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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장(行狀) 및 발문(跋文)    
G002+AKS+KSM-XI.0000.0000-20101008.B002a_002_00673_YYY
 
분류 고문서-시문류-행장 / 개인-전기-행장
추정시기 연대미상
형태사항 크기: 27×28 / 합철, 1책 6면 / 종이 /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 부안 우반 부안김씨  / 현소장처 : 부안 우반 부안김씨  
비고 출판정보 : 영인본: 『고문서집성 2 -부안 부안김씨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8) / 정서본: 『고전자료총서 83-3 부안김씨 우반고문서』(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3) 역주본: 『고문서역주총서 2: 부안 부안김씨 우반고문서』(한국학중앙연구원, 2017)
고문서집성 수록정보 『고문서집성』02 / 8. 시문류 / (3) 시문 / 시문31 / 1004 ~1007쪽
 
윤치수(尹致秀)가 지은 김상성(金相誠)의 행장(行狀)과 오수집(迃叟集) 발문(跋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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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成均生員金公行狀
公諱相誠乃實 自號確隱金氏平章事文貞
爲上祖 文行勳伐載麗史 六傳而有諱光敍
古阜郡事 知麗運將訖 大歸扶寧 子孫仍籍焉 其
後連世簪纓 曾祖諱日煥 祖諱敬垕 考諱{沃/土} 成均進
士 並潜德不顯 妣平山申氏士人思稷女 旡嗣 取公
子之 公即學生之子 羅州林建憂之外孫 學生
進士公之弟 有學行 爲士林重 號迂叟
宗戊子
四月二十一日生 稟性聰穎 擧止端重 自
髫齡無戲遊 儼然若成人不煩敎督 見識日進 父母 02)
甚鍾愛 器重之▣▣ 左右就養 承奉無違 處昆弟連
牀對榻 湛樂相▣ 蓋天性然也 早襲義方之訓 動循
禮軓 淹博經史 文藝夙就 正宗丙午中生員 妙年
登庠 聲譽藉甚 己巳迂叟公有不安節 晝夜不離側
或禱天或嘗糞 衣不解寢不就 憂形于色 及疾篤 乃
斫指灌血爲延數月之命 人謂孝感所致 易簀之日
哀毀踰制 晨夕抱柩 哭不絕聲隣里感歎 往往有泣
下者曰 迂叟之家又出孝子矣 拜墓哭涖 膝痕爲之
窞前後守制皆如之 晨謁祠堂 出入必告 雖甚病不
替 晚卜江湖 學道守靜宛有考槃碩人之趣 而人無

能窺期際也 純宗丁亥八月二十一日感疾 終于
第 享年六十是年十一月十一日葬于縣西峯坐
巳之原 配鎭川宋氏 麟休女 后配竹山朴氏弼瑞女
有四男三女男{火+獻}{火+旋} 女愼在恒妻 宋出也 {火+展}炫二女
未筓朴出也 烘{火+夌}{火+融}並側出男也 {火+獻}炫出系 {火+獻}一男
一女{火+展}一男愼在恒一男一女 並幼 公天姿夙悟 雅
性端亮 擩染庭訓 內行淳備 惟孝惟友于兄弟 奉先
則盡其誠敬 居家則務爲齊整 敎子弟 循蹈規矩 不
問知爲法家子▣▣ 鄉黨交友 一以忠欸 慶吊勞卹
各盡其方 常簡▣▣▣不以事物經心 而閨門之內 03)
雍雍如也 詩文▣▣▣左鍊蒼然有古作者體 性又聰
敏 博覽强記 ▣▣▣文獻歷代沿革 以至名姓譜系
山川道里 靡不通曉 所著詩文藏于家 公之弟相德
甫 踵門求狀 余悲公之有才不著 敢以蕪語撰次如
右 後之君子 茍問一鄉之善士 庶可考信不誣
通訓大夫前弘文館副校理兼經筵侍讀官春秋
館記注官
實錄記注官尹致
謹狀
迃叟集跋
迃叟金斯文旣殞之二十有四年杞陽兪承宣序其
集越三年雲石趙尙書題其墓巽一國之詞林重望
舗擧其醇學懿行又奚多乎哉其胤相德甫將鏤刻
遺集屬余爲跃余讀而嘆曰書不云乎詩言志歌永
言春秋大夫會而賦詩曰武以觀七子志是集也可
以觀迃叟志也夫世之言詩歌者矜▣魚拾香草儷
枝而鬪葉取碧而犯白丹靑而已爾粉墨而已爾其
屬情籍事無所▣…▣則剽耳傭目傳會蹈襲不
歡而笑不疾而▣▣▣則不存焉耳迃叟孝友世其 04)
家潛心小學▣▣▣▣其行峻其言和▣▣者無疑
優游者有餘養▣▣文獻其實加其膏而希其光仁
義之人其言藹如也其志固不盡乎詩文而詩文亦
不足以盡其志以西湖詩自警銘經義問答觀其志
則可矣盖士有遇不遇遇也命不遇也亦命倘使迃
叟出而遇也則展蘊鳴盛其志豈可量已懷鈆握槧
淪落不遇迺原本性情舗陳理道往往聘辭而吐談
若釋然於功名身世之際徒令斷簡遺唾活現於敝
紙渝墨之間顧無以得行其志不遇也故爾不暇爲
迃叟惜之重爲有司者惜之然而幸値 聖世先生
성균생원(成均生員) 김공(金公) 행장(行狀)
공(公)은 휘(諱)가 상성(相誠)이고 자(字)가 내실(乃實)이고 자호(自號)하여 확은(確隱)이라 했으며 성(姓)은 김씨(金氏)이다.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시호가 문정공(文貞公)이며 휘가 구(坵)이신 분을 상조(上祖)로 삼았다. 문행(文行)과 훈벌(勳伐)은 《고려사(高麗史)》에 실려 있다. 6대가 지나서 휘 광서(光敍)는 고부군사(古阜郡事)·지여운장흘(知麗運將訖)을 지냈고 부령(扶寧)에 대귀(大歸)하여 살았고, 이어서 자손(子孫)이 본적으로 삼았다. 그 이후 연이어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였다. 증조(曾祖)는 휘가 일환(日煥)이고, 조(祖)는 휘가 경후(敬垕)이고, 고(考)는 휘가 옥({沃/土})인데 성균진사(成均進士)를 했으며 모두 덕을 숨기고 드러내지 않았다. 비(妣)는 평산신씨(平山申氏)인데 사인(士人) 사직(思稷)의 딸이다. 후사(後嗣)가 없어 공(公)을 자(子)로 삼았다. 공은 학생(學生) 휘 익(瀷)의 자(子)이며 나주(羅州) 임건우(林建憂)의 외손(外孫)이다. 학생공(學生公) 식(寔)은 진사공(進士公)의 아우인데 학행(學行)이 있어서 사림(士林)들에게 추중(推重)을 받았으며 호(號)가 오수(迃叟)이다.
공은 영종(英宗) 무자년(1768) 4월 21일 태어났다. 품성이 총민하고 행동거지가 단정하였으며 어릴 적부터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의젓하여 성인과 같았다. 그러므로 교육을 감독하는 번거로움이 없었고 식견이 날로 발전하여 부모님께 아주 예쁨을 받았다. 큰 그릇 …(원문 결락)… 좌우에서 나아가 길렀고 뜻을 받들어 어김이 없었다. 형제간에는 책걸상에 나란히 앉아 사이좋게 공부하였으니 …(원문 결락)… 대개 천성(天性)이 그러했다. 일찍이 의방(義方)의 교훈을 훈습하여 행동마다 예법에 맞게 행동했으며 널리 경사(經史)를 섭렵하여 문예(文藝)를 일찍이 성취했다. 정종(正宗) 병오년(1786) 생원(生員)에 합격을 하고 젊은 나이로 성균관에 올랐으니 명예가 매우 자자했다.
기사년(1809) 작은아버지인 오수공(迃叟公)께서 몸이 편찮으셨다.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못하고 혹 하늘에 빌고 혹 대변을 맛보았으며 의복도 안 벗고 취침도 안 하고 근심이 안색에 가득했다. 병환이 위독해지자 이에 손가락을 베어 수혈로 인해 몇 개월 동안 목숨을 연명하였다. 사람들은 효성이 감동한 소치라고 말했다. 돌아가셨을 때는 애훼(哀毀)를 예제(禮制)에 넘치게 슬퍼하였으니 새벽부터 밤까지 널을 부여안고 끊임없이 곡을 하였다. 이웃마을에서 감탄하기도 하고 종종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오수(迃叟)의 집안에 또 효자가 나왔다.”라고 하였다. 묘소에 배알하고 곡읍(哭泣)하면서 무릎 꿇은 자국이 움푹 파여 있었으니 전상(前喪)과 후상(後喪)의 수제(守制)를 모두 위와 같이 하였다. 새벽에 사당(祠堂)에 배알하는 일과 외출할 때 반드시 보고하는 일은 비록 병이 심할 때라도 변함없이 했다. 말년에 강호(江湖)에 집을 짓고 도(道)를 공부하면서 조용히 지냈으니 완연히 고반(考槃) 석인(碩人)1)의 취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 낙을 즐기는 것을 사람들이 엿볼 수 없었다. 순종(純宗) 정해년(1827) 8월 21일 감기로 집에서 생을 마쳤으니 향년 60세였다. 동년 11월 11일 고을 서쪽 봉우리 사(巳)의 방향 언덕에 안장했다.
배(配)는 진천송씨(鎭川宋氏)이니 인휴(麟休)의 딸이다. 후배(后配)는 죽산박씨(竹山朴氏)이니 필서(弼瑞)의 딸이다. 4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 헌({火+獻})·선({火+旋})과 딸 신재환(愼在桓)의 처(妻)는 송씨(宋氏) 소출이다. 아들 전({火+展})·현(炫)과 출가하지 않은 두 딸은 박씨(朴氏) 소출이다. 홍(烘)·릉({火+夌})도 아울러 측실(側室) 소출 아들이다. 헌({火+獻})·현(炫)은 양자로 나갔다. 헌({火+獻})은 1남 1녀를 두었으며 전({火+展})은 1남을 두었으며 신재환(愼在恒)은 1남 1녀를 두었으나 모두 어리다.
공은 천품이 일찍 통달했고 본래 성품이 올곧았다. 아버지의 교육을 훈습 받아 내면과 행실도 순수했다. 오직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끼리 우애했으며 선대의 제사를 모시는 것은 그 정성을 다해서 모셨다. 집에 있을 적에는 집안일을 정돈하는 것에 힘썼다. 자제(子弟)를 교육할 적에는 규구(規矩)를 실천하게 하였지, 법가자(法家子)가 되는 것을 묻지 않았다. …(원문 결락)… 향당(鄉黨)과 사귈 적에는 늘 진심으로 대했으며 경조사(慶吊事)에는 힘써 구휼하되 각각 그 방법을 극진히 했으며 항상 간략 …(원문 결락)… 사물(事物) 때문에 마음 쓰지 않았고 가정 안에서는 온화하였다. 시문(詩文) …(원문 결락)… 창연(蒼然)히 옛 시인의 체제가 있었다. 성품 또한 총명해서 널리 보고 잘 기억했다. …(원문 결락)… 역대 문헌(文獻)과 연혁(沿革)에서부터 성명(姓名)과 보계(譜系)와 산천(山川)의 도리(道里)에 이르기까지 환히 꿰뚫지 못한 것이 없었다. 저술한바 시문(詩文)은 집에 소장되어 있었다.
공의 아우 상덕(相德)씨가 나의 집에 와서 행장을 써 줄 것을 요구했다. 나는 공께서 재주가 있는 분인데 드러내지 않았던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래서 감히 거친 글 솜씨로 위와 같이 차례차례 행장을 지었다. 나중에 군자(君子)가 진실로 한 시골 선사(善士)를 묻거든 바라건대 거짓 없이 믿고 고찰할 만한 자료가 되었으면 한다.
통훈대부 전홍문관부교리겸 경연시독관춘사관기주관실록기주관(通訓大夫前弘文館副校理兼經筵侍讀官春私館記注官 實錄記注官) 윤치수(尹致秀)는 삼가 행장을 쓴다.

오수집(迃叟集) 발(跋)
오수(迃叟) 김사문(金斯文)께서 이미 돌아가신지 14년 만에 기양(杞陽) 유승선(兪承宣)이 문집에 서문을 쓰고 이에 3년이 지나 운석(雲石) 조상서(趙尙書)가 묘갈명을 썼으니 일국(一國)의 사림(詞林)으로 중망(重望)이 있는 분들을 포진해서 쓴 것이다. 그 순박한 학문과 훌륭한 덕행은 또한 얼마나 많았던가. 그 맏아들 상덕(相德)씨가 장차 문집(文集)을 발간하려고 할 때 나에게 발문(跋文)을 부탁했다. 내가 읽어보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서전(書傳)》에 말하지 않았던가. 시(詩)는 지(志)를 노래하는 것이며 가(歌)는 언(言)을 영원히 전하려는 것이다.”라고. 《춘추(春秋)》에 대부(大夫)가 모여 시(詩)를 읊조리기를, “무(武)로써 칠자(七子)의 지(志)를 볼 수 있다2).”라고 하였으니 이 문집에서도 오수(迃叟)의 지(志)를 살펴 볼 수 있다고 하겠다.
저렇듯 세상에서 시가(詩歌)를 말하는 자는 충어(虫魚)를 모우고 향초(香草)를 모아가지고 가지와 잎으로 글자를 놓고 흰색과 푸른색으로 단청(丹靑)하고 분묵(粉墨)할 뿐이다. 그 정을 붙이고 일을 펴서 …(원문 결락)… 그 눈으로 빠르게 부회(傅會)하고 도습(蹈襲)하여 그 기뻐 웃고 …(원문 결락)…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오수(迃叟)께서는 그 집안 대대로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집안이다. 《소학(小學)》에 잠심(潛心)하고 …(원문 결락)… 그 행동은 엄격하고 그 언어는 온화하며 …(원문 결락)… 의심이 없었다. 여유롭게 지내고 …(원문 결락)… 문헌(文獻)에서 찾는다. 그 열매는 윤택하고 그 광채는 드무니 어질고 의로운 사람은 그 말이 성대한 것이다.3) 그러나 그 뜻을 시문(詩文)에 다 쓰지 못한다. 그래서 시문에서도 그 분의 뜻을 다 알지 못한다. 하지만 서오시(西湖詩)·자경명(自警銘)·경의문답(經義問答)에서는 그 뜻을 살펴보는 것이 가하다고 하겠다.
대개 선비가 시대를 만나고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만나는 것도 명(命)이며 만나지 못하는 것도 명이다. 가령 오수(迃叟)께서 세상에 나아가 시대를 만났다면 뜻을 펼쳐 이름을 날렸을 것인지 어찌 알겠는가? 그렇지 못해서 회포를 저술했지만 시대를 만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성정(性情)을 근본으로 도리(道理)를 펴면서 때때로 말을 하고 담소를 했더라면 석연(釋然)히 공명(功名)을 세상에 펼치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갓 끊어진 문장만, 해진 종이와 마모된 종이에 남았을 뿐이다. 돌이켜보면 그 뜻을 펼 수 없었던 것도 시대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수(迃叟)를 위하여 애석해 할 겨를도 없었고 거듭 유사(有司)를 위하여 애석해할 겨를도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성세(聖世)만났다면 …(원문 결락)…

[주석]

1) 고반(考槃) 석인(碩人)
현자(賢者)가 세상을 피하여 은둔해 살면서 그 낙을 노래하고 있다. “산책할만한 곳이 시냇가에 있으니, 석인의 마음이 넉넉하도다. 홀로 취침하고 홀로 일어나고 또 말을 하지만, 영원히 이 낙을 잊지 않으련다.”라고 읊고 있다.(《시경(詩經)》 〈위풍(衛風) 고반(考槃)〉)
2) 무(武)로써 칠자(七子)의 지(志)를 볼 수 있다
칠자는 정(鄭)나라 대부 7명이다. “정백(鄭伯)이 조무(趙武)를 위해 수롱(垂隴)에 가서 연회를 열었는데, 정나라 대부 자전(子展)·백유(伯有)·자서(子西)·자산(子産)·자태숙(子太叔)·인단(印段)·공손단(公孫段)이 수행하였다. 조무가 말하기를 ‘일곱 분이 그대를 따라온 것은 나를 빛나게 하기 위한 것이니, 일곱 분이 모두 시를 지어 그대가 연회를 베풀어 준 것을 표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면 나 역시 당신네 일곱 분의 뜻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칠자가 시를 지어 뜻을 표명한 것이다.(《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양공(襄公) 5년)
3) …성대한 것이다
훌륭한 문장도 내면의 덕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한유(韓愈)의 〈답이익서(答李翊書)〉에 “그 뿌리를 길러서 그 열매를 기다리고 그 기름을 더하여 그 광채를 바라는 것이니, 뿌리가 무성한 자는 그 열매를 이루고, 기름져 윤택한 것은 그 광채가 빛나며, 어질고 의로운 사람은 그 말이 성대한 것이다.[養其根而竢其實 加其膏而希其光 根之茂者其實遂 膏之沃者其光曄 仁義之人 其言藹如也]”라고 한 말을 작자가 표현하려고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문장이 단락되어 알 수 없다.(《한유집(韓愈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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