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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론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center>이 재 곤 (온해초등학교 교사)</center> 이황(李滉, 1501~1570, 號 退溪)은 오랜 기간 훈구척신 계열과의 투쟁에서 좌절과 패배를 극복하고 점차적으로 역사무대의 전면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사림층 출신이다. 그는 16세기 사림파의 이념적 지향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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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 자 료 1. 三國志集解 卷 三十 魏書 東夷 p41 <HXMLPIC ID="001"></HXMLPIC> 2. 高句麗興起 三韓比定圖 <HXMLPIC ID="002"></HXMLPIC> 3. 三國末形勢圖 <HXMLPIC ID="003"></HXMLPIC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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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이덕홍의 시대와 생애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이덕홍이 활동했던 시기는 16세기 중•후반이다. 이 시기는 권신(權臣)•척신(戚臣) 주도의 정치체제가 사림정치로 이행되어 가던 때였다. 그가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스승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수학한 것은 명종(明宗)의 친정체제가 시작됨에 따라 앞 시기에 비해 사림파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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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간재와 임진왜란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이덕홍은 38세 때인 선조 11(1578)년 3월에 전국의 명유(名儒) 9인 천거시 정구 등과 함께 추천되어 <HXMLSUP ID="001"></HXMLSUP> 같은 해 7월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간 후 작은 벼슬 몇몇을 거치게 된다. <H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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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간재의 임란 극복의식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간재의 임란 극복의식을 상론하기에 앞서 「상왕세자서」와 「상행재소 병도」의 내용구성을 약론하기로 한다. 「상왕세자서」는 머리에서 몽진시 세자(광해군)를 수행하지 못한 사유와 왕의 교서를 읽고 느낀 점, 임란을 당한 원인과 구업(舊業)의 회복을 위해 행할 일 등을 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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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심학적 극복론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이덕홍은 성리학적 세계관에 바탕한 현실인식(시국관)을 통하여 임란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상소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는 급박한 국가 비상 사태를 어떠한 관점에서 해결해야 것인가를 생각하였다. 이덕홍은 임란극복을 위해 가장 힘주어 주장한 것은 민심의 수습이었다. 사실 다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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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전술적 극복론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전술적 극복론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타개방안이다. ‘어떻게 싸워서 적에게 승리를 거둘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이덕홍의 답인 셈이다. 적을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적의 실태를 분석하고, 군사와 군량을 확보하여 적절한 시기에 지상 및 해상에서 전투를 벌여야 한다는 것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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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결론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위의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간재와 임진왜란에서는 임란초기 그가 처한 상황과 예안•안동지역의 의병활동을 논하고, 그가 전란의 와중에서 왕세자와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을 통해 병략에 관한 탁월한 식견과 나라를 위한 충정을 짐작할 수 있음을 기술하였다. 다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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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보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center>권 오 신 (안동문화원 운영위원, 경안중학교 교사)</center> <HXMLPIC ID="001"></HXMLPIC>1903년:9월 16일 안동시 율세동에서 부 중한 (重漢)과 모 안동김씨 귀행(貴行)의 2남2녀 중 장남으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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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사람은 가도 노래는 남아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 병아리 때 종종종 봄나들이 갑니다.‘ 지금도 초등학교 교정을 지나다 보면, 창문을 통하여 울려나오는 윤석중이 작사하고 권태호가 곡을 붙인 동요 ‘봄나들이’가 가던 걸음을 멈추게 한다. 향토 안동이 낳은 한국 현대음악의 선구자 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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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음악을 좋아하던 어린 시절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권태호는 1903년 9월 16일 아버지 권중한(權重漢)과 어머니 김귀행(金貴行)의 2남2녀 중 장남으로 안동시 율세동 13번지 속칭 ‘밤적골’ <HXMLSUP ID="001"></HXMLSUP>에서 태어났다. 권태호의 선조들은 대대로 안동 화성동 속칭 ‘잿골’에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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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음악에의 꿈을 안고 동경으로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진학의 꿈을 이루지 못한 권태호는 상급 학교로 진학한 소학교 동기들이 방학 때 고향으로 돌아와 중학교 모자를 쓰고 거리를 활보할 때는 진학을 하지 못하고 안동에 남아있는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괴로웠다. 동기인 권중휘(서을대 총장 역임)와 같은 또래인 이인기(전 영남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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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고국에서의 빛나는 음악 활동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연이은 독창회를 통하여 음악가로서 명성을 얻은 권태호는 1930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권태호의 광성고보 제자인 소설가 조흔파의 술회에 의하면 처음 권태호가 평양에 교사로 부임해 왔을 때 그는 평양의 자랑이요 선망이 대상이었다고 한다. 풍부한 성량에 폭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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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해방 후의 음악 활동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1945년 귀국한 권태호는 대구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경주예술학교를 건립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 때 미술은 화가 손일봉(孫一峰) <HXMLSUP ID="001"></HXMLSUP>이 맡았다. 1946년 권태호는 대구에서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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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그가 작곡한 노래들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권태호는 70생애를 오로지 음악에 다 바쳤다. 그는 원래 성악을 전공했지만 그의 음악활동은 성악과 연주에 국한되지 않았고 작곡부분에서도 눈부셨다. 그는 500여 회의 독창회를 하고, 200여 곡에 달하는 작곡을 하였다. 일찍이 음악학교 재학시절에 이미 우리에게 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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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 술에 얽힌 일화들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나의 일생은 부지런히 마시고, 또 마시는 일과(日課)의 연속이었다.” 하고 본인 스스로 술회하듯이 권태호는 애주가요 호주가였다. 그의 삶 속에는 언제나 술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 예술가들은 술을 좋아한다지만 그는 술을 빼면 이야기가 되지 않을 정도로 술에 얽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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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I. 권태호에 대한 새로운 인식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권태호는 성악활동•음악교육활동•작곡활동•국민가요 운동 등으로 한국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특히 대구•경북 음악계에 그가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는 생전에 500여 회의 독창회를 열고, 114개 학교의 교가를 비롯하여 200여 곡의 작곡을 하였다. 그리고 우리 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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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김씨 부인의 한시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HXMLPIC ID="001"></HXMLPIC>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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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조선조 안동 지방의 여성 한시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center>이 원 걸 (안동대 국학부 강사)</center> 조선조 여성들의 삶은 남성위주의 질서 아래 놓여진 제약의 삶이었다. 조선조 통치 이념으로 채택된 유교적 이념인 충•효•열의 통념은 여성들의 삶에 있어서 많은 구속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규제에 따라 여성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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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부인 안동 장씨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정부인 장씨 부인(1598-1680)은 선조 31년 1598년 11월 24일에 현 행정 구역상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의 春坡라는 작은 마을에서 敬堂 張興孝와 안동 권씨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나 집안의 유풍에 따라 유교적 교양과 덕목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文才를 지녔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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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안동문화원 이모저모 그림판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HXMLPIC ID="001"></HXMLPIC> <HXMLPIC ID="002"></HXMLPIC> <HXMLPIC ID="003"></HXMLPIC> <HXMLPIC ID="004"></HXMLPIC>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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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양지법사가 안동 법림사의 승려였다는 근거자료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위에 기술한 근거자료를 종합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양지법사가 거주했으나 불상•불탑을 만들었다는 석장사(錫杖寺), 영묘사(靈廟寺), 천왕사(天王寺), 등은 모두 경주 부근에 있는 사찰로 그 위치도 확인되었지만 법림사는 경주 지방에 있는 사찰이라는 어떤 기록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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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 결어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위에 나오는 여러 기록으로 볼 때, 첫째, 삼국유사 양지사석조의 법림사는 경주에 있는 사찰이 아니라 안동에 있는 법림사이며 삼국유사의 해제는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안동지방에 있는 전탑의 축조 시기는 종래의 특설인 8세기가 아닌 7세기로 수정해야 할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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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머리말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태자사는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에 위치하였던 사원으로 굴산사, 지장선원과 함께 나말려초 사굴산문에 속한 중요 사원 중의 하나이다. 현재의 태자사는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아 그 변천을 살필 수 있는 자료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 태자사는 사굴산문의 개창자인 통효범일의 제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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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낭공행적의 생애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낭공행적은 통효범일의 제자로 낭원개청과 함께 사굴산문을 대표하는 선종 승려이다. 낭공행적은 신라 흥덕왕 7년(832) 12월 30일에 탄생하였다. 그의 가문의 정확한 신분을 확인하는 것은 어려우나 다음의 자료에서 사회적 지위를 추정할 수 있는 몇 가지 시사점을 찾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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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낭공행적의 신자들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종교지도자와 신자들은 상호 영향을 주고 받는다. 종교지도자는 신자에게 정신적인 영향을 주어 그들의 정치적 성향과 사회적 현상에 대한 반응에 일정한 영향을 준다. 종교지도자들은 신자에 대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사회적•정치적 발언권을 증대할 수 있으며, 특히 정치권력에 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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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낭공행적과 신라왕실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위에서 필자는 낭공행적의 제자와 주요신자인 명요부인 등이 신라왕실과 밀착하고 있었음을 말하였다. 이들의 정치적 성향은 낭공행적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낭공행적과 신라왕실과의 관계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낭공행적이 당에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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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낭공행적의 비건립과 광종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실제사에 머물던 낭공행적은 915년 왕족인 명요부인이 제공한 울주 석남사로 옮겨 머물던 중 916년 2월 12일 입적하였다. 세수 85세, 승납은 61세였다. 이듬해인 916년 2월 17일 석남사 서쪽 기슭에 임시로 장례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신덕왕은 中使를 보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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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맺음말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이상에서 신라 말 고려 초의 태자사와 낭공행적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요약 정리하여 맺음말에 대신하고자 한다. 낭공행적은 6두품이하 신분의 소유자로 세속의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사굴산문 소속이었지만 명주의 호족을 신자집단으로 하여 신라왕실과 일정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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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내며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HXMLPIC ID="001"></HXMLPIC><br clear=all>문화인류학자들은 문화란 고유성과 외래성이 충돌과 화해, 지속과 소멸, 창조와 생성의 과정을 거처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문화는 고유한 것과 밖에서 흘러 들어온 것, 고유한 것과 외래의 것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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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지역 누정순례 삼구정(三龜亭)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안동에서 서쪽 16km 지점에 위치한 豊山邑은 뒤로는 鶴駕山(해발 888m)과 天燈山이 둘러있고, 앞으로는 洛東江을 끼고 드넓은 平野를 이루고 있어서 예로부터 인구가 조밀하고 物産이 풍부하여 豊山이라 하였다고 한다. 자연환경이 아름답고 생활여건이 좋은 이곳 풍산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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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泰山里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소산’은 원래 ‘금산촌’ 또는 ‘시미마’라 불렀는데 永嘉誌에 “금산촌은 풍산현의 서편 5리에 위치하며 남쪽을 향해 큰들이 놓여 있고 땅이 비옥하여 온갖 곡식이 잘 된다”라고 하였고, 소산의 舊名인 ‘金山’이 우리말로 ‘쇠뫼’가 되고 쇠뫼가 변하여 ‘시미마’로 불리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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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구정(三龜亭)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HXMLPIC ID="001"></HXMLPIC>‘삼구정’은 안동김씨 일문의 정신적 지주이자 마음의 고향이다. 입향조인 현감 金三近의 아들 한성판관 金係權이 현달한 자제 오형제를 두었는데 이 정자에는 오형제의 友愛와 孝情神이 서려있다. 연산군 1년(1495) 한성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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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龜亭 板上詩文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題三龜亭 嘉善大夫安東府使 金克儉 諸子怡愉色養時 여러 자식들이 기쁜 안색으로 봉양하던 때 板輿扶持此娛嬉 어버이를 가마에 모시고 이곳에서 즐기셨네 作亭會役三州守 정자를 짓는데 세 고을 수령이 힘을 모았고 負柱誰煩五摠龜 기둥을 지는일 오형제 누가 괴로워 하였겠나 四野秋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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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龜亭八景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삼구정 팔경은 1626년 淸陰 金尙憲 선생이 삼구정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八景으로 題하여 상촌 申欽에게 시를 지어줄 것을 청하여 청음선생과 교유하였던 여덟 名士들의 ‘삼구정팔경시’와 청음선생의 형인 金尙容의 八詠詩를 次韻한 金履健, 金養根 등 후손들의 八詠詩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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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龜亭時詞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이 시는 三塘 金瑛이 三龜亭의 四時佳興을 안동부사 金克儉의 原음韻(時•嬉•龜•漪•吹)을 次韻하여 읊은 시인데, 그의 손자 箕報가 조부를 추모하여 詩板을 만들어 걸었다고 한다. 三龜亭四時詞 金 瑛 春 挾春萬象樂芳時 봄을 맞은 만물은 즐겁고 향기로운데 人倚江亭與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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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安東金氏 泰山派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사헌부장령 金永銖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맏아들 三塘 金瑛(1475~1528)은 나면서부터 총명하여 주위에서 신동이라 일컬었다. 종조부 보백당 김계행은 ‘이 애는 장차 우리 가문을 크게 빛내리라’ 하였는데 과연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교리, 장령 등 삼사의 청직을 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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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安東金氏 壯洞派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掌令 金永銖의 둘째아들이 金璠인데 그는 文科로 평양서윤을 지내고 서울 장동에 정착하여, 안동김씨 ‘장동파’의 파조가 되었는데 그 후손이 크게 번창하고 현달하여 세칭 장동김씨라고 부르기도 한다. 장동파에는 庶尹 金璠의 세손자(大孝, 元孝, 克孝)중 셋째 克孝의 아들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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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산리 문화유적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 敦素堂(比安公舊宅, 경북문화재 자료 211호) <HXMLPIC ID="001"></HXMLPIC> 사헌부감찰 金永銓(1439~1523)의 종택으로 안동김씨 소산 입향조인 비안현감 金三近(1419~1465)이 벼슬에서 물러나 이 집을 짓고 거처했다고 하며, 처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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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泰山里 안동김씨 養泰의 精神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안동의 여러 전통마을에는 4~5백년을 동족끼리 세거해 오면서 마을마다 고유한 문화를 형성하고 나름대로 그 시대의 정서를 담아 삶의 흔적을 후손에게 남겼다. <HXMLPIC ID="001"></HXMLPIC> 그들의 후손들은 선조가 남겨준 삶의 흔적을 소중히 보존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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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草稿本 宣城誌는 있는가?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나별지(羅別誌)를 저술(著述)하는 과정에서 1994. 11. 23, 김영규(金永奎) 선생의 ‘초고본(草稿本) 와룡면지(臥龍面誌)’ <HXMLSUP ID="001"></HXMLSUP>와 1994년경에는 1993. 7. 20에 발행된 ‘국역 선성지(宣城誌)’를, 또 1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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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처음에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도산서원 선비문화 수련원에서는 지난해에 이어 2003년에도 220여 명의 전국 교원을 대상으로 하여 2박 3일의 일정으로 연수를 실시하게 되었다. 지난해 이 연수를 처음 시작했을 때 전국의 주요 방송국과 신문사에서 대대적으로 경쟁적으로 보도를 할만큼 주목을 받기도 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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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연수 제 1일차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8월 4일, 안동기차역 앞에서 오후 1시가 조금 넘어 수련원에서 마련해준 버스를 타고 ‘퇴계로’를 따라 도산서원 주차장에 도착하니 2시 10분전이었다. 도산서원 주차장에서 차에서 내려 걸어서 도산서원 정문 등록처에 도착하니 오후 2시가 거의 다 되었다. 며칠 전까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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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연수 제 2일차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아침 6시가 조금 지나 일어나 밖에 나가니 도산의 공기는 참 상쾌했다. 마음이 절로 후련하였다. 조금 후에 이동하여 자료부장님께서 퇴계기념공원으로 가서 퇴계시를 감상하자고 하셨다. 그래서 모두 이동후 부장님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얼마가지 않아서 푸른 숲이 병풍처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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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연수 제 3일차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오늘은 마지막 날이다. 상쾌한 도산의 새벽 공기를 마시는 것도 마지막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동후 부장님의 인도로 퇴계기념공원에 가서 「종매(種梅)」, 「종죽(種竹)」, 「투호(投壺)」 등 퇴계시 여러 편을 감상하고, 이어 이동한 교수님으로부터 활인심방 강의를 들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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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연수를 마치고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전국 각 지방에서 모인 교원들과 2박 3일간의 연수는 매우 재미있고 유익했다. 연령도 20대에서부터 60대 초반으로 다양하고, 직위도 교사에서 교육장이나 연구관등 고위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초중고는 물론 대학에 걸쳐 골고루 분포한 관계로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사고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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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안동에서 우리는 무엇을 체험할 것인가?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2003년 4월 20일(일) 오전 9시 17분, 대구법원 주차장 앞길에서 34명의 답사자를 싣고 선비의 고장인 안동으로 달렸다. 이재녕 부회장(대구 남구 문화원장)님께서 정성들여 만든 답사자료를 펼쳐들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중앙고속도로로 통하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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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안동인을 지탱하고 있는 정신은?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식사 후 포만감을 느끼며 18시 15분에 대구로 향하면서 나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보았다. ‘나는 안동에서 무엇을 체험했는가?’ 아니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깨달은 것은 ‘안동인을 지탱하고 있는 정신이 무엇인가?’라는 화두이다. 그저 오래된 목조 건축물을 보려고, 웅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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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문화유산을 계승하기 위한 필수 요건은?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대구로 향하는 버스가 장천 터널을 지날 무렵, 나는 다시 한번 오늘 답사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다. ‘문화유산을 계승하기 위한 필수 요건은 과연 무엇인가?’ ‘학봉 종택의 건재와 임청각의 퇴락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 것인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이건 간에 실력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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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머리말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분통가(憤痛歌)」는 향토 출신 독립지사 백하 김대락(白下 金大洛)의 작품이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그가 서간도로 망명하면서 1911년에서 1913년까지의 일기를 순 한문으로 양면괘지에 모필로 썼다. 1911년의 일기는 「서정록(西征錄)」이라 하였고 19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