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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에 용담군 북면에 사는 정의준이 작성한 신호적 / 丁義俊 / 19041904년(광무 8)에 용담군 북면 괴정리에 사는 정의준(54)이 작성한 신호적다. 그는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아내 남원양씨와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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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에 진안현 두미면에 사는 신국진이 작성한 신호적 / 辛國振 / 19021902년(광무 6)에 전라북도 진안군 두미면 고암리에 사는 신국진(41)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그는 농사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아내와 남동생과 제수와 함께 살고 있었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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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에 정읍군 북면에 사는 김영석이 작성한 신호적 / 金永錫 / 19021902년(광무 6) 1월에 정읍군 북면 와룡리에 사는 김영석(56)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당시 김영석 아내 이씨와 함께 세 칸짜리 초가에서 살았다. 직업은 농업이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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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에 강진군 열수면에 사는 김석원이 작성한 신호적 / 金錫瑗 / 19001900년(광무 4)에 전라북도 강진군 열수면에 사는 김석원(65)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김석원은 아들 부부를 데리고 동갑내기 아내 박씨와 함께 살았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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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에 순창군 금동면에 사는 조만표가 작성한 신호적 / 趙萬杓 / 1898"1898년(광무 2)에 순창군 금동면 청룡리에 사는 조만표(35)가 작성한 호적표이다.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양식과는 다른 것으로 이런 것을 신호적이라고 부른다. 신호적에서는 호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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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년에 김연갑이 임담에게 작성해 준 전답매매문서 / 金延甲 / 17921729년(영조 5)에 金延甲이 林?에게 논을 팔면서 작성해 준 매매문서이다. 임담은 처가에서 물려받은 순천 월등면 도리산평에 있는 논 3두락을 30냥을 받고서 팔았다. 이때 본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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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에 고성군 하3면에 사는 배동순이 작성한 신호적 / 裵東淳 / 1904"1904년(광무 8)에 고성군 하3면 월아리에 사는 배동순(40)이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신호적이다. 신호적은 갑오개혁 이후에 만들어진 문서로 조선시대의 호구단자와 비슷하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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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에 김제군 부량면에 사는 선방학이 작성한 신호적 / 宣邦鶴 / 1898"1898년(광무 2)에 부량면 신양리에 사는 유학 선방학(46)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당시 그의 직업은 농업이었으며, 아내 전씨(45세)와 함께 홀로 된 고령의 아버지를 모시고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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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연간에 운봉군 읍남면에 사는 박부춘이 발급한 신호적 / 朴富春 / NULL"광무년간에 운봉군 읍남면에 사는 박부춘(46)이 발급한 신호적이다. 박부춘은 40세의 아내 나씨, 그리고 9세된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문서번호 14136과 박부춘의 나이는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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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에 진안현 두미면에 사는 신국진이 작성한 신호적 / 辛國振 / 19011901년(광무 5)에 전라북도 진안군 두미면 고암리에 사는 신국진(45)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그는 농사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아내와 동생 내외와 슬하의 두 자식과 고용인 한명과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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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에 진안현 두미면에 사는 신국진이 작성한 신호적 / 辛國振 / 1904"1904년(광무 8)에 전라북도 진안군 두미면 고암리에 사는 신국진(48)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그는 농사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아내, 동생 내외, 17세인 아들과 함께 살고 있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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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에 만경군 남이면에 사는 최인홍이 작성한 신호적 / 崔寅洪 / 1901"1901년(광무 5)에 전라북도 만경군 남이면 고현리에 사는 최인홍(52)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그는 아내 이씨와 함께 어머니를 봉양하였으며, 아들을 하나 데리고 있었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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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에 진안현 두미면에 사는 신국진이 작성한 신호적 / 辛國振 / 1902"1902년(광무 6)에 전라북도 진안군 두미면 고암리에 사는 신국진(46)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그는 농사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아내, 동생내외, 15세인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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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에 금구군 낙양면에 사는 허영이 작성한 신호적 / 許泳 / 19061906년(광무 10)에 전라북도 금구군 낙양면 장평리에 사는 허영(55)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이 신호적를 보면 부는 나오지 않고 생부 원이 있으나 양자 간 사실은 찾을 수가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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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연간에 김제군 신양리에 사는 선방준이 작성한 신호적 / 宣邦俊 / NULL광무연간에 김제군 부량면 신양리에 사는 선방준(65)이 제출한 신호적이다. 그의 직업은 농업이었으며 3칸의 초가에서 아내 유씨 및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작성년도는 기재되어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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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에 부안군 상서면에 사는 서용선이 작성한 신호적 / 徐龍璇 / 18981898년(광무 2)에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가오리에 사는 서용선(55)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그의 직업은 농부였으며 아내 강씨와 함께 초가집에서 살고 있었다. 호적에 이처럼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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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에 김영락이 작성한 전답매매문서 / 金永落 / 1890"1890년(고종 27) 2월 2일에 유학 김영락이 작성한 논 매매문서이다. 그는 삼거촌 앞에 있는 거자답 3두락지를 90냥에 팔았다. 매매사유는 긴하게 돈을 쓸 데가 있어서라고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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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에 만경군 이도면에 사는 최도열이 작성한 신호적 / 崔道烈 / 1903"1903년(광무 7)에 전라북도 만경군 하이도면 고사리에 사는 최도열(34)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그는 아내 곽씨와 함께 어머니를 봉양하였으며, 아들을 하나 데리고 있었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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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에 만경군 이도면에 사는 최준열이 작성한 신호적 / 崔俊烈 / 1903"1903년(광무 7)에 전라북도 만경군 이도면 고사리에 사는 최준열(67)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그는 아내 백씨와 두 아들, 그리고 큰 며느리, 손자 둘과 함께 살고 있었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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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에 보성군 봉덕면에 사는 염종현이 작성한 신호적 / 廉琮鉉 / 1903"1903년(광무 7) 2월에 전라도 보성군 봉덕면 양지동에 사는 염종현(54)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당시 염종현은 농사를 짓고 있었으며, 아내와 아들 부부 등 4명이 초가로 지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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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에 용담군 북면에 사는 윤유인이 작성한 신호적 / 尹裕仁 / 1904"1904년(광무 8)에 용담군 북면 괴정리에 사는 윤유인(35)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그는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5칸짜리 초가에서 아내 순흥안씨와 함께 살고 있었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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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에 태인군 동촌면에 사는 최규선이 작성한 신호적 / 崔圭善 / 1904"1904년(광무 8)에 全羅北道 泰仁郡 東村面 栢川里에 사는 崔圭善(24)이 작성한 호적표이다. 최규선의 직업은 유업으로 부인과 아들 하나와 함께 살고 있었다. 한편 이 문서의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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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에 만경군 일도면에 사는 노상천이 작성한 신호적 / 魯相千 / 18981898년(광무 2)에 전라북도 만경군 일도면 응하리에 사는 노상천(52)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그는 홀아비로 아들 며느리와 어린 손자 등과 함께 살고 있었다. 직업을 ‘幼學 儒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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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에 진안군 두미면에 사는 신복렬이 작성한 신호적 / 辛卜烈 / 19071907년(융희 1)에 전라북도 진안군 두미면 고암리에 사는 신복렬(30)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그는 농사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아내와 제수와 조카 내외와 함께 살고 있었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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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연간에 김제군 부량면에 사는 선방식이 작성한 신호적 / 宣邦鶴 / NULL광무연간에 김제군 부량면 신양리에 사는 선방식(46) 작성하여 김제군에 제출한 신호적이다. 그의 직업은 농업이었으며 2칸의 초가에서 아내 장씨와 단 둘이 살고 있었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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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에 전라북도 만경군 하이면에 사는 최봉현이 작성한 신호적 / 崔奉鉉 / 1898"1898년(광무 2)에 전라북도 만경군 하이면 석치리에 사는 최봉현(43)이 작성한 호적표이다. 그는 아내 최씨, 그리고 아들 등 3명의 가족으로 이루어진 단출한 가구이다. 문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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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에 금구군 낙양면에 사는 허목이 작성한 신호적 / 許沐 / 19061906년(광무 10)에 전라북도 금구군 낙양면 장평리에 사는 허목(37)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당시 허목은 아내 최씨와 함께 홀어머니를 모시고 초가 3칸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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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3년에 김창기가 작성한 전답매매문서 / 金昌器 / 17331733년(영조 9) 정월 초9일에 김창기가 순천 주암면 소재의 곤자답 5마지기를 正租 25石에 유학 홍경항에게 팔면서 작성해 준 매매문서이다. 매매 사유는 연이은 흉년에 생계가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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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에 구례군 현내면에 사는 손재협이 작성한 신호적 / 孫在協 / 1898"1898년(광무 2)에 전라북도 구례군 현내면에 사는 손재협(51)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그는 농사를 짓고 있었으며, 아내 김씨와 아들 네 명과 함께 살고 있었다. 큰 아들은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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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에 순천군 황전면에 사는 조준석이 작성한 신호적 / 趙俊錫 / 1902"1902년(광무 6)에 순천군 황전면에 사는 조준석(90)이 작성해서 관에 제출한 신호적이다. 이 문서를 통해 홀아비인 호주 조준석은 55세의 맏아들 기량, 55세의 맏며느리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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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에 만경군 이도면에 사는 최병한이 작성한 신호적 / 崔秉漢 / 1900"1900년(광무 4)에 전라북도 만경군 이도면 고사리에 사는 최병한(59)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그는 아내 고씨와 아들, 며느리와 함께 살고 있었다. 동거인들의 나이가 전혀 기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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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에 강진군 열수면에 사는 김최순이 작성한 신호적 / 金最淳 / 19001900년(광무 4)에 강진군 열수면 군자리에 사는 김최순(38)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그는 아내 김씨(40)와의 사이에 아들을 하나 두었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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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에 고성군 하이면에 사는 박재윤이 작성한 신호적 / 朴在潤 / 1898"1898년(광무 2)에 고성군 하이면 월아리에 사는 박재윤(69)이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신호적이다. 신호적은 갑오개혁 이후에 만들어진 문서로 조선시대의 호구단자와 비슷하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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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군 조촌면에 사는 과부 정씨가 작성한 신호적 / 鄭氏 / NULL전주군에서 조촌면 사동리에 사는 과부 鄭氏(51)가 작성한 신호적이다. 그녀는 과부로 혼자서 초가집에 살고 있었다. 그 때 홀로 사는 과부가 호주였다는 사실이 흥미롭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93885
1903년에 만경군 남이면에 사는 최인홍이 작성한 신호적 / 崔寅洪 / 1903"1903년(광무 7)에 전라북도 만경군 남이면 고현리에 사는 최인홍(54)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그는 아내 이씨와 함께 어머니를 봉양하였으며, 얼마 전에 결혼한 아들 며느리 부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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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에 전라남도 무장군 동음치면에 사는 이교연이 작성한 신호적 / 李敎衍 / 19021902년(광무 6) 1월에 전남 무장군 동음치면에 사는 이교연(30)의 호적표이다. 이교연은 농사를 짓고 있으며 26세의 처 정씨와 2칸짜리 초가집에서 살고 있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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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에 장수군 계남면에 사는 양사필이 작성한 신호적 / 梁思弼 / 18991899년(광무 3)에 장수군 계남면에 사는 양사필(32)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당시 양사필은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5칸의 초가에서 어머니 여산 송씨를 모시고 아내 및 아들 조카와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93888
1906년에 금구군 낙양면에 사는 허섭이 작성한 신호적 / 許? / 1906"1906년(광무 10)에 전라북도 금구군 낙양면 장평리에 사는 허섭(65)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부란에는 이름이 없으며 생부란에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하지만 이 문서로는 양자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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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에 조대유가 작성한 전답매매문서 / 趙大有 / 1894"1894년(고종 31) 2월 24일에 조대유가 작성한 논매매문서이다. 그는 임피 주산평 등에 있는 物字畓을 비롯하여 총 7石 13두락지의 논을 950냥을 받고 팔았다. 문서의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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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에 만경군 남일면에 사는 임공수가 작성한 신호적 / 任公秀 / 1898"1898년(광무 2) 1월에 남일면 대목산리에 사는 임공수(51)가 작성하여 만경군에 제출한 신호적이다. 당시 임공수는 과부였던 숙모 전주 최씨, 혼인한 두 아들 내외 및 미혼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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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에 전라남도 완도군에 사는 김봉옥이 작성한 신호적 / 金奉玉 / 18981898년(광무 2)에 전라남도 완도군 여서도에 사는 김봉옥(53)이 작성한 호적표이다. 그는 아내 최씨와 초가 3칸에서 단둘이 살았다. 직업을 어농이라고 한 점이 특히 눈에 띈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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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에 용담군 북면에 사는 김문기가 작성한 신호적 / 金汶基 / 19041904년(광무 8)에 용담군 북면 괴정리에 사는 김문기가(18) 작성한 신호적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18세이며 농업에 종사하였고 어머니를 모시고 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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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에 용담군 북면에 사는 안태환이 작성한 신호적 / 安泰煥 / 19091909년(융희 3)에 용담군 북면 괴정리에 사는 안태환(41)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그는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41세의 아내 허씨와 함께 살고 있었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93894
1905년에 고성군 하3면에 사는 배경순이 작성한 신호적 / 裵敬淳 / 1905"1905년(광무 9)에 고성군 하3면 월아리에 사는 배경순(49)이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신호적이다. 신호적은 갑오개혁 이후에 만들어진 문서로 조선시대의 호구단자와 비슷하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93895
1900년에 전라북도 만경군 하이면에 사는 최봉현이 작성한 신호적 / 崔奉鉉 / 1900"1900년(광무 4)에 전라북도 만경군 하이면에 사는 최봉현(42)이 작성한 호적표이다. 그는 아내 최씨, 그리고 아들 등 3명의 가족으로 이루어진 단출한 가구이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93896
1900년에 장수군 계남면에 사는 양주흥이 작성한 신호적 / 梁柱興 / 19001900년(광무 4)에 장수군 계남면에 사는 양주흥(35)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당시 그는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2칸의 초가에서 아내 권씨 및 과부인 형수 한씨와 함께 살았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93897
1902년에 만경군 남일면에 사는 임공수가 작성한 신호적 / 任公秀 / 1902"1902년(광무 6)에 만경군 남일면 대목산리에 살던 임공수(55)가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신호적이다. 임공수는 상처한 홀아비로 농업에 종사하였고 3칸 규모의 초가에서 결혼한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93898
1900년에 만경군 남이면에 사는 최인홍이 작성한 신호적 / 崔寅洪 / 1900"1900년(광무 4)에 전라북도 만경군 남이면 고현리에 사는 최인홍(51)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그는 아내 이씨와 함께 어머니를 봉양하였으며, 아들을 하나 데리고 있었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93899
1905년에 전주군 조촌면에 사는 이윤시가 작성한 신호적 / 李潤始 / 1905"1905년(광무 9) 1월에 전주군 조촌면 사동리에 사는 유학 이윤시(58)가 작성한 신호적이다. 그의 직업은 농업이었고, 아내는 보이지 않으며, 아버지와 여자 고용인 1명 등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93900
1882년에 국왕이 김종만의 처 백씨에게 정부인이라는 증직을 내린 교지 / 國王 / 18821882년(고종 19) 3월에 왕이 김종만을 嘉善大夫로 책봉하고 관례에 따라 그의 처 백씨에게 貞夫人이라는 증직을 내린 교지이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