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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憲府掌令農棲李公墓碣銘(幷序) 9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正祖大王 시절 映花堂 과거에서 國子生員 李奎鎭이 장원을 하여 왕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典籍에서 監察로 옮겼다가 江原都事가 되었고 그 후 두문불출하며 경전연구에 몰두했다. 나중에 殷栗縣監으로 나가 치적을 올렸으며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農棲室을 지어 심성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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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子贈司憲府持平李公墓碣銘(幷序) 13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모친의 병에 의원이 牛黃이 가장 좋은 약이라고 하자 도보로 官府에 들어가 온갖 어려움을 겪은 끝에 약을 구해 모친의 병을 낫게 한 효자 영천인 李昌葉의 묘소에 세운 묘갈명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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陜川郡守葛村李公墓碣銘(幷序) 15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처음에는 무과에 급제했다가 다시 寒岡의 문하에 나아가 성리학을 공부한 載寧人 葛村 李潚은 임란이 일어남에 郭再祐와 함께 참전하여 크나큰 전공을 세웠다. 丁酉再亂이 일어남에 합천군수로 역시 큰 전공을 세웠으며 아울러 많은 치적도 올렸다. 광해군이 실정하자 벼슬을 물러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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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兵曹參議行沃川郡守權公墓碣銘(幷序) 19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옥천군수로 임란에 참전하여 수많은 싸움에서 크나큰 전공을 세웠으나 文丹坪 싸움에서 불행하게도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한 안동인 參巖 權希仁에게 조정에서는 兵曹參議를 제수하였다. 이 글은 그의 후손들이 묘소에 비석을 세울 때 요청으로 지어준 묘갈명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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徵士愼菴李公墓碣銘(幷序) 1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正祖大王이 독서하고 행동이 조신한 선비를 널리 구할 때 경상도 관찰사가 추천한 5인 가운데 으뜸으로 뽑혀 임금에게 節用愛民으로 대답하고 당시의 폐단을 구하는 요지를 진술함에 임금께서 繕工監監役을 제수하였다. 그 후에 물러와 더욱 勉勵하여 行義의 독실함과 출처의 올바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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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均進士沙村安公墓碣銘(幷序) 4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어려서부터 詩名이 있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廷試에 발탁되었으나 黜陟되기도 하였다. 임란에 양친을 모시고 聞慶의 萬壽洞에서 무사히 피난을 했고 그 뒤 司馬試에 합격했으나 출사의 뜻을 접고 자연으로 돌아왔다. 忠原의 鯉湖에서 基川의 逸園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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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曹佐郞翠軒朴公墓碣銘(幷序) 6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7세에 『十九史略』을 배워 일 년만에 끝내는 등 재주가 뛰어났던 潘南人 朴仁基가 伯氏와 司馬試에 합격하고 明經科에 급제하여 槐院의 正字가 되었다. 그 후에 著作博士와 典籍을 지냈으나 마마에 걸려 急逝했다. 이 글은 그의 묘소에 쓴 묘갈명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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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金海府使玉山張公墓碣銘(幷序) 8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고려조에 벼슬하여 관직이 김해부사에 이른 옥산 장공의 묘소에 비석이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알아볼 수가 없다. 이에 공의 후손들이 새로 비석을 세울 때 거기에 쓴 묘갈명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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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戶曹參議行司憲府監察孫公墓碣銘(幷序) 10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晦齋 李彦迪의 외고조인 贈 戶曹參議 行 司憲府監察인 손공의 묘비가 오래되어 다시 세울 때 공의 12대손 楨九씨가 族人 鍾遠씨의 편지와 綸九씨가 지은 家狀을 가지고 와서 비문을 요청하기에 써준 묘갈명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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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議李公墓碣銘(幷序) 13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일찍이 司馬試에 합격하여 司議가 되었으나 불행하게도 叔氏의 冤獄에 공이 대신 목숨을 바쳤다. 공의 휘는 季賢, 자는 述聖으로 경주인인데 이 글은 공의 후손들이 묘소에 비석을 세울 때 써준 묘갈명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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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子草堂李公墓碣銘(幷序) 14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延安 李長源은 호가 초당으로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여 효자로 인정을 받았는데 이 글은 공의 6세손 商霖이 묘소의 비석을 세울 때 비문을 요청하기에 써준 묘갈명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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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樞李公墓碣銘(幷序) 16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장수함으로써 通政僉樞, 嘉善同樞, 資憲大夫에 오른 全義人 李震昌의 묘소에 쓴 묘갈명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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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窩趙公墓碣銘(幷序) 18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공의 휘는 輝晉, 初諱는 炅으로 함안인이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모부인에게 교육받았고 자라서는 처사 權大復의 사위가 되었다. 어버이 섬김에 효성을 다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고 종족간에 화목하며 제사를 정성껏 받들었다. 선조의 사적을 빛내고 특히 『大笑軒集』과 『十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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茅齋李公墓碣銘(幷序) 22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말을 할 때 天地와 父母란 글자를 가르치니 天道는 父道와 같고 地道는 母道와 같다고 하여 李密菴과 金谷川 등 여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일찍이 과거의 뜻을 접고 어버이 섬김에 최선을 다했는데 아버지 병에 물고기 회를 요구함에 시냇가에 그물을 쳐서 한 자 되는 노어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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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戶曹參議趙公墓碣銘(幷序) 24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공의 휘는 徵獻, 자는 敬甫, 함안인으로 어려서부터 가학을 익혀 문을 닫고 고요히 거처하며 聞達을 구하지 아니했다. 평생 입으로 財産利祿과 타인의 過失 그리고 官長의 是非 등을 말하지 아니하며 南江 가에다 廬幕을 짓고 저술을 좋아하지 아니했으나 독서는 게을리하지 아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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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敎郞柳公墓碣銘(幷序) 1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천성이 澹泊和樂하고 평생의 行事가 모두 精誠된 마음에서 나왔다는 선교랑 휘 世長, 자 德用씨는 홍문관 교리 寓軒 유선생의 백씨이다. 이 글은 공의 5대손 一祚씨가 공의 묘소에 비석을 세울 때 써준 묘갈명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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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士崔公墓碣銘(幷序) 2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겨우 말을 할 때부터 문자를 해득했고 부친이 서울에서 별세함에 먼 길을 달려가 고향으로 返葬했으며 모부인을 지극한 효성으로 모셨다. 형님의 집에 사랑채가 없어서 돈을 내어 지어드리고 흉년에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南岡書堂을 건립하여 송죽과 화훼를 심고 해마다 봄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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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士孫公墓碣銘(幷序) 4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천성이 효성스러워 부모님 명을 거역하지 아니하였고 어버이가 늙음에 과거를 포기하고 산업에 치중하였다. 부모님 삼년상을 모두 치르고는 祭田을 마련하고 祭儀를 品定하여 자손들이 제대로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공의 휘는 儒杰이요 자는 士珍으로 월성손씨인데 이 글은 그의 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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蘭皐柳公墓碣銘(幷序) 5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빼어난 자질에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님의 뜻을 어기지 않고 사람을 尊卑와 貴賤이 없이 대하였으며 후생 교육에 게으르지 아니하여 성취한 사람이 6‧7인이나 되었다. 집이 몹시 가난했으나 편안하게 처하였고 집안에 법도가 있었으며 宗黨에 정직하지 못한 모습과 이익을 꾀하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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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均生員柱江趙公墓碣銘(幷序) 7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7‧8세 때에 處士公의 시에 대답하여 많은 사람의 칭찬을 들었고 독서에 정진하여 추위나 더위에도 멈추지 아니했다. 葛菴 선생의 문중에 장가들어 많은 가르침과 法言을 들어서 徵士 鄭萬陽이 크게 탄복했고 霽山 金聖鐸, 顧齋 李과 道義交를 맺었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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梅軒李公墓碣銘(幷序) 9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임란 당시 모부인을 모시고 圓寂山에 피난했는데 나무를 해오다가 왜적을 만나 왜적이 칼을 들고 추격함에 공이 큰 시내를 뛰어 넘으니 왜적이 물 건너로 칼을 던지거늘 그 칼로 왜적을 무찔렀다. 이 칼이 지금도 집에 보관되어 있다. 모친 장례를 마치고 伯兄을 따라 참전하여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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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泉宋公墓碣銘(幷序) 11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일찍이 求道에 뜻을 두어 旅軒 선생에게 배웠고 임란 당시에 端午祭를 거행할 때에 왜구가 갑자기 닥치거늘 공이 칼로 왜구 수십 인을 베어 왜구가 달아났다. 이에 신주와 모친을 모시고 金烏山 巖穴로 피난했다. 항상 나라를 걱정하여 칼을 잡고 長歎息을 했으나 형제가 없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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慈山府使李公墓碣銘(幷序) 13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공부하는 여가에 틈틈이 무예를 익혔는데 虎榜에 발탁되어 宣傳官을 시작으로 수많은 武班職을 거치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모친에 대한 효성이 특히 지극하여 여러 현인들의 칭찬을 받았다. 다시 관직에 나아가 많은 치적을 남겼고 병자호란 소식을 듣고 충주까지 갔다가 항복소식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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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子僉樞月巖權公墓碣銘(幷序) 15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말을 배울 때에 부모란 글자를 보고 경의를 표하고 글을 배울 때엔 經史에 통달하고 고인들 중에 효행이 탁월한 곳을 만나면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특히 『小學』을 좋아하여 사람의 도리가 이 책에 다 있다고 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몸소 농사짓고 사냥하여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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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士李公墓碣銘(幷序) 17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어려서 질병이 있었는데 부친이 공부하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나의 백부 畏齋公에게 『論語』를 배우는데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고 『孟子』를 좋아해 새벽에 일어나면 의관정제하고 부모를 문안한 후에 단정히 앉아 종일토록 글을 읽었으며 때로는 밤을 새우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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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窩李公墓碣銘(幷序) 19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도량이 관대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를 극진히 모셨으며 형제간에 우애도 돈독하였다. 특히 평생 저술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서울에는 더욱 뜻이 없었다. 평생 두문불출하며 簡黙 두 글자로 日用의 방편을 삼아 정성으로 집안을 다스리고 款曲함으로 사람을 대하였다. 자제들 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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延豊縣監金公墓誌銘(幷序) 21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11세에 承重服을 입을 때 治喪의 제반절차를 몸소 행하였고 文忠公의 「奉先諸規」와 조부의 「祭規」를 참고하여 제사를 지내고 과거공부에 열중하여 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이후로 벼슬길에 나아가 참봉을 거쳐 延豊縣監에 이르렀는데 현감으로 나아가 많은 치적을 올렸으나 죄수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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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齋李公墓誌銘(幷序) 22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일찍 어머니를 여의어 부친 손에 길러졌는데 총명하고 시에 능하였다. 부친을 따라 鹿峯精舍에 가서 여러 사람들에게 칭찬을 많이 받기도 하였다. 仲父 府使公을 부친처럼 섬겨 질병과 侍湯, 殮襲의 제반절차에 정성을 다하였고 繼妣의 봉양에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에 드는 士友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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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妣贈貞夫人李氏墓誌 24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先妣 연안이씨는 淸白吏 李光庭의 후예로 명문가의 예법을 익혀 先考에게 시집와서 가난한 살림살이에도 태연하게 처신하며 시부모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였다. 특히 조부께서는 옷이 몸에 맞고 음식이 입에 맞아 참 孝婦로 우리 가문을 昌大하게 할 것이라 칭찬했으며 先考가 성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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亡弟成均生員墓誌 25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동생의 휘는 奭佐, 자는 士能이다. 器局이 峻整하고 재덕이 겸비하며 孝友의 행실과 고결한 지조가 사림의 推重한 바가 되고 동생 喆祚와 正祖 增廣文科에 생원이 되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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宜人鵝洲申氏墓誌 26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나의 仲弟인 生員 奭佐에게 시집온 宜人 鵝洲신씨는 孝友와 慈順으로 宗黨이 칭찬하였는데 이 글은 宜人의 墓誌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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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憲府執義兼世子侍講院輔德晦谷權先生行狀 1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공의 휘는 春蘭이요, 자는 彦晦로 안동권씨이다. 어려서부터 빼어난 자질로 학문에 진력했는데 栢潭 具鳳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司馬試에 합격을 시작으로 수많은 벼슬을 하게 된다. 자기가 거처하는 동네에 朱子詩句를 따서 鑑源亭을 짓고 세상을 벗어나 지내려고 하였으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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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憲府持平栗園李公行狀 7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공의 휘는 珙이요, 자는 共甫며 예안이씨이다. 생원이 되어 밖으로는 경상, 평안, 강원도사와 연일, 현풍, 예안 현감과 풍기, 예천군수를 거치고 안으로는 병조, 예조좌랑과 사헌부지평의 제수가 있었으나 한 번도 응하지 않았으나 처음에 淸道敎授는 잠시 응한 적이 있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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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簿寺僉正贈直提學潛菴金先生行狀 11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공의 휘는 義貞이요 자는 公直이며 풍산김씨이다. 서울 壯義洞에서 태어난 공은 어릴 때부터 단정하고 엄격하여 가르침을 받지 아니해도 스스로 법도를 지켰으며 8세에는 글을 짓고 고금서적을 宿儒라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여 옛날 江文通과 같다는 칭찬을 들었다. 자라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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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寧縣監贈兵曹判書悌友堂朴公行狀 19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공의 휘는 慶傳, 자는 孝伯, 호는 悌友堂으로 밀양박씨이다. 어려서부터 氣節이 빼어나 무과에 합격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함에 淸道郡守가 도망을 쳐버리니 공이 이에 통곡하며 나라의 은혜를 받은 집안이 그냥 있을 수 없다고 하고 초상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운문산 궁벽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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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兵曹判書菊軒朴公行狀 22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공의 휘는 慶胤, 자는 希仲, 호는 菊軒으로 밀양박씨이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며 겸하여 활쏘기를 하여 문무에 모두 능하였다. 壬亂에 백씨인 悌友工과 함께 참전하였는데 服喪問題가 介在되자 나라를 위한 大節에 執喪의 小節을 介意할 것 없다고 하면서 참전하게 된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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復齋李公行狀 24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공의 휘는 道孜, 자는 至之, 성주이씨로 일찍이 부친의 명으로 季父와 함께 성주의 李佐郞에게 배웠다. 또 寒岡의 문하에 나아가 大學, 心經, 近思錄 등의 爲己之學에 대해 듣고 沈潛反覆하여 세밀하게 분석하니 鄭先生이 몹시 애지중지하였다. 임란에 모부인을 모시고 피난했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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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評事藤巖權公行狀 29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공의 휘는 徵, 호는 藤巖, 안동권씨로 생원에서 문과에 올라 승문원 정자, 저작랑, 형조와 공조 좌랑 겸 사헌부 지평이 되고 原從勳에 참여했다. 정해 5월에 兵馬評事로 關北節度使 許琮을 따라 逆賊 李施愛를 토벌하러 갔는데 공이 선봉에 서서 적을 맞으니 적의 형세가 심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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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均生員三踈齋李公行狀 32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공의 휘는 熙一, 자는 德卿이며 성주의 碧珍이씨로 3‧4세에 문자를 알았고 5세에 스승에게 배우며 7세에 從叔 內翰公에게 小學을 배웠다. 13세에 두 從叔을 따라 졸업하니 두 從叔이 크게 칭찬했다. 이로부터 爲己之學에 전념하고 부모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였다. 부친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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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從大父臨汝齋公行狀 36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공의 휘는 湀, 자는 秀夫, 初字는 士極으로 풍산유씨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글을 지으면 사람을 놀라게 하니 성문이 너무 드러날까 혐의해 부친이 刻苦勉勵를 금했으나 독서를 그치지 아니했다. 조모 환갑 때에 뭇 아이들이 모여 노는데도 혼자 夾室에 들어가 退溪의 책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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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均生員陶窩崔公行狀 1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공의 휘는 南復, 자는 景至, 경주최씨로 慶州府 南伊助里 世第에서 출생했다. 조부의 꿈에 仙官이 五色雲을 타고 내려와 南景復이라 쓴 金牌를 안고 있었는데 꿈을 깨고 이것으로 이름과 자를 지었다. 10세에 才思가 潁發하여 四書諸經을 두루 읽고 魯宇 鄭忠弼의 문하에 수학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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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子贈司憲府持平喜懼齋金公行狀 7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공의 휘는 瑞雲, 자는 虞徵, 풍산김씨로 안동 五美洞 世第에서 출생했다. 효성이 뛰어나 부친 竹峯公을 모심에 특이한 행적을 많이 남겼다. 반찬이 없다고 하자 마음으로 勞心焦思하니 날아가는 꿩이 뜰로 내려오고 집에 키우던 닭이 다 없어져 가면 동생집의 닭이 저절로 오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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菊窓金公行狀 11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공의 휘는 弼衡, 자는 克夫, 순천김씨로 醴泉 金谷里 世第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너무 재주가 뛰어나 부친이 공부를 만류했고 13세에 潘陽節 한 편을 아침에 일어나 背誦함에 한 글자도 착오가 없으니 조 부가 읽지 않고 외우는 것은 기뻐할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 訥隱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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茅溪李公行狀 15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공의 휘는 命培, 자는 受平으로 載寧이씨이다.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어 紫丘 成公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다시 葛菴 李玄逸을 호남의 謫所로 찾아가 수일간 강론하여 磁鐵의 交契를 맺었는데 이별 후에 葛菴이 이런 선비를 늦게 안 것이 한이 된다고 하였다. 이후로도 자주 왕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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副護軍休溪全公行狀 19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공의 휘는 希哲, 자는 原明, 호는 休溪, 옥천전씨로 옥천에서 출생했다. 빼어난 자질로 生員進士試에 올라 虎榜에 발탁이 되었다. 英陵, 顯陵參奉을 시작으로 禦侮將軍, 司直을 역임하고 端宗이 遜位할 때 벼슬에 뜻을 접고 병을 칭탁하며 옥천으로 돌아왔다. 그 후에 옥천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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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子盧公行狀 22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공의 휘는 舜元, 자는 聖擧이며 광주노씨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가르치는 말은 한번 들으면 알았고 날마다 『小學』과 『孝經』의 章句를 암송했다.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한 정성으로 하여 사시로 신선한 물고기 회를 장만하였고 斷指注血로 생명을 연장하였으며 부친이 별세함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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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川郡守周公行狀 24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공의 휘는 允昌, 자는 文德이며 상주주씨로 陜川 文林里 世第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빼어나 佔畢齋 金宗直의 문하에 나아가 성리학을 공부하여 선생의 獎詡를 받았고 寒暄堂 金宏弼, 一蠹 鄭汝昌, 秋江 南孝溫, 濯纓 金馹孫 등과 道義交를 맺었으며 參軍 李承彦, 參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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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進士中樞院錄事贈中樞院判書三隱張(公行略 26)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공의 휘는 憲, 호는 三隱 또는 農夫로 인동장씨이다. 三隱이라 호를 한 것은 조부의 호가 一隱, 부친의 호가 二隱으로 선인들의 뜻을 실추시키지 않겠다는 뜻이다. 太宗이 承旨와 吏曹判書로 불러도 나아가지 않고 자연에 머물러 있었다. 자손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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府君家狀 1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부군의 휘는 宗春, 자는 孟熙, 풍산유씨로 肅宗 8월에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자질이 빼어나 7세에 부친에게 『孟子』를 배우고 과거 이외에 爲己之學과 선대의 학문이 있는 것을 알고 열심히 공부하였는데 책상에는 『心經』, 『近思錄』, 朱子와 退溪의 책을 두고 침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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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考僉樞府君家狀(後贈吏曹參判) 9 / 기록자료>고도서 / 유이좌부군의 휘는 師春, 자는 季尊, 풍산유씨로 태어난 지 돌도 못 되어 모부인 홍씨가 별세함으로 평생에 모친의 얼굴을 모름을 한으로 여겼다. 부친 懶翁의 손에 길러졌고 畏齋公에게 수학하였으며 언어와 행동이 時俗에 물들지 않아 모두들 故家人이라 칭찬했다. 서울에 乞恩하러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