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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갑오년 10월에 유도성이 성주(城主)에게 올린 소지(所志)(單子)[11477] / 기록자료>고문서 / 민 류도성류도성(柳道性)이 갑오년(1894) 10월에 안동부사에게 올린 단자(單子)로 향임(鄕任)을 맡으라는 명을 병을 이유로 거절하는 내용이다. 제사(題辭)가 점련(粘連)되어 있는데 사양말고 맡으라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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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갑오년 9월에 유도성이 성주(城主)에게 올린 소지(所志)(單子)[11478] / 기록자료>고문서 / 민 류도성이 문건은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관청에 청원을 하거나 진정을 할 때 제출했던 문서인 소지(所志)이다. 소지는 억울한 내용의 전후 사정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말미에는 이에 대한 요구 사항대로 수용한 판결문과 관인이 찍혀 있다. 유림 관련 현안에 대해 언급하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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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정축년 10월에 풍남 하회리 사노 만태가 사도주에게 올린 소지(所志)[11479] / 기록자료>고문서 / 풍남 하회리 사노 만태정축년 10월 풍남면 하회리에 사는 사노(私奴) 만태(萬太)가 올린 소지로 77세의 고령으로 상전댁(上典宅) 행랑에 거접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데, 지난해 호적을 정리할 때 기병(騎兵)에 충정속(充定屬) 되었으므로 올린 소지이다. 사노가 양역을 부담하는 경우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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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즉위년(1800) 11월 25일 부여(夫餘)에 내린 감결(甘結)로 백일장(白日場) 시관으로 손예(孫譽)를 차정하니 예에 따라 들어오라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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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원년(1801) 12월 16일 부여(夫餘)에 내린 감결(甘結)로 손예(孫譽)를 시관으로 차정하니 알리라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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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년(1801) 2월 11일 내려진 것으로 손예(孫譽)를 충청좌도(忠淸左道) 영동(永同)에서 치러지는 향시의 시관으로 차정하니 알려주라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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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신미년 8월에 대국사 입장을 금한다며 대국사에 보낸 감결(甘結)[11483] / 기록자료>고문서 / 미상대행산(大行山) 대국사(大國寺:大谷寺)에 내려진 것으로 대곡사(大谷寺)는 지공대사가 수행하던 도량이므로 입장(入葬)을 금지한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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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즉위년(1800) 12월 내려진 감결(甘結)로 손예(孫譽)를 영문(營門)에서 치러지는 향시의 시관으로 차정하니 들어오라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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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모년에 순영이 수급자미상에게 보낸 감결(甘結)[11485] / 기록자료>고문서 / 순영순영(巡營)에서 내린 감결(甘結)로 제교(題敎)가 엄중하여 한사람이 가볍게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향로(鄕老), 전조관(前朝官), 각 문중에서 모여 공의(公議)를 모아야 하므로 모임을 개최하니 모두 참석하라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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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도광 2년에 발급자미상이 승정원에 보낸 계문(啓文)(狀啓草)[11486] / 기록자료>고문서 / 미상순조 22년(1822) 5월 13일 김모(金某)가 김해부사(金海府使) 유이좌(柳台佐)의 일로 승정원(承政院)에 올린 장계(狀啓)를 초한 것으로 유이좌(柳台佐)의 노(奴)의 정장(呈狀)에 의하면 유이좌(柳台佐)가 산증(疝症)으로 업무를 보지 못한다고 하니 지금 농사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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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모년에 구정복이 수급자미상에게 보낸 계문(啓文)[11487] / 기록자료>고문서 / 구정복구정복(具正福)이 올린 장계로 유병주차관(柳兵主差官)을 동파당(東坡撞)에서 만난 사실을 간략히 보고한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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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모년에 발급자미상이 수급자미상에게 보낸 계문(啓文)[11488] / 기록자료>고문서 / 미상청주(淸州) 사는 박광일(朴光馹)의 부(父) 한섬(漢暹)이 박치영(朴致英)에게 출계(出繼)한지 46년이나 되었고, 6년 동안 복상(服喪) 했음에도 불구하고 족보에서 빼버리고 파양(罷養)한 것은 억울하며 박재열(朴載烈)은 동종지의(同宗之宜)를 돌보지 않고 인륜이 중함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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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모년에 발급자미상이 수급자미상에게 보낸 계문(啓文)[11489] / 기록자료>고문서 / 미상간략한 안부를 전하고 출타 예정 등에 대해 언급한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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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모년 7월에 발급자미상이 수급자미상에게 보낸 계문(啓文)[11490] / 기록자료>고문서 / 미상지평(持平) 권홍(權亻+弘)이 홍희운(洪羲雲)의 일로 탄핵을 당하자 피혐계(避嫌啓)를 올린 것을 등서(謄書)한 것으로 사퇴하지 말라는 왕의 비답도 같이 기록되었다. 7월 13일자의 것이나 어느 해의 것인지 알 수 없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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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모년에 발급자미상이 수급자미상에게 보낸 계문(啓文)[11491] / 기록자료>고문서 / 미상북청(北靑)과 단천(端川)의 향리 심후진(沈厚鎭)과 김석형(金錫衡)의 범죄사실을 보고하고 파면을 건의한 장계초(狀啓草)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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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모년에 신재식이 수급자미상에게 보낸 계문(啓文)[11492] / 기록자료>고문서 / 신재식신재식(申在植)의 계문(啓文)을 등서(謄書)한 것이다. 유생들의 사론(士論)을 수용하라는 내용이고, 뒷 부분은 왕의 비답(批答)을 등서(謄書)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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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건륭 29년 전라도관찰사 심이 승정원에 보낸 계문(啓文)[11493] / 기록자료>고문서 / 전라도관찰사 심영조 40년(1764) 4월 6일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심(沈)이 승정원(承政院)에 도내의 농업 상황을 보고한 내용이다. 4월 12일자로 이 계문을 예조(禮曹)에 내렸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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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기묘년 10월에 사성 유이좌가 이조에 보낸 계문(啓文)[11494] / 기록자료>고문서 / 사성 류이좌순조 19년(1819) 10월 사성(司成) 류이좌(柳台佐)가 이조(吏曹)에 올린 계문(啓文)이다. 질병으로 업무를 보기 어려우니 체차(遞差)시켜 달라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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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모년에 예조에서 보낸 계문(啓文)(啓目)[11495] / 기록자료>고문서 / 예조병호시비(屛虎是非)와 관련하여 예조(禮曹)에서 올린 계목(啓目)으로 위패(位牌)의 천동(遷動) 문제에 대해서는 해도(該道)의 관료들이 조사하도록 하고 이로 인하여 다툼이 없도록 하여야 할 것이라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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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모년에 김조순이 참의 임명을 요청한 계문(啓文)[11496] / 기록자료>고문서 / 김조순판서(判書) 김조순(金祖淳)이 참의(參議)가 임명되지 않아 일을 볼 수 없으므로 참의를 임명해 줄 것을 청하자 품의한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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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가경 15년에 박만주가 사위 전수일에게 보낸 분재기(分財記)(衿給文記)[11497] / 기록자료>고문서 / 처부 박만주순조 10년(1810) 3월 17일자의 금급문기(衿給文記)이다. 사위 전수일(全壽一)에게 준 것으로 별거(別居)한 이후 정표가 없으므로 현동(縣東)의 봉평(鳳坪) 오삼포(吾三浦)에 있는 반시경(反時畊) 2두락지와 진처(陳處) 9두락지 내의 실시경(實時畊) 2두락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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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1663년에 유성룡의 화회문기(和會文記)[11498] / 기록자료>고문서 / 미상류성룡(柳成龍)의 유여남매화회문기(柳袽男妹和會文記)이다. 분재(分財)는 인조 27년(1649) 이루어졌으나 현종 4년(1663) 화회문기(和會文記)가 작성되었으므로 류성룡의 아들들은 모두 사망하고 손자인 류원지(柳元之) 등이 서명하였다. 류성룡의 재산이 왜 류성룡 사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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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남면(豊南面) 어담리(漁潭里)에 있는 조모 선산에서 일어난 투장(偸葬)과 관련된 것으로 관의 조사에 대하여 진술한 공초(供招)를 필사한 것이다. 금년 2월 인금리(仁今里)에 사는 황귀손(黃貴孫)이 자기 집의 선산이라고 하고 투장하고 유씨가(柳氏家)에서 그 무덤을 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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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황사영 백서(黃嗣永 帛書)를 필사한 검안(檢案)[11500] / 기록자료>고문서 / 미상황사영 백서(黃嗣永 帛書)를 필사한 것이다. 황사영 백서는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자 그 상황을 청(淸)에 있는 예수회 선교사에게 전하고 대박을 보내달라는 것으로 이를 빌미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당하고 남인(南人) 신서파(信西派)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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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예천(醴泉) 대행산(大行山) 산송(山訟)과 관련된 검안(檢案)[11501] / 기록자료>고문서 / 미상예천(醴泉) 대행산(大行山) 산송(山訟)과 관련된 사보(査報)이다. 장영진(張永鎭)이 매매한 토지의 성격과 김응대(金應大)가 격쟁한 내용을 바탕으로 조사해 본 결과 옛 분묘와의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음을 확인하여 유씨가(柳氏家)의 소유권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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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예천(醴泉) 대곡사(大谷寺)와 유씨가(柳氏家)가 관련된 검안(檢案)[11502] / 기록자료>고문서 / 미상예천(醴泉) 대곡사(大谷寺)와 류씨가(柳氏家)가 관련된 조사 보고이다. 태영(泰永)이 제기한 격쟁(擊錚)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류씨가의 소유권을 확인해주고 태영을 잡아올려 처벌한다는 내용으로 류씨가에 알려준 것을 필사한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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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향리들을 처벌한 기록인 검안(檢案)[11503] / 기록자료>고문서 / 미상향리들을 처벌한 기록이다. 지례(知禮) 구이방(舊吏房)과 창색(倉色) 3인을 수호와환죄(搜戶臥還罪)로 곤(棍) 30도(度)에 처하였고 예천(醴泉)의 구창색(舊倉色) 7인과 신창색(新倉色) 7인을 수호가미죄(搜戶加味罪)로 곤 20도에 처하였으며, 산청형리(山淸形吏)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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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금벌(禁伐)과 관련된 검안(檢案)(査案)[11504] / 기록자료>고문서 / 미상금벌(禁伐)과 관련된 적간기(摘看記)로 김일발(金日發) 등이 범송수금(犯松囚禁) 되었다는 것은 애매하며, 산에 벌목한 흔적이 없다고 보고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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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이좌(柳台佐)와 대곡사(大谷寺) 승려들 사이의 산송(山訟)에 대하여 초검, 재검을 거쳐 조사한 내용을 적고, 지공대사(指空大師)의 금혈비(禁穴碑)가 있다는 태영(泰永)의 주장은 허황된 주장이므로 법에 의거하여 처벌하여야 한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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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향리들과 주민들을 처벌한 검안(檢案)[11506] / 기록자료>고문서 / 미상향리들과 주민들을 처벌한 기록이다. 향리들은 주로 뇌물죄(賂物罪)로 처벌을 받았고, 사인(士人)들은 불목죄(不睦罪) 등으로 처벌하였다. 유이좌(柳台佐)가 김해부사(金海府使)로 재직할 당시의 것으로 보인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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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지례, 예천, 산청의 향리들을 처벌한 검안(檢案)[11507] / 기록자료>고문서 / 미상지례, 예천, 산청의 향리들을 처벌한 기록이다. 지례의 전 이방(吏房)과 창색(倉色) 3인은 발호와환죄(拔戶臥還罪)로, 예천의 창색(倉色)은 발호가미죄(拔戶加味罪)로, 산청의 형방색(刑房色)은 정배죄인방환죄(定配罪人放還罪)로 처벌받았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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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예천(醴泉) 대곡사(大谷寺) 승려 태영(泰永) 등이 제기한 산송(山訟)과 관련된 검안(檢案)[11508] / 기록자료>고문서 / 대곡사 승 태영예천(醴泉) 대곡사(大谷寺) 승려 태영(泰永) 등이 제기한 산송(山訟)과 관련된 초사(招辭)를 등서(謄書)한 것이다. 태영(泰永), 성정(聖正), 실훈(實訓) 등의 승려들에게 공초를 받았고, 토지를 매매했던 유학 장영진(張永鎭)에게도 공초를 받았으며, 유씨가(柳氏家)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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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년 윤3월 2일 칠산(七山)의 곽수정(郭守貞)의 정소(呈訴)에 의해 조사한 기록이다. 김성원(金聖元) 등이 조세를 거둘 때 횡령한 사실을 조사한 것이다. 유이좌(柳台佐)가 김해부사(金海府使)로 재직할 당시의 것으로 보인다. 1822년의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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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신미년 8월에 대곡사 근처에 무덤을 만들지 말라고 명시한 기문(記文)[11510] / 기록자료>고문서 / 미상신미년 8월에 작성한 문건인데, 절 근처에 무덤을 만들지 말라고 명시한 문건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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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예천(醴泉) 대곡사(大谷寺)와의 분쟁과 관련된 소지초(所志草)[11511] / 기록자료>고문서 / 미상예천(醴泉) 대곡사(大谷寺)와의 분쟁과 관련된 소지초(所志草)이다. 영자암(影子菴)에 대하여 유씨가(柳氏家)가 얼마나 많은 부조를 하였는가를 알리고 시묘(侍墓)살이 할 때 거접(居接)하였음을 말하며 승도들을 핍박하여 절을 탈취할 생각은 없다고 하였다. 뒷부분은 멸실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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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황산역리(黃山驛吏) 박초남(朴草南)의 충효를 상찬하는 기문(記文)[11512] / 기록자료>고문서 / 미상우부면(右部面)에 거주하는 황산역리(黃山驛吏) 박초남(朴草南)의 충효(忠孝)를 상찬(賞讚)하는 글이다. 부모를 공경하고 을축년 국휼시(國恤時)에 나이 70임에도 불구하고 망곡(望哭)하는 등 충성을 보였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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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우산서원(愚山書院)에 관련한 사실(事實)[11513] / 기록자료>고문서 / 미상「우산서원사실(愚山書院事實)」이다. 우산서원(愚山書院)의 위치와 주향(主享), 배향(配享)을 밝히고 우산서원과 정경세(鄭經世) 및 정종로(鄭宗魯)에 대한 여러 사제문(賜祭文)과 王命(왕명)을 기록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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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서원묘위천동전후사실(虎溪書院廟位遷動前後事實)」로 병호시비(屛虎是非)와 관련된 것이다. 병자년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추배(追配) 논의부터 무인년 10월의 소지에 이르기까지 일의 추이를 날짜별로 적어놓은 필사본이다. 후에 『여강전말(廬江顚末)』을 편찬할 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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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임오년 9월에 청나라 통상대신이 수급자미상에게 보낸 외교문서(外交文書)(咨文)[11515] / 기록자료>고문서 / 청 통상대신임오군란(壬午軍亂)과 관련된 문서이다. 청(淸) 통상대신(通商大臣)의 명의로 발급한 자문(咨文)을 등사(謄寫)한 것이다. 임오군란 직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청에 압송되자 흥선대원군의 송환을 위하여 조영하(趙寧夏), 김홍집(金弘集) 등이 청에 갔다가 9월 7일 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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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각종 서식을 적어놓은 표문(表文)[11516] / 기록자료>고문서 / 미상각종 표문(表文)의 서식을 적어놓은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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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남곡(南谷)의 사실과 순흥부의 복관(復官) 등에 관한 품목(稟目)[11517] / 기록자료>고문서 / 미상여말(麗末) 절신(節臣) 남곡(南谷)의 사실과 순흥부의 복관(復官) 등에 대한 몇 가지 의문을 품의한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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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계사년 1월에 발급자미상이 수급자미상에게 보낸 품목(稟目)[11518] / 기록자료>고문서 / 미상상주(尙州) 우산리(愚山里)의 연혁을 서술하고 명릉조(明陵朝)에 잡역을 면제해주는 조치가 있었음을 밝혔다. 뒤에 우산리에 내린 완문(完文)을 등서(謄書)하였으며, 계사년 정월 유생 황번로(黃磻老) 등이 올린 소지(所志)에 대한 제음(題音)을 같이 기록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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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과 관련한 일기(日記)인 사변록(事辨錄)[11519] / 기록자료>고문서 / 미상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과 관련한 기록이다. 1884년 11월 17일 김옥균(金玉均) 등이 거사를 일으킨 사실과 진행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였고,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하는 과정까지 기록하였다. 끝에 갑신년 11월 30일 내린「유재정신료급팔도신사기노민인등(諭在庭臣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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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계축년 7월에 사초(史草)의 일부를 옮겨놓은 일기(日記)[11520] / 기록자료>고문서 / 미상계축년 7월 1일자의 것으로 도승지(都承旨) 이(李)의 상소를 옮겨 적은 것이다. 개인의 일기는 아니고 사초(史草)의 일부를 옮겨놓은 것으로 보인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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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정조 23년(1799) 유주서가 작성한 정원일기(庭院日記)의 초(草)[11521] / 기록자료>고문서 / 주서 류정조 23년(1799) 작성된 정원일기(庭院日記)의 초(草)로 보인다. 첫머리에 기미(己未) 4월 20일 묘시(卯時)라고 시일을 기록하였고 주서(注書) 류(柳)라고 작성자가 기록되었다.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의 건강과 관련하여 왕이 말한 부분이 기록되어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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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순조 6년(1806) 김달순사건(金達淳事件)과 관련된 일기(日記)[11522] / 기록자료>고문서 / 미상순조 6년(1806) 김달순사건(金達淳事件)과 관련된 기록이다. 김달순은 순조 5년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자, 정조연간에 사도세자(思悼世子) 추숭을 주장했던 이우(李堣) 등이 영남만인소 주모자를 처벌하자고 하였다가 신하로서는 감히 언급할 수 없는 내용을 말하여 정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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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장령(掌令) 이문술(宋文述)의 사직 상소를 적은 일기(日記)[11523] / 기록자료>고문서 / 장령 이문술장령(掌令) 이문술(宋文述)의 사직 상소를 적은 것으로 4월 12일자의 사직 상소를 옮겨 적고 16일 비답(批答)이 내렸음을 적었다. 사초(史草)의 일부로 판단된다.출처 : 유교넷 -
246798
기사년(1809) 4월 14일부터 4월 26일까지의 기록이다. 주로 상소(上疏)를 올린 주체와 상소내용, 왕의 비답(批答)을 기록하였다. 유이좌(柳台佐)가 언관(言官)으로 근무할 때의 것으로 보인다.출처 : 유교넷 -
246799
순조 3년(1803) 7월 류이좌(柳台佐)가 북평사(北評事)로 임명되었을 때의 노정기(路程記)이다. 서울[京]을 출발하여 경흥(慶興)에 도착할 때까지의 거리와 숙식 상황을 기록하였고, 여행 도중에 지은 시(詩)와 견문(見聞)을 이면에 기록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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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기축년 1월에 관직의 임명 상황이 기록된 사초의 일부[11526] / 기록자료>고문서 / 미상기축(己丑)년 1월 29일자의 것이다. 사초(史草)의 일부로 보인다. 관직의 임명 상황이 초서로 기록되어 있다.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