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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飢疫盜傷死鬼文又 / 기록자료>고도서 / 권렴1732년(현종 13) 봄 대기근에다 역병이 창궐하자 감사 경상도감사가 도내 여러 읍에 기근과 역병 등으로 죽은 귀신에게 祭를 지내라고 지시하자, 靑松府 府使의 부탁으로 지은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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禳害苗蟲文 / 기록자료>고도서 / 권렴1768년(인조 26) 7월 묘동에 벼 모를 갉아먹는 해충이 번지자 이를 물리치고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田祖에 제사지내면서 올린 축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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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五弟來活文 / 기록자료>고도서 / 권렴다섯째 아우 權굉에게 올린 제문이다. 권굉은 천품이 뛰어났고 어릴 때부터 장난하고 놀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커서는 조용하고 온화했다. 또한 집안에서 기뻐하거나 성내는 기색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았고 효성스럽고 우애 깊었으며 학문에 대한 능력도 형제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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告亡兒以觀生朝文 / 기록자료>고도서 / 권렴55세 되던 해에 아들 權以觀이 죽은지 40여일 만에 돌아온 아들의 생일날에 지은 글이다. 겨우 20년 밖에 살지 못하고 1살 된 딸과 5년이란 짧은 동안 부부의 연을 맺었던 아내를 뒤로 하고 운명을 달리 한 아들의 생일을 맞이한 비통한 심정이 절절히 배어있는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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哭小祥文 / 기록자료>고도서 / 권렴1756년(인조 14) 11월 6일 이들 以觀의 小祥을 하루 앞두고 지은 글이다. 이관이 죽은 이래로 억지로 울지 않으려고 해도 울음이 나올 때가 많다며 성품과 재능 모두 뛰어났던 아들을 먼저 보낸 애통한 마음을 적고 있다. 이미 이관의 동생에게 이관이 남긴 {自警}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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哭出後兒以臨文 / 기록자료>고도서 / 권렴맏이 以觀을 잃은 이후 세상에 대한 여망을 다 버리고 오직 남은 자식 하나에만 여망을 걸어오다 3년 만인 1759년(인조 17) 또 以臨을 떠나보내며 지은 글이다. 하늘의 화가 자신들 부자에게만 미치는 것을 한탄하고 자식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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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祭剛窩任重徵文 / 기록자료>고도서 / 권렴친구 任必大(剛窩:1709∼1771)에게 올리는 제문이다. 사람을 얽어매는 과거에도 얽매이지 않았고, 문장과 시의 외형만 아름답고 실질이 없는 폐단에도 빠지지 않아 친구들의 신뢰를 받았던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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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三弟善卿文 / 기록자료>고도서 / 권렴권렴보다 10살 적은 바로 밑의 아우 權현에 올리는 제문이다. 넷째와 다섯째 동생이 죽은 후 의지하면서 서로 우애 깊게 왕래하던 동생마저 여읜 애통한 마음을 담았다출처 : 유교넷 -
244209
祭七弟淸之文 / 기록자료>고도서 / 권렴일곱째인 동생 權湜에 올리는 제문이다. 금년에 겨우 35살인 동생이 69세인 자신의 나이 절반만을 살고 떠난 것을 애통하게 여기고 있다. 권식이 12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고아가 되었는데, 권식 자신이 당시 그의 나이보다 1살 어린 아들을 두고 떠난 것을 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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悼夭孫文 / 기록자료>고도서 / 권렴16살 어린 손자의 죽음에 부치는 추도문이다. 난지 얼마 안되어 말과 걸음마를 배웠으며 세 살 때에 이미 천자문의 音을 깨우쳤던 사랑스럽고 재능 있었던 손자의 죽음을 가슴아파 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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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夫人權氏墓碣銘(1768) / 기록자료>고도서 / 권렴권렴에게 6대조에 해당되는 權恢의 딸 貞夫人權氏의 묘갈명이다. 정부인 권씨는 參判 趙址에게 시집가서 72세의 수를 누리고 오남삼녀를 낳았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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厚菴銘 / 기록자료>고도서 / 권렴{논어}에 나오는 "躬行은 두터이 하고 남에 대한 책망은 적게 한다면 원망 받을 일이 없어질 것이다"는 가르침을 받들어 초년의 병폐를 고쳤던 남송의 呂祖謙(東萊:1137∼1181)을 본받아 40세가 되도록 고치지 못하는 병폐를 고치기 위해 당호를 厚菴이라고 붙이고 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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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峯權公傳(1780) / 기록자료>고도서 / 권렴孝子公 權穆의 증조이며 權太師의 16대 손인 東峯 權克이 立巖에 寓居한 내력을 중심으로 쓴 전기이다. 권목이 임란때 처음 마을 사람들과 騎龍山 아래로 피난했다가 이듬해 그 산 속에서 立巖을 발견했다. 그곳의 경관이 뛰어나고 洞府가 幽深하며 기이한 암석들이 솟아 있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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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友列傳 / 기록자료>고도서 / 권렴소나무, 국화, 대나무, 매화 등 자연의 네 가지 식물을 의인화해 쓴 글이다. 네 가지 식물을 벗으로 삼아서 각기 그것들이 지닌 덕을 배우고 싶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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耕隱李先生行略 / 기록자료>고도서 / 권렴생육신 중의 한 사람인 李孟專(耕隱:1392∼1480)의 행적을 기록한 글이다. 자신의 문장으로는 뛰어난 덕과 충절의 마음을 형용할 수 없기에 行狀이라고 이름하지 않고 行略이라고 이름했으며, 그 끄트머리에 글쓴이인 자신의 이름을 적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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牙山蔣孝子行略 / 기록자료>고도서 / 권렴新寧의 효자 蔣元琥의 행적을 적은 글이다. 장원호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봉향함에 지극한 정성을 기울였고 매일같이 깊은 산 속의 아버지 묘소에 찾아가 아침저녁으로 음식 올리기를 거른 적이 없었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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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考通德郞府君紀事 / 기록자료>고도서 / 권렴권렴의 증조부 權積의 행적을 적은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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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考通德郞府君紀事 / 기록자료>고도서 / 권렴권렴의 증조부 權聖時의 행적을 적은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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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考處士府君紀事 / 기록자료>고도서 / 권렴권렴의 아버지인 后準의 행적을 적은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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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권렴金(龜窩:1739∼1816)이 1811년(숙종 11)에 지은 행장이다. 1669년(광해 37) 밀암 이재의 문하에서 {소학}에서 의문 나는 사항들을 모아서 질의하고 들은 답을 進德修業의 근본으로 삼아 실천궁행에 힘쓴 사실, 천성이 廉潔하여 名利에 뜻이 없었기에 형과출처 : 유교넷 -
244221
墓碣銘 / 기록자료>고도서 / 권렴鄭宗魯가 지은 墓碣銘이다. 권렴의 아들 權以復이 73세의 몸으로 厚菴의 유고와 김굉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청송에서 백여 리를 걸어 방문해 왔다. 이에 원고 내용을 살펴본 결과 권렴의 덕행이 공경스럽기에 글재주 없음을 내세워 거절할 수가 없어서 묘갈명을 쓴다고 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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遺事 / 기록자료>고도서 / 권렴아들 權以復이 권렴의 행적을 적은 것이다. 행장, 묘갈명 등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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輓詞 / 기록자료>고도서 / 권렴李象靖의 만사이다. 權濂이 좋아하던 파초를 통해 그의 죽음을 언급한 후 玉溪유람을 함께 했던 일, {明誠集}에 심력을 기울인 일 등에 대해 말하고 옥계 유람 이후 龍潭과 松堤를 함께 유람하기로 약속해 놓고 성사되지 못한 아쉬움을 적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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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 기록자료>고도서 / 권렴柳澐의 만사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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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 기록자료>고도서 / 권렴李光靖의 만사이다. 벗들에게 길을 가르쳐줄 사람을 잃었다고 했다. 아들을 두고 떠난 것을 원망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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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 기록자료>고도서 / 권렴柳道源의 만사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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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 기록자료>고도서 / 권렴金宗德의 만사이다.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면서도 [明誠篇]이 후인이 따라야 할 학문상의 규범이 될 것으로 위안을 삼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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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 기록자료>고도서 / 권렴趙述道의 만사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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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 기록자료>고도서 / 권렴申體仁의 만사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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跋 / 기록자료>고도서 / 권렴아들 權以復이 지은 발문으로 문집이 간행된 경과를 밝히고 있다. 徐爾亮이 아들과 조카들에게 문집 판각을 발의함에 그의 再從 조카 徐涑이 나서 李樹國 등 권렴의 문인 문인 30여명과 힘을 합쳐 간행사업을 시작해 행장, 묘갈명, 만사 등과 집안에서 보관하던 글 등 모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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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창집 / 기록자료>고도서 / 송기식해창집(海窓集) 海窓 宋基植의 문집. 9권 5책. 목판본. 朴昶魯가 쓴 발문(1957년)에 따르면, 宋基植 사후 9년 뒤인 1957년에 동생 宋淵植이 유고를 수습하여 처음 간행하였다. 박창로 외에 송연식이 쓴 발문도 있는데, 이 두 편의 발문과 묘지명과 묘갈명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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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기록자료>고도서 / 송기식聖人吟(1899), 讀書四戒, 懶惰, 邪念, 睡魔, 務廣,次金東溪特夫(璋煥)洗心吟(1901), 仲秋與金國卿(相燮)逢金溪相和, 近溪金公(承洛)輓, 風雷軒與朴昶魯唱酬(1901), 步前韻, 用西厓先生集中韻與昶魯同賦, 七月二十五日卽聖節也海隅蒼生不能無玉宇不勝寒之懼與朴兄用西厓先출처 : 유교넷 -
244233
詩 / 기록자료>고도서 / 송기식秋夕不堪鄕懷無以自裁適於山痴村至步自風化樓上丹陽公園共賦, 錦繡山與諸友唱和, 三仙九曲, 下仙巖, 將臺巖, 好娘巖, 釜潭, 壺項灘, 隱仙巖, 中仙巖, 臥龍巖, 上仙巖, 舍人臺(臺卽易東禹先生以舍人退居讀書之所), 白下翁書來以天山迂韻尙存觀水亭有會飮與於山痴村同往, 自萬壑江至島潭紀行출처 : 유교넷 -
244234
上西山先生(1898) / 기록자료>고도서 / 송기식西山 金興洛을 스승으로 모신 다음해에 보낸 편지이다. 스승에 대한 존경과 아울러 독서하면서 느낀 생각을 적고 후에 가르침을 받을 것임을 아뢰고 있다. 『大學』에 대해서는 의리의 깊은 곳에 대해 아직 분명히 깨닫지 못하고 있어 두렵다고 밝히고 있고, 이에 관한 朱子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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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西山先生(1899) / 기록자료>고도서 / 송기식이 편지 역시 스승인 서산 김흥락에게 보내는 것으로, 스승에 대한 존경과 만나 뵙고 싶어하는 감정이 면면히 배어 있다. 아울러 열심히 공부하여 의문나는 곳이 있으면 여쭙겠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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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拓菴先生(1901) / 기록자료>고도서 / 송기식스승으로 모셨던 拓菴 金道和에게 보낸 편지이다. 『논어』를 읽으면서 자신의 立志가 견고하지 못함을 느꼈음을 밝히고, 더욱 진실한 공부를 하겠다는 의지를 표출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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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拓菴先生 / 기록자료>고도서 / 송기식척암 김도화가 내려 준 가르침에 대해 큰 깨달음을 받고 올린 편지이다. 아울러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遺稿의 정리에 참여할 수밖에 없어 바로 찾아뵙지 못함을 아뢰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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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拓菴先生(1905) / 기록자료>고도서 / 송기식척암 김도화에게 올리는 편지이다. 소동파의 문장과 유종원의 문장을 비교한 부분이 있는데, 소동파의 문장은 종종 虛誕한 측면이 있는 반면에 유종원의 문장은 文氣와 骨格이 있으며 간결하고 고아스럽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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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拓菴先生(1910) / 기록자료>고도서 / 송기식척암 김도화에게 올리는 편지이다. 경술년 나라가 위태로움에 직면한 상황에서 느낀 단상이 담겨 있다. 아울러 동생 宋淵埴과 金斗國을 제자로 받아달라고 간청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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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洗山柳先生(1902) / 기록자료>고도서 / 송기식柳洗山이 선조의 묘지문 글씨를 써 준 것에 대해 올린 감사의 편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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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響山李先生 / 기록자료>고도서 / 송기식스승으로 모신 響山 李晩燾에게 올린 글이다. 유가의 덕목인 효도와 우애, 어른을 공경하고 예를 다하는 것 등에 대해 큰 진보가 없음을 토로하고 이에 대한 가르침을 청하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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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響山李先生(1903) / 기록자료>고도서 / 송기식향산 이만도와 그 동문들이 기록한 스승의 언행록에 대해 평한 편지글이다. 『논어』의 「鄕黨」편처럼 아름답다고 극찬하면서, 향산 이만도가 증조부의 墓文을 써 준 것에 대해서도 감사를 표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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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晩求李丈(種杞) / 기록자료>고도서 / 송기식이종기에게 올린 편지이다. 스승의 遺文을 정리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해 일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 미안함을 담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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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修齋柳丈(廷鎬,1906) / 기록자료>고도서 / 송기식류정호에게 올린 편지로, 우리나라 역사서에 대해 마치 史官처럼 決斷하여 기록해 두면서 읽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金溪遺稿」를 필사하고 교감하고 있는 정황을 적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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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怡齋李丈(,1905) / 기록자료>고도서 / 송기식이건에게 올린 편지이다. 心身의 病과 변화 발전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내적인 괴로움이 표출되어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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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槐南金丈(益洛,1905) / 기록자료>고도서 / 송기식服中에 있던 김익락에게 올린 편지이다. 당시에 유학의 시대적 영향이 文字的인 측면에만 국한되고 있지만 후대에 반드시 알아줄 이가 있을 것이라 하면서, 문집의 간행에 있어 자신이 감당할 만한 능력이 없음을 겸손하게 표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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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梧山金丈(濟冕,1936) / 기록자료>고도서 / 송기식김제면에게 올린 편지로, 중국 漢나라 이래로 군주의 專制 정치에 억눌려 선비들이 제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동양이 서구 열강에 의해 잠식당할 수밖에 없었음을 통탄해하고 있다. 시대와 역사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서간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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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息軒崔丈(桓,1901) / 기록자료>고도서 / 송기식최환에게 올린 편지로, 『논어』와 『聖學十圖』등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으나 아직 정미한 부분을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겸손하게 표현하고 후에 가르침을 청할 것을 덧붙였다. 한편 경전을 읽는 여가에 틈틈이 詞章家의 문장을 읽는 것도 학문의 진보에 보탬이 될 것이란 점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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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柯山金丈(瀅模,1907) / 기록자료>고도서 / 송기식鏡院에서 김형모를 모시며 가르침을 받은 기억을 적은 편지이다. 주자의 格致圖에 대해 언급하면서 공부가 정밀하고 心理가 명찰하지 않으면 그 본의를 파악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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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石洲李丈(象羲,1902) / 기록자료>고도서 / 송기식독립운동가인 李相羲(李相龍: 1858∼1932)에게 올린 편지이다. 체계적인 독서 계획을 갖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려고 하는 노력을 피력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