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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문(科文)-대책(對策)    
G002+AKS+KSM-XI.0000.0000-20101008.B002a_002_00675_XXX
 
분류 고문서-시문류-과문 / 정치·행정-과거-과문
추정시기 연대미상
형태사항 크기: 25×170 / 낱장, 1장 / 종이 /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 부안 우반 부안김씨  / 현소장처 : 부안 우반 부안김씨  
비고 출판정보 : 영인본: 『고문서집성 2 -부안 부안김씨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8) / 정서본: 『고전자료총서 83-3 부안김씨 우반고문서』(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3) / 본 이미지는 전북대학교 박물관에서 제공한 것으로 저작권이 전북대학교 박물관에 있음. 역주본: 『고문서역주총서 2: 부안 부안김씨 우반고문서』(한국학중앙연구원, 2017)
고문서집성 수록정보 『고문서집성』02 / 8. 시문류 / (4) 대책문초 / 대책문초2 / 1013 ~1017쪽
 
진휼의 방책에 대한 상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책문초(對策文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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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王若曰 云云
 臣對 曷嘗有以宋臣■■鄭俠流民之圖進
 于 殿下者乎 當時流民之入京師者 左右夙夜
 之臣 豈無見者 而無一人告于其帝者 鄭俠一微
 官也 而獨不忍見其父母妻子之遷移困頓遑
 遑不給之狀 寫圖投進 則鄭俠憂民之意 可想
 也 亦嘗有以故相臣鄭澈之疏告于我 殿下
 者乎 澈當倭寇充斥之日 朝京師不忍見道
 路之餓莩 上章于 宣廟 請以惻怛之意 下
 哀痛之詔 得錢谷濟其民 則鄭澈憂民之意
 亦可見也 今我 殿下當皇天降灾之日 哀萬
 姓顚壑之慘 憂深於救濟之策 謀及於韋
 布之士 噫今日之飢民 不啻於安上之飢民 今
 日之謀拯 不下於癸巳之謀拯 則殿下之悶 可謂
 切矣 殿下之意 可謂懇矣 臣雖不侫 敢不以鄭
 俠鄭澈之疏爲 殿下流涕誦之乎
 臣伏讀 聖策曰自凶饑之患止未免於鬻子 臣
 奉命主臣 拜手稽首曰 文王 式克之意 我殿下
 欲有之矣 臣窃伏念 民之所天者食也 而旣乏其食
 則民何以生之 君之所天者民也 而旣無其民 則君
 誰與爲國 此人君之遇凶 年饑歲也 必盡心於救
 民 竭力於賑飢者也 若謂天災之流行 國家之
 代有 而其於救飢之策 不能預爲之所 則不幾
 於使斯民飢而死耶 噫世之論救飢之策者 必以
 孟軻所謂仁政 臣觀今日之急 猶以爲未也 何者 夫仁政者 薄稅
 歛省刑罰之謂也 今欲薄稅歛省刑罰而爲仁
 政 則不幾於決 西江之水 活涸轍之魚者耶 世之講
 救飢之政者 必以易經所謂節用 而臣觀今日之急 亦以爲未也 何
 者 夫節用者 不傷財不害民之謂也 今欲不傷財不害
 民 而爲節用 則不幾於無麵不托者耶 然則何爲而
 可也 傳曰 稷思天下 有飢者 猶己飢之 禹思天下
 有溺者 猶己溺之 夫己之飢也 其所以救之盡其誠者 何
 如也 己之溺也 其所以救之盡其誠者 何如也 噫今日之飢 不
 下於稷之時矣 今日之溺 不下於禹之時矣 誠能不以
 民之飢 爲民之飢 而以己之飢 視之 不以民之溺 爲民之
 溺 而以己之溺視之 則我 殿下盡其誠於救民之飢者
 卽稷之盡其誠於救其民者也 我 殿下盡其誠於
 救民之溺者 卽禹之盡其誠於救其民者也 伏願
 殿下留神焉
 吁聖莫如堯 而洚水之警 至於九載 德莫如湯 而旱
 魃之慮 至于七年 則戚然之變 可見於二聖 而俗臻
 熙皥 民無菜色者 豈無所以然哉 不過曰國有
 餘財 上盡其誠而己 承仁腐之業 享富庶之盛
 則建元之治 不讓三代 而終未免財力之虛耗 行四
 年之仁 致三錢之化 則貞觀之治 罕見近世 而卒至於
 關外之鬻子 噫不息土木之役 又極窮黷之患 則幾
 至於亡?之績者 不亦宜乎 不戒用兵之禍 至於
 東
之役 則未保其初之治者 良以此也 噫非三代不
 
 法先儒之訓也 堯湯之遇災盡誠 此殿下之可戒
 者也 ▣唐之▣....▣伏願
 念哉
 臣伏讀聖策曰 自予以寡昧止拮据何地 臣聞命
 踧踖拜稽曰 成湯責己之心 我殿下卽有之矣 臣
 護按康誥曰 若保赤子 謂之赤子 則其所以愛之
 保之[者?]何如也 我殿下視此而爲之法 故以愛保其
 子 爲固邦之本 臣又按康誥曰 恫癏乃身 謂之乃身
 則其所以愛之護之者何如也 我殿下視此而爲之法 故
 以愛護其身 爲恤民之本 一念民隱 洎今二紀 則宜
 乎屢疊之頌 可續於周雅 粒我之歎 可聞於堯民 然而
 未至於是者 獨何歟 噫何代無凶 而曷有如去年之
 慘耶 何國無饑 而曷有如今年之酷耶 萬民春
 夏之命 只在於兩年 而兩年連至枯損 則春秋所
 謂無麥者 豈如是之甚耶 萬民 一歲之食 都在乎
 禾稼 而禾稼又至於卒痒 則韓愈所謂田畝少
 所收者 豈若此之慘耶 閭里蕭然 十室九室 則
 孑遺之歎已極矣 皮之不存 毛將安傅 則國空之
 患將至矣 言念及此 其亦太息之不足也 其所流涕之
 不足也 其亦痛哭之不足也 噫殿下於宗廟之祭 已徹
 六英之樂 臣亦知之矣 殿下於朝夕之奉 已減八㫆之
 饍 臣亦知之矣 噫禹貢惟正之供 將於何責之 周官
 三等之祿 將於何責之 而況齊王之棠已空 長孺之
 倉無發 移栗之政 古人之所已行者也 今欲行之 則其如八
 路之無糴何 賣爵之擧 古之人所已行者也 今欲行之 則
 其下民之懸磬何 噫雖有智者 無以善其責
 矣 我東方億萬蒼生 其將盡爲顚壑之鬼耶 噫龍
 樓半夜 玉漏丁東 而丙枕無寐 念及于此 則殿下之
 心 當復如何 此所以降問於臣等 而欲聞一得之愚者也 臣請
 先言致此之由 而後及救此之策可乎 臣聞傳曰 至
 誠而不動者 未之有也 我殿下果能盡誠而動其
 天乎 乃者是歲之凶也 徒事文具之末不見成湯之六責
 未聞宋景之三言 則其視羲易 所謂盈缶之實
 何如也 臣於此有以見吾民之累困於是餓者 亦由於
 聖心對越之無其誠也 又聞先傅曰 上以至誠而待其
 下 則下亦竭誠而報其上我殿下果能盡誠而恤其下
 乎 乃者賑飢之疏 未見惻怛之誠 只歛富民之穀 徒資
 奸吏之窃 則其視羲易 所謂有孚惠心何如也 臣於
 此有以見吾民之未蒙實惠者 亦由於聖心怛民之無
 其誠也 由是觀之 減膳徹樂 非救民之本也 至誠
 愛民 乃救民之本也 移粟賞爵 非得財之道也 若保恫癏 乃得財之道也 誠能至誠而待其下 則昔之閉
 糴者 安知不閉於今日 誠能至誠而賑其飢 則昔之盜
 窃者 安知不窃於今日乎 噫所謂財者非天生而地出也
 非鬼施而神設也 昔者壬辰兵燹之餘 而尙有救民之
 道甲
午相食之際 而亦有拯濟之策者 不過曰上盡其誠而
 民蒙實惠也 乃者數年之凶 雖或慘矣 其視兵
 燹之際 豈可同日而語哉 臣所謂至誠待下 則自有
 其財之可救者 有見乎此也 伏願 殿下無皇曰無稽也
 臣伏讀聖策 曰自諸生止視策焉 臣承命感激
 拜稽曰 大舜好察之心 我殿下 卽有之矣 噫殿下
 恤民之誠 雖切於上 而百里分憂之人 不奉於下 則
 殿下之民 將何以蒙其澤乎 漢宣帝之言曰 與我共理
 者 其非良二千石乎 親民之官 莫近於守令也 今之爲
 令
者 專事肥己 不念斯民 文天祥所 謂操斧斤淬鋒
 鍔 日夜思所以斬伐其命脉者 正爲今日道也 然則今日
 賑飢之道 只在於守令之得其人矣 伏願
 殿下旣盡其誠 又得其人 以責其任 則今日之民 庶幾
 不至於死而得所矣伏願 殿下留神焉 臣謹對
상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운운(云云).
신이 이에 대답합니다. “어찌 일찌기 송나라 신하인 정협(鄭俠)의 유민도(流民圖)와 같은 것을 전하께 바친 일이 있었겠습니까? 당시 유민(流民)들 중에서 경사(京師)에 들어온 것을 좌우에 가까이 있는 신하들 중 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것인데, 한 사람도 황제에게 고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직 정협(鄭俠)만은 미미한 관직에 있었지만 그 부모와 처자가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곤핍하고 겨를 없이 당황하며 넉넉지 못한 상황을 견딜 수 없어서 그림을 그려 바쳤으니 정협이 백성들을 근심하는 뜻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1) 또한 일찍이 고(故) 상신(相臣) 정철(鄭澈)2)이 우리 전하께 상소하여 고한 적이 있었는데 이는 어째서 그랬겠습니까? 정철은 왜구가 가득 차 퍼져나가는 날에 서울에 조회 왔다가 도로에서 길가에서 굶주리고 얼굴이 뜬 사람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선조에게 글을 올려 슬퍼하는 뜻으로 애통(哀痛)의 글을 내려서 백성들의 곡물을 얻어 그의 백성들을 구제할 것을 청하였으니, 여기서 정철이 백성들을 근심하는 뜻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 하늘이 재해를 내린 날에 백성들이 계곡에 거꾸러지는 비참을 슬퍼하여 구제의 방책을 깊게 근심하였고, 그러한 대책에 대해 도모하는 것이 일반 선비들에게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아! 오늘날 굶주린 백성들을 편히 하는 것뿐만 아니라, 상께서 굶주린 백성들을 오늘날 건져내려 도모하는 것은 계사년에 도모한 것에 못지않습니다. 그런즉 전하의 근심은 절실하다고 할 만하며, 전하의 뜻은 간절하다고 할 만합니다. 신은 비록 재주가 없지만, 감히 정협과 정철의 상소로써 전하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그 일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전하의 성책을 삼가 읽고 말씀드립니다.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것을 근심한다’[흉기지환(凶饑之患)]는 구절부터, 자식을 팔게 되는 근심을 면치 못한다.[미면어육자(未免於鬻子)]는 구절까지, 신이 명을 받들어 황공스럽게도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말씀드리니, “문왕(文王)이 잘 이행하였다는 내용에 대해 우리 전하께서도 마음을 두셨으면 합니다. 신은 외람되게도 삼가 생각하건데, 백성들이 하늘로 삼는 것은 먹는 것이니, 먹는 것이 적다면 백성들은 어떻게 살며, 임금이 하늘로 삼아야 하는 것은 백성들이니, 백성들이 없다면 군주는 누구와 더불어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이것은 군주가 흉년과 굶주린 해를 만났기 때문이니, 필시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 마음을 다하고 굶주린 사람들을 진휼하는 데 힘을 다한 것입니다. 그 하늘에 재해가 유행하는 것이 국가는 시대마다 있었는데, 굶주리는 사람을 구제하는 방책에 대해서 미리 하는 바가 없다면 거의 백성들로 하여금 굶어서 죽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아 세상에서 그 배고픈 사람을 구제하는 방책을 논하는 자는 맹가(孟軻:BC372?~BC289?)3)가 말한 어진 정치를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니, 신이 오늘날의 급박한 현실을 보건데, 오히려 아직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데,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겠습니까? 어진 정치란 세금을 가볍게 하고 형벌을 덜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세금을 덜어주고 형벌을 줄여서 어진 정치를 베풀고자 한다면, 이것은 거의 서쪽 강의 물을 터뜨려서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에서 숨을 할딱거리며 죽어가고 있는 물고기를 되살리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세상에서 굶주리는 사람을 구제하는 정책을 강구하는 자는 《역경(易經)》에서는 이른바 반드시 비용을 절약해야 한다고 하는데, 신이 오늘날의 시급한 현실을 보건데 이것만으로는 여전히 모자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요? 절용을 한다는 것은 재물을 손상시키지 않고 백성을 해치지 않는 것입니다. 재물을 손상시키지 않고 백성을 해치지 않고 절용을 하고자 한다면, 이는 ‘면이 없이 국수를 만드는 일’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옳겠습니까? 전하는 말에 이르길 “직(稷)4)이 천하를 생각할 적에 굶주리는 자가 있으면 오히려 자기가 그를 굶주리게 하는 것 같이 여기고, 우(禹)5)가 천하를 생각할 적에 물에 빠진 자가 있으면 오히려 자기가 물에 빠뜨린 것처럼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자기가 굶주리게 한 자를 구제하는 데 자기 정성을 다하듯이 하고, 자기가 물에 빠뜨린 자를 구제하는데 자기 정성을 다하듯이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아! 오늘날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는 현실이 직(稷)의 시대에 비해 못지않고, 오늘날 백성들이 물에 빠진 현실이 우왕(禹王) 시대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진실로 백성들의 굶주림을 저들만의 굶주림이 아니라 내가 굶주린다고 생각하시고, 백성들이 물에 빠진 것을 저들이 빠진 것이 아니라 내가 빠진 것으로 생각하신다면, 우리 전하께서 백성의 굶주림을 구제하는데 정성을 다하는 일은 곧 직왕이 자기 백성을 구제하는 데 정성을 다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 전하께서 백성들이 물에 빠진 자를 구제하는데 정성을 다하는 것은 곧 우왕이 그 백성을 구제하는데 정성을 다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여기에 마음을 쓰시기 바랍니다.
아아! 성인으로는 요왕(堯王)만한 분이 없습니다만 당시 홍수의 경계도 9년에 이르렀고, 덕은 탕왕(湯王)만한 분이 없지만 당시 한발(旱魃)의 염려가 7년에 이르렀으니, 이와 같은 걱정스런 변괴가 두 명의 성인에게서도 볼 수 있었지만, 당시의 풍속은 여전히 기쁘고 밝았고 백성들에게 주린 빛이 없었던 것은 어찌 그만한 까닭이 없었겠습니까? 나라에 남은 재물이 있고, 상께서 그 정성을 다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인후한 업을 이어받고 성대한 부유함을 누리니, 건원(建元)의 정치6)가 삼대의 정치에 못지않았지만, 끝내 재력을 헛되이 소모하는 것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4년의 인을 행하고, 3전의 교화를 다한다면7), 정관(貞觀)의 정치8)같은 것이 근세에 보기에 드물었지만, 그것은 끝내 관외(關外)에서 자식을 파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아아! 토목 공사를 쉬지 않고, 인륜을 더럽히고 소통하지 못하는 근심이 매우 커서, 거의 나라를 잃을 지경에 이른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병사를 쓰는 화를 경계하지 않아서, 요동(遼東)의 역에 이르러서 그 애초의 다스림을 보존하지 못한 것은 진실로 이것 때문입니다. 아아! 삼대가 선유(先儒)의 가르침을 본받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요왕과 탕왕이 재해를 만나 정성을 다하였으니 이것은 전하께서 경계할만한 점이니 삼가 유념하시기를 바랍니다. 한나라와 당나라가 용병(用兵)에 힘을 다하고 무력(武力)을 남용한 것을 전하께서 경계하셔야 할 것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신은 임금의 책문 중에서 ‘내가 모자라고 어둡기 때문에[여이과매(予以寡昧)]’로부터 ‘어느 곳에서 마련할까?[길거하지(拮据何地)]’까지를 논의하겠습니다. 신이 명을 듣고 송구하여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말씀드립니다. ‘성왕과 탕왕이 자기를 책망하는 마음은 우리 전하께서 이미 가지고 계십니다. 신(臣)은 삼가 〈강고〉(康誥)9)에서 “갓난아기를 보호하듯이 하라.”고 하는 구절을 살펴보니, 갓난아기라고 말한 것은 사랑하고 보호한 것이 어느 정도였겠습니까? 우리 전하께서 이것을 보고서 법을 삼아 그 자식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으로 나라를 공고히 하는 근본으로 삼으십시오. 신이 또 〈강고〉를 살펴보니, “아픔과 병이 그대 몸에 있듯이[통환내신(恫癏乃身)]”라고 하였고 그대 몸[내신(乃身)]이라고 한 것은 양육하고 보호하게 하는 까닭은 어떠한 것입니까? 우리 전하께서 이것을 보고 본받으므로 자기 몸을 양육하고 보호하는 것으로 백성들을 가련히 여기는 근본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백성들이 겪는 괴로움을 오로지 생각하시고, 지금까지 2기(紀)가 지났으니 마땅히 송(頌)이 자주 쌓여 주나라의 아(雅)10)와 같은 것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며 자기들에게 밥을 먹여 살려달라는 탄식은 요나라 백성들에게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지 않았던 것은 단지 어째서이겠습니까? 아아! 어느 시대인들 흉년이 없었을까마는 그렇다고 어찌 지난해의 참혹함만 한 것이 있었겠습니까? 어느 나라엔들 기근이 없을까마는 어찌 금년처럼 혹독한 적이 있겠습니까? 만민(萬民)들이 봄과 여름 동안 목숨을 유지하는 것이 단지 두 해의 농사에 달려 있는데, 두 해에 걸쳐 연이어 말라 죽어 봄과 가을에 이른바 보리가 없는 것이 어찌 이와 같이 심하겠습니까? 만민의 일년 먹을거리는 모두 농사에 달려 있는데, 농사가 또 마침내 걱정스러운 지경에 이르니 한유(韓愈)11)가 말하는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적다.(田畝少所收)”고 한 것도 어찌 이와 같이 참혹한 것이겠습니까? 마을이 쓸쓸해져서 10집에 9집이 비었고 부모를 잃고 홀로 남은 탄식이 이미 지극합니다. 가죽이 없다면 터럭을 어디에 붙이겠습니까?12) 그런즉 나라가 장차 텅 비게 되는 근심이 생길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그 역시 지나치게 탄식하여도 부족하며, 눈물을 흘리기에도 부족하고, 그 또한 통곡하여도 부족합니다. 아아! 전하(殿下)께서 종묘제(宗廟祭)에서 이미 육영(六英)의 음악13)을 그만두었으니 신도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조석의 식사에도 이미 여덟 가지 진미의 반찬을 덜어낸 것도 신은 압니다. 아아! 우공(禹貢)에서 ‘백성들이 마땅히 바쳐야 할 세금’이라는 것은 앞으로 어디에 물릴 것이며, 주관(周官)에서 ‘3등의 녹(祿)’이라고 하는 것은 장차 어디에서 마련하려 하십니까? 하물며 제(齊) 나라 왕(王)의 당읍(棠邑)에 있는 창고는 이미 비었고,14)장유(長孺)15)의 창고는 연 일이 없으며, 흉년에 곡식을 옮기는 정사는 옛날 사람이 이미 행한 것인데, 지금 이것을 행하고자 한다면 팔도에 사들인 쌀이 없으니 어찌하겠습니까? 그리고 작위를 파는 일은 옛날 사람이 이미 행한 일인데, 지금 행하고자 해도 백성들의 집안에 식량이 없는데 어찌하겠습니까? 아아! 비록 지혜가 있는 자라고 하더라도 그 책임을 잘 수행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동방의 억만 창생들은 장차 모두 다 계곡을 메운 귀신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아아! 용루(龍樓: 태자궁)에서 밤을 지새우시다가 새벽에 동이 트도록 병침(丙枕: 임금의 잠자리)에서 잠을 못 이루실 것이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전하의 마음은 마땅히 다시 어떠하시겠습니까? 이것이 신들에게 물으셔서 어리석은 자에게 하나라도 듣고자 하시는 것이니, 신은 청컨대 먼저 이와 같은 연유를 말씀드린 뒤에 이것을 구제하는 방책에 이르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신이 전해 오는 말을 듣건대, “지극한 정성으로 감동시키지 않는 경우는 아직 없었다.”고 하는데 우리 전하께서는 과연 정성을 다하여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전에도 그해가 흉년인데도 한갓 문구(文具)의 말단을 일삼고 있었을 뿐이고, 성탕(成湯)의 여섯 가지 자책16)을 보지 못하였으며, 송경공(宋景公)의 세 마디 17)을 듣지 못하였으니 주역에서 말하는 바 ‘질장구의 속이 가득 차 있는’ 실질을 본들 어찌 하겠습니까?18)
신은 여기에서 우리 백성들이 이러한 굶주림에 괴로움을 겪는 것이 또한 임금께서 상제(上帝)를 마주하는 듯이 하는 정성이 없는 데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또 선부(先傅)에게 듣기를, “윗사람이 지성으로 그 아랫사람을 대하면 아랫사람도 정성을 다해서 그의 윗사람을 보답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과연 정성을 다하여 아랫사람을 불쌍히 여기십니까? 이전에 굶주리는 백성들을 진휼하라는 소(疏)에서 불쌍히 여기라는 정성은 보지 않으시고, 단지 부민들의 곡식을 거두어들여서 간악한 관리들이 훔쳐 먹는 데 밑천이 되게 하였다면, 주역에서 이른바 은혜로운 마음에 진심을 둔다고 한 것과 비교해서 어떠하겠습니까? 신(臣)이 여기에서 우리 백성들이 실제 은혜를 받지 못한 것은 또한 임금께서 백성들을 측은히 여기는 정성이 없는 것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부터 보건대 반찬을 줄이고 음악을 물리는 것은 백성들을 구원하는 근본이 아니고, 지극한 정성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곧 백성을 구제하는 근본입니다. 풍년이 든 지역에서 흉년이 든 지역으로 곡식을 옮겨 구제하거나 진휼미를 낸 데 따라 작위를 상으로 주는 것은 재물을 얻는 바른 방법이 아니며, 어린 아이를 보듬듯이 하여 병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재물을 얻는 방법입니다. 참으로 지성으로 아랫사람을 대우한다면, 옛날에는 환자를 중지하던 것을 오늘날에는 중지하지 않을 것임을 어찌 알겠습니까? 참으로 지성으로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한다면, 옛날 훔쳐 먹던 자들이 어찌 오늘날 훔치지 않을 줄 어찌 알겠습니까? 아아! 이른 바 재물이란 하늘에서 낸 것도 아니고 땅이 낸 것도 아니고, 귀(鬼)가 밝힌 것도 아니고, 신이 베푼 것도 아닙니다. 옛날 임진왜란 이후에도 오히려 백성들을 구원하는 도가 있었으며, 갑오년에 서로 잡아먹을 때에도 그들을 구제하는 방책이 있었던 것은 윗사람이 자기의 정성을 다하면 백성들이 실제 은혜를 입은 것을 말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전에 수년 동안의 흉년이 비록 혹시 참혹하였지만, 병화의 때와 비교하면 어찌 같은 날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이른바 지성으로 아랫사람을 대한다면 절로 그 재화가 구제할 수 있다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으니, 삼가 원컨대 전하께서는 제가 여가를 이용하여 터무니없는 말을 한다고 하지는 마십시오.
신이 삼가 성책에서 〈제생(諸生)〉으로부터 〈시책언(視策焉)〉까지의 내용을 읽었습니다. 신이 명을 받아서 감격하여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기를, ‘위대한 순왕(舜王)의 잘 살피는 마음을 우리의 전하가 바로 가지고 있으시다.’라고 하였습니다. 아아! 전하께서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는 정성은 비록 위에서는 절실하더라도, 사방 백리(百里)의 고을에서 임금의 근심을 나누어 가진 수령이 아래에서 받들지 않는다면, 전하의 백성들은 앞으로 어떻게 왕의 은택을 입겠습니까? 한나라 선제(宣帝)19)의 말을 따르자면, ‘나와 이치를 함께하는 사람이 아마 좋이 이천석(二千石)20)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을 친히 여기는 관리는 수령보다 가까운 사람이 없으니 오늘날의 수령은 오로지 자기 살찌우기만을 일삼고, 이 백성들은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문천상(文天祥)21)이 이른바 ‘도끼를 잡고, 칼끝을 담금질하여 밤낮으로 그 명맥을 없애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은 바로 오늘날의 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굶주린 사람을 진휼하는 도는 단지 지방관이 직무에 합당한 사람을 얻는 것에 있을 뿐입니다. 삼가 원컨대 전하께서는 자기 정성을 다하시고, 그 사람을 얻어서 자기 책임을 다한다면 오늘날의 백성들은 거의 죽음에 이르지 않고 자기가 있을 곳을 얻기를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마음을 쓰시기를 바랍니다. 신은 삼가 대답합니다.

[주석]

1) 정협(鄭俠)
송(宋)나라 신종(神宗) 때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피폐하고 가뭄이 들었는데 왕안석의 권세에 눌려 아무도 이를 간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정협이 소장(疏章)과 함께 백성들의 실상을 그림으로 그려 합문(閤門)에 나아가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비밀스럽고 급한 일이라고 칭탁하여 마체(馬遞)를 발동시켜 곧바로 승정원에 올렸다. 신종이 그 그림을 보고 깊이 깨달아 다음 날 신법을 정지시키고 빈민을 구제하니 큰비가 내렸다. 그러나 정협은 간당(姦黨)들의 미움을 받아 멋대로 마체를 발동시켰다는 이유로 죄를 받았다.(《송사(宋史) 권321 정협열전(鄭俠列傳)》)
2) 정철(鄭澈)
1536년(중종31)∼1593년(선조26).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서울 장의동(藏義洞
3) 맹가(孟軻)
가(軻)는 맹자의 본명이고, 자는 자여(子與), 자거(子居)이며, 시호는 추공(鄒公)이다. 공자의 유학을 발전 계승하여 성선설을 주장하였다.
4) 직(稷)
순(舜)임금의 신하로 농사를 맡은 사람. 이름은 기(夔). 중국주(周) 나라의 시조이다.
5) 우(禹)
고대 중국 임금. 순(舜)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하왕조(夏王朝)의 시조가 되었다고 하는 임금. 정산종사는 “옛날 우(禹)는 선한 일을 들으면 반드시 일어나 절을 하매 좌우에서 말하되 ‘상하를 불고하고 절하는 것이 너무 예에 과하지 않나이까’ 하거늘, 우는 ‘내가 절하는 것은 그 위를 보고 절하는 것이 아니요, 그 선을 보고 절했으니 선은 상하와 귀천이 없는 것이라’ 하셨다 하니, 이는 만고에 선(善) 좋아하는 표본이 될 만하니라”(《정산종사법어》 권도편40)라고 했다.
6) 정치
건원(建元)의 정치: 한나라 무제 건원 연간의 정치를 말한다.
7) 4년의 인을 …… 다한다면
여기서 3전의 교화는 풍년이 들어 쌀 한 말에 3전 밖에 안했다는 뜻인데, 당나라 태종이 즉위하자 연 3년 동안 흉년이 들어 쌀 한 말에 비단 1필 값이 되었는데, 정관(貞觀) 4년(630)에 대풍이 들어 쌀값이 폭락하고 기근이 완전히 풀리었다고 한다. 정관의 정치를 달리 표현한 것이다.
8) 정관(貞觀)의 정치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은 627년에서 649까지 23년간 재위했는데, 태종 때의 연호가 ‘정관’이었으므로 이를 ‘정관지치’라고 한다. 태종은 안으로는 위징(魏徵), 방현령(房玄齡), 장손무기(長孫無忌), 두여회(杜如晦) 등의 인재를 널리 등용하여 제도를 정비하고, 부역과 세금을 경감하여 민생을 안정시켰으며, 밖으로는 돌궐(突厥)을 제압하고 토번(吐蕃)을 회유하는 등, 당나라의 기틀을 닦았다.
9) 강고(康誥)
《서경(書經)》 〈주서(周書)〉의 편명임.
10) 아(雅)
아(雅)는 소아(小雅)와 대아(大雅)로 분류된다. 소아는 모두 74편으로, 서주 일대의 시가이며 궁정의 악가로서 연회와 전례 때에 불려졌다. 이들 시의 내용은 연회, 전쟁, 폭정, 연정 등 다양하다. 대아는 모두 31편이다. 역시 궁정의 악가로서 융숭한 연회, 전례 때에 사용하였다. 국풍의 반 이상이 서정시인 반면에, 대아의 반 이상은 서사시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주나라의 개국을 칭송하는 역사시와 또 하나는 주(周) 선왕(宣王)을 영송(詠頌)하는 시이다.
11) 한유(韓愈)
768 ~ 824년. 당나라 하남(河南) 하양(河陽) 사람. 자는 퇴지(退之)이고, 창려선생(昌黎先生)으로도 불린다. 덕종(德宗) 정원(貞元) 8년(792) 진사가 되었다. 어릴 때 고아가 되어 형수의 손에 길러졌다. 장성해서 《육경(六經)》을 다 암송하고 백가(百家)의 학문을 배웠다. 시문에 뛰어나 일가를 이루었다. 동진(董晉)이 선무(宣武)에 있을 때 불러 순관(巡官)이 되었다. 변군(汴軍)이 어지러울 때 대책을 말하면서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사문박사(四門博士)를 거쳐 19년(803)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다. 이때 수도의 장관을 탄핵했다가 덕종(德宗)의 노여움을 사 양산령(陽山令)으로 좌천되었다. 국자박사(國子博士)와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원화(元和) 12년(817) 오원제(吳元濟)의 반란 평정에 공을 세워 형부시랑(刑部侍郎)이 되었지만, 14년(819) 헌종(憲宗)이 불골(佛骨)을 모신 것을 간하다가 조주자사(潮州刺史)로 좌천되었다. 원주(袁州)로 옮기고, 이듬해 소환되어 국자좨주(國子祭酒)에 임명되고, 병부시랑(兵符侍郞)을 거쳐 나중에 이부시랑(吏部侍郞)과 경조윤(京兆尹)까지 올랐다. 시호가 문(文)이라, 한문공(韓文公)으로 불린다. 유가의 사상을 존중하고 도교와 불교를 배격했으며, 송나라 이후의 도학(道學)의 선구자가 되었다. 저서에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 40권과 《외집(外集)》 10권, 《유문(遺文)》 1권 등이 있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가운데 한 사람이다.
12) 가죽이 …… 있겠는가?
《춘추좌씨전》 희공(僖公) 14년 기사에 나오는 말이다.
13) 육영(六英)의 음악
제곡(帝嚳) 고신씨(高辛氏)의 음악이다.
14) 제(齊)나라 왕의 당읍(棠邑)에 있는 창고
《맹자(孟子)》 〈진심 하(盡心下)〉에 “제나라가 흉년이 들자, 진진(陳臻)이 말하기를, ‘나라 사람들이 모두 부자(夫子)께서 장차 다시 당읍의 창고를 열어 주게 하실 것이라고 기대하는데, 이는 다시 할 수 없을 듯합니다.”라고 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15) 장유(長孺)
한나라의 명신 급암(汲黯)의 자이다. 복양(濮陽) 사람이다. 한나라 경제(景帝) 때 부친(父親)이 태자세마(太子洗馬)를 지냈기 때문에 무제(武帝) 초기에 알자(謁者)가 되었다. 뒤에 동해태수(東海太守), 주작도위(主爵都尉) 등을 지내고, 구경(九卿)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성격이 강직하여 직간(直諫)을 많이 했다. 그래서 무제(武帝)는 그를 사직지신(社稷之臣)으로 불렀다. 흉노(匈奴)와 화친을 주장했고, 후에 작은 죄를 지어 파직되었다. 전원생활 수년 만에 다시 회양태수(淮陽太守)로 임명되었으나, 부임 중에 죽었다.
16) 성탕(成湯)의 여섯 가지 자책
은(殷)나라 임금 성탕이 7년 동안 큰 가뭄을 당하여 상림(桑林)에서 여섯 가지 일로 자책하기를, “정치를 절도 있게 하지 않았는가? 백성이 직분을 잃었는가? 궁실은 숭엄한가? 여자의 청(請)이 치성한가? 뇌물이 행하는가? 참소하는 자가 성한가?” 하였다. 《여씨춘추(呂氏春秋) 순민(順民)》 성탕은 하남(河南) 상구(商丘) 사람으로 성(姓)은 자(子), 이름은 리(履), 묘호(廟號)는 태조(太祖)이다. 상(商)나라의 개국군주(開國君主)로 BC 1617년부터 BC 1588년까지 재위에 있었다. 무탕(武湯), 은탕(殷湯), 천을(天乙), 성탕(成湯), 성당(成唐)으로 불리기도 하고, 갑골문(甲骨文)에서는 당(唐), 태을(大乙), 고조을(高祖乙)로 기재되어 있다. 고대 상(商) 부족의 지도자이다. 하(夏)나라를 멸망시키고 상나라를 건립하고 인정(仁政)을 베풀었다. 시호(諡號)는 무왕(武王)이다.
17) 송경공(宋景公)의 세 마디 말
경공(景公)은 춘추 시대 사람이다. 어느 날 형혹성(熒惑星)이 출현하여 송나라 분야를 지키고 있자, 경공이 몹시 우려하였다. 이에 사성(司星) 자위(子韋)가 그 책임을 재상에게 돌릴 수 있다고 하였으나, 경공은, “정승은 나의 팔과 다리 같은 자이다.” 하였고, 자위가 그 책임을 백성에게 돌릴 수 있다고 하였으나, 경공은, “임금은 백성이 없으면 임금이 될 수가 없다.” 하였고, 그 책임을 그 해의 풍흉에다 돌리라고 하니, 경공은, “흉년이 들어 백성이 곤궁하면 내가 누구의 임금이 되겠는가.”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자위가, “하늘은 높지만 작은 말까지 듣습니다. 백성들의 임금이 될 수 있는 말씀을 세 번이나 하셨으니, 형혹성이 이동할 것입니다.”고 하였는데, 과연 그 형혹성이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사기(史記) 권38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18) 질장구의 속이 가득차 있는’ 실질
《주역》 비괘(比卦) 초육(初六)에 “진실함이 있는 것이 질장구의 속이 가득 차 있는 것과 같으면 종래에 다른 길함이 오리라.[有孚盈缶 終來有他吉]” 하였다.
19) 한나라 선제(宣帝)
기원전 91년-기원전 49년. 중국 전한(前漢)의 9대 황제(재위
20) 이천석(二千石)
곡식 2천 섬을 말하며, 태수(太守)가 받는 녹봉이 곡식 2천 석이었으므로 그 직위를 말한다.
21) 문천상(文天祥)
1236 ~ 1282sus. 자는 송서·이선, 호는 문산. 보우 3년(1255) 진사에 수석으로 급제했다. 당시 증대하고 있던 원(元)나라 몽골족의 압력에 대해 시종 강경책을 주장하고 천도를 반대한 이유로 면직되었으나 그 후 복직되었다. 1275년 의용군을 조직하여 원의 군대에 대항했다. 원과의 강화를 위해 원의 진중에 파견되었을 때 포로가 되었으나 탈출하여 각지를 전전했다. 남송이 멸망한 후 원나라에서 벼슬하는 것을 거절했다. 도종의 장자 익왕을 도와 남송 회복에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다시 체포되어 대도로 유폐되었다가 3년 후 처형되었다. 시문에도 뛰어나 옥중에서 지은 장시 〈정기가(正氣歌)〉가 유명하다. 이 밖의 저서로 《문산전집(文山全集)》 20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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