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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고창정(高唱亭)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풍산현(豊山縣) 남쪽 1리 쯤에 있다. 들에 임하여 아주 높다. 옛 늙은이들이 전하기를 “신라(新羅) 말에 섬의 오랑캐들이 자주 와서 고을사람들에게 도적질을 하니 들에 일하러 가는 사람들이 사람을 시켜 정자에 올라 바라보다가 만약에 오면 높은 소리로 크게 고함치게 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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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천당정(泉堂亭)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풍산현(豊山縣) 남쪽, 화산(花山) 서쪽 기슭에 있다. 서쪽으로는 옥연(屋淵)에 임하였고 북으로는 학가(鶴駕)를 바라본다. 큰 괴수(槐樹)가 있는데 사간(司諫) 안팽명(安彭命)이 그 아래에서 독서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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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어락정(魚樂亭)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풍산현(豊山縣) 남쪽, 화산(花山) 동쪽 기슭, 곡강(曲江)위에 있다. 효자 김세상(金世商)이 지은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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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삼귀정(三龜亭)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풍산현(豊山縣) 서쪽, 금산리(金山里) 동네 앞에 있다. 현감 김영전(金永詮)이 지은 것이다. 현액은 용재(慵齋) 이종준(李宗準)의 글씨이다. 임진년 난리에 불타서 두 칸이 허물어지니 조도사(調度使) 김상준(金尙寯)이 다시 수리하였다. 성현(成俔)의 기(記)에 상사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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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침류정(枕流亭)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풍산현(豊山縣) 서쪽 구담촌(九潭村)에 있다. 김수한(金粹澣)이 지은 것이다.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의 싯구가 있어 말하기를 벼랑을 굽어 보면 고기와 자라를 세일 수 있고 하늘을 쳐다보면 북두칠성 잡을 수 있네 라고 하였다. 장옥(張玉)의 시 하늘과 사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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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긍구당(肯構堂)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풍산현(豊山縣) 서쪽, 상암(床巖) 북쪽 언덕에 있다. 안순(安洵)이 지은 것이다. 지금은 다만 터만 남았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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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선지정(先志亭)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풍산현(豊山縣) 서쪽, 종연(鍾淵) 북쪽 기슭에 있다. 관찰사 김연(金緣)이 항상 늙어 물러나서 정자를 지으려다 이룩하지 못하였는데 그의 아들 생원 부의(富儀)가 정자를 짓고 인하여 선지(先志)로써 이름하였다. 임진년에 적에게 불살라졌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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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삼경당(三徑堂)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감천현(甘泉縣) 서쪽 1리 쯤에 있다. 사인(士人) 윤창문(尹昌文)이 지은 것이다. 지금은 허물어져 터도 없어졌다. 윤창문의 시 흰 눈이 내릴 때 높은 집 새로 짓고 새 길을 힘써 자그맣게 하니 먼 그리움이 있네. 턱을 괴고 매양 하늘에 이은 산봉우리 헤아리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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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환수정(環水亭)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내성현(柰城縣) 앞에 있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졌다. 이우(李堣)의 기(記)에 내성은 현(縣)이 작고 부(府)에서 멀며 또 영주(榮州)와 봉성(奉城)사이에 끼었다. 땅은 다하여도 길은 궁벽하여 손님이나 나그네가 일이 긴급하지 않으면 오는 사람이 드물다. 그러므로 부(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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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청암정(靑庵亭)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내성현(柰城縣) 북쪽 6리 권충정공(權忠定公) 집 앞 바위 돌위에 있다. 충정공이 처음 지은 것이다. 시내를 끌어 못을 만들고 세 면을 부용꽃으로 둘러싸니 심히 성대하다. 퇴도(退陶) 선생의 시 우리 공(公)께서 평소에 깊은 가슴 안고서 지팡이 기대니 아득히 하늘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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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읍호(邑號)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고타야(古陀耶), 고창(古昌), 창녕(昌寧), 일계(一界), 지평(地平), 화산(花山), 고령(古寧), 고장(古藏), 석릉(石陵), 능라(綾羅), 안동(安東), 영가(永嘉), 길주(吉州), 복주(福州).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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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석천정(石泉亭)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내성현(柰城縣) 삼계(三溪)위에 있다. 지경이 맑고 그윽하고 바위돌이 기묘한 경치이다. 권동보(權東輔)가 지은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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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송암정(松巖亭)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내성현(柰城縣) 토곡(吐谷)서쪽 기슭에 있다. 권동미(權東美)가 지은 것이다. 연못이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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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외영당(畏影堂)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내성현(柰城縣) 서쪽 호평(虎坪)에 있다. 진사 이홍준(李弘準)이 지은 것이다. 이우(李堣)의 시 내가 있으면 곧 형체가 있고 그림자 나뉘어지니 형체도 둘이 된다. 음과 양은 바뀌어 은은히 나타나고 움직임과 고요함은 서로 놓지 못하구나. 날마다 씀에 백 가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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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취규정(翠虬亭)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내성현(柰城縣) 서쪽 9리 용담(龍潭) 의 절벽 위에 있다. 참봉 임흘(任屹)이 지은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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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곽(城郭)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읍성(邑城) 돌로써 쌓았다. 둘레가 2,947자이고 높이가 8자이다. 안에 우물 열여덟, 도랑 둘, 못 다섯 개가 있다. 평화스러워 허물어져도 수리하지 않았는데 만력(萬曆) 임진년(1592)에 부사 정희적(鄭熙績)이 조정의 명령으로써 네 성(城)을 보축(補築)하니 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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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향교(鄕校)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안동부(安東府)의 성북(城北) 자좌오향(子坐午向)에 위치(位置)하였으며, 주악(主嶽)이 단엄(單嚴) <HXMLSUP ID="001"></HXMLSUP>하고, 문필봉(文筆峯)을 정면(正面)으로 대하고 있다. 대성전(大成殿) 구칸(九間). 퇴계(退階)간 길이 사십팔척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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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단묘(壇廟)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사직단(社稷壇) 안동부 서쪽 2리 향사당(鄕射堂) 뒤에 있다. 단하(壇下)에 위판묘(位版廟)가 있다. 여단(厲壇) 안동부 북쪽 5리 이봉(貽峯) 북동(北洞)에 있다. 성황사(城隍詞) 안동부 동쪽 6리에 있다. 삼공신묘(三功臣廟) 안동부에 있다. 여조통합삼한벽상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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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강서원(廬江書院)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안동부의 동쪽 여산촌(廬山村)에 있는데 곧 백련사(白蓮寺)의 구기(舊基) <HXMLSUP ID="001"></HXMLSUP>이다. 만력(萬曆) 을해(乙亥)년에 창건하였으며 병자(丙子)년 봄에 증영의정문순공퇴도이선생(贈領議政文純公退陶李先生)을 봉안하였다. 묘(廟) 육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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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각현 연혁(各縣 沿革)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임하현(臨河縣) 본디 고구려의 굴화군(屈火郡)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곡성군(曲城郡)으로 고쳤는데 고려 초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顯宗)때에 본부(本府)에 예속되었다. 길안현(吉安縣) 본디 길안부곡(吉安部曲)인데 고려 충혜왕(忠惠王)때에 승격시켜 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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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삼계서원(三溪書院)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내성현(柰城縣) 북쪽 사현리(沙峴里)에 있는데 만력(萬曆) 기축(己丑)년에 창립되었다. 간좌 곤향(艮坐 坤向)이며 묘당이 삼 칸이며, 퇴주(退柱)가 삼칸인데 충정공묘(忠定公廟)라 한다. 명륜당(明倫堂) 사칸, 협실(夾室) 이 칸반, 동재(同齋) 삼 칸, 서재(西齋)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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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병산서원(屛山書院)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본래 풍악서당(豊岳書堂)은 화산과 병산(屛山)의 사이에 있다. 절벽(絶壁)을 대하고 장연(長淵)을 임해서 가장 기절(奇絶)하다. 만력(萬曆) 임진(壬辰)에 적병(賊兵)이 불태운 바 되었으며, 을사년(乙巳年)에 남강(南崗)의 자좌 오향(子坐午向)의 기지(基地)로 이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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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당(書堂)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풍악서당(豊岳書堂) 풍산현(豊山縣) 북쪽 일리(一里)에 있다. 가정(嘉靖) 계해(癸亥)에 창립(創立)되었는데, 생원(生員) 권경전(權景絟) 등이 상소하여 이에 학전(學田)을 하사(下賜)받고, 그 후에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원(院)이 노방(路傍)에 있어 장수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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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향사당(鄕射堂)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부성(府城)의 서쪽 2리쯤 되는 곳에 있는데 그곳은 법상사(法尙寺)의 옛터이다. 당(堂)은 5영(楹) 집인데 당의 동쪽에는 단(壇)을 쌓고 향사당과 편평하게 하였다. 봄 가을로 강신(講信)과 향사음주례(鄕射飮酒禮) <HXMLSUP ID="001"></HXMLSUP>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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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향규구조(鄕規舊條)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부모를 따르지 않는 자, 조부모(祖父母)나 백(伯)ㆍ숙부모(叔父母)에게도 같다. 형제간에 싸우는 자, 형이 옳고 아우가 그르면 아우만을 다스리고 형이 그르고 아우가 바르면 형제를 함께 벌한다. 행실이 부정하여 좋은 풍속과 가르침을 해치는 자. 위와 같은 자는 영구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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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정십조(新定十條)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향임을 중히 여긴다. 향중(鄕中)에서 나이와 덕망있는 이를 추대하여 좌수(座首)를 삼고 조행있는 세 사람으로 별감(別監)을 삼되 향안(鄕案)에 오르지 않은 사람은 뽑지 않는다. 향임을 뽑을 때는 먼저 공론에 따라야 하며 사사로운 정실에 이끌려 잘못된 사람을 임명하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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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복호소(復號蔬)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의서습독관봉직랑(醫書習讀官奉直郞) 안몽열(安夢說), 이정회(李庭檜) 등이 말씀을 올립니다. 엎드려 생각컨데 신(臣) 등이 사는 안동부(安東府)는 지난 병자년(丙子年 : 1576)에 적자(賊子) 신복(申福)이 그 어미를 죽인 일로 현(縣)으로 강등되었습니다. 이제 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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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군기(軍器)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활 209개, 긴화살 162부 4개, 짧은 화살 204부, 깃 화살 4개, 귀뚫은 화살 4개, 묘도(苗刀) 3, 삼도(芟刀) 3, 참도(斬刀) 2쌍, 유쟁(鍮錚) 3, 소고(小鼓) 4, 삼지창(三枝槍) 3자루, 나팔(喇叭) 3자루, 대요령(大搖鈴) 1, 제금(蹄金)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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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역원(驛院)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안동문화원안기도(安寄道) 부(府)의 서북 5리에 있으며 찰방(察訪) 1인이 있다. 속역(屬驛)이 10개 있는데 철파(鐵破)ㆍ금소(琴召)ㆍ송제(松蹄)ㆍ청운(靑雲)ㆍ문거(文居)ㆍ화목(和睦)ㆍ각산(角山) ㆍ영양(寧陽)[옛이름은 소양(蘇陽)이다. 옛터는 본역의 남쪽 신당골(新堂洞)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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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우리 안동에는 선사이래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는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적 전통과 역사적 흔적들이 남아 있으며 그 전통과 흔적들이 지금 안동의 역사적 위상과 성격을 규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국가 통치이념으로 성리학이 채택되면서 우리 안동은 명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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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정척사운동과 영남만인소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1) 위정척사운동 1800년대 중반에 들어 우리 사회는 나라 안팎으로 심각한 변화에 직면하였다. 안으로는 세도정치(勢道政治)의 폐단이 부정적인 영향으로 나타났고, 밖으로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이 무너졌던 것이다. 세도정치란 소수 세력에 의해 펼쳐진 장기 독재정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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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안동지방 독립운동과 퇴계 학통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안동지방 독립운동사의 특성은 뭐니뭐니해도 학통성이 강하다. 그것도 퇴계 학통의 연장선상에서 펼쳐졌다고 말해야 정확한 표현이 된다. 첫째, 의병항쟁은 안동유림들이 여러 서원에서 통문이나 격문을 발송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리고 유림대표자들의 회의에서 의병항쟁을 결의하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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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승방안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1) ‘보수’라는 안동의 이미지를 바꾸는 작업 ‘안동’이라면 누구나 유교문화권의 핵심적인 지역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보수적인 역사의 표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말과 일제강점기에 펼쳐진 독립운동사를 통해서, 보수적이라는 평가가 지극히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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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극복할 과제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안동지방 독립운동사를 살펴보노라면, 현재 우리가 반드시 극복해야 할 세 가지 과제를 느끼게 된다. 첫째, 퇴계학통의 생명을 21세기에도 이어지게 하는 인식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퇴계학통에 관한 연구발표나 행사에서 주제로 삼은 시기가 대체로 18세기를 넘어서기 힘들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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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료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1) 문집류 『起巖遺稿』(李中業) 『東邱遺稿』(李濬衡) 『東山全集』(柳寅植) 『碧山先生文集』(金道鉉) 「碧山先生倡義顚末」(金道鉉) 『西山全集』(金興洛) 『西坡集』(柳必永) 『石洲遺稿』(李相龍) 『石洲遺稿』 後集(李相龍) 『星臺集』(權世淵) 「乙未義兵日記」(李肯淵)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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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단행본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권준호, 『미리 써두는 碑銘』, 바다, 1992. 김상기, 『한말의병연구』, 일조각, 1997. 김을동, 『안동판 독립사』, 1985. 김중섭, 『형평운동 연구』, 민영사, 1990. 김진화, 『일제하 대구의 언론연구』, 화다출판사, 1978. 남부희, 『유림의 독립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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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논문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강정숙, 「일제하 안동지방 농민운동에 관한 연구」, 『한국근대농촌사회와 농민운동」, 열음사, 1988. 고숙화, 「‘예천사건’을 통해 본 일제하의 형평운동」, 『수촌박영석교수화갑기념 한민족독립운동사논총』, 1992. 권대웅, 「금산의진고 -1896년 경상도 서북부지방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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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안동 출신 독립운동 포상유공자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HXMLPIC ID="001"></HXMLPIC> <HXMLPIC ID="002"></HXMLPIC> <HXMLPIC ID="003"></HXMLPIC> <HXMLPIC ID="004"></HXMLPIC> <HXMLPIC ID="005"></HXMLP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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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학농민 운동·갑오개혁과 안동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1) 동학농민운동과 안동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반봉건·반침략의 깃발을 들고 농민운동이 발발하였다. 농민운동의 발생은 당시 부패한 정부의 착취와 개항 이후 전라도 지역으로 유입되는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조선정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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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갑오의병의 이념과 항쟁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1) 갑오의병의 봉기원인과 이념 한국독립운동은 이 책머리에서도 밝힌 것처럼 1894년부터 1945년까지 약 51년간 전개되었다. 이 가운데 첫 장을 장식하는 활동이 바로 의병항쟁이다. 의병항쟁은 1894년에 시작되어 1918년 말, 즉 3·1운동 직전까지 펼쳐졌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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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을미의병의 봉기원인과 이념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1895년 8월 명성황후 시해사건인 을미사변을 비롯하여 을미개혁까지 일련의 정치적 변동을 묶어서 을미정변이라고 말한다. 1894년 갑오년에 일본이 일으킨 청일전쟁은 우리 강토를 쑥밭으로 만들었고, 백성들의 생활도 어렵게 만들었다. 곳곳에서 일본군들이 약탈을 자행하였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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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안동의병의 봉기와 안동부 점령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안동에서 갑오의병에 이어 다음해인 1895년(을미) 말에도 의병이 일어났고, 1896년(병신)까지 이어졌다. 의병이 비록 다음 해까지 이어졌지만, 일반적으로 이를 을미의병이라 일컫는다. 이 의병의 직접적인 계기는 일본에 의해 자행된 명성황후 살해사건(1895.8.20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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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의병전투와 관군·일본군의 안동부 장악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안동부는 의병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그러자 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은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의병이 일어난 날 밤에 안동부를 탈출하였다. 원래 관찰사는 의병 봉기의 움직임이 있자, 대구부에 연락을 취해 일본군의 지원을 요청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의병이 봉기하고 곧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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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안동의병의 반격과 안동부 탈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안동의병은 그냥 당할 수만은 없었다. 의병장 권세연을 중심으로 다시 재기에 나섰다. 의진을 수습하고 안동부를 다시 공격하고자 나선 것이다. 여기에 예안과 예천 등 인근의 읍에서도 의병이 결성되고 이에 합세하고 나섰다. 1896년 2월 16일(음 1.4) 선성의진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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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내며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필자는 어느 자리에서 안동이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성지’라고 생각하고, 이를 기리기 위해 기념관이 세워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말에 안동을 말할 때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어느 교수가 앞도 뒤도 가리지 않고 ‘과대평가’하지 말라고 내뱉았다. 졸지에 필자는 상식도 없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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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의병장 교체와 의병항쟁 전개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의병장 권세연이 갑자기 사퇴하였다. 그는 3월 12일(음 1.29) 4·50여명의 향원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향회에 단자(單子)를 보내 자신의 사퇴의사를 전했다. 권세연은 자신이 대장에 추대되어 안동부를 접수한 직후였던 1월 29일 전투에서 패한 일을 들어 자신을 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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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연합의진의 편성과 태봉전투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안동의진과 선성의진은 우선 태봉의 일본 병참부대를 공격의 목표로 삼고 이를 위하여 서상렬의병을 비롯한 인근의 의병들과의 연합을 시도하였다. 호좌의진의 서상렬은 3월초에 원용정(元容正)·홍선표(洪璇杓) 등을 대동하고 영남지역으로 들어왔다. 3월 10일에 안동에 도착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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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일본군의 안동부 방화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29일 밤에 의병들은 대체로 예천으로 후퇴하였다가 출신지에 따라 흩어졌다. 호좌의진은 예천 경진교(京津橋; 서울나들이) 근처에서 다시 싸울 계책을 마련한다고 했지만, 안동의진은 예천을 거쳐 안동으로 후퇴했고, 예안의진은 학가산을 거쳐 예안으로 돌아갔다. 안동의진은 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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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의병의 제기와 고난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안동의병은 일본군이 물러난 후 의진을 다시 갖추고 재항전을 준비하였다. 4월 3일(음 2.21) 안동부내를 떠난 의병진은 우선 본부를 개목골짜기(介木谷; 용상동 안동댐 역조정지댐)으로 옮겼다. 4월에서 5월초 사이에 척암은 안동 주변에 의진을 주둔시키면서 활약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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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안동의진의 해산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안동의진은 태봉전투 패전 이후, 특히 안동이 불바다가 된 이후에 인적 물적 지원의 부족으로 혹독한 시련에 부딪쳤다. 그러다가 장마를 거치면서 점차 의진을 운영하는 데 한계를 보였다. 의병장 김도화가 안동의 대표적인 지도자인 김흥락이나 하회 유씨 문중, 그리고 이 지역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