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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姨兄金公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식찬姨從兄 김공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공은 타고난 효성과 덕성으로 모친에게 효를 다하였으며, 공의 행실은 집안의 모범이 되었다. 인편을 통해 여러 번 찾아오라고 했지만 병이 들어 14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다가 세상을 마쳤는데 직접 조문도 못하고 만사도 한 장 올리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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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舍弟是瓘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식찬동생 金是瓘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동생을 잃은 지극한 아픔을 말한 것으로 형제이면서 서로의 師友로서 평생의 지기로서 살다가 갑자기 동생이 죽음 맞자 나의 반쪽 몸을 잃은 듯 애통하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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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 기록자료>고도서 / 김식찬동생 金是瓘의 小祥 때 지은 글이다. 동생이 죽은 지 1년이 지났건만 아침에 눈을 떠도 혼자이고 花朝月夕에 홀로 쓸쓸히 남아 있고, 빗소리에, 가을밤 그리움이 더할 때, 더욱 동생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하다는 내용과 동생의 며느리를 맞이하고 집을 일으키는 것이 모두 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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哭亡兒鍾儒 / 기록자료>고도서 / 김식찬죽은 아들 鍾儒의 祭에 지은 글이다. 아들을 먼저 저승으로 보낸 애통한 심정을 읊었다. 총명하여 장래를 기약할 수 있었던 아들이 18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치자, 자신의 자식 2남 3녀가 먼저 죽고 또 다시 죽음을 맞이하는 참혹한 심정을 서술하고, 다행히 며느리가 임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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哭亡姪灝儒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식찬죽은 조카 灝儒의 祭에 지은 글이다. 집안의 젊은이들이 일찍 죽는 애통한 심정을 읊었다. 조카의 형제가 먼저 죽고 난후 홀로 남았던 조카마저 서른 남짓된 나이로 죽게 되어 8대 동안 이어오던 宗孫이 끊기게 되어 어떻게 집안을 이어나가야 할 지 모르겠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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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使文(復)哀辭 / 기록자료>고도서 / 김식찬白復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공은 순후하면서 화려하지 않고, 忠信하면서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면서 자만하지 않는 성품으로 부모에게 효를 다하였다. 이러한 아름다운 행실이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이 저자의 책임이라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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兒子鍾儒字辭 / 기록자료>고도서 / 김식찬아들 鍾儒의 字를 "人正"이라고 지어주고 그 의미를 설명한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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鷹峯處士傳贊 / 기록자료>고도서 / 김식찬鷹峯處士는 光山 金氏 瑞龜로 자는 國寶이다. 禮安에 거주하였으며, 타고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고, 돌아가신 후에는 의례에 따라 상례를 치렀으며, 자식을 훈육하기를 항상 어진 마음을 잊지 말도록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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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月堂重修上樑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식찬雪月堂은 金富倫의 정자인데, 다시 수리를 하고 상량할 때 쓴 글로 자손들이 잘 이어받아 길이 보존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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拱北亭上樑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식찬拱北亭을 상량할 때 지은 글로, 지은지 오래되고 위치도 좋지 않아 새로운 곳으로 이전하여 지으니 길이길이 보전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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靈臺上樑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식찬靈臺를 상량할 때 지은 글로, 마음을 항상 경계해서 게으르게 황폐하게 하지말고, 조심조심해서 보전하기를 당부한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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芝軒先生墓碣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식찬芝軒 鄭士誠의 墓碣銘이다. 정사성의 본관은 淸州, 자는 子明이다. 李滉 金彦璣 具鳳齡의 문인이다. 진사시에 합격했지만 大科를 단념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590년 遺逸로 천거받아 泰陵參奉을 지냈고, 임진왜란 때에는, 태조의 영정을 받들어 난이 평정될 때까지 봉안하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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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四義士廟庭碑合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식찬壬辰倭亂과 丙子胡亂에 義兵을 일으켜 외적과 용감히 싸웠던 伊西 朴氏 집안의 14명(慶新 智男 哲男 璨 瑀 琡 慶因 慶傳 慶胤 璘 球 慶宣 瑾) 義士를 廟庭에 모시고 그 합동비명을 쓴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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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逸齋公墓碣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식찬野逸齋 金光岳의 묘갈명이다. 본관은 光山, 자는 以直. 大妃 廢母論이 일어났을 때, 李爾瞻을 극형에 처할 것을 상소하고, 병자호란에 형 光繼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조령까지 갔다가, 남한산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청량산에 은거하였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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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王考通訓大夫行丹城縣監贈司僕寺正眞城李公墓碣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식찬외조부 李世德의 묘갈명이다. 이세덕의 자는 敬胤로 퇴계선생의 7대손이다. 성품이 온후하고 인자하였으며, 부모의 상에 예를 다하였다. 莊陵參奉을 거쳐 丹城縣監으로 나갔으며, 재임기간이 8개월 밖에 되지 않았지만 백성들이 追思碑를 세워 치적을 기렸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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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淵處士朴公墓碣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식찬朴明元의 묘갈명이다. 박명원의 자는 和甫, 본관은 潘南이다. 處士로 평생을 살면서, 봉제사에 정성을 다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고, 仁厚한 품성은 이웃에까지 전해졌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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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士朴公墓碣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식찬朴宗赫의 묘갈명이다. 박종혁의 자는 光遠, 본관은 潘南이다. 부모에 효와 예를 다하고, 그것을 미루어 이웃과 아랫 사람들에게까지 미치게 하였고, 자식들에게는 근본에 힘쓰도록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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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溪姜孝子墓碣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식찬姜鳳文의 묘갈명이다. 강봉문의 자는 周瑞, 본관은 晉陽이다. 부모를 섬기는데 효를 다하였다. 한번은 모친이 등창을 앓았는데, 의원이 뱀을 잡아 환약으로 만들어 먹어야만 효과가 있을 것이라 하였다. 한 겨울이라 쉽게 구할 수가 없어서, 손발이 터져 피가 나도록 얼음 속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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蒙庵公墓竭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식찬金命元의 묘갈명이다. 김명원의 자는 天應, 본관은 光山이다. 일찍이 과거에 뜻을 두었으나, 그만두고 한평생을 포의로 은인자적한 삶을 살았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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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從大父進士公墓碣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식찬金협의 묘갈명이다. 자는 長仲, 본관은 光山이다. 명리에 뜻을 두지 않고 한평생 집안과 문중, 그리고 고을의 화목을 위해 힘썼고, 경서를 가까이 하며 세상을 마쳤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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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代祖考杜門子公墓表 / 기록자료>고도서 / 김식찬金耀亨의 묘갈명이다. 김요형의 자는 伯達, 본관은 光山이다. 과거에 몇 번 실패한 후로는 과거의 뜻을 접고, 산림에 학문연구에 진력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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叔父徵士公墓誌 / 기록자료>고도서 / 김식찬金台翼의 묘갈명이다. 김태익의 자는 君成, 호는 書巢, 본관은 光山이다. 가업을 이어받아 학문에 힘썼으며, 정조가 벼슬을 내리자 사양하고, 세 번이나 불렀지만 끝까지 나가지 않았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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龜山卞先生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식찬卞璧의 행장이다. 변벽의 자는 獻之, 호는 養性齋, 본관은 密城이다. 부모가 살아계실 때나 돌아가셨을 때, 지극한 효성과 예를 다하였다. 나라에서 벼슬을 주고 불렀으나 끝내 나가지 않고, 鳳凰山 아래에 "養性齋"를 지어 거처하면서 학문연구에 진력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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槐亭朴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식찬朴瑄의 행장이다. 박선의 자는 子復이다. 임진왜란 때 집안 14명의 義士가 의병에 참가하여 전사하거나, 다치기도 하였다. 대부분 국가에서 벼슬을 追贈하기도 하고, 벼슬을 직접 내리기도 하였다. 박선은 나라에서 내린 벼슬을 끝까지 사양하고 "槐亭"을 짓고 학문연구에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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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有齋公家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식찬金鏞의 가장이다. 김용의 자는 鳴久, 호는 六有齋, 본관은 光山이다. 한 평생을 성리학 연구에만 전념하였고, {심경}과 {주자서절요}를 매우 좋아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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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松亭李先生遺事 / 기록자료>고도서 / 김식찬李繼陽의 遺事이다. 이계양의 자는 達甫, 본관은 眞寶이다. 퇴계선생의 조부이다. 자질이 뛰어나고 학문이 깊었으나, 癸酉난과 세조가 찬탈을 하고, 六臣이 화를 당하자 세상의 명리에 마음을 두지 않고, 독서하고 자식을 훈육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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崇禎處士朴公遺事 / 기록자료>고도서 / 김식찬朴璥의 유사이다. 박경의 자는 栗甫, 호는 東川, 본관은 務安이다. 젊어서 과거에 뜻을 두고 여러번 鄕試에는 합격하였지만 禮部이 시험에는 번번히 실패하였고, 또 광해군의 난정을 본 후로 벼슬할 마음을 그만두었다. 병자호란으로 청과 화친을 맺었다는 말을 듣고 비통한 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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戶曹正郞贈禮曹參議醒庵權公遺事 / 기록자료>고도서 / 김식찬權士恭의 유사이다. 권사공의 자는 子安, 호는 醒庵, 본관은 安東이다. 공의 주손이 몇 번 끊어지고 집안에 화재를 당하여 자세한 이력을 알 수 없다. 戶曹正郞으로 있던 1617년에 廢母論이 일어나자 그 부당함을 상소하였는데, 도리어 임금을 저버리고 역당의 편을 든다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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輓詞 / 기록자료>고도서 / 김식찬저자의 죽음을 애도한 글이다. 李仁行, 琴汝稷, 朴宗潤, 金瑩, 洪履厚가 각각 지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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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식찬저자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李野淳, 李秉運, 屛암書院儒生, 琴詩述, 李彙淵, 李秉遠, 卞纏, 權時敏, 申甲俊, 金熙復, 柳道明, 甥姪 李秀應, 女서 李彙冕, 李彙담, 外孫 李箕煥, 族曾孫 濟漢, 族孫 行敏, 族從姪 , 族姪 商儒, 門下 族孫 海敎가 각각 지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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遺事 / 기록자료>고도서 / 김식찬曾孫 金濟冕이 찬술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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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碣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식찬李中轍이 찬술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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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識 / 기록자료>고도서 / 김식찬7대손 金永倬이 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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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여재집 / 기록자료>고도서 / 유규臨汝齋 柳의 문집. 9권 5책(부록 포함). 목판본. 문집의 서문은 李羲發이 썼고 行狀은 三從孫인 柳台佐가 썼으며, 哲宗연간에 손자 柳鶴祚가 편집·간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卷1에는 오언시·칠언시·만시 등 詩 144首가 수록되어 있고, 사림을 대신해서 지은 「屛山書院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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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기록자료>고도서 / 유규立春, 早春書懷, 雲谷書堂偶吟, 辛未仲春與李起初(宐震)李夏瑞(宇錥)鄭昌伯(忠弼)會雲谷書堂拈韻共賦九首,奉呈寢郞宗兄(澐)赴恭陵直, 閒居戱題, 峴寓秋懷, 十槐淸陰載在襄陽地誌而朽折殆盡只餘二樹今年又一爲風顚一爲火爇感成一絶, 四月初吉聞鶯,陪李大山朴南野遊謙亭申子長(體仁)金直夫(宗敬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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屛山書院請額疏(代士林作) 28 / 기록자료>고도서 / 유규屛山書院에 賜額을 내려줄 것을 청하는 상소문으로 사림을 대표하여 지은 글이다. 병산서원은 西厓 柳成龍과 그의 아들인 柳袗을 함께 배향하고 있는 곳으로 儀文의 준비나 유생들의 講肄之節이 玉山書院이나 陶山書院 못지 않으나 대대로 임금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 미처 사액을 청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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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崔百弗庵(1783) 1 / 기록자료>고도서 / 유규崔興遠에게 보낸 편지이다. 저자가 부모상을 연달아 당하여 5년이나 거상 중에 있었다는 사실과 위 항렬이 모두 떠나고 從弟와 서로 외로움을 달랬다는 그간의 정황을 먼저 말하고, 천연두 유행과 종제의 병세를 들어 저자의 종제가 장인인 최흥원에게 문병갈 일자를 며칠 늦췄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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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崔百弗庵(1784) 2 / 기록자료>고도서 / 유규노년인 최흥원의 건강을 걱정하고 아울러 저자의 부실한 공부를 한탄하며, 문하에서 직접 모시고 배우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내용과 함께 안부를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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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蔡樊巖(1795) 2 / 기록자료>고도서 / 유규蔡濟恭에게 보낸 편지이다. 채제공의 양아들인 蔡弘遠이 전도가 밝으니 잘 가르쳐 근본을 두터이 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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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蔡樊巖(代士林作) 3 / 기록자료>고도서 / 유규채제공이 정조의 명을 받아 편찬을 맡았던 『人物考』에 영남 유현들의 이름이 누락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병산서원 소속 사림을 대표하여 누락된 병산서원 소속 선배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보내니 보충하여 달라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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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外舅李公(德祥) 4 / 기록자료>고도서 / 유규저자의 장인인 李德祥에게 보낸 글이다. 정신을 못 가눌 정도로 심한 열병을 앓아 글 쓰는 것도 어려운 지경이었다는 정황을 전하는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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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李台甫(1792) 4 / 기록자료>고도서 / 유규字가 台甫인 李아무개에게 보낸 글이다. 恩命을 받고 肅拜를 올린 뒤 1년이나 되도록 귀향하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조카가 일찍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마음이 슬펐다는 내용과 德懋가 陶山別試에 응시 했는지를 묻고 그의 인물됨이 훌륭하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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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李台甫(1806) 5 / 기록자료>고도서 / 유규李台甫의 맏아들을 칭찬하며 『論語』 공부를 좀 시킬 것을 권유하고, 息爺의 글 중 象數說과 璣衡제조법에 대한 글을 『甁窩集』에서 읽은 적이 있다는 사실과 詩 지은 것을 모아서 보내주면 그에 화답하는 시를 보낼 것이라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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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鄭昌伯(1751) 5 / 기록자료>고도서 / 유규字가 昌伯인 鄭아무개에게 보낸 편지이다. 지난번 화답하지 못한 시를 몇 편 적어 보낸다고 하며, ‘安宅’과 ‘霞洲逸居’ 등의 현판 글씨를 써서 보내 줄 것을 부탁한 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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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鄭昌伯 6 / 기록자료>고도서 / 유규여름이래로 이름 모를 병을 앓아 몸이 바싹 여위고 정신이 혼미하여 半生半死로 지내고 있으며, 눈병마저 겹쳐 몸을 지탱하기가 힘들다는 내용과 함께 江菴에 기거하는 것도 몸조리 때문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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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鄭昌伯(1785) 7 / 기록자료>고도서 / 유규사촌형이 상을 당한 사실과 정창백의 너무 狷介한 처신이 못마땅하다는 심정을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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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鄭昌伯(1787) 7 / 기록자료>고도서 / 유규宗兄이 죽고 난 후 집안이 더욱 쓸쓸하다는 내용과 저자에게 글을 배우고 있는 아이들 중 榮이 가장 나은 이유가 정창백이 이끌어준 공이 있기 때문이며, 다시금 창백의 杜門自修를 안타까워 한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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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鄭昌伯 8 / 기록자료>고도서 / 유규南野 朴孫慶의 글 읽는 자세를 설명하면서 저자의 능력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경우임을 말하고, 達城孫氏 친구의 「璣衡說」에 대한 설명을 읽고 그것에 대한 의문점을 제시하면서 註를 다시 살펴보고 답장을 해 달라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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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申子長(1794) 9 / 기록자료>고도서 / 유규字가 子長인 申아무개에게 보낸 글이다. 여름에 동생 내외가 죽어 장례를 치른 지 며칠 안 된다는 내용과 함께 영남지방의 흉년이 특히 심하여 풀뿌리로 연명해야 될 처지라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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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申子長(1804) 9 / 기록자료>고도서 / 유규최근의 근황을 주고받은 내용으로 노경으로 인하여 閬苑瑤地와 같은 곳을 함께 노닐지 못함을 아쉬워한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