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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7년 제문(祭文)    
G002+AKS+KSM-XI.1737.0000-20101008.B001a_001_01190_XXX
 
분류 고문서-시문류-제문 / 종교·풍속-관혼상제-제문
작성주체 발급: 김대(金岱) /수취: 동애 이공(東厓 李公)
작성시기 1737년 / 정사4월기미삭13일   
형태사항 낱장, 1장 / 종이 /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 안동 오천 광산김씨 후조당  / 현소장처 : 안동 오천 광산김씨 후조당  
비고 출판정보: 『고전자료총서 82-2 광산김씨 오천고문서』(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2) 본 번역문은 2014년 한국고문서 정서·역주 및 스토리텔링 연구사업 연구결과물임.
고문서집성 수록정보 『고문서집성』01 / 18. 제문·애사·축문 / 제문2 / 413 ~쪽
 
김대가 동애 이협(1663~1737)의 장례날 고한 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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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37)
  維歲次丁巳四月己未朔十三日 乃東厓李公大歸之日也 前一日庚午 友人光山金岱 漬淚爲文 敬告于筵前而哭之曰 於乎哀哉 天胡棄公 以卓犖奇偉之氣 而志未展於明時 又胡付公以經邦濟物之器 而名不入於沙籠 閱盡蒼桑之變 而虛老七十五載之光陰 時耶命耶 抑斯文之無祿 而吾黨之不幸也 想公之精爽 不隨化而昧昧 則寧可無一言以訣哉 首敍得識面 次陣其知心 公其聽之否乎 於乎 昔在癸酉之秋 余從聘君於京邸 因得謁先太宰芹谷先生 望之儼然 卽之溫然 如入春風之室 古所謂碩德宏輔 而先生時已退休矣 賜之坐謂余曰 爾非黙齋之孫乎 吾與爾祖 做業爾祖 做業禪房幾月餘 托以金蘭之契 吾則出而仕 爾祖隱之未顯 又不幸早世 嗟乎 如爾祖今世豈易得哉 公以下 次第列侍 金章紫綬 輝映左右 正韓子所稱鸞鵠停峙 而公則年方少 玉雪可念也 擢雙蓮之魁 多士昻昻乎如雲霄之雀 耻與鷄鶩羣也 于斯時也 朝著淸明 群賢布列 誠千載一時 意謂公展步靑雲之上 以符槐陰之做 時事一變 駭機漸發 公則逾嶺而南 寓居於花山之城東 進退消長之理 公盖已審得 而亦以此中多士友親舊故也 戊寅之春 公爲訪權都憲公而過陋居 公惟未記 而余卽識之也 遂一
 笑而定莫逆之交 自是往還從遊 四十年餘 公取我之疎狂 我受公之 坦夷 山堂學舍 幾處周施 縱言劇談 間以諧笑 未見而思 旣見而喜 合必兩恩其厥趣 而旬月不見 卽以爲疎 數年以來 各臨老頭 源源相從 雖不如少年時 而以時相存 簡牘盈箱 去年秋 就公而宿臨別 公忽握手噓唏曰 吾與君年過毁車 相見無期 吾當偸閑而一訪 那知此言 爲天古訣耶 痛哉痛哉 於乎 風儀粹然 符彩外揚 襟度恢曠 仁厚內積 其於交際之間 不挾不矜 而一任衷曲 揚人之善 猶恐不及 急人之難 褰裳不憚 親知有喪 賻誄必先於人 有陳大丘之風 於書無所不涉 於文無所不爲 遊刃公車之業而屢中 宏詞輒不利於省試 而公不以得先介意 人咸以公輔期之 而公亦以喬木世臣 常有江湖之憂 晩從蔭輔 選入桂坊 註解聖訓 擬進輔之方 而宗祧不幸 前星秘暉 幾抱賈傅之痛 至於傷時之忠義奮發 履險之義理自明 此則可驗平日之定力矣 嗟夫 倘使公遇時展布其所蘊 則學足以輔袞 文足以煥猷 識足以通古達今 才足以剪繁理劇 其所施爲蔚然 有可觀者 而朱門任奪 白首固窮 欹枕看戱 文章自娛 園囿植花竹 以爲寓興之具 撫老松而盤桓 策藜杖而逍遙 翛然有出鹿之想 哦詩著書 積成卷秩 此足爲不朽之資耶 公之長允 賢而早夭 而公以理自遣 不爲慽慽之容 兩允繼登司馬 而亦無躍躍之喜 其於得失榮辱 處之有素矣 頤養神精 鶴髮仙然 嘗謂宇宙百年 吾輩長存 把玩光景 期與之終始 豈知俄頃之間 薪火遽窮耶 公之玄宅隔江 而與幽居相望 此公之樂哉 蝦丘之禁禁 佳城知有前定矣 嗚呼 聞變之初 我則匍匐而進 七尺之軀 已楫於一木矣 濯濯之英燁燁之光 不可得以後接 但見兩孤叩地之狀 而室中叫天之聲 尤不堪聞 撫柩一哭 悲緖萬端 從此不忍復馬首之南 而卽遠之辰 不可無巨卿之訣 强扶老病 一酒知己之淚 公固洋洋在上 而笑我之噭噭矣 公未入地 柳學士欽若 又至不淑 地上之親友盡矣 不知泉臺之下 相逢如人世否 獨立暮道 撫躬長痛 有愧乎太上之忘情 嗚乎痛哉尙 饗

유세차(維歲次) 정사년(1737, 영조13) 4월 기미삭(己未朔) 13일은 곧 동애 이공(東厓李公)1)대귀(大歸)2)하는 날입니다. 하루 전 경오일(庚午日)에 친우 광산(光山) 김대(金岱)3)는 눈물을 흘리며 글을 지어 영위(靈位) 앞에서 삼가 고하며 곡합니다.
아, 슬프옵니다. 하늘은 어찌 공에게 탁락 기위(卓犖奇偉)한 기질을 부여하면서 밝은 시대에 뜻을 펼치지 못하게 하고, 또 어찌 공에게 경방 제물(經邦濟物)4)의 기량을 부여하면서 이름이 사롱(紗籠)5)에 들지 못하게 하여 창상(蒼桑)의 변고를 다 겪으면서 75세의 세월을 헛되이 늙게 하였으니, 시대의 탓입니까, 명운의 탓입니까. 아니면 사문(斯文)이 복이 없어서입니까, 우리 유림(儒林)이 불행해서입니까. 아마도 공의 정령(精靈)은 변화에 따라 어둡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 한 마디 말로 영결(永訣)함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먼저 그 얼굴을 알게 된 일을 서술하고, 다음에 그 마음을 알게 된 일을 진술할 것인데, 공은 이들을 들어보겠습니까.
아, 옛날 계유년(1693, 숙종19) 가을에 내가 장인6)을 따라 경저(京邸)에서 공의 아버지 판서 근곡 선생(芹谷先生)7)을 뵙게 되었습니다. 바라보면 엄연(儼然)하고 가까이 나아가면 따뜻하여 마치 봄바람이 부는 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았으니, 옛날에 이른바 ‘석덕 굉보(碩德宏輔)’였습니다. 그런데 근곡 선생은 이때 벼슬에서 물러나 쉬고 있었습니다. 나에게 앉을 자리를 권하면서 일러 말하였습니다.
“그대는 묵재(默齋)8)의 손자가 아니겠느냐. 내가 그대의 조부와 선방(禪房)에서 몇 달 남짓이 공부하면서 금란(金蘭)의 계(契) 모임을 가졌네. 그런데, 나는 나가서 벼슬하고 그대의 조부는 은거하며 현달(顯達)하지 못하였네. 그리고 또 불행하여 일찍 세상을 떠났네. 아! 그대의 조부같은 사람은 오늘날 세상에는 어찌 쉽게 얻을 수 있겠는가. 내가 항상 진중거(陳仲擧)가 숙도(叔度)를 그리워하던 일과 같음이 있었네9). 지금 그대를 보니 감구(感舊)의 회포가 배나 됨을 깨닫겠네.”
내가 나아가 뵙는 예를 마치고 물러나와 박천공(博泉公)10) 이하의 여러분이 차례로 열지어 모시고 있는 광경을 뵙게 되었는데, 금장 자수(金章紫綬)11)가 좌우에 어리비추었습니다. 이야말로 한자(韓子)가 일컬은 ‘난곡 정치(鸞鵠停峙)하다’는 12)이었는데, 공은 나이 바야흐로 젊어서 옥설(玉雪) 같은 자태가 생각함 직하였습니다.
공은 사마시(司馬試)에 장원으로 뽑히어 많은 선비들이 하늘 높이 나는 새처럼 우러러 보았으나 계목(鷄鶩)과 같은 무리가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이때에 조정이 청명(淸明)하고 현인들이 포진하고 있으니, 참으로 천년에 한 번 있는 때여서 공은 청운(靑雲)의 꿈을 실현하여 괴음(槐陰)13)의 일에 부합되리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시사(時事)가 한번 변하여 해기(駭機)가 점차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공은 조령을 넘어 남쪽으로 와서 화산(花山 : 안동의 별칭)의 성 동쪽에 우거하였습니다. 진퇴 소장(進退消長)하는 이치를 공은 이미 깨쳤고 또한 이 곳의 많은 선비와 벗하며 친구가 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인년(1698, 숙종24) 봄에 공은 권 도헌공(權都憲公)14)을 방문하기 위하여 가는 길에 나의 집을 들렀습니다. 공은 기억하지 못하였으나 나는 곧 알았습니다. 마침내 한번 웃고는 막역(莫逆)한 사귐이 정해졌습니다.
이로부터 40년 남짓이 오가며 종유(從遊)하였는데, 공은 나의 소광(疎狂)함을 취하고 나는 공의 탄이(坦夷)함을 받아들였습니다. 산당(山堂)과 학사(學舍) 몇 곳에서 주선하며 폭넓게 유창하게 이야기하고 중간에 익살로 우스게소리도 하였습니다. 보지 못하면 그리워하고 이미 만나보면 기뻐하였는데, 두 사람이 모이면 반드시 그 취미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열흘이나 한 달 정도 보지 못하면 곧 뜸하게 여겼습니다. 몇 년 전부터 두 사람이 각각 늙어서 소년 시절처럼 자주 상종(相從)하지는 못하나 수시로 안부 편지를 보내어 간독(簡牘)이 상자 속에 가득하였습니다.
지난해 가을에 내가 공의 집에 나아가서 묵었습니다. 작별할 적에 공이 갑자기 내 손을 잡으며 탄식하기를,
“나와 그대는 훼거(毁車)할 나이15)가 지났으니 서로 만나볼 기일이 없소. 내가 한가한 틈을 내어 그대에게 한번 찾아가겠소.”
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말이 천고의 영결(永訣)이 될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슬프고 슬프옵니다.
아, 공은 풍채가 수연(粹然)하여 부채(符彩)가 밖으로 드러나고, 금도(襟度)가 넓어 인후(仁厚)함이 안에 축적되었습니다. 그래서 교제할 즈음에 있는 채하지[挾] 않고 뽐내지 않으면서 한결같이 충심대로 행동하였습니다. 남의 착한 점을 드날리되 오히려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남의 어려움을 다급하게 여기되 건상(褰裳)16)도 꺼리지 않았습니다. 친지(親知)가 초상이 나면 부의와 뇌문(誄文)을 반드시 다른 사람보다 앞서하되 진대구(陳大丘)17)의 풍도가 있었습니다.
서적에 있어서 섭렵하지 아니한 것이 없고 문장에 있어서 지어보지 아니한 것이 없어 공거(公擧)의 일에 여유로워 여러 차례 합격하였으나, 굉장한 문장이 성시(省試)에서는 이롭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은 남보다 먼저 얻는 데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공보(公輔)의 재목으로 기대하였으나 공 또한 교목 세신(喬木世臣)으로 항상 강호(江湖)의 근심이 있었습니다. 만년에 음보(蔭補)로 계방(桂坊)18)에 뽑혀 들어가서 성훈(聖訓)을 주해(註解)하여 보도(輔導)를 진취하는 방도로 삼으려 했는데, 종조(宗祧)가 불행하여 전성(前星)이 빛을 숨기게 되어19) 거의 가부(賈傅)의 아픔20)을 안게 되었습니다. 시대를 상심하는 충의(忠義)가 분발함에 이르러서는 험난함을 이행하는 의리가 저절로 밝아졌으니, 이는 평소의 정력(定力)을 징험할 수 있습니다.
아, 슬프옵니다. 행여 공으로 하여금 때를 만나 축적한 포부를 펴게 하였다면, 학문은 임금을 도울 수 있고 문장은 모유(謨猷)를 빛나게 할 수 있으며, 지식은 고금을 달통(達通)할 수 있고 재능은 번극(繁劇)함을 정리할 수 있으니, 그 시행하는 바가 성대하게 볼 만한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문(朱門)21)이 임면(任免)을 마음대로 하여 백수가 되도록 빈궁하게 살며 베개에 의지하여 희극(戱劇)을 보고 문장으로써 스스로 즐겼습니다.
동산에 꽃과 대를 심어 흥취를 붙이는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노송(老松)을 어루만지며 서성이고 여장(藜杖)을 짚고서 거닐으니 훌쩍 속세를 벗어난 생각이 있었습니다. 읊은 시와 지은 저술이 쌓여 권질(卷秩)을 이루니 이것이 족히 영원히 전할 자료가 되겠습니까.
공의 맏자제는 어질었으나 일찍 죽었습니다. 공은 순리대로 스스로 보내고 슬퍼하는 얼굴빛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두 자제가 잇따라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또한 뛸 듯이 기뻐하는 일이 없었으니, 그 득실 영욕(榮辱)에 대하여 처신함이 이미 평소에 정해졌던 것입니다. 정신을 수양하여 백발의 신선과도 같았습니다. 일찍이 말하기를,
“이 우주 사이의 백년동안 우리들이 영원히 살아 좋은 광경을 구경하며 시종을 함께 하기를 기약하겠다.”
라고 하더니, 잠깐 사이에 신화(薪火)22)가 갑자기 다할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공의 묘지가 강 건너편에 있는데 공의 유거(幽居)와 마주 바라보이는 곳이니, 이는 공이 즐겨하는 것이겠습니까. 하구(瑕丘)23)가 금지하고 금지하는 곳이니 묘지도 미리 정해진 곳이 있음을 알겠습니다.
아, 공이 죽었다는 변고의 소식을 듣던 당초에 나는 조문하러 나아가서 칠척의 공이 이미 하나의 관(棺)에 들어갔습니다. 아름다운[濯濯] 자태와 빛나는 광채를 다시 볼 수 없고 다만 두 고아의 자제가 땅을 치며 통곡하는 상황을 볼 뿐이며, 집안에서 하늘을 부르며 애통해 하는 소리는 더욱 들을 수 없었습니다. 영구(靈柩)를 어루만지며 한번 곡하니 슬픈 회포가 만단(萬端)이나 됩니다. 이로부터 차마 말머리를 남쪽으로 향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장례 때 거경(巨卿)의 영결24)이 없을 수 없어 늙고 병든 몸을 억지로 부축하여 지기(知己)의 눈물을 한번 뿌리니, 공은 진실로 양양(洋洋)히 위에 있으면서 나의 교교(噭噭)한 곡소리를 비웃을 것입니다.
공이 지하로 들어가기 전(별세)에 학사(學士) 류흠약(柳欽若)25)이 또 저 세상으로 가게 되었으니, 지상의 친우가 다 죽었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인간 세상에서처럼 천대(泉臺) 아래에서 만나보았습니까. 모도(暮道)에서 홀로 서서 자신을 어루만지며 길이 슬퍼하니 최상[太上]의 정을 잊어버리는 것이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아, 슬프옵니다. 흠향하기 바랍니다.

[주석]

1) 동애 이공(東厓李公)
이협(李浹)을 말한다. 1663년(현종4)~1737년(영조13).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열경(悅卿), 호는 동애(東厓), 판서 관징(觀徵)의 아들, 예조 참판 옥(沃)의 아우, 허목 ․ 홍우원의 문인. 생원(生員) ․ 진사시에 합격. 동궁시직(東宮侍直) ․ 사옹원 봉사(司饔院奉事) 등을 역임. 안동의 아름다운 풍속을 사랑하여 성동(城東)의 언덕에 우거하며 ‘동애(東厓)’라 자호하고 서사(書史)로써 즐거움을 삼았다.
2) 대귀(大歸)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죽음을 이르는 말. 흔히 장례날을 ‘대귀(大歸)’라 한다.
3) 김대(金岱)
1665년(현종6)~1747년(영조23).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사종(士宗), 호는 낙은(洛隱). 묵재(默齋) 염(𥖝)의 손자, 과헌(果軒) 순의(純義)의 아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사위. 낙은의 조부 염(𥖝)의 생부(生父)는 광실(光實)이었는데, 백부 광계(光繼)의 후사(後嗣)가 됨. 근시재(近始齋) 해(垓)의 현손.
4) 경방 제물(經邦濟物)
나라를 경영하고 사람을 구제하는 것.
5) 사롱(紗籠)
사롱중인(紗籠中人)을 말한다. 재상이 될 만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 그런 사람은 저승에서 반드시 초상을 그려놓고 비단 씌우개로 가려 둔다는 데서 나온 말. 당나라 이번(李藩)의 고사[書言故事 宰相類]. 곧 동애(東厓) 이협(李浹)이 재상이 될 만한 인물임을 찬양한 것이다.
6) 장인
낙은(洛隱) 김대(金岱)의 장인은 곧 이조 판서를 지낸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을 말함. 아마 이현일이 서울에서 벼슬할 때 낙은 김대가 갈암을 통해 동애의 아버지 근곡(芹谷) 이관징(李觀徵)을 알게 된 듯하다.
7) 근곡 선생(芹谷先生)
근곡은 이관징(李觀徵)의 호. 1618년(광해10)~1695(숙종21). 자는 국빈(國賓), 근곡(芹谷), 또는 근옹(芹翁). 문과에 급제, 이조 판서 및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냄.
8) 묵재(默齋)
낙은 김대의 조부 김렴(金𥖝)의 호. 1612년(광해4)~1659년(효종10). 자는 여용(汝用), 호가 묵재,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9) 진중거(陳仲擧)가 …… 있었네
진중거는 후한(後漢)의 사람 진번(陳蕃)을 가리킨다. 그의 자가 중거(仲擧)이다. 숙도(叔度)는 역시 후한의 학자 황헌(黃憲)의 자. 진번은 낙안(樂安) ․ 예장(預章)의 태수(太守)를 거쳐 태위(太尉)에 이르렀다. 영제(靈帝) 때 두태후(竇太后)의 아버지 두무(竇武)와 조정의 정사를 보필하여 이름난 현인을 불러 임용하니, 선비들이 대부분 귀의(歸依)하였다. 뒤에 두무와 환관(宦官) 조절(曺節) ․ 왕보(王甫) 등의 주벌(誅罰)을 모의하다가 조절 등에게 도리어 피살되었다. 진번은 당시 고결하기로 소문이 나서 여느 손님은 만나주지 않았으나 서치(徐穉) 등 고사가 오면 걸상을 내어놓고 앉게 하며 예우하였다. 황헌은 당시 사람에게 학행으로 존중을 받았는데, 학자 순숙(荀淑)이 그와 이야기하면서 해가 저물어도 가지 않았고, 진번 같은 고결한 인품의 소유자도 황헌을 만나보지 못하면 비린(鄙吝)한 마음이 싹튼다고 말할 정도였다. 고사 곽태(郭泰)는 황헌의 인품을 다음과 같아 평론하였다. “천경(千頃)의 못처럼 넓어서 맑게 하려 해도 더 맑아지지 않고 흐리게 하려 해도 더 흐려지지 않아 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 곧 근곡(芹谷)이 묵재(默齋)의 학행을 존모(尊慕)함을 후한의 명환(名宦) 진번(陳蕃)이 황헌을 그리워함에 비유한 것이다.
10) 박천공(博泉公)
근곡의 맏아들 이옥(李沃)을 가리킨다. 이옥은 1641년(인조19)~1698년(숙종24). 조선 문신, 자는 문약(文若), 호가 박천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예조 참판에 이름.
11) 금장 자수(金章紫綬)
금도장과 자주빛 인끈. 벼슬아치의 복장을 비유한 것임. 금자(金紫).
12) ‘난곡 정치(鸞鵠停峙)하다’는 것
남의 훌륭한 자제를 찬양하는 말이다. 당나라 문호(文豪) 한유(韓愈)의 「전중소감마군묘명(殿中少監馬君墓銘)」에, “물러나와 소부(少傅)를 뵈니 푸른 대나무 ․ 푸른 오동나무에 봉황새[鸞鵠]가 멈추어 서 있는 듯하였으니, 가업을 지킬 수 있는 분이었다.[退見少傅 翠竹碧梧 鸞鵠停峙 能守家業者也]”라고 하였다.
13) 괴음(槐陰)
홰나무 그늘로 곧 가문의 번성함을 비유한 말이다. 송태조(宋太祖) 때의 시종관(侍從官) 왕호(王祜)를 정승으로 임명하게 하였는데, 송태조의 비위를 거슬려 정승이 되지 못하였다. 집 뜨락에 홰나무 세 그루를 심으면서, “내 자손 중에 삼공(三公
14) 권 도헌공(權都憲公)
대사헌 권해(權瑎)를 가리키는 듯하다. 권해는 조선 숙종 때의 문신. 1639(인조17)~1704(숙종30). 자는 개옥(皆玉), 호는 남곡(南谷), 본관은 안동, 호조 판서 권대재(權大載)의 아들. 문과에 급제. 대사성(大司成) ․ 부제학 ․ 대사헌을 지냈다. 영해(寧海) 등지에 유배되었다. 저서에는 『노론주해(魯論註解)』 ․ 『사범(士範)』 ․ 『의경변의(義經辨疑)』 ․ 『남곡집(南谷集)』 등이 있다.
15) 훼거(毁車)할 나이
훼거 살마(毁車殺馬)할 나이. 곧 수레와 말을 없애고 은거할 결심이 굳음의 비유. 세상일에 대한 의념을 버리고 집에 폐칩(閉蟄)해 있는 것을 뜻하는 말로 70이 넘음을 뜻하는 듯하다.
16) 건상(褰裳)
아랫도리를 걷어 올린다는 뜻으로 급히 서두름을 말한다. 『시경(詩經)』 정풍(鄭風) 건상(褰裳)에 “그대가 사랑하여 나를 그리워할진댄 내 치마를 걷고 진수(溱水)를 건너가련다.[子惠思我 褰裳涉溱]”하였는데, 모서(毛序)의 주에, “건상은 바로잡아 주기를 생각한 시이다.”하였다. 그리고 『장자(莊子)』 산목(山木)에 “아랫도리를 걷고 빨리 간다.[褰裳躍步]”하였다. 『후한서(後漢書)』 최인전(崔駰傳)에, “일이 있으면 아랫도리를 걷는다.[有事則 褰裳]”하였는데, 건상의 주에 “발을 물에 적시고 갓이 벗겨지더라도 돌아보지 않고 급히 함이다.”하였다. 낙은공은 제문에서의 문자 사용을 바로 쓰지 않고 ‘훼거(毁車)’니 ‘건상(褰裳)’이니 하여 그러한 어휘(語彙)를 사용하고 있다.
17) 진대구(陳大丘)
대구(大丘) 수령으로 남의 초상 장사에 남먼저 제문 ․ 만사 등을 행한 사람이 있는 듯
18) 계방(桂坊)
세자 익위사(世子翊衛司)의 별칭. 동애(東厓)가 사마시에 합격한 뒤에 동궁시직(東宮寺直)의 벼슬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19) 전성(前星)이 …… 숨기게 되어
황태자(皇太子)의 별칭.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를 가리킨다. 효장세자는 1724년(영조즉위)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즉위하기 전에 죽었다. 양자인 정조가 즉위하자 진종(眞宗)으로 추존(追尊)되었다.
20) 가부(賈傅)의 아픔
가부(賈傅)는 한문제(漢文帝) 때 양회왕 태부(梁懷王太傅) 가의(賈誼)를 가리킨다. 가의가 장사왕 태부(長沙王太傅)로 나갔다가 조금 뒤에 양회왕 태부(梁懷王太傅)로 옮겼다. 양회왕이 말에서 떨어져 죽자, 가의는 양회왕의 사부(師傅) 노릇을 제대로 못한 것을 스스로 슬퍼하다가 한 해 남짓 뒤에 가의 또한 죽었다. 가의가 양회왕의 죽음을 아프게 여긴 것을 곧 효장세자의 죽음에 비한 것이다.
21) 주문(朱門)
호부한 사람의 집에 그 문을 붉게 칠한 사람을 가리킨다. 후대에 와서 후왕(侯王)이나 고관이 거처하는 집을 모두 붉은 색으로 꾸몄으므로 주문(朱門) 또는 주저(朱邸)로 불렀다.
22) 신화(薪火)
섶의 불. 신전(薪傳)과 같은 말로 섶의 불이 전해져서 끊어지지 않는 것을 사도(師徒)의 도가 전해져서 끊어지지 않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여기서는 동애공의 죽음을 비유한 것이다.
23) 하구(瑕丘)
옛 지명, 또한 부하(負瑕)라 한다. 춘추(春秋) 때는 노(魯)에 소속되었고 한(漢)나라 때는 폐지되었다. 구체적으로 어디를 가리키는지 미상.
24) 거경(巨卿)의 영결
거경(巨卿)은 동한(東漢) 때 범식(范式)의 자. 범식이 태학(太學)에 유학(遊學)할 때 장소(張劭)와 벗하였다. 장소의 자는 원백(元伯). 장소과 범식이 각자 집으로 돌아갈 적에 범식이 언약하기를, “2년 뒤에 내가 들러 그대의 어머니를 뵙겠다.”하고 두 사람이 함께 기일을 정하였다. 약속한 기일이 되자 장소가 닭을 잡고 기장밥을 지어놓고 기다렸다. 장소 어머니는, “2년 전 작별할 적에 천리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한 말을 믿는단 말이냐.”하니, 장소는, “거경은 미더운 선비라 반드시 어기지 않을 것입니다.”하였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범식이 당도하여 당에 올라가 장소의 어머니에게 배알(拜謁)하고 술을 마셨다. 뒤에 장소가 죽었는데, 범식의 꿈에 장소가 자기의 죽은 날짜와 장사 일자를 일러주었다. 범식이 장사 날짜를 계산하여 갔을 때는 장소의 상여가 이미 출발하여 광중에 이르러 장사지내려 하였다. 그런데 장소의 관이 광중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한참 있으니, 범식이 흰 수레와 흰 말을 타고 울부짖으며 와서 관의 줄을 끌자 그제서야 나아갔다는 고사가 있다. 낙은이 동애의 장삿날 영결하러 가야함을 말한다.
25) 류흠약(柳欽若)
흠약(欽若)은 류경시(柳敬時)의 자. 1666년(현종9)~1737년(영조13).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함벽당(涵碧堂), 동휘(東輝)의 아들, 안동에 거주, 이현일(李玄逸) ․ 이유장(李惟樟)의 문인, 1694년 문과에 급제, 성균전적(成均典籍) ․ 예조 좌랑 ․ 사헌부 장령 ․ 황해 도사(黃海都事) ․ 양양부사(襄壤府使) 등을 지냈다. 낙연서원(洛淵書院)에 제향 됨. 조선조 때 예문관이나 홍문관의 관원을 지내면 ‘학사’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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