정목 30필을 받았다.
답주 7대손 유학 윤응경(尹應慶)[착명]
필집 유학 윤상필(尹商弼)[착명]

영암 옥천면(玉泉面) 신교평(薪橋坪) 대자답(大字畓) 2배미 정종 5마지기 18복 9속. 양안(量案)에는 매남(每男)의 이름으로 올라 있다.【동쪽은 엇금(㖙金)의 논, 남쪽은 신남(信男)의 논, 서쪽은 토(吐), 북쪽은 같은 사람의 논】 값은 정목 30필을 받았다.
답주 7대손 유학 윤일우(尹一遇)[착명]
필집 전(前) 사과(司果) 윤선양(尹善養)[착명][서압]

영암 옥천면 소을산동(所乙山洞) 들판 성자답(成字畓) 5배미 정종 5마지기 2작(作)을 아울러 10복 7속. 양안(量案)에는 귀금(貴金)의 이름으로 올라 있다.【동쪽과 남쪽은 큰 길, 서쪽은 태일(太日)의 논, 북쪽은 매남(每男)의 밭】 값은 정목 40필을 받았다.
답주 자필 7대손 유학 윤백우(尹百遇)[착명]

영암 옥천면 대산(代山) 아래 동자답(冬字畓) 2배미 정종 3마지기 2작(作)을 아울러 9복. 양안(量案)에는 마입리(亇入里)의 이름으로 올라 있다.【동쪽은 돌시(乭屎)의 논, 남쪽은 선복(善卜)의 논, 서쪽은 돌시의 논, 북쪽은 예산(禮山)의 논】 값은 정목 30필을 받았다.
6대손 유학 윤조(尹遭[착명]
필집 유학 윤백우(尹百遇)[착명]
강진 파지대면에 있는 훼자답(毁字畓) 정종 3말 5되지기 2작(作)을 아울러 10복.【두 방향이 천복(千卜)의 논, 서쪽은 같은 사람의 논, 북쪽은 도랑】 양안(量案)에는 막근(莫斤)의 이름으로 올라 있다. 값으로 정목 22필을 받았다.
답주 자필 7대손 유학 윤반로(尹磻老)[착명]

강진 파지대면에 있는 급자답(及字畓) 3마지기【동쪽은 토(吐), 서쪽은 상전(祥錢)의 논, 남쪽은 같은 사람의 논, 북쪽은 금박(金朴)의 논】 양안(量案)에는 ……. 값으로 정목 30필을 받았다.
답주 7대손 유학 윤의철(尹義哲)[착명]
필집 8대손 유학 윤시매(尹時邁)[착명]

값으로 정목 50필을 정형도(鄭亨道)에게 주고 영암 옥천(玉泉) 쟁강동(爭江洞) 들판에 있는 개자답(芥字畓) 정종 6마지기 25복 3속 곳을 매득하였다. 문기는 유사(有司)의 궤 안에 보관되어 있다.
필집 유학 윤백우(尹百遇)[착명]

값으로 정목 1동(同) 5필을 최옥(崔沃)에게 주고 정유년 4월 18일에 영암 옥천 혁등(革登) 들판에 있는 윤자답(潤字畓) 4마지기 9복 7속 곳을 매득하였다. 문기는 유사의 궤 안에 보관되어 있다. 계축년 10월 12일에 추가로 기록하였다.
필집 유학 윤천후(尹天厚)[착명]

값으로 정목 2동 30필을 윤시망(尹時望)에게 주고 을미년 4월 3일에 영암 옥천 후동(後洞) 들판【논은 어평(於坪)에 있는데 문기는 후동(後洞)으로 쓰여 있다. 잘못 쓰인 것인지 알지 못한다.】에 있는 수자답(水字畓) 9마지기 27복 1속 곳을 매득하였다. 문기는 유사의 궤 안에 보관되어 있다. 계축년 10월 12일에 추가로 기록하였다.
필집 유학 윤천후(尹天厚)[착명]

[주석]

1) 친진(親盡)
친진은 제사 지내는 대수(代數)가 다한 것을 말한다. 사대부가에서는 조선 중기 이후 4대 봉사가 관례화됨에 따라 4대가 지난 5대조 이상의 조상을 의미하게 되었다.
2) 의기(義起)
예문(禮文)에는 없지만 의리에 입각해서 행하는 예법을 말한다.『예기』「예운(禮運)」의 “선왕의 예법에는 그러한 예가 없을지라도, 의리에 입각해서 적절하면 새로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다.[禮雖先王未之有, 可以義起也.]”라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3) 지낸다.”
고례(古禮)에 … 제사 지낸다 :『가례』에 “대종의 집안에서 시조가 친진하면 그 신주를 묘소에 묻고 대종이 그 묘전을 주관하여 묘제를 받든다. 해마다 종인을 거느리고 한 번 제사를 지내는데 백세토록 고치지 않는다. 2세 이하의 조상이 친진하거나 소종의 집안에서 고조가 친진하면 그 신주를 옮겨 묻는다.[大宗之家 始祖親盡 則藏其主於墓所 而大宗猶主其墓田 以奉其墓祭 歲率宗人 一祭之 百世不改 其第二世以下祖親盡 及小宗之家 高祖親盡 則遷其主而埋之]”라고 하였다.『家禮 卷1 通禮』
4) 지자답(知字畓)
‘지(知)’ 자 자호(字號)의 논이라는 의미이다. 조선시대 토지대장인 양안(量案)은 5결(結) 단위로 천자문 중 한 글자를 이용하여 토지의 순서를 표시하였다.(『한국 고전용어사전』참조)
5) 배미[夜味]
‘배미’로 읽히는 야미(夜味)는 조선시대 명문(明文) 및 양안(量案) 등 토지관련 문헌에서 주로 나타나는 구획의 단위이다. 즉 밭이나 논의 두렁을 기준으로 하여 쉽게 인지 가능한 전답의 지형적 경계 구분이다. 주로 한 배미(一夜味), 두 배미(二夜味)라는 식으로 배미 앞에 수효가 붙어서 지형적으로 구분되는 토지, 주로 전답의 구획이 몇 곳인지를 표시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아울러 배미는 단순한 토지 경계의 구분뿐만 아니라, 토지 구획을 함으로써 하나의 구획에 대한 지형(地形)이나 위치까지 표현할 수 있는 용어이자 단위로 사용되었다. 즉 치마배미(사다리꼴), 장구배미(장구 모양), 삿갓배미(이등변삼각형) 등의 전형(田形)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고, 아랫 배미, 웃 배미라고 하여 특정지점에서 해당 전답을 지칭할 때 그 위치를 나타낼 수도 있었다.
6) 들[員]
토지 구획 명칭.『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우리나라의 토속자로 다루었으며 ‘도리’라고 읽는다. 산 밑 반원 형태의 평야로 추정되기도 했으며 평(坪)보다 넓은 지역 명칭으로 알려져 있다.(김성갑,「조선시대 명문에 관한 문서학적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2. 참조)
7) 토(吐)
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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