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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장(行狀)    
G002+AKS+KSM-XI.0000.0000-20101008.B027a_042_00363_XXX
 
분류 고문서-시문류-행장 / 개인-전기-행장
작성주체 발급: 이자수(李自修)
작성시기 지순원년11월
형태사항 크기: 36×50 / 낱장, 1장 / 종이 /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 안동 주촌 진성이씨 경류정  / 현소장처 : 안동 주촌 진성이씨 경류정  
비고 출판정보 : 『고문서집성 42 -안동 주촌 진성이씨편(Ⅱ)-』(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고문서집성 수록정보 『고문서집성』42 / 8. 시문류 / (2) 행장 / 행장1 / 565 ~566쪽
 
眞城李氏 家門의 起家祖인 李子修의 紅牌 抄本과 이자수의 政案, 告身 등을 搜得하게 된 내력을 기록한 문서.
 
개요
   문서의 冒頭에는 “松安君의 及第 紅牌, 政案, 告身 2幅을 왼쪽에다 기록한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紅牌 轉寫本만 수록되어 있다. 그 아래로 紅牌, 政案, 告身의 수득 경위가 부기 형태로 기록되어 있는데, 작성자는 李滉이다.李滉의 기록에 따르면, 1549년(明宗 4) 豊基郡守로 재직할 당시 同宗 李壕・李堡・李均의 집에서 〈先世遺跡〉이라는 冊子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 책자 안에 紅牌 1幅, 告身 18幅, 政案 1幅 등 모두 20폭의 문건이 수록되어 있었다고 한다.告身과 政案은 전사되어 있지 않아 현재로서는 내용을 알 수 없다. 다만 홍패는 이자수가 1341년(忠惠王 2) 鄕貢擧人으로서 明書業에 2科 第4人으로 及第할 당시에 발급된 내용이다. 비록 전사본이기는 하지만 원본의 양식에 준하여 기록하였으며, 당시의 知貢擧와 同知貢擧의 官銜은 물론 名署까지 그대로 수록하였다.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점은 〈先世遺跡〉에 수록된 홍패에는「李自修」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황은「自」를「子」의 오자로 파악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眞城李氏族譜〉에는「李子修」로 표기되어 있으나 홍패가 이자수 당대의 것이고 원본임을 고려할 때 도리어「李自修」가 원래의 이름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검토가 요구된다.16세기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진성 이씨 가문에서는 선조 李子修의 宦歷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였는데, 告身과 政案의 발견으로 인해 이자수의 행적을 재구성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확보하게 되었다.역시 이황의 부기에 따르면, 당시 진성 이씨 가문에서는 李子修의 封君(松安君) 사실을 확증하는 문서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1549년(明宗 4) 이황의 형인 李瀣가 忠淸監司로서 公州를 순찰할 당시 이자수의 외손계열인 朴承李라는 사람으로부터 이자수의 공신녹권을 입수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로써 이자수의 봉군사실이 확인될 수 있었는데, 본 문건에는 공신녹권의 전체가 轉寫되어 있지 않고 父・祖・曾祖・外祖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世系 부분만 간단하게 제시되어 있다.한편 본 문건의 말미에는 이자수의 손자로서 善山府使를 지낸 李禎의 齋舍 建立・重修과 관련된 사항이 추기되어 있다. 여기에 따르면, 齋舍 창건은 1479년(成宗 10) 이정의 3아들 李遇陽・李興陽・李繼陽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중수는 1561년(明宗 16) 이정의 증손과 현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창건과 중수를 막론하고 役事가 승려들에 의해 주관된 점은 당시의 사회상과 관련하여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라 하겠다.

용어
   紅牌는 과거에 합격한 사람에게 성적・등급・성명을 적어서 주는 합격증이다. 붉은색 종이에 써 주기 때문에 홍패라 한다. 홍패는 문무과 합격자에게 내리는 합격증으로서 生員・進士試 입격자에게 내리는 白牌나 관리에 대한 사령장인 告身과는 구분된다.政案은 벼슬아치들의 宦歷을 기록한 문서이다. 大典會通에 따르면, 京外 各官들은 매 3년마다 출신・내력을 모두 기록하여 吏曹에 제출하면 이조에서 이를 바탕으로 정안을 작성하였다.功臣錄券은 공신들의 공훈을 기록한 문서로 일종의 공신 증서이다. 고려초에는 녹권을 하사하였으나 고려중기의 中興功臣에게는 녹권과 공신교서를 아울러 반사하였다. 조선초기의 경우는 三功臣 즉 開國・定社・佐命功臣의 正功臣에 한하여 공신교서와 녹권을 반사했고, 原從功臣에게는 녹권만 내렸다. 그러나 세조조의 靖難功臣 이후로는 正功臣에는 교서만 내리고 녹권은 원종공신에게만 주었다.

인물
   李子修는 진성 이씨의 시조이며, 생졸년은 미상이다. 고려말 진보현리로서 진사시에 합격한 李碩의 아들이다. 1341년(忠惠王 2) 문과에 합격하여 지춘추관사를 지내고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이 침입하자 總兵官 鄭世雲의 부장으로서 난리를 평정하여 개경을 회복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인해 安社功臣에 책훈되고 松安君에 봉해졌다. 그는 명실공히 진성 이씨의 起家祖로서 현재까지 안동・예안 일대에 세거하는 진성 이씨는 모두 이자수의 자손들이다. 최종 관직은 判典儀寺事이며, 후일 參議에 증직되고 자손들에 의해 鵲山祠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특징
   紅牌의 경우 1549년 당시까지 보존되어 있던 원본에 준하여 그와 동일한 형식으로 전사했다는 점에서 원본에 준하는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작성일:2000.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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