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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弟士會(後萬)文 / 기록자료>고도서 / 유후장族弟인 柳後萬을 위해 지은 제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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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族弟善兼(後達)文 / 기록자료>고도서 / 유후장族弟인 柳後達을 위해 지은 제문이다. 자기보다 몇 살 연하인 고인과 柳世鳴의 문하에 함께 있으면서 7∼8년간 숙식을 함께 한 일을 추억하고, 1683년 조모의 상을 치를 때에 본가에 천연두가 돌아 다들 참여하기를 꺼렸는데 고인은 개의치 않고 와서 돌보아주었던 일화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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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安參奉(重鉉)文(代) / 기록자료>고도서 / 유후장參奉 安重鉉을 위해 지은 제문의 代人作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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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申參奉(命龜)文(代) / 기록자료>고도서 / 유후장參奉 申命龜를 위해 지은 제문의 代人作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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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李護軍(達意)文(代) / 기록자료>고도서 / 유후장護軍 李達意을 위해 지은 제문의 代人作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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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亡弟生員德應(後康)文(葬時) / 기록자료>고도서 / 유후장1697년에 유후장의 동생 生員 柳後康의 葬時에 지은 제문이다. 죽음이야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지만 연로하거나 질병이 있지도 않았는데 43세 중년으로 기력도 좋던 사람이 갑자기 죽은 것이 믿기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동생의 생전 품성과 행적을 칭송하였고, 이어서 자신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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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1699.8.11. 再朞時) / 기록자료>고도서 / 유후장동생인 生員 柳後康의 再朞時에 지은 제문이다. 동생이 죽은 지 2년 만에 동생의 열한 살짜리 아들과 세 살짜리 유복녀가 열흘 사이에 연달아 요절하였음을 탄식하며 제대로 돌보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는 내용이다. 그 사이에 맏누이, 큰 고모, 그리고 伯父의 상을 연달아 당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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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考拙齋府君遺事 / 기록자료>고도서 / 유후장조부인 拙齋 柳元之(?∼1674)의 언행을 기록한 글이다. 節目別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원지는 병자호란 당시 안동부의 義將이었던 李弘祚(字 汝廓, 號 睡隱:1595∼1660)가 일 처리를 규모 있게 하지 못하고 심지어 군량미 수송의 일에 조차 두서가 없음을 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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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母淑人聞韶金氏行跡記事 / 기록자료>고도서 / 유후장조모이자 柳元之의 부인인 聞韶金氏의 행적을 기록한 글이다. 16세에 시집오자마자 당시 병환 가운데 있던 증조모 대신 가사를 맡아서 서책에만 빠진 남편을 대신해 집안의 온갖 대소사를 다 처리하느라 고생이 많았다는 이야기며, 일 처리에 늘 올바르고 의로우셨다는 이야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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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詩 / 기록자료>고도서 / 유후장李惟樟(字 夏卿, 號 孤山: 1624∼1701)이 유후장에게 준 세 首의 贈詩이다. 뒤의 두 수는 유후장이 入京한 해에 쓰여진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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輓詞 / 기록자료>고도서 / 유후장유후장의 죽음을 애도한 輓詞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다(게재순). 權斗寅(字 春卿, 號 荷塘 雪窓:1643∼1719), 權斗經(字 天章, 號 蒼雪齋:1654∼1726), 李琬, 李光庭, 金台重, 李유(字 巨源, 號 龍浦:1669∼?), 李영, 趙鳳徵, 鄭天周, 李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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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文 / 기록자료>고도서 / 유후장유후장을 기리는 제문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다(게재순). 權구(1672∼1749, 字 方叔, 號 屛谷), 權斗經(2편), 李成麒(同門弟), 權壽元, 權壽泰, 朴昌世(內從弟), 鄭昌興(姪壻), 安項(門人), 洪儉(世侍生), 李集(門人), 柳萬河(家大人), 柳經河(再從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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靜齋記文 / 기록자료>고도서 / 유후장族叔인 유세정이 유후장에게 대해 기록한 글이다. 유후장의 성품과 행실에 대해 간략하게 칭송한 뒤, 그는 평생 남에게 알려지기를 꺼려하는 처사적인 삶을 살았고 어려서부터 문예에 뛰어났는데 이는 家學의 전통에 힘입은 것이라 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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遺事 / 기록자료>고도서 / 유후장유후장의 행적에 대한 여러 기록을 모은 것으로, 유후장의 모친 박씨가 한글로 꿈 내용을 적은 기록에서 하나를 실었고, 대부분 유후장의 從子 柳聖和(字 介仲, 號 西湖)가 기록한 유사와 유후장의 아들 柳聖師가 기록한 유사를 출처로 하였다. 문집 간행인의 注에 의하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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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유후장유후장의 族玄孫인 柳疇睦이 찬술한 유후장의 行狀이다. 가계와 생장과정, 학업, 덕성, 행적, 죽음, 학문 연원, 유후장 이후의 가계, 그리고 자신이 행장을 쓰게 된 경위 등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집안은 豊山柳氏로, 高麗 忠烈王 때 급제한 柳伯을 鼻祖로 하여 柳從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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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誌 / 기록자료>고도서 / 유후장유후장의 從孫인 柳규가 찬술한 유후장의 墓誌文이다. 가계와 출생, 생장 과정 및 결혼, 학업, 공부와 생활에 관련된 일화, 학문 연원, 몇 차례의 除授와 辭職, 학문에 침잠한 晩年, 문장을 자임하지 않았으나 몇 차례의 상소문으로 서울 문인들의 칭송을 받은 일, 모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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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碣銘 / 기록자료>고도서 / 유후장興陽의 李時亨이 찬술한 유후장의 墓碣銘이다. 유후장의 8세손 유석우의 간청을 거절할 수 없어 행장에 의지해 쓴다고 집필 경위를 밝혀 두었다. 가계 및 출생과 수학기의 일화, 수차의 제수와 사직소, 그리고 죽음과 이후 가계 등의 일을 적었다. 특히 유성룡을 위해 변무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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嶺南人物考抄 / 기록자료>고도서 / 유후장正祖의 명에 의해 李儒脩(字 周臣, 號 錦里), 韓致應( 字 혜甫, 號 병山:1760∼1824) 등이 찬술한 『嶺南人物考』 가운데 유후장과 관련된 조를 뽑아 실었다. 본문은 자호, 본관, 자의 벼슬 제수, 생몰년 등의 간략한 소개로 이루어져있고, 이황에서 유성룡, 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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養吾堂記 / 기록자료>고도서 / 유후장유후장이 강학하던 堂을 두고 月城의 崔南復이 쓴 記文이다. 유후장이 강학하던 堂을 後孫인 柳謙祚가 신축하면서 자신에게 記文을 의뢰했다는 집필 경위를 서두에 적었다. 이어서 유후장의 堂號인 "養吾"의 의미를 齋號인 "主一"과 연관하여 풀어서, 敬 공부와 養氣 공부의 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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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會日有感詩(幷序) / 기록자료>고도서 / 유후장유후장의 從6代孫인 柳道獻이 契會日에 유후장을 기리며 쓴 시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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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石時告由文 / 기록자료>고도서 / 유후장유후장의 從5代孫인 柳進翼이 安石할 때 지은 告由文이다. 유후장의 행적을 서술하고 추모한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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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碣告由文 / 기록자료>고도서 / 유후장興海의 裵東煥이 수碣할 때 지은 告由文이다. 유후장의 행적과 가학연원 등을 서술하고 추모한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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跋 / 기록자료>고도서 / 유후장유후장의 10세손인 柳宗夏가 1974년에 문집을 간행하면서 말미에 쓴 跋文이다. 300년이 지나서야 유고를 간행하게 되어 편질이 영성하게 되었음을 애석해하였다. 그나마 인멸되고 남은 것을 두루 모았으며, 특히 成渾 李珥, 金長生, 宋時烈 등의 從祀에 반대하는 이른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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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봉집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간죽봉집(竹峯集) 竹峯 金侃의 문집. 4권 2책. 석인본. 서문은 李祥鎬가 썼고 발문은 저자의 10대손 憲在가 썼다. 일찍이 저자의 후손 宗鐸(號 畏厓, 1757~1812)이 약간의 시문과 부록을 수습하고 간찰과 잡저를 세의가 있는 여러 집안에서 찾아내었으나 간행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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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간待友不至, 次權天章(斗經)韻, 屛院夜吟, 偶吟寄李時徵(容全), 廣興道中, 觀音村雨後二首, 挽芝村金公(邦杰), 次李侯叔謙(益著)韻, 溪上次金君(學海)韻, 次鳥赤松亭韻, 挽玉光重(世寶), 道齋堂次李侯叔謙韻, 南城酒席次李悅卿(浹)韻, 悅卿嘲余違約又步前韻, 挽李高城(後榮),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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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간次孟浩然歸終南韻詠懷, 次老杜韻自遣, 夜坐無聊次老杜客夜韻, 上前邱見江水流澌船路始通二首, 海陽柳台馳報金雞將入頭流喜而賦之, 將入頭流過岳陽花開二首, 入雙溪寺次初上人軸中李五峯韻, 又次張谿谷韻, 又次崔遲川韻二首, 自雙溪七佛二首, 三神洞, 七佛庵二首, 新興寺, 贈太古庵修上人, 佛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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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判决事疏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간저자에게 掌隷院 判決事가 제수된 것에 대한 사직소이다. 내용은 대개 저자가 벼슬길에 들어선 이래 24년이 되었다고 하고 당시까지 받은 벼슬이 양사의 말단직이거나 병조의 낭관 직이 가장 높은 자리였으니 재주 없음을 가히 미루어 알 수 있다고 하고, 이런 사람이 다시 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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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金威仲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간金威仲에게 보낸 편지이다. 김위중이 부모가 구존한 가운데 문과에 급제한데 비해 자신은 소과에 급제한 것에 탄식하였다. 편지 가운데 魂魄이 함께 없어진다는 설은 어디서 들은 것인지, 스스로 지어낸 것인지를 물었다. 초대에 응하지 못한다는 뜻과 함께 李司諫이 참석하는 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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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安吉甫(日履,1703)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간安日履에게 답한 편지이다. 저자가 유배에서 풀려났음을 말하고, 이는 처음부터 무고에 의한 것임이 밝혀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같은 죄를 받고 유배된 벗들이 있는데 혼자 돌아오게 되었으니, 사람의 일을 알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이라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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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李子昂(山斗)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간李山斗에게 답한 편지이다. 지난 해 말에 뜻이 같은 벗들과 저녁 늦도록 담소한 것이 무척 의미가 있었다고 회고하고, 이번에 거동할 때 만약 보름 전에 모일 수만 있다면 때를 보아서 만나 볼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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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玉諧伯(振韶)汝集(振)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간玉振韶·玉振에게 보낸 편지이다. 척족들이 모두 잘 있는 안부를 물었다. 풍산현의 李진사가 妻喪을 당했다고 하면서 노인의 체력으로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 하였다. 백부의 상사를 당한데 대해 위로하고 뜻밖에 편지를 받고 초겨울의 추위에 잘 지내고 있음을 알게 되어 기쁘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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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豐山士友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간풍산현의 유림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임란 때 소실된 豐岳서당의 중건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풍악서당은 전답이 있었고 명종 때 사액되어 풍산유림들의 귀의처가 되었는데 불행히 전란으로 잿더미가 되어 학전과 노비가 다른 데로 소속되었음을 말하였다. 원로들이 중건을 도모하였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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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趙是光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간趙是光에게 답한 편지이다. 책을 간행하는 일에 考訂의 역할을 부탁한데 대해 사양하는 내용이다. 병든 몸으로 감당할 수 없으며 더욱이 타지로 여행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조시광의 부탁에 부응할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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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權(相德)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간權相德에게 보낸 편지이다. 서원의 사무는 저자의 근력을 가늠해 볼 때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음을 말하고 원장직을 그만 두고자 하는 의사를 밝혔다. 비록 주변에서는 만류하지만 모양을 따지지 말고 체직을 허락해 주면 좋겠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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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孤山李先生文(1703)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간저자의 스승인 孤山 李惟樟에 대한 제문이다. 연원이 깊고 독실한 학문과 정숙하고 맑은 자세를 가졌다고 하고, 선생이 가니 사림이 본받을 대상이 없어졌다고 했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순숙하면서도 삼가고 엄격하게 스스로를 지켰고, 뜻을 세움이 견고하고 확실하면서도 물러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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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宗兄美村公文(1707)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간종손인 美村公 健에 대한 제문이다. 의리를 깊이 쌓고 고문에 침잠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태만함이 없었다. 집안을 다스림에 있어서 오로지 효성을 위주로 하였으며 배움에 있어서는 스승의 훈계를 잘 지켜 가문의 명예를 보전하였다. 과거공부에 힘쓴 것도 오로지 부모의 뜻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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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柳公(後沆)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간柳後沆에 대한 제문이다. 이치를 파악함에 정밀하였고 식견은 명철하였지만 세상의 명예와는 어긋났다고 하였다. 구릉의 소나무와 골짜기의 난초는 스스로 무성하고 스스로 향기를 피우니 벼슬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자연에 은거하기를 즐겼고 안으로 수양하기에 힘썼다. 나이 차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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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李達卿文(1713)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간李鴻逵에 대한 제문이다. 마음이 한 가지이면 금속도 끊는다 하였는데, 이홍규와 저자는 몸을 둘이지만 마음은 하나였다고 했다. 저자는 어리석음을 잊고 이홍규는 나이를 잊고 어울렸다. 어려서부터 알기 시작해서 과거시험장에 출입할 때까지 서로 의지하면서 도왔고, 저자가 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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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再從兄(侹)文(1715)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간저자의 재종형 侹에 대한 제문이다. 60을 下壽라 하는데 공은 4년을 더하였고, 자식이 하나라도 적지 않은데 공은 셋이나 되니 하늘이 공에게 내린 것이 이미 적지 않다고 하였다. 공의 죽음에 대해 향당에서 애도하니, 이것은 공이 한 집안이 아닌 한 고을에서 차지하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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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李景古(基晩)文(1719)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간李基晩에 대한 제문이다. 66세로 죽었으며 병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많다고 하면 이기만보다 더 많은 사람도 얼마든지 있고, 병 때문이라고 하면 이기만보다 더 병이 깊은 사람이 있는데, 정신이나 근력이 그다지 떨어지지 않고 등에 종기가 좀 있었던 것으로 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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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李時徵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간李時徵에 대한 제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문예가 뛰어나 향시에서 누차 장원을 차지하였는데 재주와 수명은 서로 어긋나는 것인지. 만년에 성균관에 들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초야로 돌아와서 독서로 낙을 삼았다고 했다. 40여년을 청빈하였고 서로 권면하여 노년을 기약하였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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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陽謫行日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간1701년(숙종 27) 호남유림을 중심으로 沙溪 金長生을 문묘에 배향하자는 의론이 제기되었을 때, 저자가 疏首가 되어 반대 상소를 하였다. 그러나 이 일로 집권세력의 미움을 받아 光陽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후 방환되었다. 이 내용을 1701년 1월 21일 상소를 올리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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附重牢宴序(金泰運)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간1732년(영조 8) 4월 27일 저자의 나이가 80이 되어 重牢宴을 열었을 때 金泰運이 서문을 쓴 것이다. 영남의 종가에서 모두 참석하여 축하였는데, 저자는 예복을 입고 합근례를 행하였다. 저자가 처음 혼례를 할 때는 실 한 타래와 비단 한 필이 있었을 뿐인데 지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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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狀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간저자의 행장이다. 휘는 侃, 자는 士行, 성은 金氏, 자호는 竹峯, 본관은 豊山이다. 父는 진사 弼臣이고, 母는 禮安 李氏로 1653년(효종 4)에 태어났다. 조실부모하고 백부의 집에서 자라 孤山 李惟樟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1693(숙종 19)에 성균관에 진학하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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遺事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간행장과 대동소이한 내용으로 1904년에 저자의 6대손 尙欽이 썼다. 시조는 고려 判相事 文迪이다. 7대조는 楊震이며 호는 虛白堂이고 벼슬은 직제학, 삼도 관찰사, 공조참판을 지냈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권신 金安老의 배척을 받았지만 문장과 덕업으로 시대의 추앙을 받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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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碣銘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간행장과 대동소이한 내용으로 서문을 쓰고 銘을 붙였다. 銘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깊도다 그 역량이여, 자상하도다 그 어짊이여. 세상을 구하는 재주와 나라를 빛내는 문장이여. 찰방을 맡아 치적으로 세웠으나 나라의 인사는 누가 맡았는가. 올바로 아는 것은 하늘이고 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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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간저자에 대한 제문으로 주로 山南의 명문 가문에서 태어나 군자의 고을에서 성장하였고 현인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향년은 83세라는 내용이다. 洛濱書院 유생 金達圭, 李浹, 柳聖和, 李成全, 柳泳, 李景翼, 李載基, 從弟 佶, 從姪 達龍, 再從姪 瑞鼎, 三從姪 瑞圖, 再從姪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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挽詞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간저자에 대한 만사이다. 李浹, 金聖鐸, 柳敬時, 柳升鉉, 趙德麟, 權萬, 李光庭, 鄭玉, 權榘, 權相一, 李載基, 李景翼, 權德秀, 柳聖和, 柳春榮, 三從弟 佶이 썼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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洛淵書院奉安文(金㙆)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간저자의 위패를 洛淵書院에 모실 때 지은 봉안문으로 金㙆이 지었다. 대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생은 빼어난 자질을 갖추었으며 어린 나이에 스승을 얻어 정성스러운 장려를 받았으니 큰 인물이 될 것으로 기약하였다. 덕과 능력으로 나아갔고 행실은 빠짐이 없었다. 한통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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附周甲戊申上言後回啓 / 기록자료>고도서 / 김간1728년(영조 4) 무신란이 일어났을 때 저자가 의병을 일으키고 조정에 보고한데 대해 임금이 했던 말을 붙여 놓았다. 영남은 추로지향일 뿐 아니라 임진왜란 이래로 창의의 공적이 있었는데, 무신란에서는 더욱 뛰어난 공을 세웠다고 하였다. 특히 安東 등 13고을에서는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