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자료센터

  • Open API
  • 사이트맵
  • 이용안내
  • 열린마당

한국고문서자료관

통합검색

  • 상세검색
  • 문자입력기

디렉토리분류

닫기

1768년 수분와(守分窩) 김단(金湍) 행장(行狀)    
G002+AKS+KSM-XI.1768.0000-20101008.B002a_002_00646_XXX
 
분류 고문서-시문류-행장 / 개인-전기-행장
작성주체 발급: 정실(鄭宲) /수취: 김단(金湍)
작성시기 1768년   
추정시기 18세기 중후반 : 찬자(撰者) 정실(鄭宲: 1701~1776)의 문장활동기
형태사항 크기: 35×120 / 낱장, 1장 / 종이 /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 부안 우반 부안김씨  / 현소장처 : 부안 우반 부안김씨  
비고 출판정보 : 영인본: 『고문서집성 2 -부안 부안김씨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8) / 정서본: 『고전자료총서 83-3 부안김씨 우반고문서』(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3) / 본 이미지는 전북대학교 박물관에서 제공한 것으로 저작권이 전북대학교 박물관에 있음. 역주본: 『고문서역주총서 2: 부안 부안김씨 우반고문서』(한국학중앙연구원, 2017)
고문서집성 수록정보 『고문서집성』02 / 8. 시문류 / (3) 시문 / 시문4 / 932 ~934쪽
 
18세기 중후반 정실(鄭宲: 1701∼76)이 지은 김단(金湍)의 행장(行狀)
 
자료로딩...
닫기



 守分金先生行狀
公諱止叔 金氏系出扶寧扶寧今爲扶安縣新羅敬順
之裔也遠祖文貞公 用德業文章爲高麗名賢築室于縣
邊山知止浦沒而葬焉 士林立祠享之 子孫因居 遂爲湖南名
族 十世而有諱錫良 我朝成均進士 隱德不仕 南冥曺先生
銘其墓曰 滄海遺珠 大醫無藥 碩人其俁公不錫爵 寔公
之曾祖也 祖諱察訪考諱泰福成均生員贅居靈光
倭亂 糾率一鄉人士守城 事在守城錄武靈丁氏㕘奉希參
之女也以萬曆丙申七月十七日 生公于甕井里第 幼而頴
秀 歧嶷絶凡兒 見者異之 始壬辰之亂 公兄永吉與其妻俱投海
生員無他子 日夜疚傷晚而生公 鍾愛甚過 十歲不令
就學 公年十四 始自奮請學 忘寢食孜孜未數年 文理大
進 作詩文輒驚人 擅名場屋 同輩瞠然推服 年二十九中甲
子生員 是年賊舉兵叛 大駕南巡 公約湖南士友倡義
募兵將赴難聞賊已平 屬其軍需於道伯而退 事在
義錄
丙子虜亂 公又與族兄前牧使弘遠同縣人高㕘奉
弘達
激礦義勇 收聚粮械 發覲王行至礪山聞朝廷與
虜媾 遂北望痛哭而還 自是謝絕公車 杜門求志 及孝廟
即位 群賢當朝 同春宋文正公 以公志節薦于朝 己丑
孝陵㕘奉
乙未長興庫直長秋陞禁府都事病不就 丙申
懷德縣監 未幾忤按使罷歸 丁酉同春先生入侍經筵 語及
守宰黜陟 爲陳公治理淸謹 罷官非其罪 前爲按使者適同
入愧謝不已 戊戌拜新寧縣監 以老病辭不獲 黽勉赴任 廉簡爲政


治化大行 邑有無名稅入 一切蕩除 不以毫末自累 歲飢竭力賙恤
一境晏如 秩滿邑民號籲請留 按使以聞 褒賜廐馬 及歸行
橐蕭然 公既還鄉里 結茅數架 名之以守分窩辛亥二月二十日
以疾卒 得年七十六 葬于甕井舊里負丑之原 公資禀雋拔
識度高邁 自少慷慨有志節 出言行事 明白果決無揜婀
依違之態 篤修家學 夙夜整飭 威儀動止有常 人不見其有
疾言遽容 敎子孫以孝悌 勉後生以義理 常曰 貧者士之常也 不
可妄求 於外物 紾華尤淡然無所好 甞以早恃不逮養 爲終身
痛事 生員公有深愛 及喪服禮致哀 幾至毀滅 與二先生
交誼深摯 往復講磨 多所資益 及公沒 同春輓 雨述分憂
日 延英辯奏時 仁恩婦孺誦 淸德聖明知 㕘判金汝鈺稱公曰 一
鄉之善士也 公配彥陽金氏 後公六年而沒 壽八十一 袝葬公墓
之剛{广/魯}有學行 {广/魯}有一男 曰壽星 有三男曰
士公之子姓 至今五六世 皆祗飭承家 公之所以繩先而裕後者 於斯
可徵 噫其可尙也已 謹摭其家狀 參以先輩緖論 撰定如右 以俟來者
資憲大夫議政府左參贊兼弘文館提學 世孫左副賓客鄭 宲
수분(守分) 김선생(金先生) 행장(行狀)
공(公)은 휘가 단(湍)이고, 자(字)가 지숙(止叔)이다. 김씨(金氏)는 부령(扶寧)에서 계파(系派)가 진출(進出)하였으니 부령(扶寧)은 지금의 부안현(扶安縣)이다. 본(本)은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후예(後裔)이다. 원조(遠祖)는 문정공(文貞公) 구(坵)이니 덕업(德業)과 문장(文章)으로 고려(高麗) 때 명현(名賢)이었으며 부안현 변산(邊山) 지지포(知止浦)에 집을 짓고 살다가 돌아가셨고 그 곳에 안장(安葬)했다. 사림(士林)이 사당(祠堂)을 건립하여 제향(祭享)을 드렸고 자손(子孫)들이 인하여 그곳에 거주하면서 마침내 호남(湖南)의 명족(名族)이 되었다.
10대가 지나서 휘 석량(錫良)은 조선에서 성균 진사(成均進士)를 하였으나 은덕(隱德)이 있어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이 묘지명(墓誌銘)에 말하기를 “창해(滄海)에 남긴 구슬 같은 글, 큰 문장가라도 손볼 곳이 없네. 그 훌륭하신 분이시여! 자손에게 복을 끼쳐주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분이 공의 증조(曾祖)이다. 조(祖)는 휘(諱)가 광(光)이고 찰방(察訪)을 지냈다. 고(考)는 휘가 태복(泰福)이고 성균생원(成均生員)을 지냈다. 영광(靈光)에서 타향살이를 하다가 임진왜란을 만났다. “일향(一鄉)의 인사(人士)들을 소집해서 인솔하고 성(城)을 지켰다.”는 내용이 《수성록(守城錄)》에 실려 있다. 무령 정씨(武靈丁氏)집안에 장가들었으니 참봉(㕘奉) 희참(希參)의 딸이다. 만력(萬曆) 병신년(1596) 7월 17일 부안(扶安) 옹정리(甕井里) 자택에서 공을 출산하였다.
어릴 적부터 영특하여 보통 아이들 보다 두드러졌다. 그러므로 보는 사람들이 특이하다고 하였다. 처음 임진왜란이 났을 때 공의 형 영길(永吉)은 그의 처(妻)와 함께 바다에 투신하여 사망했다. 때문에 아버지 생원공(生員公)은 다른 자식이 없었으므로 밤낮 새록새록 슬퍼하다가 말년에 공을 낳았다. 그래서 공을 아주 지나치게 사랑하셨고 10살 때까지 취학(就學)시키지 않았다. 공의 나이 14살에 비로소 스스로 우겨서 취학하였다. 공은 침식(寢食)을 망각한 채 열심히 공부하였고 몇 년 채 못 되어서 문리(文理)가 크게 진취하였다. 시문(詩文)을 지어 문득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고 장옥(場屋)에서 명성을 휩쓸기도 했다. 같은 동료들은 당황해하면서도 추중(推重)하고 감복(感服)하곤 하였다.
나이 29세 때 갑자생원시(甲子生員試)에 합격했다. 동년에 역적(逆賊) 이괄(李适)이 병란(兵亂)을 일으켰고, 대가(大駕)가 남순(南巡)하였다. 공은 호남(湖南)의 사우(士友)와 창의(倡義)하고 모병(募兵)하여 장차 난리가 난 곳에 진격하려 할 때인데 적(賊)이 이미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당시 “군수(軍需)는 도백(道伯)에게 이속(移屬)하고 퇴진했다.”는 내용이 《모의록(募義錄)》에 실려 있다.
병자호란(丙子虜亂)에도 공은 족형(族兄)이신 전 목사(前牧使) 홍원(弘遠)과 동현(同縣)에 사는 고참봉(高㕘奉) 홍달(弘達)1)과 의용(義勇)으로써 격려(激礦)하고 군량과 무기를 거두어 가지고 근왕(勤王)하려고 출발했다. 하지만 여산(礪山)에서 “조정(朝廷)이 청나라와 화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침내 북쪽을 바라보면서 통곡(痛哭)하고 되돌아왔다. 이때부터 공거(公車)에는 마음을 접고 두문불출하고 앞으로 세상에 진출하려는 뜻만 강구했다.
효묘(孝廟)가 즉위하자, 여러 현인이 조정에 취임하였다. 문정공(文正公) 송동춘(宋同春)께서 공을 지절(志節)로써 조정에 천거하였다. 기축년(1649) 효릉참봉(孝陵㕘奉)에 제수(除授)되었고, 을미년(1655) 장흥고 직장(長興庫直長)에 천직(遷職)되었다. 동년 가을 금부도사(禁府都事)에 승서(陞敍)되었으나 신병 때문에 취임하지 않았다. 병신년(1656) 회덕현감(懷德縣監)에 제배(除拜)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관찰사(觀察使)의 뜻을 거역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어 귀가하였다. 정유년(1657) 동춘선생(同春先生)이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하여 수재(守宰)의 출척(黜陟)에 대해 언급하다가, “공은 치리(治理)가 청근(淸謹)한 사람인데 파직되었으니 그의 죄(罪)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그 찰나에 마침 전임 관찰사가 함께 들어와서 “그 때 일은 부끄럽습니다.”라고 극구 사죄하였다. 무술년(1658) 신령현감(新寧縣監)에 제배(除拜)되었다. 노병(老病)이라는 이유를 들어 정사(呈辭)를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지못해 부임하여 청렴함으로 청치를 펴서 치화(治化)가 크게 행해졌으며 읍(邑)에 무명세입(無名稅入)은 일절 탕제(蕩除)하여 털끝만큼도 자신의 신분에 누가 되는 정치는 하지 않았으며 흉년이 든 해에는 주휼(賙恤)을 극진히 하여 온 고을을 안도하게 하였다.
임기가 만료되자, 읍민(邑民)은 유임해 줄 것을 호소하였고, 관찰사는 “구마(廐馬)로써 포상(褒賞)을 내려달라.”라고 계문(啓聞)하였다. 하지만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행탁(行橐)2)은 깨끗했었다. 공은 이미 향리(鄉里)로 돌아와 띠를 엮어 가지고 두어 서까래 집을 짓고 수분와(守分窩)라고 이름을 지었다. 신해년(1671) 2월 20일 질병으로 생을 마쳤으니 향년 76세였다. 옹정구리(甕井舊里) 축(丑)방양의 언덕에 안장(安葬)하였다.
공은 자품(資禀)이 영특하고 식견과 도량이 고매(高邁)하여 소싯적부터 강개(慷慨)한 지절(志節)이 있었다. 그래서 말을 하고 일을 실행하면 명백하게 하고 과감하게 결론지었지, 위법을 숨기는 등 행태가 없었다. 가학(家學)을 독실하게 배워 위의(威儀)와 동지(動止)를 밤낮으로 정칙(整飭)했다. 그러므로 상인(常人)이 있는 장소에서도 다급한 말과 황급한 안색을 보이지 않았다.
자손(子孫)을 효제(孝悌)로써 교육하였으며 후생(後生)을 의리(義理)로써 권장하면서 늘 말씀하시기를 “가난이라는 것은 선비의 일상이다. 망령스럽게 외물(外物)에서 물화를 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셨고 사치에는 더욱 담담하고 좋아하지 않았다. 일찍이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그래서 봉양하지 못한 것을 종신토록 애통하게 여겼고 아버지 생원공(生員公)을 매우 애틋하게 섬겼다. 상복례(喪服禮)에 대해서는 치애(致哀)를 거의 훼멸(毁滅)할 정도로 하였다. 우암(尤庵)선생·동춘(同春)선생과는 교의(交誼)가 매우 도타웠으니 서로 강마(講磨)하여 학문의 자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공이 사망하자, 동춘(同春)선생이 만사(挽詞)에 “우술(雨述)3)에서 근심을 함께 하던 날, 연영전(延英展)4)에서 상주할 안건을 이야기할 때였네. 인은(仁恩)은 아녀자들도 노래하였고, 청덕(淸德)은 성명(聖明)께서 알아주었네.”라고 적었다. 참판(㕘判) 김여옥(金汝鈺)5)이 공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일향(一鄉)에서 선사(善士)였다.”라고 하였다.
공의 배(配)는 언양김씨(彥陽金氏)인데 공보다 6년 뒤에 생을 마쳤으니 81세로 장수를 누렸다. 공의 무덤에 부장(附葬)했다. 아들은 지강(之剛)이고 손자는 노({广/魯})인데 학행(學行)이 있었다. 노({广/魯})에게 1남이 있었으니 수성(壽星)이다. 수성에게 3남이 있었으니 속(遫)·일(逸)·손(遜)이다. 진사공(進士公)의 자성(子姓)이 지금까지 5~6대에 이르렀는데 모두 지칙(祗飭)으로써 가업을 이었으니 여기에서 공이 선대를 이어 후대를 풍요하게 했다는 것을 징험할 수 있다. 오호! 그 숭상할만하다. 삼가 가장(家狀)을 모우고 선배(先輩)의 서론(緖論)을 참고하여 위와 같이 찬정(撰定)하고 오는 세대를 기다리겠노라.
자헌대부 의정부좌참찬겸홍문관제학 세손좌부빈객(資憲大夫議政府左參贊兼弘文館提學 世孫左副賓客) 정실(鄭宲)6)은 찬(撰)한다.

[주석]

1) 고참봉(高㕘奉) 홍달(弘達)
1575(선조8)∼1644(인조22).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달부(達夫), 호는 죽호(竹湖).(『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행탁(行橐)
행장을 넣어가지고 다니는 배낭.
3) 우술(雨述)
회덕(懷德)의 고호(古號).
4) 연영전(延英展)
장령전(長齡殿) 북쪽에 있는데 제도는 작으나 대략 건덕전(乾德殿)과 비슷하다. 왕이 여기에서 진사(進士)들을 친히 시험을 보였던 곳이다.
5) 김여옥(金汝鈺)
1596(선조29)∼1662(현종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군수(君粹), 호는 미산(薇山).
6) 정실(鄭宲)
1701(숙종27)∼1776(정조즉위년).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공화(公華), 호는 염재(念齋). 본관은 연일(延日). 충주 출생. 철(澈)의 후손이며, 경연(慶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澔)이고, 아버지는 순하(舜河)이고, 어머니는 김익항(金益炕)의 딸이며, 이재(李載)의 문인이다. 1733년(영조9) 생원시에 장원하고, 1739년 호조좌랑으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교리·장령·정언을 거쳐, 1748년 세자시강원 보덕·응교·필선을 역임하였으며, 1756년 안동부사, 1761년 좌유선(左諭善), 이듬해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1764년 강화부유수에 이어 홍문관제학·도승지가 되고, 대제학·형조참판을 거쳐 1767년 호조판서·지경연사(知經筵事)를 역임하였으며, 이듬해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이조판서에 올랐다. 1770년에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편서로 《송강연보(松江年譜)》가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주소

역대인물정보보기
인물관계정보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