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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서산김선생묘지(西山金先生墓誌)    
G002+AKS+KSM-XI.1935.0000-20101008.B032a_049_00325_YYY
 
분류 고문서-시문류-유사 / 개인-전기-묘문
작성주체 발급: 송준필(宋浚弼)
작성시기 1935년 / 기해후37년을해단양월상한   
형태사항 크기: 30×21 / 합철, 1책 12면 / 종이 /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 안동 법흥 고성이씨 임청각  / 현소장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비고 출판정보: 『고문서집성 49 -안동 법흥 고성이씨편-』(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0)
고문서집성 수록정보 『고문서집성』49 / 8. 시문류 / (4) 묘문·행장 / 묘문·행장6 / 943 ~955쪽
 
1935년에 金興洛의 문인 宋浚弼이 西山 金興洛에 대해 쓴 墓誌銘.
 
개요
   宋浚弼은 西山 金興洛 선생의 문인으로, 1899년에 돌아가신 선생의 묘지명을 1935년에 적고 있다. 선생은 순조 27(1827년) 10월 25일에 안동부 금계리에서 출생하셨다. 자태가 다른 사람과 달라서 눈빛이 빛났다. 기상이 남달라서 여러 아이들을 호령하였다. 독서에도 정식을 따르지 않고 하루에 반드시 두번 숙제를 받아서 독송하엿다고 한다. 16,7세 때에 선공의 가르침으로 舊見을 씻어내고 새롭게 성현의 말과 고이의 일을 믿고 따를 것에 뜻을 두었다. 주희선생와 퇴계선생의 책을 늘 가까이 하며 밤낮으로 계속 읽으며 깊이 숙독하였다. 한 예로 새해 아침이라 하더라도 사당에 배례하고 부모님께 세배한 뒤에 문을 걸어 잠그고 독서하였다고 한다. 일상생활 중에도 늘 규범으로서 스스로를 단속하였다. 모든 성현의 말씀을 절취하여 뜻을 요약하여 항상 지니고 다니면서 반성할 자료로 삼았다. 1845년 유치명 선생의 문하에 들어갔다. 가르침을 받은 것을 익히고 익혀서 아는 것이 날로 고명한데에 이르고 행하는 것이 날로 평실한 데로 나아갔다. 선생으로부터 衣鉢을 전수 받았다. 이후 천거되어 인릉참봉에 임명된 이후 사옹원 주부를 거쳐 경상도 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거처하는 곳의 서쪽에 西山齋를 짓고 조용히 거쳐하면서 玩理體道의 공부를 하였다. 그러자 사방에서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몰려들어 항상 가득하였다. 선생은 임오년에 산림으로써 사헌부지평에 천거되었으나 걸면하고 경인년에 군민들이 관청의 橫斂으로 고생한 끝에 난을 꾀하여 직접 관문을 두드리니 부백이 두려워 이들을 해산하도록 선생에게 간청하니 선생은 부득이 부로 들어가 그들에게 義로써 타이르니 듣는 이들이 즉각 해산하였다. 갑오년 7월에 승정원 우부승지에 올랐다. 8월에 寧海부사로 제수되었지만 선생은 걸면하였다. 선생의 학문은 朱子書節要를 높이 숭상하고 퇴계와 大山 양 선생의 문집을 몹시 떠받들었다. 선생은 심법의 요체를 居敬窮理에 두었다.

인명
   金興洛(1827: 순조27∼1899)은 한말의 유학자로 본관은 의성, 자는 繼孟, 號는 西山이다. 안동 출신으로 金誠一의 胄孫이다. 아버지는 綾州牧使 鎭華이며 어머니는 李元祥의 딸이다. 柳致明의 문인이다. 1841년 성현의 격언을 초록하여 諸訓集說要覽을 지었다. 1845년 4월 유치명의 제자가 되면서 李滉・李象靖・유치명으로 이어지는 영남학파의 주요한 학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이해 겨울 가정과 사우로부터 보고 들은 바를 모아서 『困學錄』을 편성하고 또한 「初學箴」, 「畏天說」을 지었다. 1850년(철종1) 親命으로 增廣試에 응시하였다. 1851년 『鶴峰集』을 중간하고 그 이듬해에는 『家禮儀』를 편성하였다. 1854년 「拙守要訣」과 「入學五圖」 및 「主一說」을 지었다. 1867년(고종4)에 어사 박선수가 유일로서 천거하여 인릉참봉에 임명되었고 얼마 뒤 사옹원주부 경상도 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889년 退溪先生文集攷證을 會校하였다. 1894년 7월에는 승정원 우부승지에 올랐다. 이 해 8월 영해부사로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렸다. 한말 영남의 대유학자로 李敦禹・權璉夏 등과 교유하였으며 ,학자・의병・독립운동가 등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사후 소계서당에 입향되었으며 저서로는 『西山集』 16책(본집 13책, 속집 3책)이 있다.宋浚弼(1869: 고종6 ∼ 1943)은 도학자. 본관은 冶城. 자는 舜佐. 호는 恭山. 경상도 성주 출신. 祺善의 아들이다. 만년에는 순천에서 살았다. 李震相의 講學에 참석하였고 18세 때부터 장복추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뒤에 金興洛의 문하에서 배우기도 하여 당시 영남의 석학들 문하에 폭넓게 내왕하며 수학하였다. 그의 성리설은 이황의 心合理氣說을 따랐는데 이것은 주로 장복추의 영향하에 형성된 것이다. 그는 성리설의 학통에서 李象靖을 중시하여 주희와 이황의 정맥을 이상정이라고 파악하였다. 나아가 이황은 마음을 통합적으로도 설명하고 분별적으로도 설명하였지만 이이는 통합적인 파악을 내세워 분별적 이해를 공격하였고 李玄逸, 權相一 등은 분별적 설명을 강조하여 통합적 파악을 거부하였으며 이상정은 이러한 대립적인 견해를 통합하여 이황의 본래 의도를 발휘하였다고 본다. 이진상의 心卽理說은 보통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성인의 마음을 가리킨 것이라 지적하면서도 마음과 본성을 일치시켜 마음이 기질과 결합된 사실을 외면하는 것은 일치시킬 줄만 알고 분별하여 이해할 줄은 모른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田愚의 性尊心卑說은 본성을 理로 보아 존중하는 것을 시인하면서도 마음을 본성과 상대시켜 비하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는 자신의 『心統性情三圖發揮』(1928)에서 송대 성리설과 퇴계학통의 성리설을 정연하게 체계화시키고 나아가 자신의 성리설을 정립하고 있다. 나아가 1919년 유림의 독립청원운동인 파리장서사건에서 郭鍾錫・張錫英 등과 활동함으로써 의리정신과 민족의식을 발휘하였다. 주요저술로는 『大山書節要』, 『四勿箴集說』, 『五先生微言』 『正學入門』 『續續資治通鑑綱目』, 『恭山集』 등을 남기고 있다.定齋柳先生은 柳致明을 말한다. 유치명(1777: 정조 1∼1861: 철종 12)은 조선후기의 문신, 학자로서 본관은 전주, 자는 誠伯, 호는 定齋이다. 아버지는 진사 晦文이고 어머니는 韓山李氏이다. 李象靖의 外曾孫으로 외가인 안동의 蘇湖에서 출생하였다. 이상정의 문인인 南漢朝・柳範休・鄭宗魯・李瑀 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05년(순조 5)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 사간원정원, 사헌부지평, 세자시강원문학 등을 거쳐 1831년 전라도 掌試都事가 되었다. 1832년 홍문관교리에 발탁된 뒤, 1835년(헌종1) 우부승지가 되었다. 그 뒤 초산부사・공조참의를 거쳐 1847년 대사간이 되고 1853년(철종 4)에 嘉善階에 오르고 한성좌윤,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855년 장헌세자의 추존을 청하는 상소를 하였다가 대사간 朴來萬의 탄핵을 받고 상원에 유배되었고 이어 智島에 안치되었다가 그 해에 석방되었다. 1856년 嘉義大夫의 품계에 올랐으나 다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1857년 제자들이 지어준 雷巖의 晩愚齋에서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그뒤 1860년 동지춘추관사가 되고 다음해에 85세로 죽었다. 초산부사로 있을 때에는 진정에 힘쓰고 환곡, 전결에 따른 時弊를 교정하는 등 여러가지 치적을 쌓아 그곳 사민들이 生祠堂을 짓기도 하였다. 그는 경학, 성리학, 에학 등 여러 분야에 정통하여 학문적으로도 큰 업적을 남겼다. 특히 성리설에 있어서는 이상정의 학설을 계승하여 理를 活物로 보고 理의 自發的 動靜에 의하여 氣가 動靜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단칠정론에 있어서는 氣發理乘을 주장한 李珥의 학설을 공격하였다. 理는 能動能靜하는 神用이 있을 분만 아니라 理의 자발적 동정으로부터 음양오행의 기가 나오며 이가 무체적인 실재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李滉 - 金誠一 - 張興孝 - 李玄逸 - 李栽 - 이상정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이어받아 李震相, 柳宗喬, 李敦禹, 權永夏, 李錫永, 金興洛 등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저서 및 편서로는 『정재문집』, 『禮疑叢話』 『家禮輯解』, 『學記章句』, 『常變通攷』, 『朱節彙要』 『大學童子問』, 『太極圖解』, 『大山實記』 『知舊文人往復疏章』등이 있다.李敦禹(1801: 순조 1 ∼ 1884: 고종 21)는 조선말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全州이고 자는 允若・允公, 호는 莘憩, 初名은 敦榮, 효령대군 補의 15세손으로 증이조판서 得英의 손자이며 첨지중추부사 相斗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徐寅修의 딸이다. 相衡에게 입양되었다. 1827년(순조 27)에 증광별시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홍문록에 올랐으며 곧 홍문관제학이 되었다. 1831년 都廳을 역임한 뒤 1836년 이조참의가 되고 이듬해 執義가 되었다. 그뒤 1840년(헌종 6) 이조참판에 오르고 이듬해 전라도관찰사로 나가 치적을 쌓았다. 1843년 중앙으로 돌아와 이조참판에 다시 등용되고 1845년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그뒤 형조판서・대사헌・한성부판윤등을 차례로 역임하였으며 1849년(철종즉위년)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1853년 공조판서・판의금부사를 거쳐 1855년 예조판서・병조판서를 지냈다. 이듬해 廣州府留守를 거쳐 1857년 다시 판의금부사를 지냈다. 1858년 이조판서가 되고 1860년 형조판서 공조판서를 역임한 뒤 다시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이듬해 다시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1861년 경상도관찰사로 나아가 각지에서 발생하는 민란수습에 전력하다가 중앙으로 돌아와 이듬해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1863년(고종 즉위년) 國葬都監의 제조로 국장도감의 哀冊文製述官으로서의 구실을 다하였다. 1864년 좌참찬・판의금부사 호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실록찬수당상으로 『철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호조판서・부묘도감제조를 거쳐 1866년 다시 제조・호조판서를 지냈다. 그뒤 1874년 元子輔養官으로 세자를 보필하였고 이듬해 좌찬성으로 전문 서사관의 임무를 수행한 뒤 奉朝賀가 되었다. 이어 1882년 대제학이 되어 會圈에 참여하였다. 비록 일생을 관직에서 보냈지만 항상 청백한 것을 좋아하여 연꽃을 사랑한다는 「蓮說補」을 지어 자신의 뜻을 펼쳤다. 저서로는 『甲稿』6권이 있다. 시호는 文貞이다. 權璉夏(1813: 순조13∼1896)는 조선말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安東, 字는 可器, 號는 頤齋이다. 유치명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평생동안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전념하였다. 1879년에 經學으로 薦擧되어 繕工監役을 제수받았다. 1881년 스승의 문집인 『定齋文集』을 교감하였으며 1882년 수직으로 敦寧府都正에 증직되었고 1887년에 嘉善大夫와 嘉義大夫로 연이어 가자되었으나 辭職上疏를 올렸다. 1892년에 다시 嘉善大夫로 증직되어 龍驤衛護軍에 제수되었다. 보수적인 유학자로서 기존의 체제와 가치가 도전받는 것을 싫어하였고 그를 위해 자신의 해박한 지식을 동원하여 새로운 학설들에 대해 반론을 펴는 한편, 자신의 신념에 입각하여 후학양성에 노력하고 전통적인 미풍양속의 고취 및 전통적인 교육제도의 확충에 진력하였다.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각지의 서원이나 사우에서 빈번히 강회를 개최하는 한편, 각지의 효자, 열녀, 충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발굴하여 책으로 엮어내기도 하였다. 저서로 『이재선생문집』 17권이 있다.李晩慤(1815: 순조 15∼1874: 고종 11)은 조선말기의 학자로 본관은 眞寶이고 자는 謹休, 호는 愼庵・巖后이다, 아버지는 通德郞 彙運이고 어머니는 全州 柳氏로 진사 晦文의 딸이다. 외숙 柳致明에게 글을 배웠다. 1865년(고종 2) 直指使 朴珪壽의 추천으로 繕工監假監役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일찍이 榮利의 뜻을 버리고 경전과 『朱書節要』를 깊이 연구하면서 후진양성에 전력하였다. 당시의 석학 李敦禹 姜楗 尹最植 등과 교의를 맺고 그들과 학문에 대한 많은 서신을 남겼다.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어 李滉・奇大升 간에 있었던 四七理氣論을 연구 발전시켰다. 그리고 『퇴계전서』 중에서 긴요한 宗旨 만을 발췌하여 『溪書約選』을 편집하였고 고증학에도 밝아 庸學疑目인 「巖后類記』를 남겼다. 저서로는 『신암문집』 10권 5책이 있다.

용어
   姿表는 자태를 말한다. 元朝는 새해 아침을 말한다. 拜廟는 사당에 배례하는 것을 말한다. 繩墨은 원의가 먹줄이라는 뜻으로 법도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衣鉢은 학문 기예 등을 아래 사람에게 전하는 일을 말한다. 仁陵은 조선조 23대 왕 순조 및 그의 비 純元王后 김씨의 陵으로 廣州에 있고 직원은 令・參奉 각 1인이 있다. 司饔院은 조선시대 때 왕이 먹는 음식과 대궐 안에서 쓰이는 각종 식료품을 맡아보는 관청을 말한다. 都事는 조선 전기 이래 인물출척권을 가지고 수령의 殿最에 참여하고 불법을 행한 수령의 推鞫, 農況의 踏驗審檢, 饑民救恤, 모든 행정문서에의 서명 등 관찰사의 일을 도와 일체의 도정을 수행하여 亞監司라고 호칭되었으며, 감사의 유고시에는 監司權을 대행하여 명실공히 도정상의 제2인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관찰사의 수석보좌관이었다. 負笈은 책상자를 짊어지고 타향에 공부하러 간다는 말이다. 重趼은 발에 못이 박혀왔다는 뜻으로 먼 길을 왔다는 말이다. 橫斂은 관청에서 민에게 마구 거두어들이는 것을 말한다. 搶攘은 몹시 어지러운 모양을 말한다. 徵士는 학문과 덕행이 높아 임금이 부르나 나아가 벼슬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 작성일:2000.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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