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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유사(某里遺事)    
G002+AKS+KSM-XI.0000.0000-20101008.B013a_023_00172_XXX
 
분류 고문서-시문류-유사 / 개인-전기-유사
작성주체 발급: 정중원(鄭重元)  
작성시기 0000년   
형태사항 크기: 34×84 / 낱장, 1장 / 종이 /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 거창 강동 초계정씨 동계 종가  / 현소장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비고 출판정보 : 『고문서집성 23 -거창 초계정씨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 『고문서집성 80 - 거창 초계정씨편(정서본)-』(한국학중앙연구원, 2005)
고문서집성 수록정보 『고문서집성』23 / 1. 개별고문서 / (21) 시문 / 시문1-3~1-4 / 279 ~280쪽
 
모리유사, 모리유사서
   동계 정온 선생의 증손 정중원모리재의 건립과 선생의 유고 편찬 내력을 기록한 글이다.
 
某里遺事
[내용 및 특징]
   동계 정온의 증손 정중원이 쓴 某里齋의 건립과 정온의 유고집 편찬의 배경을 기록한 글로, ‘某里遺事’와 ‘某里遺事序’라는 표제로 되어 있다. 이 가운데 ‘某里遺事序’는 『桐溪集』속집 제3권, 부록에 ‘某里遺事記’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으나, ‘모리유사’는 수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편집 과정에서 刪削된 것으로 보인다.
   ‘某里遺事’는 정온정중원 이 선생의 문하생들이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書齋를 건립한 내력을 기록한 글이다. 이 글에는 병자호란 때 조정이 나라와 화의하자 당시 이조참판이었던 정온 선생이 남한산성에서 이 소식을 듣고 할복하여 자결을 시도한 사실과 함께 당시 조정의 의론과 화의에 반대한 선생의 행적, 비록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자식들에게 남긴 유언, 할복 당시의 상황에 대한 묘사와 이후 남한산성에서 가마에 실려 모리로 귀향하기까지의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후반부에는 선생이 모리에 집을 짓고 ‘鳩巢’라 명명한 내력과 모리의 地勢와 당시의 심경을 읊은 시, 모리에서도 尊明을 실천하려 했던 모습이 기술되어 있다. 끝으로 선생의 문하생들이 뜻을 모아 鳩巢의 터에 堂을 세워 선생의 유품을 안치하여 뜻을 기리게 된 사실을 기록하였다.
   ‘某里遺事序’는 위의 글보다 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선생의 문하 유생들이 서재를 건립하였으나 화재로 인해 불에 타버렸으므로 정중원이 사림과 논의하여 서재를 중건하고, 이를 즈음하여 선생의 유고를 모아 ‘모리유사’를 엮으면서 그 서문으로 지은 것이다. 이 글에는 서재를 중건하게 된 경위와 그 의의, 선생의 유고를 모아 엮게 된 이유가 기록되어 있는데, 후반부의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내 마음에 또 두렵고 근심스러운 점이 있다. 나의 선조께서 돌아가신 지가 지금 벌써 64년이 되었으니, 문하에 출입하던 연로한 분들은 거의 다 세상을 떠났고, 64년 뒤에 지금 남아 있는 吾黨의 諸子들도 당시 某里의 일에 대해 오히려 견문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하물며 내 뒤에 태어나서 이곳에서 유적을 접하는 사람들은 단지 한 채의 당만이 빈 산속에 우뚝 솟아 있음을 볼 것이다. 지난 일을 묻고자 하더라도 징험할 곳이 없으니 숲과 구릉을 서성이면서 어찌 悵望한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이에 외람되고 망녕됨을 헤아리지 않고 감히 遺稿를 모으고 예전에 들은 것을 기술하여 某里의 遺事로 삼는다.”
   이 글은 모리재의 초기 내력을 파악하는 데 유용한 자료가 되며, 아울러 『동계집』 간행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도 참고가 된다.
『古文書集成 23 : 居昌 草溪鄭氏篇 影印本』解題, 정순우·안승준, 韓國學中央硏究員, 1995
            『古文書集成 80 : 居昌 草溪鄭氏篇(正書本)』, 韓國精神文化硏究院, 2005
            「조선후기 籍沒 ‘位土’ 회복과정-居昌 草溪鄭氏 고문서를 중심으로-」, 김성갑, 『고문서연구』28 한국고문서학회, 2006
            「용천정사중건과 위전환급을 탄원한 진정서」, 金泰淳, 『경남향토사논총』2, 경남향토연구협의회, 1993
            「거창지역의 향토사 관련자료와 그 역사적 성격」, 박병련·김학수, 『거창의 향토문화와 고문서』, 한국정신문화연구원·거창문화원, 2001
1차 집필자 : 장을연, 2차 집필자 : 성봉현
 
 
관련자료1 : 1806~1897년 거창 초계정씨가 정세립(鄭世立) 등 모리재 중수문서군

1806~1897년 정세립 등은 안의현감 및 순찰사에게 모리재 건물이 무너질 지경에 처해있으므로 보수해 줄 것을 청하는 소지는 올렸다. 모리는 유림의 추앙을 받는 동계 정온이 낙향하여 타계할 때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동계 정온의 후손인 정필달이 지은 모리재의 상량문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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某里遺事 曾孫重元
皇明毅宗皇帝崇禎九年仁祖大王十四年丙子十二月人大擧侵我
十一日夕邊報至十四日大駕播遷于南漢山城先生以吏曹參判扈駕入
城次于北門下十六日山城被圍二十四日請對畧陳戰守事且請申嚴軍律
斬臨死遺君者二十六日上箚請堅定聖志勿爲邪議所撓亟遣吾卽竿元首
頭以激勵士氣丁丑正月十七日主和者密啓 上定稱臣之議二十日先生上箚討
臣父子背城一戰守正死社稷又有詩曰生世何險戱三旬月暈中一身無足惜千
乘奈云窮外絶勤王帥朝多賣國兇老臣何所事腰下佩霜鋒虜旣得國書以不
送斥和者爲言二十二日先生上箚請以身應虜人之求二十四日虜以大砲攻城益
急先生有詩曰砲聲四震如雷動撞破孤城士氣洶惟有老臣談笑聽擬將茅屋
號從容又草葛川墓碣書其後寄示諸子曰到此死境無意把筆而先生行業
終至泯沒則死難瞑目圍城矢石之中忽迫起草無暇點改勿以我死難於筆削也
事已至此只合含笑而已二十六日夜三大將軍亂至闕下請出斥和臣於是當事者
列書前後諫臣十餘人姓名時往虜營有白上者曰斥和諸臣皆一時重望如後世
議何上命還止之二十七日江都敗報至大臣入對以出城定議當事者持書往虜營
約以明日出城二十八日曉先生獨起痛哭爲贊曰主辱已極臣死何遲舍兼取態此
正其時陪輦投降余實耻之一劒得仁視之如歸又視諸子曰大駕出城臣子捐躬
此正其時玆以出城之日已決自栽使昌謹埋置軍器之北立標以志竢胡虜退去
以薄板運歸埋子龍山墓下汝輩事汝毋以孝處兄弟以友奉二父無忤昌謹若脫死
視之如同腹無使飢寒而死余言至此痛恨奈何對置衣帶中因正衾枕而臥
以佩刀自決侍者知之開衾視之刃沒腹中二寸有餘卽驚號拔之鮮血迸出怳
惚氣絶者久之一城大驚朝紳相識者咸來救之 上聞之亦卽遣御醫持藥
物以救之又命廣州牧供給救療令必無至於死數日得生道三十日 大駕出
城先生不能從口號進箚辭訣且陳處變之道二月二十一日先生臥便輿南下
三月還鄕自歎曰吾不死於南漢以答國恩何忍供賦稅享妻子之樂與平人
齒乎寄栖上穴下支石尋以支石與村閻近移入某里某里德裕南麓一窮谷也
樹木蓊翳人烟隔絶虎豹交跡先生始至披草爲屋因土爲床命曰鳩巢而爲之
記開山田種黍秫以自養諸子憫其居處之苦飮食之薄托以谷中無泉石請
於水泉勝處移搆精舍先生歎曰吾於今日豈宜精其舍而玩泉石哉吾則視
此所處猶有自泰之心也仍爲詩以示之
詩曰是日幽潛未或非況耕無稅可療飢
爾曹莫歎臨年苦志遂身安道亦肥又曰
登山採薇應知死因樹爲家亦
豈安當日來聞諸子沮從來孝道在承歡
是時國家不用 皇明正朔先生以丁丑大統曆常
置案上題詩卷面以寓意不復近新曆在山中無所出入人之尋訪者亦稀巾櫛不修
柴戶常閉有洛閩書一篋時時披閱又以冠童六七人從之受學以爲罷寂之資庚辰
金猿山德裕山有木稼識者頗憂之明年六月先生易簀門生等結同門契相
與合志建堂于鳩巢遺址先生手澤遺物以像平日而瞻敬之杖一案一案上置
鳩巢記手草一帖及崇禎舊曆又弊篋中有紫陽集若干卷又嘗蒐輯
續近思錄未卒業手草散紙若干傍置齋舍以爲後學藏修之所募僧徒
以守護縣官亦未嘗以王稅加於是洞也

某里遺事序
城陰古縣某里洞乃吾曾祖桐溪先生崇禎丁丑後遯世之所也門下諸
公嘗於遺址營小堂奉杖几及崇禎舊曆置書齋其下不幸前年春遭
鬱攸之灾重元叨與斯文末議將謀重修竊自悵然曰昔者堂中手澤遺
物擧入灰燼而今而後復可所依像焉旣又翻然自解曰天地間有正氣亘
萬古長在而不減當崇禎末吾先祖以是氣托某里文山所謂地維賴以立天
柱賴以尊三綱實係命道義爲之根者非耶古語曰書焚氣不焚吾亦曰堂雖
焚氣不焚因其址復其堂以求是氣之所托而倣滄洲精舍儀用寓追仰之誠
則曷謂依像之無其所焉且山中所披閱朱書數卷偶然散帙在家舊曆卷面
手題詩二十八字有摹本不至全泯也抑吾又有所瞿然愍然者吾先祖易簀今
已六十四年及門諸生耆老在世無幾吾黨諸子在六十四年年之後者其於某里當日
事尙不免耳目浸遠況生乎吾後而撫遺蹟於此者但見一堂巋然空山之中欲
問往事莫從以徵焉則彷徨林壑豈無悵望慨恨者哉於是不揆猥妄敢用摭
遺稿述舊聞爲某里遺事噫嘻其亦慽矣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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