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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후기 의병과 안동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중기의병으로 구분되는 시기는 1904년부터 1907년 7월말까지이다. 중기의병은 러일전쟁 발발(1904.2.8, 일본 선전포고; 2.10)을 계기로 강제 체결된 한일의정서와 제1차 한일협약에서 비롯되었다. 이들 조약으로 조선은 준식민지 상태로 떨어져 갔다. 이에 항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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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제의 국권침탈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1) 대한제국의 성립과 광무개혁 1896년 2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면서 친일내각이 붕괴되고 이에 일본의 내정간섭이 일단 주춤해지자, 전국으로 확대되었던 의병운동도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일제와 개화파 관료들이 퇴진하고, 고종이 의병의 해산을 권유하면서 적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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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계몽운동으로의 전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한말 보호국 치하에서 국권회복운동은 무장투쟁노선으로서의 의병항쟁과 실력양성운동노선으로서의 계몽운동으로 나뉘어 전개되었다. 그런데 1896년 10월 이후 사라졌던 의병들의 반일운동이 러일전쟁을 계기로 하여 다시 촉발되었다. 이 시기 의병전쟁은 일제의 침탈을 직접적으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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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충의사(忠義社)와 재경인사들의 활동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19세기 말 중앙에서 지식인들 사이에 서구사상과 학문, 기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실력양성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하였을 때, 안동을 비롯한 경상도 지역에서는 중앙의 새로운 경향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척사상소운동과 의병항쟁이 그 시기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강하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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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간사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안동은 역사적으로 많은 이야기꺼리를 안고 있는 고장이다. 고려왕조의 건국에 이바지한 이래 어느 지방에 못지 않게 역사의 주목을 받아온 안동이다. 안동이란 지명을 갖게된 이유가 바로 그러한 역사를 대변해 주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안동문화’라고 하는 문화권을 형성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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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협동학교와 교육구국운동의 전개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안동지역에 근대교육이 시작된 것은 1907년에 설립된 협동학교였다. 그렇지만 이보다 훨씬 앞선 1896년에 안동지방에도 근대교육을 지향하던 학교가 존재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계몽운동 차원의 신교육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정부가 신교육을 전국에 펼쳐나가려 해도 교사나 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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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교남교육회와 사립학교 설립운동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1900년대 초 안동의 재야 유생들 가운데 일부는, 이미 상경하여 활동하고 있던 재경관인 및 계몽적인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현실에 대한 인식을 확대시켰다. 뿐만 아니라 서양문화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 신서적을 읽거나 계몽운동단체에 관계하면서 사상적인 변화를 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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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대한협회 안동지회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1907년 11월 설립된 대한협회는 19세기 말 개화파의 명맥을 이은 일련의 정치운동과 대중계몽운동을 계승한 단체였다. 안동에 대한협회 지회가 설립된 때는 1909년 4월이었다. 대한협회 본회에서는 지방 유림들에게 협회에 가입할 것과 또 지방에서 지회를 설립할 것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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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항일 자정순국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를 반대하는 의열·순국투쟁이 잇달았다. 특히 1910년에 일제에 강점되자 전국적으로 자결하는 순국자가 줄을 이었다. 우선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이한응(李漢應;용인)·조병세(趙秉世;가평)·민영환(閔泳煥;서울)·김봉학(金奉學;황주)·이상철(李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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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제의 한국 강점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1874년에 대만을 공격한 일본이 다음 해 말 강화도에 함포사격을 해 왔다. 임진왜란 이후 약 200여 년 동안 쇄국정책을 펴던 일본이 또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제국주의를 구가하던 미국의 함포사격은 깊은 잠재의식 속에 깃들여 있던 일본의 침략성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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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일본 제국주의 식민지배는 경제적 수탈과 민족문화 말살이라는 두 가지 점에 초점이 두어졌다. 일제 강점기 동안 겉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한국을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지배하기 위한 정책에 전혀 변함이 없었다. 이런 기본 정책에 바탕을 두고 일제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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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행정구역 변경을 통한 일제의 행정 장악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1910년대 안동사회는 조선총독부의 행정 장악 정책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었다. 전통적으로 뭉쳐 있는 결속력을 부수는 일이 식민지 장악을 위한 지름길이라고 일제는 판단한 것이다. 때문에 총독부는 행정제도 개편에 나섰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점될 당시 우리 나라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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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설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안동은 독립운동의 성지(聖地)’이다. 이렇게 말을 던지면 누구나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을 자랑하는 말로만 받아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지방사를 서술하는 경우, 지방의 역사를 과대 포장하면서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하다는 식의 배타적인 논리를 펴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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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안동지방의 사회적 변화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안동지역은 전통적으로 토착세력이 강하게 자리잡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우선 혈연적인 면에서 많은 동족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다시 통혼권을 형성하여 친인척으로 연결되는 복잡하면서도 계층에 따라 뚜렷한 한계선을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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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토지조사사업과 안동지방의 경제적 변화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자마자 실시한 가장 큰 사업이 토지조사사업이었다. 1차 산업사회인 한국의 경제를 장악하는 지름길이 바로 토지를 차지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모든 토지 소유 현황을 신고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많은 농민들이 일제의 강점 자체를 부정하는 판국에, 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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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910년대 민족운동의 특성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1910년에 들면서 독립운동은 대한제국 멸망, 즉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조건에서 새 길을 찾고 있었다. 그 길은 앞서 전개된 의병항쟁과 계몽운동이라는 두 줄기의 연장선에서 펼쳐졌지만, 활동무대가 바뀌거나 성향의 차이로 또 새로운 길을 찾는 모습을 보였다. 의병항쟁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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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의병항쟁과 계몽운동의 합류모색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1) 양대 방략의 갈등과 합류 시도 의병항쟁이나 계몽운동은 모두 국권의 회복 또는 독립이라는 같은 목적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의 방략은 한 군데로 힘을 모으지 못하였다. 의병항쟁을 펼치던 인물들은 계ㄴ몽운동이 내세우던 “신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이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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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0년대 교육운동의 확산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우리 민족문화를 말살시키려는 일제의 정책의 중심축은 동화정책이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일제는 식민지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11년 ‘제1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면서 내세운 ‘충성되고 선량한 국민의 육성’이라는 목표는 식민지 통치기간 동안 줄곧 강화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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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민족교육을 위한 역사서의 편찬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국권을 상실하고 난 이후 국사를 연구하고 저술하는 그 자체가 독립운동이었다. 일제의 식민사관에 항거하고 민족정신을 가다듬게 만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앞장 선 대표적인 인물이 신채호·황의돈·박은식·계봉우·이상룡·김교헌·장도빈 등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해외로 망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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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민회와의 결속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나라가 무너진다는 판단이 서자, 안동지방의 독립운동 주역들은 새로운 장을 개척하고 나섰다. 서울의 소수 선각자들이 국가의 멸망을 피할 수 없는 사실로 깨닫기 시작하던 1905년쯤, 안동에도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1904년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변화 조짐이 1907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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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만주 망명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일찍이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만주로 진출하였다. 김구도 청국인과 연합의병을 추진하였고, 유인석이 이끌던 제천의 호좌의진도 그러했다. 이처럼 독립운동 세력들이 만주로 진출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만주는 우리 나라와 가장 가까운 곳이어서 장차 국내로 군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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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독립운동의 이해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친 시기의 세계 역사는 하나의 커다란 대립구도로 이해될 수 있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이라는 한 쪽과 이에 맞서는 아시아·아프리카의 구국운동과 독립운동이라는 다른 쪽이 부딪치는 구도였다. 침략국가들은 입으로 인도주의·인류공영을 소리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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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만주에서의 활동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안동 출신 인사들은 1911년 2월초에 만주 요녕성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 추가가(鄒家街)에 도착하였다. 그리고서 장차 많은 동포들을 이주시키고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기초를 마련하는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목적을 위해 결성된 조직이 바로 경학사(耕學社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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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1 운동의 배경과 계기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한민족의 저항은 1910년 일제 강점기에 들면서도 위축되지 않고 이어졌다. 국내 의병항쟁은 비록 규모가 작아졌지만 도심을 파고들거나 만주로 이동하여 독립군이 되었고, 계몽운동도 도시를 중심으로 확산해 나가거나 만주지역 독립군기지 건설에 눈에 띌만한 성과를 보이기 시작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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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1 운동의 발발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초기의 3·1운동 계획은 종교계와 학생들에 의해 각기 추진되었다. 일제는 한국 강점 직후 독립운동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정치성을 띤 모든 사회단체에 대해 강제해산 조치를 단행하였다. 따라서 그나마 조직과 단체를 유지할 수 있었던 세력으로는 사실상 종교계와 학생밖에 없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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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1 운동의 국내외 전개와 일제의 탄압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1) 3·1운동의 지방 확산 3·1운동은 3월 중순까지 국내만이 아니라 국외지역 동포사회에까지 확산되어 갔다. 국내의 경우는 전파되는 경로에 몇 가지 특성을 보였다. 첫째, 교통망에 따라 확산된 점이다. 철도 교통망을 따라 그 주변의 대도시로 퍼져 나갔고, 대도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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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1 운동의 역사적 의의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3·1운동은 ‘독립운동의 호수’, ‘독립운동의 분수령’이라 불릴 만큼 우리의 민족사는 물론 세계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먼저 3·1운동의 민족사적 의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3·1운동은 한민족의 주체적인 독립쟁취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대부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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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동면 시위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1) 시위의 발단과 1차 시위 안동의 3·1운동은 동경 유학생 강대극(姜大極)의 귀국과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재학생인 김재명(金在明)의 귀향으로 시작되었다. 강대극은 1919년 2월 16일에 ‘2·8독립선언서’라고 하는 「선언서」를 가지고 귀국하였다고 알려진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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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안·도산·동후면 시위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1) 예안면 1차 시위 안동지방에서 대규모 군중에 의해 최초로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은 예안이었다. 안동면에서 13일 이상동 한 사람에 의해 1차 시위가 있었지만, 예안은 대규모 군중에 의해 처음으로 시위가 전개된 곳이다. 예안시위의 발단은 고종인산에 참가했던 이동봉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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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안동지방 독립운동의 위상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1) 한국독립운동의 발상지가 안동이다. 독립운동사는 1894년부터 1945년까지 51년 동안 전개되었고, 그 가운데 첫머리를 장식한 것이 1894년 갑오년에 일어난 갑오의병(甲午義兵)이었다. 그런데 독립운동사의 출발점인 갑오의병이 일어난 곳이 바로 이곳 안동이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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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임동 · 임북면 시위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1) 임동면 시위 안동의 3·1운동은 21일이 되자 4개면(임동·임하·길안·일직)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이것은 18일의 안동면 의거가 각 지역에 자극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거사 주동자들의 사발통문이 신속히 전달된 결과이기도 하였다. 임동시위는 유동시(柳東蓍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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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임하 · 길안면 시위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1) 임하면 시위 임하면 3·1의거는 금소동의 임찬일(林贊逸)이 임범섭(林範燮)·임득연(林得淵) 등과 국장에 참가하고 독립선언서를 구해온 이후부터 모의되었다. 임찬일은 금양의숙(錦陽義塾)에서 수학한 후 고종 국장에 참례하기 위해 상경하여 봉도단에 가입하였다. 그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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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일직 · 풍남 · 풍산면 시위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일직면 시위는 21일 밤 11시에 망호동 솔밭에서 일어났다. 이구덕(李九德) 외에 5명이 앞장서서 주민 백여 명과 함께 만세를 벌인 것이다. 그러나 곧 주재소의 일본경찰이 와서 해산하였다. 이튿날 오후 6시에 이들이 다시 시위를 일으켰다. 이번에는 주도자인 이구덕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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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위 양상의 변화와 인명 피해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1) 전개 시기와 규모 안동의 만세시위는 3월 13일 안동면의 이상동 단독시위에서 27일 풍남면 하회 시위까지 모두 14회 펼쳐졌다. 안동면에 세 차례, 예안면에 두 차례 시위가 있었고, 17일에서 23일까지가 절정기였다. 시위 인원은 23명에서 3,000명에 이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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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위 주도 인물의 성격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1) 사회적 성격 유림세력이 단독으로 시위를 주도했던 지역은 예안면과 임동면 두 곳이다. 또 아주 작은 규모이기는 하지만, 예안시위 다음날 진성 이씨 집성촌인 도산면에서도 유림이 중심이 되어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것은 예안의 시위가 계속 확산되어 가는 것을 나타내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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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안동 3 · 1운동의 특성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전국적으로 3·1운동은 3월 1일부터 5월 7일까지 전개되었다. 경북지방은 3월 8일부터 4월 28일까지 시위가 전개되었는데, 3월 16일에서 25일 사이에 절정을 이루었다. 그런데 안동의 3·1운동은 바로 경북지방의 절정기에 해당하는 3월 13일부터 27일까지 15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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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파리장서(巴里長書; 유림단의거)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파리장서’는 3·1운동 직후에 일부 유림세력이 파리강화회의에 우리의 독립을 요구하는 긴 청원서[長書]를 보낸 일이다. 이후 1925,6년에 유림들에 의해 의열투쟁이 있었는데, 이것을 경북유림단의거(慶北儒林團義擧), 혹은 2차 유림단의거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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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안동지방 독립운동의 역사적 배경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안동지방이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활발한 모습을 보인 역사적 배경으로 다음의 몇 가지를 말할 수 있다. 첫째, 정치적인 배경으로 조선시대 후반기에 남인의 정치 행로가 막힌 뒤 학문생활에 몰입하면서, 안동지방 유림들이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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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제의 기만적 문화통치와 경제수탈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1) 문화통치의 기만성 3·1운동으로 우리 민족의 강인한 독립의지를 알게 된 일제는 ‘문화통치(文化統治)’라는 것을 들고나섰다. 이것은 강점 이후 펼친 무단통치가 잘못되어 3·1운동이 일어났다는 판단에서 나온 정책변화였다. 그러나 이 문화통치, 혹은 문화정치라는 것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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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20년대 안동 사회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1) 일제의 행정 장악 3·1운동 직후 일제가 택한 문화정치는 지방통치체제에서 헌병경찰제도를 보통경찰제도로 전환시켰다. 헌병경찰기관이 경찰기관과 헌병으로 분리되면서, 경찰기관은 도지사가 관장하면서 행정기관에 속하게 되었다. 군 단위 이하에서는 경찰서·주재소가 군·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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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20년대 민족운동의 특성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1920년대라 하면 1920년부터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독립운동의 기준에서는 그 흐름과 성경으로 볼 때 3·1운동 이후로 잡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익히 알고 있듯이 독립운동사에서 3·1운동은 분수령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독립운동의 인적·물적 자원이 확산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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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시정부 지원활동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1) 임시정부 지원활동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민족의 염원이었던 망명정부가 수립되었다. 당시의 대표적인 정부조직으로는 국내의 한성정부, 블라디보스톡의 대한국민의회,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였다. 이들 세 개의 정부 조직은 1919년 9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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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노동운동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1)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 1920년대 안동에서 노동운동이라는 말 자체가 낯선 것이었다. 그것이 안동만의 현상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그러했다. 더구나 안동에는 공업이 발달되지 않은 곳이었으므로 노동자 계층이 제대로 형성될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동에 노동단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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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년운동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1) 청년회의 결성과 문화활동 3·1운동은 대중의 힘을 보다 효과적으로 결집하고 아울러 계속적으로 항일이데올로기를 육성하기 위한 조직체의 필요성을 요구하게 되었다. 더욱이 민족의 장래를 책임져야 할 청년들의 수양과 훈련, 이들을 통한 대중의 계몽과 지도의 필요성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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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농민운동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1) 소작인회의 결성 1920년대 전반기의 농민운동은 노동운동과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고 같은 범주에서 이해되고 있었다. 빈농층이 농업노동자로 이해되고 있어서 아직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이 전문화되지 못하고, 빈농층이 농업노동자로 파악되고 있었던 셈이다. 대체로 북성회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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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성운동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안동지역의 여성운동은 안동여성회가 성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20년 안동부인회가 창립되었지만 두드러진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안동·예안기독면려청년회에서도 여성들이 활동하였지만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였다. 안동여성회는 안동면을 중심으로 안동유치원의 보모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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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유림의 2 · 3차 독립청원과 경북유림단의거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1919년 3·1운동 직후 유림이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긴 글[長書]을 보낸 것은 이미 앞에서 이야기했다. 그런데 유림들은 파리장서에서 투쟁을 끝낸 것이 아니라 거듭해서 독립청원서를 국외로 보내려고 계획을 세웠다. 1920년 11월 예안의 기암 이중업(起巖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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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신간회 안동지회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3·1운동후 일본의 유화적인 민족분열정책으로 좌우의 민족운동은 모두 위기에 봉착하였다. 우파민족주의 인사들의 실력양성운동은 타협주의라는 비난을 받았고, 공산주의자들은 1926년의 6·10만세운동을 계획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그 조직이 거의 붕괴되다시피 하였다. 이러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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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재경 안동인의 민족운동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1) 민립대학설립운동 1920년대 초에 들면서 우리 손으로 우리 민족을 위한 대학을 설립해 보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한말에 이미 시도된 적이 있었던 이 운동은 일단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주저앉은 일이 있었다. 그러다가 3·1운동 이후 물산장려운동과 함께 민립대학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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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국외 안동인의 민족운동 / 유교문화>지역간행물 / 김희곤(1) 만주지역의 민족운동 안동 출신 인물들이 국외로 나가서 벌인 독립운동은 그 어느 지역 출신 보다 대단한 것이었다. 협동학교와 대한협회 안동지회, 교남교육회 안동지회 등을 통해 구국운동에 전념하던 이상룡와 유인식 그리고 김동삼 등은 1910년에 나라를 잃게 되자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