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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에 대해 총652,310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 648801

    16일. 저녁에 흐림. 늦은 아침에 순천(順天) 관아로 가는 행차를 출발하여 저녁에 과천에서 묵었다. 이날 빈청에서 산릉의 택일(擇日)을 입계했다.【역사(役事)를 시작하는 날은 8월 2일, 발인은 10월 24일, 하현궁(下玄宮)은 같은 달 27일 축시(丑時, 오전
  • 648802

    17일. 흐리고 종일 비가 내림.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에 진위에서 묵었다. 다음 날 또 비가 크게 쏟아져 앞 내의 물이 불어 넘쳐서 건널 수가 없기에 그대로 진위에 머물렀다.
  • 648803

    19일. 저녁에 맑음. 늦게 출발하여 소사참에 도착했는데, 물에 막혀 그대로 묵었다.
  • 648804

    20일. 가끔 비가 내리고 가끔 맑음.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양천(兩川)을 건너 성환에서 점심을 먹었고, 무장현감(茂長縣監) 이유수(李儒修)와 강진현감(康津縣監) 이해청(李海淸)이 올라오는 행차를 만났다. 관아의 인편을 만났는데 그대로 서울에 보냈다. 저녁에 덕평참
  • 648805

    21일. 저녁에 흐림.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모루원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경천참에서 묵었다. 이날 공조참판(工曹參判) 박준원을 정경(正卿)으로 승진시켜 발탁하라고 하교했다. 정경(正卿): 조선시대 정2품 이상의 벼슬아치를 이르던 말이다.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 648806

    22일.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은진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은진현감(恩津縣監) 윤재급(尹載伋)을 만났다. 능기점(陵歧店)에서 말을 먹이고, 저녁에 삼례에서 묵었다. 은진현감(恩津縣監) 윤재급(尹載伋): 이때 은진 현감은 김세연(金世淵)이었고 윤재급은 한산군수(韓山郡守
  • 648807

    23일. 저녁에 전주에서 묵었는데, 들어가서 관찰사 김달순을 만났다. 관아의 인편을 만나 서울로 전송(轉送)했다.
  • 648808

    24일. 종일 비가 내림.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노암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오수(獒樹)에서 묵었다.
  • 648809

    25일. 가끔 비가 내리고 가끔 맑음.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남원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이방(吏房)이 관아에서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에 곡성에서 묵었는데, 현감 정창기가 와서 만났다. 이날 대비전의 하교로 인해 혼궁(魂宮)을 선정전(宣政殿)으로 했다.
  • 648810

    26일. 가끔 비가 내리고 가끔 맑음.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잔수(潺水)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송원에서 묵었는데, 수교(首校)가 광양(光陽)에서 병부를 가지고 왔다. 잔수(潺水): 잔수역(潺水驛)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오수 찰방(獒樹察訪)이 관할하는 11
  • 648811

    27일. 가끔 비가 내리고 가끔 맑음.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관아에 도착했다. 나는 당초에는 반드시 체직되려고 했으나, 임금의 상을 당한 후이기에 의리상 번거롭게 하기 어렵고, 또 선조(先朝, 정조)가 특명으로 임명하여 보낸 관직이므로 재촉하는 명에 의해 다시 임소
  • 648812

    28일. 서울 인편을 보냈다. 본 고을에 그 사이 비가 쏟아졌는데 빗물이 편중되어 무너진 곳이 많았다. 밥을 먹고 나서 남문 밖으로 나가 시내를 따라 조사한 후, 10여 호(戶)에 무상으로 미두(米斗)를 지급했다. 민의 소장이 19장이었다.
  • 648813

    29일. 원촌(遠村)의 무너진 곳 10여 호에 무상으로 미두를 지급했다. 민의 소장이 13장이었다. 서울 인편이 돌아왔다.
  • 648814

    30일. 인편을 통해 서울에 보내는 편지를 부쳤다. 민의 소장이 25장이었다. 이날 임금이 공제(公除)를 행했다. 이조판서 이병정의 체직이 허락되고 김재찬이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날 … 행했다: 공제를 마쳤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공제는 국상을 당하여 조의(弔
  • 648815

    8월. 1일. 새벽에 객사에 나아가 망곡례(望哭禮)를 행했다.【전패(殿牌)의 동쪽에 빈자리를 설치하고, 최복(衰服)을 갖추어 입고 자리에 나아가 엎드려 곡을 한 후에 사배(四拜)를 행하고 나왔다.】 떠내려가거나 무너진 호에 관한 일을 감영에 보고했다. 민의 소장이
  • 648816

    2일. 아침에 비가 내림. 민의 소장이 71장이었다. 이날 김조순이 병조판서에 제수되었고, 박준원이 장용사(壯勇使)가 되었다.
  • 648817

    3일. 선전관(宣傳官)이 병부를 바꾸는 일로 좌수영(左水營)에 가는데, 지나는 길에 와서 묵기에 나가서 만났다. 민의 소장이 21장이었다. 이날 산릉의 택일을 고쳐 입계했다.【역사를 시작하는 날은 8월 2일, 발인은 10월 3일, 하현궁은 같은 달 6일 진시(辰時,
  • 648818

    4일. 서울 인편을 보냈고, 구호적대장(舊戶籍大帳)의 연조(年條)를 썼다. 민의 소장이 22장이었다. 이날 차대(次對)를 행했는데, 대비전이 전교하기를, “대행조(大行朝, 정조)가 특별한 전교로 투비(投畀)한 김이재를 임금에게 여쭈어 결정할 부류에 넣은 것은 지극히
  • 648819

    5일. 구호적대장을 다 써서 창고에 넣었다. 민의 소장이 25장이었다. 선전관이 돌아가는 길에 들렀다.
  • 648820

    6일. 아침에 비가 내림. 선조(先朝, 정조)가 일찍이 『주서백선(朱書百選)』과 『아송(雅誦)』을 각 고을의 향교에 1건씩 하사했는데, 본부에 하사한 것 또한 5월 초에 내려왔으나 관아가 비었던 까닭에 미처 반포하지 못했다. 이날 배진(陪進)하여 향교에 봉안한 뒤에
  • 648821

    7일. 민의 소장이 93장이었다. 저녁에 사단(社壇)에 나아갔다가 그대로 잤으니, 내일 새벽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다.
  • 648822

    8일. 비가 내림. 새벽에 제사를 지내고 바로 돌아왔다. 민의 소장이 43장이었다.
  • 648823

    9일. 가좌성책(家坐成冊)을 와서 납부하기 시작했다. 민의 소장이 50장이었다.
  • 648824

    10일. 가좌성책을 구적(舊藉)과 대조했다. 민의 소장이 30장이었다. 서울 인편이 돌아왔다. 이날 산릉의 풀을 베고 흙을 파냈다. 대비전이 전교하기를, “공법(公法)은 굽힐 수 없고 사람들의 분노는 막을 수 없으니, 의관 심인은 즉시 그가 있는 지방에서 사형에 처
  • 648825

    11일. 가좌성책을 대조했다. 이날 차대를 행했는데, 영의정 심환지가 소대를 가까운 시일에 열 것을 계청하자, 임금이 “아뢴 대로 하라.” 했다. 이날 … 했다: 『승정원일기』와 『일성록』에는 8월 10일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 648826

    12일. 가좌성책을 대조했다.
  • 648827

    13일. 가좌성책을 대조하고, 서울 인편을 보냈다. 민의 소장이 7장이었다. 이날 대비전이 전교하기를, “소대를 가까운 시일에 해야 하는데, 옥당에 사람이 없어서 걱정이다. 파삭(罷削)된 사람을 서용(敍用)하고, 정사를 열어 차출하라.” 했다. 파삭(罷削): 관인을
  • 648828

    14일. 서울 인편이 돌아왔다.
  • 648829

    15일. 비가 내림. 새벽에 객사에 나아가 망곡례를 행했다. 묘시(卯時, 오전 5~7시)에 월식(月食)이 있어 관아의 문밖에 자리를 설치하고 구식(救蝕)을 했는데, 먹구름 때문에 달이 보이지 않았다. 이날 도목 정사(都目政事)에 임금이 친림(親臨)하고 자전(慈殿)이
  • 648830

    16일. 비가 내리고, 밤에 거센 바람이 붊. 민의 소장이 3장이었다.
  • 648831

    17일. 서울 인편이 돌아왔다. 민의 소장이 52장이었다. 이날 임금이 처음으로 소대에 나아가 『맹자(孟子)』 제1권의 ‘맹자견양혜왕(孟子見梁惠王)’부터 ‘이위대불역의호(以爲大不亦宜乎)’까지 진강(進講)했다. 옥당의 민명혁과 민기현(閔耆顯)이 참석했다. 대비전이 전
  • 648832

    18일. 인편을 통해 서울에 보내는 편지를 보냈다. 이날 임금이 소대에 나아가 ‘교린국유도(交隣國有道)’부터 ‘언능사여불우재(焉能使予不遇哉)’까지 진강했다. 옥당의 김희주(金熙周)와 민기현이 참석했다. 전교하기를, “이비(吏批)와 병비(兵批)에 허사과(虛司果)가 너
  • 648833

    19일. 본도(本道) 진향 제문(進香祭文)의 제술관(製述官)에 차출되어서 제문 76구(句)를 지어 편지를 써서 관찰사의 순행(巡行)이 도착한 곳으로 보냈다. 이날 소대에서 『맹자』 제2권의 ‘공손추문왈부자(公孫丑問曰夫子)’부터 ‘부족이사부모(不足以事父母)’까지 진강
  • 648834

    20일. 비가 내림. 서울 인편이 돌아왔다. 민의 소장이 45장이었다. 가좌성책을 다 받아서 대조를 마쳤다. 본부의 민호는 예전에 13,700여 호였는데, 항상 실호가 많이 누락되는 것과 비총(比摠)이 부족한 것이 근심이었다. 여기에 이르러 성책의 호수가 18,00
  • 648835

    21일. 민의 소장이 9장이었다. 이날 예조에서 아뢴 바로 인해 갑인년(1674년, 숙종 즉위) 대상(大喪) 때의 의절(儀節)에 따라 발인 때 대전(大殿)의 봉사(奉辭)는 돈화문(敦化門) 밖에서 하고, 반우(返虞) 때 지영(祗迎)은 성문 밖에서 하는 것으로 마련하도
  • 648836

    22일. 서울 인편을 보냈다. 민의 소장이 25장이었다.
  • 648837

    23일. 민의 소장이 26장이었다. 이날 김근순이 가자(加資)되어 승지가 되었으며, 이(李) 어른이 판의금부사에서 체직되었고, 아버님은 병을 사유로 사직 상소를 올리고 공무를 행하지 않았다.
  • 648838

    24일. 고을 민이 살인사건을 발고했는데, 고한(辜限)이 이미 지났기 때문에 검시(檢屍)를 하지 않고 관련된 여러 사람을 모두 잡아들여 진술을 받았다. 고한(辜限): 보고기한(保辜期限)의 준말로, 남을 상해(傷害)한 사람에 대하여 맞은 자를 치료해 주고 상처가 다
  • 648839

    25일. 서울 인편이 돌아왔고, 또 인편으로 서울에 보내는 편지를 보냈다. (살인사건에 관련된) 여러 사람에게 진술을 받는 것을 마치지 못했다. 광양현감 남성로(南省老)가 임기 만료로 체직되어 인신과 병부를 가져 왔는데, 원래 겸관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이날 김일
  • 648840

    26일. (살인사건에 관련된) 여러 사람에게 진술을 받는 것을 마쳤다. 이날 임금이 소대에 나아가 ‘맹자왈시인함인(孟子曰矢人函人)’부터 ‘구어제비아지야(久於齊非我志也)’까지 진강했다. 옥당의 김희주와 민명혁이 참석했다.
  • 648841

    27일. 신임 광양현감이 도임(到任)했기에 인신과 병부를 돌려보냈다. 자유(子牖)가 진안(鎭安)으로 가고, 뒤늦게 서울 인편이 내려와서 18일에 체직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살인사건 문안을 밤이 되어서야 완성하여 순영에 보내고 나서 행장을 꾸렸다. 자유를 뒤쫓아 갔
  • 648842

    28일. 중기(重記)를 수정하고 창고의 장부와 고창(雇倉)의 문서를 수정한 뒤에 각각의 해당 감관(監官)과 색리에게 다짐[侤音]을 받고 모두 신임 순천부사에게 보냈다. 이날 정사에서【이조참판 윤행임이 주관했다.】 정관(政官)이 해유(解由)를 제출하지 않은 수령도 구
  • 648843

    29일. 그믐. 인신(印信)과 병부를 광양에 보내고, 즉시 출발했는데 자유가 따랐다. 이날 차대를 행했다. 또 임금이 소대에 나아가 『맹자』 제4권의 ‘이루지명(離婁之明)’부터 ‘차지위대효(此之謂大孝)’까지 진강했다. 옥당의 김희주와 박종순이 참석했다. 경상도관찰사
  • 648844

    9월. 1일. 북창에 도착하여 인편을 통해 서울에서 보낸 편지를 받았다. 고을 민이 모여 술과 안주를 가지고 전송하여 섭섭한 마음을 다했는데, 1년 동안 부사를 하면서 민에게 실질적으로 미친 은혜가 없어 부끄럽다고 답하고, 사양하여 보냈다. 잔수에서 점심을 먹고 저
  • 648845

    2일. 소나기가 내림. 일찍 출발하여 10리를 가서 순자진(鶉子津)을 건너 자유를 진안으로 보냈다. 강을 따라 50리를 올라가서 순창(淳昌)에 도착하여 들어가 관찰사를 뵈었는데, 고을의 일을 부탁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시 출발하여 50리를 가서 저녁에 갈담점(
  • 648846

    3일. 일찍 출발하여 50리를 가서 염암(鹽巖)에서 점심을 먹고, 40리를 가서 저녁에 전주에서 묵었다. 이날 정사에서 민기현이 부수찬이 되었다. 임금이 소대에 나아가 ‘맹자왈백이(孟子曰伯夷)’부터 ‘불청즉거(不聽則去)’까지 진강했다. 옥당의 김희주와 박종순이 참석
  • 648847

    4일. 인배(引陪) 최광세(崔光世)가 유지(有旨)를 받들고 내려와서, 공경히 받은 후에 선문(先文)을 발송하여 역(驛)의 말과 마부가 왔다. 늦은 아침에 출발하여 능기점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여산에서 묵었는데,부사(府使) 김형주(金衡柱)가 와서 만났다. 청주 영장
  • 648848

    5일. 일찍 출발하여 은진에서 점심을 먹고, 충청도관찰사의 순행이 도착한 곳에 편지를 써서 보냈다.【일찍이 어사(御史)가 되었을 때, 바로잡고자 했으나 미처 하지 못한 몇 가지 일을 바로잡도록 부탁했다.】 저녁에 경천참에서 묵었으며, 서울 인편을 보냈다. 이날 소대
  • 648849

    6일. 일찍 출발하여 소포(小浦)에 도착해 전 직산현감(稷山縣監) 한복연(韓復衍)에게 들러서 만났다. 일신참(日新站)에서 점심을 먹고 진사(進士) 신대집(申大集)에게 들러서 만났으며, 저녁에 광정참(廣庭站)에서 묵었다. 이날 재궁의 결과(結裹)에 임금이 친림하여 대
  • 648850

    7일. 일찍 출발하여 천안에서 점심을 먹고, 부토리(富土里) 산소(山所)에 들러 배알했다. 전 부안 현감이 상경하는 행차를 만나 저녁에 성환에서 함께 묵었다. 이날 임금이 소대에 나아가 ‘무혹호왕지부지(無或乎王之不智)’부터 ‘종역필망이이의(終亦必亡而已矣)’까지 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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