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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G002+AKS+KSM-XI.1635.0000-20101008.B061a_088_00548_XXX
인용(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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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김성일(金誠一)의 신도비명(神道碑銘)과 서(序)로, 김성일의 가계와 그의 일대기가 굵직한 일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임진왜란을 전후로 한 그의 활약상은 과거의 일반적인 인식과는 많이 다르다.
용어
朝著: 조정. 편복(便服): 평상시에 입는 옷. 편의(便衣).
라는별명을얻었다.그해함경도순무어사가되어영흥․함흥․삼수․길주․명천등의고을을순행하면서민정을살피고수령들의근무태도를점검하였다.1583년특지로나주목사가되어도내의민폐를해결하였다.당시김여물(金汝杖)이순무어사로나주에파견되어민가에서술을마시고밤에관아로오자,그를꾸짖고문을열어주지않는강직함을보였다.1589년의정부사인(舍人)으로있을때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
가 보낸 현소(玄蘇) ․평의지(平義智) 등과 일본과의 통호문제를 의논하였고, 그해 일본 사정을 탐지하려고 파견된 사행에서 부사(副使)로 임명되었다. 일본에 들어간 직후부터 정사 황윤길(黃允吉) 등과 관백(關伯)에게 예를 표하는 절차를 놓고 심한 의견 대립을 보였는데,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국왕이 아니므로 왕과 동일한 예를 베풀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1591년 2월 부산에 돌아와 각기 조정에 상소를 올릴 때, 황윤길은 반드시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고, 그는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이 발언 때문에 안방준(安邦俊) 등에 의해 왜란을 불러온 장본인으로 매도되었고, 왜란 초에 파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발언이 일본이 틀림없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장담한 황윤길의 발언으로 인하여 민심이 혼란해지는 것을 완화하려는 의도였다고 해명하였다. 실제 황윤길의 발언이 있은 직후 조정은 각지에 성을 쌓고 장정들을 징집하는 등 급작스런 대비책을 강구하였는데, 이는 당시 민심을 상당히 동요시켰다. 이에 상소를 올려 오늘날 두려운 것은 섬나라 도적이 아니라 민심의 향배이니, 민심을 잃으면 견고한 성과 무기가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여 내치(內治)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왜란 초 경상도 일대가 왜군에 의하여 유린되자, 사태수습을 목적으로 다시 경상도초유사(招諭使)에 임명되었다. 관군이 궤멸된 상황에서 곽재우(郭再祐) ․김면(金沔) ․정인홍(鄭仁弘) 등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들을 의병장으로 삼아 서로 협동하게 하고, 용맹한 자를 선발하여 수령이 없는 고을의 행정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또 각지를 순행하면서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뿌리고 군량으로 쓸 양곡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곽재우와 경상감사 김수(金谿)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생기고 조정에서 곽재우를 처벌하려는 기색이 있자, 양자를 화해시켜 이를 원만히 수습하기도 하였다. 왜란 초기에 피폐해진 경상도 지역의 행정을 바로 세우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동인(東人)에 속하였으며, 저서로는 《해사록(海 錄)》 《상례고증(喪禮考證)》 《조선연혁풍속고이(朝鮮沿革風俗考異)》 등을 남겼고, 1527년 후손들에 의하여 문집 《학봉집》이 간행되었다.
황윤길(黃允吉):본관장수(長水).자길재(吉哉).호우송당(友松堂).1561년(명종16)식년문과에병과로급제,1563년정언,1567년지평이되었다.1585년(선조18)황주(黃州)목사를지내고병조참판에이르렀다.1590년통신사로일본에파견되어도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
를 접견하고 이듬해 귀국하여 장차 일본이 반드시 내침(來侵)할 것이므로 대비하여야 할 것이라고 복명하였다. 이때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의 보고와 서로 상반되었으나, 조정은 동인(東人) 세력이 강성하였으므로 서인인 그의 의견을 묵살하였다. 1592년 봄 그의 예견대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그의 말을 좇지 않았음을 후회하였다고 전한다. 정인홍(鄭仁弘): 본관 서산(瑞山). 자 덕원(德遠). 호 내암(萊菴). 경상남도 합천(陜川)군 출생. 조식(曺植)의 문인. 1573년(선조 6) 학행으로 천거되어 6품직(六品職)을 받고, 1575년 황간현감(黃澗縣監), 다음해 지평(持平)을 거쳐 1581년 장령(掌令)이 되어 정철(鄭澈) ․윤두수(尹斗壽)를 탄핵하다가 해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제용감정(濟用監正)으로 합천(陜川)에서 의병을 모아, 성주(星州)에서 왜병을 격퇴하여 영남의병장의 호를 받았다. 이듬해 의병 3,000명을 모아 성주 ․합천 ․함안(咸安) 등을 방어하였고, 1602년 대사헌에 승진, 중추부동지사 ․공조참판을 역임하였으며 유성룡(柳成龍)을 탄핵하여 사직하게 하고, 홍여순(洪汝諄) 등의 북인(北人)과 함께 정권을 잡았다. 1607년 유영경(柳永慶)이 선조가 광해군에게 양위하는 것을 반대하자 이를 탄핵하다가, 이듬해 영변(寧邊)에 유배령(流配令)을 받았으나, 선조의 급서로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사헌이 되어 대북정권(大北政權)을 세우고 좌참찬에 특진되었다.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祠)를 반대하여 유생이 청금록(靑衿錄:儒籍)에서 삭제하는 등 집권을 위한 싸움으로 정계에 분란을 일으켰다. 1612년 우의정이 되고, 다음해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켜 영창대군을 폐하여 증살(蒸殺)하게 한 뒤 서령부원군(瑞寧府院君)에 봉해지고, 좌의정에 올라 1615년 궤장(섟杖)을 받았다. 1618년 인목대비를 폐위하여 서궁(西宮)에 유폐시키고 영의정에 올랐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참형되고 가산은 적몰되었으며, 이후 대북은 정계에서 거세되어 몰락하였다. 김시민(金時敏): 본관 안동. 자 면오(勉吾). 시호 충무(忠武). 목천(木川) 출생.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 훈련원판관이었을 때 군사에 관한 일을 병조판서에 건의한 것이 채택되지 않아 관직을 버렸다. 1591년(선조 24) 진주판관(晉州判官)이 되었는데,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죽은 목사(牧使)를 대신하여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무기를 갖춘 공로로 목사가 되었다. 사천(泗川) ․고성(固城) ․진해(鎭海) 등지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 올라 금산(金山)에서 다시 적을 격파하였다. 그해 10월 적의 대군이 진주성(晉州城)을 포위하자 불과 3800명의 병력으로 7일 간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적을 격퇴했으나, 그 싸움에서 이마에 적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추록되었으며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고, 뒤에 영의정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증(追贈)되었다. 진주(晉州)의 충민사(忠愍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집필자 : 정태윤/작성일:2003-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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