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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년에 정효근이 작성한 전답매매문서 / 鄭孝根 / 18461846년(헌종 12) 1월 10일에 畓主인 정효근이 아무개에게 작성해 준 논매매문서이다. 정효근은 공사채를 갚기 위해서 조상에게 물려받은 命字 屯田畓 7마지기를 錢文 130냥을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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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에 고성군 하삼면에 사는 배동순이 작성한 신호적 / 裵東淳 / 1907"1907년(융희 1)에 고성군 하삼면 월아리에 사는 배동순(42)이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신호적이다. 신호적은 갑오개혁 이후에 만들어진 문서로 조선시대의 호구단자와 비슷하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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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에 진안현 두미면에 사는 신국진이 작성한 신호적 / 辛國振 / 1898"1898년(광무 2)에 전라북도 진안군 두미면 구암리에 사는 신국진(37)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그는 농사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아내, 동생 내외와 함께 살고 있었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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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에 부안군 상서면에 사는 서용기가 작성한 신호적 / 徐龍璣 / 1903"1903년(광무 7)에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가오리에 살던 서용기(67)가 작성한 신호적이다. 그의 직업은 농부였으며, 부인과 아들 내외 등 모두 4명이 함께 살고 있었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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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에 부안군 상서면에 사는 서용선이 작성한 신호적 / 徐龍璇 / 19031903년(광무 7)에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가오리에 살던 서용선(60)의 신호적이다. 그는 자식은 한 명도 없이 초가집에서 부인 진주강씨와 단 둘이 살고 있었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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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에 전라남도 무장군 동음치면에 사는 이일용의 신호적 / 李一容 / 1904"1904년(광무 8) 전남 무장군 동음치면 원동에 거주하며 농사를 짓고 살던 이일용(38)의 호적표이다. 이일용은 처 강씨(38세), 아들 교익(15세)과 3짜리 초가집에서 살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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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에 만경군 이도면에 사는 최창열이 작성한 신호적 / 崔昌烈 / 1900"1900년(광무 4)에 전라북도 만경군 이도면 고사리에 사는 최창열(35)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그는 아내 강씨와 아들, 며느리와 함께 살고 있었다. 호주의 직업을 유학과 농으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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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에 금구군 낙양면에 사는 허영이 작성한 신호적 / 許泳 / 1899"1899년(광무 3)에 전북 금구군 낙양면 장평리에 사는 허영(48)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당시 허영 직업은 선비로 기재되어 있으며 1897년에 작성한 신호적에 허영의 나이가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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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에 임실군 구고면에 사는 송영옥이 작성한 신호적 / 宋英玉 / 1901"1901년(광무 5)에 전라북도 임실군 구고면 두곡리에 사는 송영옥(64)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그는 아내 이씨와 아들 진섭과 함께 살고 있었다. 호적에는 같이 사는 식구가 남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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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에 강진군 열수면에 사는 김병순이 작성한 신호적 / 金炳淳 / 19001900년(광무 4)에 강진군 열수면 군자리에 사는 김병순(65)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홀아비인 그는 아들(동선) 부부와 함께 살았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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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연간에 남원군 산동방에 사는 양국필이 작성한 신호적 / 梁國弼 / NULL광무년간에 남원군 산동방에 사는 유학 양국필(56)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그는 남원 양씨로 농사를 짓고 있으며 양치성이 생부로 기록되어 있어서 양자를 간 것 같으나 양아버지의 이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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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4년에 허일선이 작성한 전답매매문서 / 許一善 / 17741774년(영조 50) 정월 26일에 허일선이 작성한 밭 매매문서이다. 그는 부득이한 일이 생겨 자기가 매득하여 수년 동안 경작해온 순천 주암면 소재의 곤자전 3마지기를 조생원댁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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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에 고성군 하3면에 사는 배삼익이 작성한 신호적 / 裵三益 / 1903"1903년(광무 7)에 고성군 하3면 월아리에 사는 배삼익(40)이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신호적이다. 신호적은 갑오개혁 이후에 만들어진 문서로 조선시대의 호구단자와 비슷하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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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년간에 김제군 부량면에 사는 선방학이 작성한 신호적 / 宣邦鶴 / NULL광무년간에 부량면 신양리에 사는 선방학(50)이 작성하여 김제군에 제출한 신호적이다. 그의 직업은 농업이었으며 3칸의 초가에서 아내 전씨 및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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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에 전라북도 구례군에 사는 최정호가 작성한 신호적 / 求禮郡守 / 1904"1904년(광무 8) 10월에 전라북도 구례군에서 작성한 최정호의 신호적이다. 최정호(58세)의 본관은 낭주로 증조는 창준이고, 조는 경택이며 부는 봉현이다. 처 문화 유씨(5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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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에 전라북도 구례군에 사는 최정호가 작성한 신호적 / 求禮郡守 / 1905"1905년(광무 9) 1월에 전라북도 구례군에서 작성한 최정호의 신호적이다. 최정호(59세)의 본관은 낭주로, 증조는 창준이고, 조는 경택이며, 부는 봉현이다. 처 문화 유씨(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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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에 여수군 덕안면에 사는 최백열이 작성한 신호적 / 崔百悅 / 1898"1898년(광무 2)에 전라남도 여수군 덕안면 관기리에 사는 유학 최백열(66)이 작성한 호적표이다. 당시 그는 동갑인 아내 김씨와 아들 내외 및 손자 내외 등 모두 함께 살았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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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에 진안군 두미면에 사는 신성수가 작성한 신호적 / 辛成洙 / 19101910년에 전라북도 진안군 두미면 고암리에 사는 신성수(23)가 작성한 신호적이다. 그는 농사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20세의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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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에 만경군 남이면에 사는 최인홍이 작성한 신호적 / 崔寅洪 / 1899"1899년(광무 3)에 전라북도 만경군 남이면 고현리에 사는 최인홍(50)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그는 아내 이씨와 함께 어머니를 봉양하였으며, 아들을 하나 데리고 있었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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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에 금구군 낙양면에 사는 허목이 작성한 신호적 / 許沐 / 1899"1899년(광무 3)에 금구군 낙양면 장평리에 사는 허목(31)이 작성하여 금구군에 제출한 신호적이다. 이 신호적는 갑오개혁 이후에 새롭게 등장한 문서로 한 종이의 양쪽에 같은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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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에 금구군 낙양면에 사는 허몽이 작성한 신호적 / 許? / 19051905년(광무 9)에 전라북도 금구군 낙양면 장평리에 사는 허몽(48)이 작성하여 금구군에 제출한 신호적이다. 이 신호적는 갑오개혁 이후에 새롭게 등장한 문서로 한 종이의 양쪽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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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에 만경군 남일면에 사는 임공수가 작성한 신호적 / 任公秀 / 19001900년(광무 4)에 만경군 남일면 대목산리에 사는 임공수(53)가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신호적이다. 임공수는 당시 아내를 잃고 6칸의 초가에서 결혼한 두 아들과 아직 미혼인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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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에 이기용이 작성한 전답매매문서 / 李琪用 / 18901890년(고종 27) 12월 31일에 이기용이 작성한 밭매매문서이다. 그는 동복현 읍내면 둔동촌 앞에 있는 位字 麻田 5승락지에 모란 80根을 심어 오랫동안 가꾸어 왔으나 빚을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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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에 만경군 이도면에 사는 최준열이 작성한 신호적 / 崔俊烈 / 1902"1902년(광무 6)에 전라북도 만경군 이도면 고사리에 사는 최준열(66)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그는 아내 백씨와 두 아들, 그리고 큰 며느리, 손자 둘을 동거인으로 두고 있었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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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에 만경군 이도면에 사는 최병조가 작성한 신호적 / 崔秉朝 / 1902"1902년(광무 6)에 전라북도 만경군 이도면 고사리에 사는 최병조(60)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그는 아내 이씨와 아들 셋을 데리고 있었는데, 이 중 두 아들은 결혼하여 아내를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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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희연간에 함열군 군내면에 살는 조준식이 작성한 신호적 / 趙俊植 / NULL"융희 년간(1907~1910)에 전라북도 함열군 군내면 천북리에 사는 조준식(35)이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신호적이다. 조준식의 직업은 관리로 정 3품의 직을 가지고 있었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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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에 금구군 낙양면에 사는 허목이 작성한 신호적 / 許沐 / 1905"1905년(광무 9)에 전라북도 금구군 낙양면 장평리에 사는 허목(36)이 작성하여 금구군에 제출한 신호적이다. 이 신호적는 갑오개혁 이후에 새롭게 등장한 문서로 한 종이의 양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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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에 만경군 이도면에 사는 최상열이 작성한 신호적 / 崔尙烈 / 1903"1903년(광무 7)에 전라북도 만경군 이도면 고사리에 사는 최상열(53)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그는 아내 임씨와 아들, 며느리와 함께 살고 있었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93929
1899년에 전라북도 구례군에 사는 최봉현이 작성한 신호적 / 求禮郡守 / 1899"1899년(광무 3) 1월에 전라북도 구례군에서 작성한 최봉현의 신호적이다. 최봉현(85세)의 본관은 낭주로, 증조는 상태이고, 조는 창준이며, 부는 경택이다. 아들 승한(54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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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년간에 김제군 부량면에 사는 선방엽이 작성한 신호적 / 宣邦燁 / NULL광무년간에 부량면 신양리에 사는 선방엽(48)이 작성하여 김제군에 제출한 신호적이다. 그의 직업은 농업이었으며 2칸의 초가에서 아내 홍씨 및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사는 지역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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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에 전라남도 무장군 동음치면에 사는 이위용의 신호적 / 李魏容 / 1901"1901년(광무 5년)에 전남 무장군 동음치면에 사는 호주 이위용(65세)의 호적표이다. 그는 53세의 처 김씨, 17세의 아들 이교수, 20세의 며느리 김씨와 살고 있다. 노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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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에 만경군 이도면에 사는 최상열이 작성한 신호적 / 崔尙烈 / 1902"1902년(광무 6)에 전라북도 만경군 이도면 고사리에 사는 최상열(52)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그는 아내 임씨와 아들, 며느리와 함께 살고 있었다. 호적 말미에 만경군수 김정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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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에 용담군 이북면에 사는 안영수가 작성한 신호적 / 安永壽 / 19051905년(광무 9)에 용담군 북면 괴정리에 사는 안영수(60)가 작성한 신호적이다. 그는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41세인 아들 내외와 함께 살고 있었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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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에 문성수표가 작성한 전답매매문서 / 文聖票 / 18911891년(고종 28) 3월 23일에 문성표가 작성한 논매매문서이다. 문성표는 緖字畓 12마지기를 100냥을 받고 팔았다. 매수인의 이름은 적혀있지 않아 알 수 없다. 이 논은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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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에 전주군 조촌면에 사는 이윤시가 작성한 신호적 / 李潤始 / 19071907년(융희 1)에 전주군 조촌면 사동리에 사는 李潤始(60)가 작성한 신호적이다. 그의 3년전 58세때에 발급한 신호적에는 동거친속이 없었는데 이번에 발급한 신호적에는 처와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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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에 흥양군 고읍면에 사는 정효현이 작성한 신호적 / 鄭孝鉉 / 1901"1901년 1월에 전라남도 흥양군 고읍면에 사는 정효현(53)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그는 아내 장씨와 아들 부부와 함께 모두 4명이 살고 있었다. 이전의 1900년에는 호구단자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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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에 광양군 인덕면에 사는 손형무가 작성한 신호적 / 孫瑩武 / 1898"1898년(광무 2)에 전라남도 광양군 인덕면 도청리에 사는 손형무(73)가 작성한 신호적이다. 손영무는 두 아들 내외와 함께 살았다. 전년도에 작성한 신호적와 비교해보면 둘째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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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에 장수군 계남면에 사는 양주순이 작성한 신호적 / 梁周舜 / 18991899년(광무 3)에 장수군 계남면에 사는 양주순(35)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당시 그는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2칸의 초가에서 아내 죽산안씨 및 9세 된 아들과 함께 살았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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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에 장수군 계남면에 사는 양사필이 작성한 신호적 / 梁思弼 / 19001900년(광무 4)에 장수군 계남면에 사는 양사필(31)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당시 그는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5칸의 초가에서 어머니 여산 송씨를 모시고 아내 옥천육씨 및 조카와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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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에 부안군 상서면에 사는 서용기가 작성한 신호적 / 徐龍璣 / 1905"1905년(광무 9)에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가오리에 사는 서용기(69)가 작성한 신호적이다. 그의 직업은 여전히 농부였으며, 십여 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부인과 아들 내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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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에 태인군 동촌면에 사는 최규남이 작성한 신호적 / 崔圭南 / 1904"1904년(광무 8)에 전라북도 태인군 동촌면 백천리에 사는 최규남(25)이 작성한 호적표이다. 당시 그는 부인 김씨와 아들 하나, 고용인 3명을 데리고 6칸 초가에서 살고 있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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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에 장수군 계남면에 사는 양주흥이 작성한 신호적 / 梁柱興 / 18991899년(광무 3)에 장수군 계남면에 사는 양주흥(34)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당시 양주흥은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2칸의 초가에서 아내와 더불어 과부인 형수와 함께 살았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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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에 작성한 임공수의 신호적 / 任公秀 / 19011901년(광무 5)에 만경군 남일면 대목산리에 살던 임공수(54)가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신호적이다. 당시 임공수는 상처한 홀아비로 농업에 종사하였다. 6칸 규모의 초가에서 결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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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에 금구군 낙양면에 사는 허섭이 작성한 신호적 / 許? / 19051905년(광무 9)에 전라북도 금구군 낙양면 장평리에 사는 허섭(64)이 작성하여 금구군에 제출한 신호적이다. 허섭은 직업이 참봉으로 초가 3칸의 집에서 아내와 아들 성과 살고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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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에 정상욱이 작성한 전답매매문서 / 鄭相旭 / 18861886년(고종 23) 1월 23일에 정상욱이 작성한 논매매문서이다. 그는 동복현 읍내면 둔동촌의 位字畓 1두락지를 95냥에 팔았다. 매수인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아 알 수 없으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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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에 전라북도 만경군 하이면에 사는 최봉현이 작성한 신호적 / 崔奉鉉 / 1898"1898년(광무 2)에 전라북도 만경군 하이면 석치리에 사는 최봉현(40)이 작성한 호적표이다. 그는 아내 최씨, 그리고 아들 등 3명의 가족으로 이루어진 단출한 가구이다. 문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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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에 전라남도 무장군 동음치면에 사는 이위용의 신호적 / 李魏容 / 1904"1904년(광무 8) 전남 무장군 동음치면 원동리에 사는 이위용(68)의 호적표이다. 이위용은 농사를 지으며 52세의 처 김씨, 그리고 아들 교련(20) 내외와 함께 3칸짜라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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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에 장수군 계남면에 사는 양주순이 작성한 신호적 / 梁周舜 / 19001900년(광무 4)에 장수군 계남면에 사는 양주순(36)이 작성한 신호적이다. 당시 그는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2칸의 초가에서 아내 안씨 및 10세 된 아들과 함께 살았다.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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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에 금구군 낙양면에 사는 허몽이 작성한 신호적 / 許? / 19061906년(광무 10)에 전라북도 금구군 낙양면 장평리에 사는 허몽(49)이 작성하여 금구군에 제출한 신호적이다. 허몽은 초가 3칸의 집에서 아내 유씨와 아들 용귀와 살고 있으며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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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에 작성된 전라북도 금구군 동면 당월리의 신호적 / 東面 堂月里 / 1902"1902년(고종 39)에 작성된 전라북도(全羅北道) 금구군(金溝郡) 동면(東面) 당월리(堂月里)의 신호적(統表)이다. 신호적은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에 새로 만들어진 문서로서출처 : 호남기록문화시스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