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실

  • 삶의 공간과 유물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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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문당
진주유씨 16세손 유시회(柳時會, 1562-1635)가 처음 건립하였다고 전해지나 현재의 건물은 조선 후기에 새로 건립된 것이다. 유시회의 조카인 유적(柳頔)이 선조의 부마로 정해진 후 아버지 유시행(柳時行)의 묘를 부고동 새터에 정하면서 이후 진주 유씨는 임금이 하사한 넓은 사패지(賜牌地)와 안산 바닷가의 어염권을 기반으로 이곳에 살면서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고, 조선 중기에는 기호남인(畿湖南人) 3대 가문의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또한 조선 후기에 이르면 청문당 만권루는 조선 4대 서고의 하나로 기호남인들의 학문과 예술의 중심질서 실학의 산실이 되었다. 부곡마을 안쪽의 낮은 경사지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청문당은 넓은 앞마당에 면하여 뒷날개를 가진 'ㄷ'자형 사랑채가 있고 그뒤로 'ㄱ'자형 안채와 'ㅡ'자형 아래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어 전체적으로 큰 ㅁ자형의 배치를 하고 있다. 안채 동북쪽에는 사당이 있고 뒷뜰에는 화계(花階)가 조성되어 있다. 집 앞에는 연지가 있었으며, 연지 동쪽에는 바깥사랑채에 해당하는 연당(蓮堂), 서쩍에 현정(玄亭), 북쪽에 느티나무와 우물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연지의 석축만 남아 있다. 이 가옥은 경기지역의 민가와 사대부가의 형식이 절충된 구성을 보여 주는 사림집으로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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