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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墓誌) 초(草)    
G002+AKS+KSM-XI.0000.0000-20101008.B032a_049_00326_YYY
 
분류 고문서-시문류-유사 / 개인-전기-묘문
형태사항 크기: 26×20 / 합철, 1책 18면 / 종이 /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 안동 법흥 고성이씨 임청각  / 현소장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비고 출판정보: 『고문서집성 49 -안동 법흥 고성이씨편-』(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0)
고문서집성 수록정보 『고문서집성』49 / 8. 시문류 / (4) 묘문·행장 / 묘문·행장7 / 956 ~974쪽
 
병조정랑을 지낸 李後榮(1649-1711)의 墓碣銘.
 
개요
   趙德鄰이 쓴 병조정랑 李後榮(1649-1711)의 墓碣銘이다. 그의 가계, 생몰연월일, 관력, 자손에 관해 상세히 기술된 序와 운문으로 된 銘으로 이루어져 있다.

용어
   비에는 記蹟碑, 巡狩碑, 定界碑・拓境碑, 彫像碑, 寺刹事蹟碑, 紀功碑・戰捷碑, 廟庭碑,篤行碑・旌閭碑 등 기념비의 성격을 띤 것들이 많다. 이외에 가장 많은 수를 점하고 있는 묘비가 있다. 비는 대체로 石碑로 되어 있으나 때로는 목재나 철을 재료로 한 것도 있다. ′碑′는 螭首와 龜趺가 갖추어진 方形이고 ‘碣’은 머리부분에 장식이 없고 원형의 형태를 이룬다. 갈의 고자는 원래 木‘ 변에 쓴 ’楬’로 ‘비’의 기능과는 달리 처음부터 標木 혹은 標石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唐代에 5품 이상 관리에게만 비를 세울 수 있게 하고 그 이하는 碣을 세우도록 법제화하였다. 우리 나라는 고려대까지도 비에 대한 특별한 규정이 없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경국대전』에 정2품 이상은 神道碑를 세우고 그 이하는 墓碣을 세운다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관직에 따라 비와 갈을 구분하는 것처럼 규정하고 있으나 흔히 양자는 혼용되었다.비문의 내용은 대체로 序와 銘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원래 비명은 운문으로 짓는 것이기 때문에 사자의 일생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산문의 서를 두고 이를 요약하여 운문의 명을 붙인다. 비문의 내용은 전면에 새기고 내용이 많을 경우는 네 면에 걸쳐 새기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로 비신 뒤쪽에는 비를 조성한 緣起나 造成者를 기록한 陰記를 새긴다. 墓誌銘도 묘비의 체제와 동일하다. 墓標의 경우 전면에 사자의 관직 성명을 기록하고 뒤에는 음기가 붙으며 명이 없다는 점에서 묘비와 다르다. 거의 한자로 기술한 것이 통례이나 드물게는 靈碑와 같이 한글로 적은 것도 있다.

인물
   李後榮은 1649년(효종 즉위년) 3월 2일에 태어나 1711년(숙종 37) 1월 8일 향년 63세로 사망하였다. 본관은 固城, 자는 士久이다. 조선초 좌의정을 지낸 李原의 9세손으로 조부는 동지중추부사 李宗培, 부친은 李蕡, 모친은 대사간을 지낸 南天漢의 딸 英陽 남씨이다. 관찰사를 지낸 李溟翼의 딸 진성 이씨와 혼인하여 7남 3녀를 두었다. 1673년(현종 14) 생원시에 급제하고, 1684년(숙종 10)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은 성균관학유・학록, 의금부 도사, 사헌부감찰, 예조좌랑, 병조정랑 등을 지냈다. 1693년(숙종 19) 高城郡守로 부임하였다가 이듬해 부인이 임지에서 사망하자 관직을 그만두고 안동으로 낙향하여 여생을 보냈다. 무덤은 안동부 동쪽 甘城洞의 巳坐(대체로 북서향)에 썼다.
/ 작성일:2000.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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