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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孺人冶城宋氏殉節行蹟後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孺人 冶城宋氏의 순절한 행적에 대한 기록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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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義城三烈士碑壇記後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丙‧丁의 난리에 순절한 義城의 세 烈士의 碑壇 기문에 대한 후기이다. 세 열사는 一室의 삼형제로 국가의 급난을 당해 대의를 지켰다. 세 열사는 金燁‧金煜‧金燦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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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吳執義疏藁後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執義 吳翼煥(字 鵬若)의 상소 초고에 대한 후기이다. 집의의 아우 吳翯煥을 통해 집의의 시문과 상소 초고를 보고 나서 그 감회를 기록한 것이다. 군주와 신하 간의 진정한 만남이 어려움을 서술하면서 뜻을 펴지 못한 오익환을 슬퍼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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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裵槐潭稿後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槐潭 裵相說(1759~1789)의 원고에 대한 후기이다. 괴담은 봉화 석평 출신으로 서른의 나이로 요절했는데 시문 및 천문‧역학‧상수학에 뛰어난 학자였다. 그가 제작한 渾天儀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소장되어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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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溪巖金先生行狀後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溪巖 金坽의 행적을 기술한 行狀 뒤에 쓴 짤막한 글로, 壬亂에 창의한 계암의 절개와 뜻을 간명하게 묘사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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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登瀛社景慕錄後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영주 순흥에 있는 登瀛社의 『景慕錄』을 보고 쓴 글이다. 영주 출신의 선비 성언근은 『등영경모록』을 편집하고 나서 서문을 지어 그 사실을 기술하고, 저자에게 후기를 짓게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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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白屋翁家狀後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저자와 志氣가 서로 통하였던 白屋翁의 家狀 뒤에 붙인 글이다. 백옥옹의 조카인 夔漢이 가장을 보여주자 그 인품을 상상하며 한숨을 쉬며 지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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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權處士稿後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花山[안동]에 사는 權處士의 원고 뒤에 붙인 글이다. 권처사의 文字가 雕飾을 구하지 않아 質朴한 것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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誄辭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梧山 徐昌載‧召羅 洪錫範‧大宗叔 益源‧三從妹 完山李氏婦‧三從弟 井瑞 등에 대한 애도의 글이다. 대부분 서문이 병기되어 있어 뇌사를 지은 사연과 死者에 대한 저자의 진솔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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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李致道‧丁聲伯‧任盛初 夏常‧舅氏 金用休‧權啓亨‧南宗伯‧金禹行智吉‧權慶運‧白屋翁‧族兄 子章‧三從弟 蓍老 耆漢‧伯母 孺人李氏‧季父府君‧殤子七魯渼 등의 죽음을 애도한 글이다. 代作도 수록되어 있으며 遷葬 시에 지은 제문도 1통 실려 있다. 특히 아들의 죽음을 곡한 제문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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陶軒柳公墓碣銘(幷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전주류씨인 陶軒處士 柳友潛(字 尙之)의 행적을 적은 墓碣銘이다. 서문이 병기되어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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琴隱朴公墓碣銘(幷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추월당 한산두의 문인으로 양양[예천]의 琴隱洞에 살던 自然亭 朴希文(字 士彬)의 행적을 적은 墓碣銘으로 서문이 병기되어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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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政大夫刑曹參議東屛李公墓碣銘(幷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통정대부로 형조참의를 지낸 東屛 李世泰(字 季通)의 행적을 기록한 墓碣銘이다. 서문이 병기되어 있다. 동병은 진성이씨로 퇴계의 후손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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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副承旨斗菴金公墓碣銘(幷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좌부승지를 지낸 斗菴 金若鍊(字 幼成)의 행적을 정리한 墓碣銘으로 서문이 병기되어 있다. 두암은 선성김씨로 문절공 김담‧백암 김륵의 후손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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仙槎縣朱公墓碣銘(幷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仙槎縣[울진]에 살던 養性齋 朱尙德(字 汝潤)의 행적을 정리한 墓碣銘으로 서문이 병기되어 있다. 양성재는 전광옥‧박경지 등에게 글을 배웠으며, 사서오경을 근본으로 삼고 『소학』을 일상의 공부로 삼았다. 묘갈명은 朱始陽의 행장에 근거해 작성되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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族祖處士公墓碣銘(幷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저자의 族祖되는 處士 황보(字 汝線)의 행적을 정리한 墓碣銘으로 서문이 병기되어 있다. 黃夔漢의 仲父가 지은 遺事를 근거로 작성되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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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叔祖承政院左承旨負暄堂公碣陰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저자의 叔祖되는 승정원 좌승지를 지낸 負暄堂 黃是(字 是之)의 묘비석의 陰記이다. 예전의 誌文을 바탕으로 빠진 것을 보충하였으며 銘詞는 없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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損齋南公墓誌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저자의 벗인 損齋 南漢朝(字 宗伯)의 묘소의 誌文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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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祖考察訪府君墓誌銘(幷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저자의 先祖로 안기도 찰방을 지낸 黃立顯(字 而晦)의 묘소의 誌文이다. 명사가 실려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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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高祖成均進士白羽公墓誌銘(幷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저자의 從高祖로 成均 進士를 지낸 白羽 黃琰(字 季玉)의 墓誌銘이다. (幷序)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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舊校洞先塋族葬誌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풍기의 서쪽 예전 校洞에 위치한 先塋의 族葬에 대한 기록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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伯父處士府君墓誌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풍기군 서쪽에 있는 伯父 黃集大(字 成甫)의 묘소의 誌文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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再從叔處士府君墓誌銘(幷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저자의 再從叔되는 黃濟大(字 汝達)의 墓誌銘이다. 황제대는 소시의 失學을 한탄하여 濂洛의 서적을 모으고 현달한 자를 쫒아 견문을 넓히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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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兄處士公墓誌銘(幷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사촌형 黃連漢(字 龍見)의 墓誌銘이다. (幷序)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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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均進士枕肘齋鄭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成均 進士에 오른 枕肘齋 鄭度均(字 正平)의 행적을 정리한 행장이다. 침주재는 동래정씨로 천성이 강직하여 구차하지 않았다. 숙종에게 소를 올려 자식의 본분을 다할 것을 간언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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岐峯柳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전주 류씨로 안동 무실에 터전을 마련한 岐峯 柳復起(字 聖瑞)의 行狀이다. 학봉 김성일에게 글을 배웠으며 문학과 덕량이 추중을 받았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동지들을 모아 여강서원에서 창의를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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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均進士秋月堂韓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금계 황준량의 문인으로 成均 進士에 오른 秋月堂 韓山斗(字 士贍)의 行狀이다. 추월당은 청주한씨로 풍기 魯溪에 거처하면서 經史를 논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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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西權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예천 대소에 살던 松西 權應鐸(字 天振)의 行狀이다. 송서는 저자에게 中表兄이 되며 송서의 손자 權顯相의 청에 의해 행장이 작성되었다. 송서는 정지일‧권용‧박손경 등으로부터 학문적 영향을 받아 궁행 실천을 위주로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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琅城居士吳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보성에 사는 琅城居士 吳光復(字 伯心)의 行狀이다. 오광복은 청주오씨로 妙年에 重試에 수석하여 臺憲의 벼슬을 지낸 오익한의 아버지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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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士朴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處士 朴會元(字 極初)의 行狀이다. 박회원은 소고 박승임의 從父되는 朴璡의 후손으로 안동에 거주하였다. 자식들 교육에 열성을 보였으며 학문은 모름지기 실지에 힘써야 하며 기질을 변화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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孺人安東權氏事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저자의 벗인 李季翼의 亡婦 孺人 安東權氏의 행실을 기록한 글이다. 유인 안동권씨는 冲齋 權橃의 후손으로 화재가 나자 姑氏를 구하다가 죽었다. 임신년에 조정에서 旌表의 명이 내렸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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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叔祖通訓大夫兵曹佐郞釣臺公事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저자의 叔祖로 통훈대부 병조좌랑을 지낸 釣臺 黃有中(字 中正)의 사적을 기록한 행장이다. 조대는 식암 황섬의 장자로 소시에 월사 이정구와 함께 공부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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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祖考忠佐衛部將府君家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저자의 祖考로 忠佐衛 部將을 지낸 黃立穎(字 見甫)의 家狀이다. 재주가 대단하고 기질이 호탕하여 머리를 굽힌 적이 없었으며 시문도 迭宕하여 뛰어났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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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部參奉丹邱黃公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봉화 문단 출신으로 東部 參奉을 지낸 丹邱 黃昌述(字 繼道)의 행장이다. 1708년(숙종 34) 봄 나이 81세로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하당 권두인‧창설 권두경‧청사 권두기‧이명하‧채응만 등과 교유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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亡友徐君行錄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저자의 벗으로 고인이 된 梧山處士 徐昌載의 行錄이다. 오산처사는 대산 이상정의 高足으로 治心과 養性의 공부에 전념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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族祖百忍齋公行錄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族祖되는 百忍齋의 行錄이다. 저자는 소시에 족숙 最源 및 그 재종 泗源과 그 글방에서 공부하였다. 백인재는 예를 좋아하되 바탕이 질박하였고 기질이 강하되 말이 순박하였다. 이 행록은 저자가 직접 견문한 바를 簡約하게 서술하여 보태거나 줄인 것이 없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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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考府君行錄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저자의 先考로 24세로 요절한 黃直大(字 叔方)의 行錄이다. 유복자로 태어난 저자는 諸父에게 들은 바에 의거하여 행록을 작성하였다. 科式‧賦表 등의 글은 혼연히 이루어져 하자가 없으며 기타 行文‧書札 같은 글도 모두 조리가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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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妣孺人淸風金氏行錄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저자의 先妣인 孺人 淸風金氏의 行錄이다. 유인은 어려서부터 고금의 嘉言과 懿蹟을 익혔으며 內則을 이해하였다. 자식 교육에 힘을 쏟아 “내가 죽지 않은 것은 네가 있기 때문인데, 네 아비에게 누를 끼치면 내가 무슨 얼굴로 지하에서 네 아비를 보겠느냐?”며 저자의 면학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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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述 / 기록자료>고도서 / 김대진저자가 자신의 행적을 정리한 글로 戊寅年(1818) 4월 9일에 지었다. 저자는 이글의 벽두에서 憂患에서 나고, 우환에서 늙고, 우환에서 죽는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그 우환 속에서도 학문에 대한 열정만은 한평생 식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자성의 의식에 근거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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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재집 / 기록자료>고도서 / 유후장주일재집(主一齋集) 主一齋 柳後章의 문집. 6권 3책. 柳後章의 8代族玄孫인 奭佑가 주장하여 유고를 모아서 10世孫 宗夏가 1974년에 10行 22字 3冊의 석인본으로 간행하였다. 金胤錫이 序文을 썼고, 柳宗夏가 跋文을 썼다.유후장은 문장과 저술에 뜻을 두지 않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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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기록자료>고도서 / 유후장秋日遊北潭偶吟四首, 挽葛庵李先生(玄逸), 又(代), 又(代), 挽三從叔靜齋公(世楨)二首(代), 又, 挽宗叔佐郎公(世哲), 又(代), 挽三從叔 軒先生(世鳴, 代), 挽金參判(빈)二首, 挽鶴溪金公(時任, 代), 又, 挽洪洗馬(相民)大夫人金氏(代), 挽戚叔金都事(命基)二首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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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諮議初疏 / 기록자료>고도서 / 유후장世子侍講院 諮議 제수에 대한 첫 번째 辭職疏이다. 유후장은 44세 되던 1693년 12월에 世子侍講院 諮議로 제수된 바 있는데, 이에 대해 사직을 주청하는 첫 번째 상소문이다. 세자시강원 자의라는 직책의 중요성에 비해 자신은 稟質, 文詞, 經史 등 모든 면에서 부족함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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再疏(逸) / 기록자료>고도서 / 유후장世子侍講院 諮議 제수에 대한 두 번째 辭職疏이다. 疏文 자체는 일실되어 수록되지 못했으나, 문집 간행자가 遺事의 내용을 토대로 하여 이 再疏에 대한 숙종의 批答 내용을 주석으로 인용해두었다. 다음 三疏의 내용을 볼 때 초소와 삼소 사이에 재소가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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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疏 / 기록자료>고도서 / 유후장世子侍講院 諮議 제수에 대한 세 번째 辭職疏이다. 두 번의 辭職疏에도 불구하고 숙종이 계속 올라오라는 비답을 내리자 재차 사직의 뜻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취할 만한 바가 있다면 바로 나아가지 왜 나가지 않겠느냐며 다시금 세자 가르치는 일을 감당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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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疏 / 기록자료>고도서 / 유후장世子侍講院 諮議 제수에 대한 네 번째 辭職疏이다. 세 번의 辭職疏에도 숙종이 여전히 윤허하지 않자 다시금 사직의 뜻을 역설하고 있다. 자신이 나아가는 것이 부당한 이유를 들고, 신병을 더욱 강조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에 대한 숙종의 비답은, 사직의 뜻이 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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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持平疏(代) / 기록자료>고도서 / 유후장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持平職을 사직하는 내용으로 올린 상소문이다. 의뢰인이 누구인지는 미상이고, 다만 이 소를 올린 당시 의뢰인의 나이는 74세로 확인된다. 전에 올린 사직소에 의해 체직이 윤허되었는데 몇 달 만에 또 같은 관직에 제수 받고 다시 사직의 뜻을 밝히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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再疏(代) / 기록자료>고도서 / 유후장앞의 상소문에 윤허가 내려지지 않아 다시 올린 상소문으로 역시 代人作이다. 성은에 감격하면서도 노쇠함을 이유로 직책에 나아갈 수 없음을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다. 身病이 날로 더해져서 임무를 감당하기는커녕 몸을 건사하기도 어려움을 다시 강조하면서, 병이 이 정도로 깊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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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掌令疏(代) / 기록자료>고도서 / 유후장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掌令職을 사직하는 내용으로 올린 상소문이다. 의뢰인이 누구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유후장이 祭文을 지은 바 있는 자신의 再從祖 柳千之일 가능성이 있다. 대인 현사를 등용하는 것이 국가의 중대한 문제인데 자신과 같은 부족한 사람을 등용하면 국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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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校理疏(代) / 기록자료>고도서 / 유후장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校理職을 사직하는 내용으로 올린 상소문이다. 의뢰인이 누구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유후장이 祭文을 지은 바 있는 李漢命일 가능성이 있다. 조금이라도 감당할 만한 재주가 있다면 뛰어올라가 성은에 보답할 터이지만, 그럴 수 있는 상황이 못됨을 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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斥牛栗文廟從祀疏 / 기록자료>고도서 / 유후장牛溪 成渾과 栗谷 李珥를 文廟에 從祀하는 일의 부당함을 논한 상소문이다. 먼저 문묘 종사의 중대함을 강조하고 학술과 도덕 양 방면에서 전혀 의론의 여지가 없어야 하므로 치우친 의견에 의해 문묘 종사 대상을 변경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어서 이이와 성혼의 결함을 각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