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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문(科文)-대책(對策)    
G002+AKS+KSM-XI.0000.0000-20101008.B002a_002_00674_XXX
 
분류 고문서-시문류-과문 / 정치·행정-과거-과문
추정시기 연대미상
형태사항 크기: 45×129 / 낱장, 1장 / 종이 /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 부안 우반 부안김씨  / 현소장처 : 부안 우반 부안김씨  
비고 출판정보 : 영인본: 『고문서집성 2 -부안 부안김씨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8) / 정서본: 『고전자료총서 83-3 부안김씨 우반고문서』(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3) / 본 이미지는 전북대학교 박물관에서 제공한 것으로 저작권이 전북대학교 박물관에 있음. 역주본: 『고문서역주총서 2: 부안 부안김씨 우반고문서』(한국학중앙연구원, 2017)
고문서집성 수록정보 『고문서집성』02 / 8. 시문류 / (4) 대책문초 / 대책문초1 / 1008 ~1012쪽
 
과거시험 과목의 하나인 대책문(大策文) 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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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對 愚按周禮 遂師巡其稼穡 又按班史 載耒以勸東作 噫其所以務本重穀之
 意 豈不大哉 今我聖后卽位以來 不遑他務 惟民事是圖 而執事承之 策士之
 日 不他之及 而稼穡是問 富哉執事之問 其亦我明后之意也 愚也躬耕食貧
 之士也 其敢曰 不如老農而不爲之助張乎 竊謂民惟邦本 食爲民天 蓋民依
 於食 食由於農 非食則民無以爲生 非農則食無以資養 民之源 固在於農
 食 而養農之本 莫先於稼穡 生靈之休戚 恒於斯 國用之豊歉 恒於斯 則信
 乎稼穡之爲本於王政也 是以古之聖王 莫不以是爲重 知小人之攸依 而措民之
 力 審稼穡之艱難 而濟民之産 耕之播之 不違農時 耘之獲之 不妨田功
 民於是足食 而得遂其生養之樂 國於是利用 而能享其富庶之治 夫豈
 若後世之厲農而病國哉 雖然稼穡之功在於民 使民盡力在於上 不緩
 民事 俟農功畢 則國裕而民不窮 使民以勞不服田畝 則農病而草不
 辟必也 盡其實心 行其實惠 以安民業 以裕民力 然後迄田康寧 有實其積
 然則稼穡之政 以實心行實惠而已 請白之 后稷敎民 樹藝五穀 大禹宅土
 畎澮斯濬 相土之道 粒民之功 愚何間然 視民如傷 無時豫怠 圭璧旣卒
 旱災乃弛 則康功之文 側身之宣 不可尙已 無逸之篇 七月之詩 此乃周公
 之所以戒成王 務本之意 何必深究 噫歸來千載 時無魯僖之悶雨 而競爲
 秦人之箕歛 則務農重穀之政 愚未之多見 而貫朽紅腐之富 僅見於
 後元之世 斗米三錢之效 偶値於貞觀之日 然而文景之治 徒尙雜伯 太宗
 德 未免雜夷 則何足與論乎 秦之商鞅 始開阡陌 魏之李理 或盡地利 而
 田
之法廢焉 菑畬之利蔑矣 則爲法之弊 貪饕之罪 安可逃也 漢武之弘羊 初
 攉酒酤 秋毫徒柝 唐宗之劉晏 專管鹽鐵 人無侔利 則卜式之諫 五峯之譏 固
 難免焉 其生財務本之能 合其道者 愚未之知也 鳴呼 良農能稼 貴於多獲 君
 子能言 貴於知務 請姑舍是 嘗試談今 恭惟我聖后 以聰明有臨之聖 先知稼穡
 之艱難 宵錦旴玉 仙枕靡安 恤民之政 史不絶書 重農之令 前後相見▣...▣
 稻有耟 地無遺利 是獲是{亠+田+卜} 人不遺力 民有生生之業 國有穰穰之盛 而何▣...▣
 相仍 民不聊生 道路者相望 溝壑者相連 梁賑難繼 魯廩告罄 是何重農之▣
 勤勤於上 而食農之效 迫迫於下耶 愚不敢知課督之未盡其要而然耶 賦重役頻▣...▣
 不盡力於田畝而然耶 抑不敢知惰農自安 背本趨末而然耶 愚於執事之問疑▣...▣
 對 而姑取其一二所見而言之 則勸課失制 而有司之徵歛無藝 西事方殷而科外▣...▣
 徭役繁興 今玆之弊 豈無積累之原乎 煦煦一惠 無補於實用 姑息末政 竟▣...▣
 具 則稼穡之卒痒 生民之阻飢 無足怪矣 然則務農之道 豈無其本 愚前所▣...▣
 心行實惠者是也 傳曰心存則政擧 孟子曰 仁言不如仁聲之入人 深爲▣...▣
 計 莫如體大禹躬稼之實心 法周文卽田之實惠 一政之發害於農 則
 曰予之所以務本之心 有愧於大禹耶 何大禹之能致粒民之功 而予不能致耶
 去其不如大禹者 而就其如大禹者 一令之行妨於農 卽曰予之所以養民之
 

 惠 有慊於周文耶 何周文之能臻康功之效 而予不能臻耶 去其不如周文者 而就其如
 周文者 省其徵歛 以簡其徭役 而能臻撫摩之方 以
 致勸相之功 則農不失時 耘耔敏於公私 有依其土 懽呼同於中外 南畝
 荷鋤 率多且慨之歌 東郊觀稼 極目如雲之盛 可見亦服爾 耕民有
 生
之業 紅腐相仍 可致京坻之積 何患稼穡之不藝 上下之不足乎 篇不
 已就乎 更竭餘蘊 嗚呼 以實心行實惠者 固在於 一人 而承流而宣化者 其
 不在於得人乎 雖以大舜之聖 而無益稷之佐 則阜財之吟 難保其獨
 致 今我聖后之德 固不在大舜之下 而能贊燮理之道者 果能以益稷之
 佐大舜 佐吾君乎 吾君垂惠於上 而下而承流者 盡職於下 則此如順風
 而呼 聲非加疾 白屋有生生之樂 赤子頌穰穰之盛 擊壤之歌 可以復致
 於今矣 漢宣曰 與我共理者 其惟良二千石 子朱子曰 君臣者朝廷之本也
 愚見如是 執事以爲如何 謹對
다음과 같이 대책을 올립니다.
제가 《주례(周禮)》를 살펴보건대 “수사(遂師)가 그 가색(稼穡)을 순찰한다1).”라고 하고, 또 반고(班固)의 《한서(漢書)》를 살펴보건대 “쟁기를 싣고 가서 봄철의 농사를 권면한다2).”라고 하였습니다. 아, 근본에 힘쓰고 곡식을 중시하는 뜻이 어찌 위대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 성군(聖君)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다른 것에 힘쓸 겨를 없이 오직 민사(民事)만을 도모하고 계시는데, 집사(執事)께서 이를 받들어 선비들을 책문(策問)하는 날, 다른 것은 언급하지 아니하고 심고 거두는 농사에 대해 물으시니, 풍성하십니다, 집사의 물음이여! 그 또한 우리 밝으신 임금의 뜻이겠습니다. 저는 직접 밭을 갈아 가난하게 부쳐 먹는 선비입니다만, 그래도 감히 “노련한 농부만 같지 않지만 조장(助長)3)하는 일을 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곡식은 백성의 하늘이니, 대개 백성은 곡식에 의지하고 곡식은 농사로부터 생겨납니다. 곡식이 아니면 백성은 삶을 영위할 수 없고, 농사가 아니면 곡식은 길러질 바탕이 없습니다. 백성의 근원은 진실로 농사의 곡식에 달려 있고, 기르고 농사짓는 근본은 심고 거두는 것보다 앞설 일이 없습니다. 생령(生靈)의 기쁨과 괴로움이 항상 여기에 달려 있고, 국가 재용의 넉넉함과 모자람이 항상 여기에 달려 있으니 참으로 심고 거두는 일은 왕정(王政)의 근본일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옛적 성왕(聖王)들은 이를 중시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소민(小民)이 의지하는 바를 알고서 백성의 힘을 안배하였고, 심고 거두는 일이 힘들고 어려움을 살피고서 백성의 생산을 구제해 주었습니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데에 농사짓는 시기를 어기지 않고, 김매고 수확하는 데에 농사일을 방해하지 않으니, 백성들은 이에 먹을 것이 풍족하여 그 낳고 기르는 즐거움을 성취할 수 있고, 나라는 이에 재용을 이롭게 하여 그 부유(富裕)로운 치세(治世)를 누릴 수 있습니다. 어찌 후세에서 농사를 괴로워하여 나라를 병들게 하는 것과 같겠습니까.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심고 거두는 공로는 백성에게 달려 있고, 백성으로 하여금 힘을 다하게 만드는 것은 윗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백성의 일을 늦추지 않고 농사의 공로를 다하기를 기다려 준다면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곤궁하지 않을 것이지만, 백성을 고되게 부리며 경작지에 복무하지 못하게 한다면 농사는 병들고 풀밭이 개간되지 않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실심(實心)을 다하여 그 실제 은택을 시행함으로써, 백성의 생업을 안정되게 하고 백성의 힘을 여유롭게 해 준 뒤에야 농사일까지 편안해지게 되어 그 노적가리가 꽉 찰 것입니다. 그렇다면 심고 거두는 농정(農政)은 실심으로 실제 은택을 시행하는 것일 뿐인바, 아뢰어 보겠습니다.
후직(后稷)이 백성을 가르침에 오곡(五穀)을 심고 가꾸었으며4), 대우(大禹)가 전토(田土)를 정함에 견(畎)과 회(澮)를 깊이 팠으니5), 토지를 살펴보는 방도와 백성을 먹인 공(功)에 대해 어리석은 제가 어찌 그 사이에 끼어들 수 있겠습니까. 백성을 보기를 다칠 듯이 여기어6) 한시도 태만하지 말며7), 규(圭)와 벽(璧)을 이미 다 바치어8) 가뭄으로 인한 재앙을 풀었으니, 백성을 편안케 하는 일을 한 문왕(文王)9)과 몸을 편안히 두지 않은 선왕(宣王)10)은 더할 나위가 없습니다. 《서경(書經)》의 〈무일(無逸)〉 편과 《시경(詩經)》의 〈칠월(七月)〉 편, 이것은 곧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훈계한 내용인바 근본에 힘써야 한다는 뜻을 어찌 굳이 깊이 궁구해야만 될 것이겠습니까.
아, 지난 천년 동안 노(魯)나라 희공(僖公)만큼 비오기를 근심한 적이 없었지만 진(秦)나라 관리들에게 경쟁적으로 가혹하게 징수 당하였으니, 농사에 힘을 쓰며 곡식을 중시하는 정사(政事)를 어리석은 저는 많이 보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돈꿰미가 썩고 곡식이 붉게 부패할 정도로 부유한 11)후원(後元)12) 세대에 겨우 보았고, 1말의 쌀이 3전이 되는 성과13)정관(貞觀)14)의 시대에 우연히 마주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경(文景)의 치세(治世)15)에도 한갓 잡다한 패도(覇道)를 숭상하였고, 당(唐)나라 태종(太宗)의 덕으로도 잡박한 이적(夷狄)의 방법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함께 의론할 것이 있겠습니까. 진(秦)나라의 상앙(商鞅)은 처음으로 천맥법(阡陌法)을 개창하고 위(魏)나라 이회(李悝)는 혹 토지의 이로움을 극진히 하였지만, 정전법(井田法)은 폐기되고 새 밭과 묵은 밭을 가는 이로움은 사라졌습니다. 그러한즉 법제(法制)를 만든 폐단과 재화(財貨)를 탐욕한 죄에서 어찌 도망할 수 있겠습니까. 한 나라 무제(武帝) 때에 상홍양(桑弘羊)이 처음 술 판매를 독점함에 가을철 털끝조차 분석하고, 당 나라 태종(太宗) 때에 유안(劉晏)이 소금과 철을 전속 관할함에 모리(謀利)하는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그렇지만 복식(卜式)의 간언16)과 오봉(五峯)의 기롱17)에서 진실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재화를 생산하면서 근본에 힘쓰는 일이 제대로 그 도리에 부합한 경우는 어리석은 저는 아직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 선량한 농부가 농사를 잘 짓는 것은 많은 수확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고, 군자가 말을 잘 하는 것은 힘쓸 바를 아는 것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선은 이에 대해 놔둔 채 한번 현재 상황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공경히 생각건대 우리 성군께서는 총명(聰明)으로 임하신 성철(聖哲)이시기에 심고 거두는 일의 힘들고 어려움을 먼저 아셨으므로 소의한식(宵衣旰食)하며 안락한 잠자리도 편안히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정사에 대해서는 사관이 끊임없이 기록하였고, 농사를 중시하는 명령은 전후로 나타나 있습니다. 벼농사에 농기구가 있음에 땅에는 버려지는 이익이 없고 이를 수확하고 이를 밭갊에 사람들에게는 버려지는 노동력이 없으니, 백성들은 왕성한 생업이 있고 나라는 곡식이 풍부한 성대함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원문 빠짐] 계속 이어지어 백성들이 삶을 영위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길에는 유랑 행렬이 계속 이어지고 도랑과 계곡에는 뒹구는 시체가 죽 이어졌습니다. 그런데도 양(梁)나라의 진휼책18)은 이어가기 어렵고, 노(魯)나라의 창고19)는 텅 비었음을 알리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농사를 중시 [원문 빠짐] 위에서는 부지런한데 농부를 먹이는 효과가 아래에서는 팍팍하단 말입니까.
어리석은 저는 감히 모르겠습니다만, 독책하는 일이 그 핵심에 대해서는 미진하여 그러한 것입니까, 부세는 무겁고 요역은 번다 [원문 빠짐] 전답에 진력하지 않아서 그러한 것입니까? 아니면 감히 모르겠습니다만, 농사일에 나태한 채 스스로 안일에 빠져 근본을 등지고 말단을 추구하여서 그러한 것입니까. 어리석은 제가 집사의 질문에 대하여 대책을 비의 [원문 빠짐] 우선 한두 가지 소견을 취하여 말해보겠습니다. 권면하는 일은 통제력이 상실되어 가는데 유사(有司)의 징렴(徵斂)은 끝이 없고, 서녘의 일이 한창 바쁜데 과외(科外) [원문 빠짐] 요역이 번다하게 있습니다. 이 같은 폐단에 있어서 어찌 적폐(積弊)의 원인이 없겠습니까. 잗다란 한 은혜는 실제 쓰임에 보탬이 안 되고, 고식적인 말단 정책은 결국 [원문 빠짐] 도구인즉 심고 거두는 농사일이 끝내 병들고, 생민이 곤궁하고 굶주리는 것은 괴이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한즉 농사에 힘쓰는 도리에 있어서 어찌 그 근본이 없겠습니까. 어리석은 제가 앞서 [원문 빠짐] 실제 은혜를 행한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전(傳)》에 “마음에 있으면 정사가 거행된다20).”라고 하였고, 《맹자(孟子)》에 “인언(仁言)은 인성(仁聲)이 사람에게 깊이 들어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였습니다. - 원문 빠짐 - 위한 계책으로는 대우(大禹)가 직접 농사를 지은 실제 마음을 체득하고, 주 문왕이 전지(田地)에 대해 쏟은 실제 은혜를 본받는 것 만한 일이 없습니다. 한 가지 정사를 펼친 것이 농사에 해가 되거든 “근본에 힘쓰는 나의 마음이 대우(大禹)에게 부끄러운 점이 있는가. 어찌하여 대우는 백성들에게 곡식을 먹이는 공(功)을 이룰 수 있었는데,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대우만 못한 점들은 제거하고 대우와 같은 점은 좇아야 합니다. 하나의 명령의 시행이 농사에 장애가 되거든 “백성을 양육하는 나의 은혜가 주나라 문왕(文王)에게 부족한 점이 있는가. 어찌하여 주나라 문왕은 백성을 편안케 하는 일의 성과를 이룰 수 있었는데,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주나라 문왕만 못한 점들은 제거하고 주나라 문왕과 같은 점은 좇아야 합니다.
그 징렴을 줄임으로써 그 요역을 간단히 하며, 마무하는 방법을 잘 해냄으로써 권면하고 도와주는 공(功)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농사는 그 시기를 놓치지 않고, 김매고 가꾸는 일을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민첩히 하여 그 토지에 의지함이 있게 되어 중외(中外)에서 똑같이 환호할 것입니다. 남쪽 밭이랑에서는 호미를 매고 대부분 감격에 겨워 노래 부르고, 동쪽 교외에서는 벼를 심은 것이 시야가 미치는 끝까지 구름처럼 성대함을 볼 것이니, 또한 심복(心服)함을 알 수 있습니다. 경작하는 백성들에게는 삶을 즐거워할 업(業)이 있고, 붉게 부패할 정도의 곡식21)은 계속 쌓여 언덕과 같고 모래섬 같은 노적가리22)를 이룰 수 있거늘, 어찌 심고 가꾸는 농사일이 잘 되지 않아 상하가 부족하게 될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글을 다 완성하지 못하였는바, 남은 속마음을 다시 털어놓겠습니다. 아, 실제 마음을 가지고 실제 은혜를 시행하는 것은 진실로 한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만, 왕의 은혜를 받들어 흐르게 하고 교화를 펼치게 하는 23)은 적임자를 얻는 데에 달려 있지 않겠습니까. 비록 대순(大舜)과 같은 성인이라도 익직(益稷)과 같은 신하의 보좌가 없었다면, 재물을 언덕처럼 쌓으리라는 노래24)를 독점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성군의 덕은 진실로 대순의 아래에 있지 않으시니, 섭리(燮理)의 도를 제대로 도울 수 있는 자라야 정말로 익직이 대순을 보좌한 것처럼 우리 임금을 보좌할 수 있을 것인저!
우리 임금께서 위에서 은혜를 베푸시면 그것이 밑으로 내려와 그 은혜를 받들어 흐르게 할 수령은 아래에서 직분을 다할 것인즉, 이는 마치 바람 부는 방향으로 소리를 지르면 목소리가 커진 게 아니건만 듣는 사람은 또렷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25)과 같습니다. 초가집에서도 낳고 낳는 즐거움을 향유하고, 가난한 이들도 곡식이 풍성함을 칭송하리니 격양가(擊壤歌)26)를 오늘날에 다시 들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한(漢)나라 선제(宣帝)는 “나와 함께 다스릴 자는 바로 선량한 이천석일 것이로다27).”라고 하였고, 주자(朱子)는 “임금과 신하는 조정의 근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리석은 저의 견해는 이와 같은데, 집사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삼가 대책문28)을 올립니다.

[주석]

1) 수사(遂師)가……순찰한다
이 말은 《주례(周禮)》 〈지관(地官) 수사(遂師)〉에 보인다. 수사는 주대(周代)의 관직명으로 수인(遂人)을 보좌하여 정령(政令)과 금법(禁法)을 관장하였다. 가색(稼穡)은 그 소(疏)에서 “봄에 심는 것을 가라 하고, 가을에 거두는 것을 색이라 한다.[其春種曰稼 秋斂曰穡]”라고 하였다.
2) 쟁기를…권면한다
이 말은 《한서(漢書)》 권99 〈왕망전(王莽傳)〉에 보인다.
3) 조장(助長)
조급히 키우려다 오히려 망친다는 뜻이다. 《맹자(孟子)》 〈공손추상(公孫丑上)〉에 “억지로 조장하는 자는 벼싹을 뽑아놓는 자이니, 유익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해치는 것이다.[助之長者 揠苗者也 非徒無益 而又害之]”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4) 후직(后稷)이……가꾸었으며
이 말은 《맹자(孟子)》 〈등문공상(滕文公上)〉에 보인다. 허행(許行)에게서 배운 진상(陳相)에게 맹자가 치인(治人)과 치어인(治於人)의 도리를 말하면서 “후직이 백성들에게 가색을 가르쳐서 오곡을 심고 가꾸게 하셨는데, 오곡이 성숙함에 인민이 잘 길러졌다.[后稷敎民稼穡 樹藝五穀 五穀熟而民人育]”라고 하였다.
5) 대우(大禹)가……팠으니
《서경(書經)》 〈우서(虞書) 익직(益稷)〉에서, 우(禹)가 제순(帝舜)에게 자신이 한 일을 말하면서 “제가 구천을 터놓아 사해에 이르게 하고, 견과 회를 깊이 파서 내에 이르게 하였습니다.[予決九川 距四海 濬畎澮 距川]”라고 하였다. 채침(蔡沈)의 주에서 《주례(周禮)》를 인용하여 “1무 사이에 넓이가 1척이고 깊이가 1척인 것을 견이라 하며, 1동 사이에 넓이가 2심이고 깊이가 2인인 것을 회라 한다.[一畝之間 廣尺深尺曰畎 一同之間 廣二尋深二仞曰澮]”라고 하였다.
6) 백성을……여기어
《맹자(孟子)》 〈이루하(離婁下)〉에서 맹자가 “문왕은 백성을 보기를 다칠 듯이 여기셨으며, 도를 바라보시고도 보지 못한 듯이 여기셨다.[文王視民如傷 望道而未之見]”라고 하였다.
7) 한시도 태만하지 말며
《서경(書經)》 〈상서(商書) 태갑중(太甲中)〉에서 이윤(伊尹)이 태갑에 말하기를, “왕은 당신의 덕을 힘쓰시어 당신의 열조를 살펴보아 한시도 태만하지 마소서.[王懋乃德 視乃烈祖 無時豫怠]”라고 하였다.
8) 규(圭)와……바치어
《시경(詩經)》 〈대아(大雅) 운한(雲漢)〉에서 선왕(宣王)이 여왕(厲王)의 학정(虐政)을 평정하고 왕화(王化)를 다시 펴려 할 즈음 백성들이, “신의 제사를 거행하지 않음이 없으며 이 희생을 아끼지 아니하여, 규벽을 이미 다 바쳤거늘 어찌하여 내 말을 들어주지 아니하시는가.[靡神不擧 靡愛斯牲 圭璧旣卒 寧莫我聽]”라고 하였다.
9) 백성을……문왕(文王)
《서경(書經)》 〈주서(周書) 무일(無逸)〉에서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훈계하기를, “문왕께서 나쁜 의복으로 백성을 편안히 하는 일과 농사일에 나아가셨습니다.[文王卑服 卽康功田功]”라고 하였다. 채침(蔡沈)의 주에서 “강공은 백성을 편안히 하는 일이고, 전공은 백성을 기르는 일이다.[康功 安民之功 田功 養民之功]”라고 하였다.
10) 몸을……선왕(宣王)
《시경(詩經)》 〈대아(大雅) 운한(雲漢)〉의 모서(毛序)에서, “선왕이 여왕의 학정을 뒤이어 안으로 난을 평정하려는 뜻을 품었는데, 재앙을 만나 두려워하여 몸을 편안히 두지 않고 행실을 닦아 재앙을 없애려고 하였다.[宣王承厲王之烈 內有撥亂之志 遇災而懼 側身修行 欲銷去之]”라고 하였다. 공영달(孔穎達)의 소(疏)에서 “측은 바르지 않음을 말하는 것인데, 이리저리 뒤척거림을 이른다. 근심 때문에 절로 편안하지 않으므로 몸가짐을 이리저리 뒤척거리는 것이다.[側者 不正之言 謂反側也 憂不自安 故處身反側]”라고 하였다.
11) 돈꿰미가……부유한 것
《한서(漢書)》 권64 〈가연전(賈捐傳)〉에서,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주애군(珠崖郡)의 반란을 진압할 방법을 묻자 가연(賈捐)이 말하기를, “효무황제 원수 6년에 이르러 태창의 곡식은 붉게 부패하여 먹을 수 없고, 도성 내의 돈은 돈꿰미가 썩어 셀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至孝武皇帝元狩六年 太倉之粟 紅腐而不可食 都內之錢 貫朽而不可校]”라고 하였다.
12) 후원(後元)
한(漢)나라 무제(武帝)의 11번째이자 마지막 연호로, BC 88년부터 BC 87년까지를 말한다.
13) 1말의……성과
《신당서(新唐書)》 권51 〈식화지(食貨志)〉에 “이때에 해내가 부유하고 가득 차 쌀 한 말의 가격이 13전이었는데, 청제 지역에서는 한 말에 겨우 3전이었다.[是時 海內富實 米斗之價錢十三 靑齊間斗纔三錢三]”라고 하였다.
14) 정관(貞觀)
당(唐)나라 태종(太宗)의 연호로, 627년에서 649년까지를 말한다.
15) 문경(文景)의 치세(治世)
한(漢)나라 문제(文帝)(BC202~BC157, 재위:BC180~BC157)와 경제(景帝)(BC188~BC141, 재위:BC157~BC141)의 통치 기간을 합하여 이른 말이다. 상대적으로 검소하여 세금을 줄였어도 국가 재정이 튼실하였다고 한다.
16) 복식(卜式)의 간언
한(漢)나라 무제(武帝) 시절 복식은 태자태부(太子太傅)이고, 상홍양(桑弘羊)은 치속도위(治粟都尉)이었을 적에, 약간 가뭄이 들자 무제가 관원들에게 비가 오도록 방법을 찾게 하였는데, 복식이 “고을 관원들은 마땅히 조세를 받아서 먹고 입을 뿐입니다. 지금 상홍양이 관리들로 하여금 저잣거리에 나앉아 좌판을 벌려, 물건을 팔아 이익을 추구하게 하고 있습니다. 상홍양을 삶아 죽인다면 하늘에서 비를 내릴 것입니다.[縣官當食租衣稅而已 今弘羊令吏坐市列肆 販物求利 亨弘羊 天乃雨]”라고 간언하였다.(《史記 卷30 平準書》)
17) 오봉(五峯)의 기롱
오봉의 기롱이 무엇인지 분명치 않다. 혹 ‘五峯’이 유안(劉晏)에 앞서 염철의 독점 관리하던 제오기(第五琦)의 ‘五琦’의 오자인지 분명치 않다. 혹은 송(宋)나라 호굉(胡宏)의 호가 오봉인데, 호굉이 후대에 유안을 비판하였는지도 분명치 않다.
18) 양(梁)나라의 진휼책
전국시대에 양(梁)나에 흉년이 들자 혜왕(惠王)이 그 구휼 대책으로 백성을 옮기고 곡식을 옮긴 것[移民移粟]을 말한다.(《孟子 梁惠王上》)
19) 노(魯)나라의 창고
노나라에는 순(舜)임금 시대부터 있어온 자성(粢盛)의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고 한다.(《禮記 明堂位》)
20) 마음에……거행된다
《중용(中庸)》에는 “그러한 사람이 있으면 그러한 정사가 거행되고, 그러한 사람이 없으면 그러한 정사가 종식됩니다.[其人存 則其政擧 其人亡 則其政息]”라고 하여, 원문의 ‘心’이 ‘人’으로 되어 있다.
21) 붉게……곡식
《한서(漢書)》 권64 〈가연전(賈捐傳)〉에서,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주애군(珠崖郡)의 반란을 진압할 방법을 묻자 가연(賈捐)이 말하기를, “효무황제 원수 6년에 이르러 태창의 곡식은 붉게 부패하여 먹을 수 없고, 도성 내의 돈은 돈꿰미가 썩어 셀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至孝武皇帝元狩六年 太倉之粟 紅腐而不可食 都內之錢 貫朽而不可校]”라고 하였다..
22) 언덕과……노적가리
《시경(詩經)》 〈소아(小雅) 보전(甫田)〉에 “증손의 농사가 이엉과 같고 수레의 끌채와 같으며, 증손의 노적가리가 모래섬과 같고 언덕과 같도다.[曾孫之稼 如茨如梁 曾孫之庾 如坻如京]”라고 하였다.
23) 왕의……하는 것
《한서(漢書)》 권56 〈동중서전(董仲舒傳)〉에 “지금의 군수와 현령은 백성들의 통솔자이기에 인주의 은혜를 받들어 흐르게 하고 교화를 펼치는 일을 맡은 것이다. 그러므로 통솔자가 현명하지 못하면, 인주의 덕은 펴지지 못하고 은택은 흐르지 못하게 된다.[今之郡守縣令 民之師帥 所使承流而宣化也 故師帥不賢 則主德不宣 恩澤不流]”라고 하였다.
24) 재물을……노래
《공자가어(孔子家語)》 권8 〈변악해(辯樂解)〉에서 자로(子路)가 망국의 음악을 거문고로 타는 것을 공자가 듣고서 말하기를, “옛적에 순임금이 다섯 줄로 된 거문고를 타면서 남쪽 바람이라는 시를 만들었는데, 그 시에 ‘남쪽 바람이 훈훈하니 우리 백성의 수심을 풀 수 있으리. 남쪽 바람이 때에 맞으니 우리 백성의 재물을 언덕처럼 쌓을 수 있으리.’ 하였다.[昔者舜彈五弦之琴 造南風之詩 其詩曰 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慍兮 南風之時兮 可以阜吾民之財兮]”라고 하였다.
25) 바람……있는 것
이 내용은 《순자(荀子)》 〈권학(勸學)〉 편에 보인다. 단, 원문에는 ‘順風而呼 聲非加疾’로만 되어 있는데, 《순자》에 근거하여 ‘而聞者彰’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26) 격양가(擊壤歌)
요(堯)임금 때 늙은 농부가 땅을 치면서 천하가 태평한 것을 읊은 노래로, “내 해뜨면 일어나고 해지면 쉬며, 우물 파서 마시고 밭 갈아 먹으니, 임금의 공력이 나와 무슨 상관이리오.[吾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帝力於我何哉]”라고 하였다.(《王充, 論衡 異虛》)
27) 나와……것이로다
이 내용은 《한서(漢書)》 권89 〈순리전(循吏傳)〉 서문에 보이는데, 이천석은 당시 지방 군수의 연봉으로 곧 수령을 말한다.
28) 대책문
대책(大策)은 과거시험의 한 과목 또는 그때 작성하는 문장을 말한다. 중국 한나라의 관리등용시험에서 그 시초를 찾을 수 있다. 정사(政事)나 경의(經義)상의 문제를 내면 수험자는 거기에 답하였는데, 책(策)은 이때 문제를 써놓은 글이다. 우리나라는 958년(광종9) 과거를 처음 실시하면서 시무책(時務策)도 함께 물었다. 조선시대도 고려의 과거제를 계승하여 문과시의 종장(終場)에 대책을 시험하여 《경국대전》 이후의 법전에도 거의 변동 없이 준수되었다. 역대의 사기(史記)나 시무에 관한 것이 주로 출제되었다. 그러나 과거 이외 때로는 일반관리에게 책문을 내어 그 성적에 따라 자품(資品)을 올려 포상을 하기도 하고, 관리나 관직에 있지 않은 지식인들도 정치적 의견을 시무책의 형식으로 밝히는 경우가 있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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