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와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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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암 김령 신도비 전경
김령의 자는 자준(子峻), 호는 계암(溪巖)이다. 예안 출신. 효노(孝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綏)이고, 아버지는 현감 부륜(富倫)이며, 어머니는 평산 신씨로 부호군(副護軍) 수민(壽民)의 딸이다. 1612년(광해군 4)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올라 승문원정자, 승정원주서 겸 춘추관 기사관에 옮겼으나 이른바 대북ㆍ소북이 서로 대치하여 국정이 어지럽자 묘를 지켜야 한다는 핑계로 고향으로 내려왔다. 1618년 인목대비가 폐위되자 두문불출 독서로 나날을 보냈다. 인조 4년 청나라가 침략하여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하고 여러 도의 군사가 잇달아 패하는 긴박한 지경에 이르러 예안에서도 의병을 일으키매 김령은 가산을 기울여 의병을 도왔으며 이듬해 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향하여 통곡하였다고 한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위험을 무릅쓰고 한양으로 인조를 찾아 나섰으나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 요형(耀亨)을 시켜 소를 올리게 하고서 돌아왔다. 뒤에 신하로서 아들을 시켜 상소하는 것이 도리에 어긋났다는 격렬한 상소가 있었으나 인조가 이를 모두 무마시켰다. 그 뒤로도 학덕을 잊지 못한 인조가 장령·보덕·헌납·사간 등으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번번이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나라 병사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가산을 모두 털어 의병들의 군량미로 충당했으며,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비분강개한 시 몇 편을 남겼다. 벼슬에서 물러나 처음에는 제자들과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찾아 마음을 달래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마지막 20여 년 간은 문 밖 출입을 삼가며 오가는 사람도 방에 앉아 영접하고 보내, 세상에서 영남의 제1인이라고 불렀다. 1689년(숙종 15)에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영조 때는 원액(院額)이 하사되었다. 저서로는 ≪계암집 溪巖集≫ 6권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인조 19년 향년 65세를 일기로 몰하였다. 나중에 문정공의 시호를 받았다. 문집 2책과 40여 년간의 일기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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