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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장(行狀)    
G002+AKS+KSM-XI.0000.0000-20101008.B002a_002_00668_XXX
 
분류 고문서-시문류-행장 / 개인-전기-행장
추정시기 연대미상
형태사항 크기: 23×39 / 낱장, 1장 / 종이 /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 부안 우반 부안김씨  / 현소장처 : 부안 우반 부안김씨  
비고 출판정보 : 영인본: 『고문서집성 2 -부안 부안김씨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8) / 정서본: 『고전자료총서 83-3 부안김씨 우반고문서』(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3) / 본 이미지는 전북대학교 박물관에서 제공한 것으로 저작권이 전북대학교 박물관에 있음. 역주본: 『고문서역주총서 2: 부안 부안김씨 우반고문서』(한국학중앙연구원, 2017)
고문서집성 수록정보 『고문서집성』02 / 8. 시문류 / (3) 시문 / 시문26 / 995 ~쪽
 
김홍원(金弘遠)의 행장(行狀) 초본(草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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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嘉善大夫兵曹參判▣…▣
都摠府副■摠管行▣…▣金公行狀
公諱弘遠而重 ■號海翁扶寧人 ■■■■ 麗朝名臣平
章事諡文貞公遠祖也 爀世簪纓 六傳有諱
光敍古阜郡事 知麗亡 大歸鄉貫 子孫因居焉
曾祖諱錫弼 文科校理 祖諱參奉
贈參議 考諱景順贈■■參判以公貴也 妣晉州姜氏隆慶辛
八月初二日生公 幼而岐嶷 性又豁達自少力學
攻文 儕流莫之及 年十八擧進士 二十二當壬辰
寇 大駕播遷奮不顧身 欲赴行在 而二親年
老且病 不忍絕裾 瞻望痛哭■ 旋聞粮道梗
塞 辦■米數十斛 輸送于龍灣 乙未遭內外
兩艱 ■■三年之內 不脫經帶 不御酒肉 哀毀成疾
幾不能支 ■■■丁酉服闋 倭寇復熾 ■蹂入西南 公慨
然長歎曰 壬辰之亂 不得赴■死者爲親故也
■今兩親俱沒 吾何顧戀妻子 不死於國■■遂聚
義旅數百隊 ■…■諭之以忠義 激之以慷慨 時黃公
愼 爲本道監司 致書請見 以安集人心拒絕
賊鋒之 ■■策懇懇力陳 則黃公與語大■悅
引坐上坐 虛己■問以經略 與衆數百使之(以下缺)
증가선대부병조참판(贈嘉善大夫兵曹參判) …(원문 결락)… 도총부부총관행(都摠府副摠管行) …(원문 결락)… 김공행장(金公行狀)
공은 휘가 홍원(弘遠)이고, 자(字)가 이중(而重)이고, 호(號)가 해옹(海翁)이고, 부령인(扶寧人)이다. 고려조에 명신(名臣)이며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시호가 문정공(文貞公)이고 휘가 구(坵)인 분이 원조(遠祖)이시다. 대대로 고관대작으로 명망이 있었다. 6대가 지나서 휘 광서(光敍)는 고부군사(古阜郡事)를 지냈다. 하지만 고려가 망할 것을 알고 은퇴하고 고향인 부령으로 돌아가서 살았다. 자손이 인하여 부령에서 살았다. 증조(曾祖)는 휘가 석필(錫弼)이고 문과(文科)를 거쳐 교리(校理)를 지냈다. 조(祖)는 휘가 개(溉)이고 참봉(參奉)을 지냈으며 참의(參議)에 증직되었다. 고(考)는 휘가 경순(景順)이고 참판(參判)에 증직되었다. 공은 아버지 참판공 때문에 귀하게 되었다.
비(妣)는 진주강씨(晉州姜氏)이니 융경(隆慶) 신미년(1571) 8월 2일 공을 낳았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성품도 활달했다. 젊어서는 힘써 학문하여 동료들이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나이 18세에 진사(進仕)에 합격하였다. 22세에 임진왜란을 만나 대가(大駕)가 파천(播遷)하게 되었다. 공은 격분하여 몸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려고 하였다. 하지만 부모님께서 연로하시고 또 병중에 계셔서 차마 붙잡는 옷자락을 뿌리치지 못하고 바라보며 통곡만 하였는데 곧 식량을 공급하는 길이 막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쌀 몇 십 섬을 마련해가지고 용만(龍灣)으로 수송하였다.
을미년(1595) 부모님 내외분 상을 당했다. 3년 동안 수질(首絰)·요질(腰絰) 등을 벗어본 적이 없었으며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애훼(哀毁)로 인하여 병을 얻어 거의 몸을 지탱할 수 없는 데까지 이르렀다. 정유년(1597) 3년 복을 벗었다. 왜란(倭亂)은 다시 치열했다. 그리고 다시 서남쪽으로 침입해 들어오자, 공이 개연(慨然)히 장탄(長歎)하여 말하기를 “임진년 난리에 사지(死地)에 나아갈 수 없었던 것은 부모님 때문이었다. 지금 양친께서 모두 돌아가셨는데 내가 어찌 처자식에 연연하여 국가의 난리에 나아가 죽을힘을 다하지 않겠는가?”하고 마침내 의병 수 백 대(隊)를 모집하고 충의(忠義)로써 효유(曉諭)하고 강개(慷慨)로써 격려(激勵)하였다. 당시 황신(黃愼)1)이 전라감사로 재직했다. 편지를 보내 뵙기를 청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적의 선봉을 막아 방어합시다.”라고 깐깐하게 힘써 진술하였다. 황공(黃公)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고는 매우 기뻐하였다. 그리고 상좌(上坐)에 앉히고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경략(經略)을 자문하였다. 그리고 무리 수백 명을 주어 모모하게 하였다. …(원문 결락)…

[주석]

1) 황신(黃愼)
1560(명종15)∼1617(광해군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사숙(思叔), 호는 추포(秋浦).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1596년 변방 백성들을 따뜻하게 위로하는 방법을 진달(進達)한 공로로 절충장군이 되었다. 이어 위유사(慰諭使)·찬획사(贊劃使) 등을 거쳐 전라감사에 임명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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