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啓蒙攷疑序 5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자신이 저술한 『啓蒙攷疑』의 전말을 기록한 서문이다. 저자의 나이 44세 때인 1816년(순조 16) 저술한 것이다.歐陽脩가 세상의 학자들은 항상 새로운 의미를 좋아해 모든 경전에서 전해지는 註疏를 두고 힘써 先儒들을 비난하기 마련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들이 잘못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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濂洛風雅補遺序 6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金仁山이 편집한 『濂洛風雅』의 규모가 제대로 갖추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정밀하지 못한 한계가 있다는 판단에 따라 내용을 보완해 자신이 저술한 『濂洛風雅補遺』의 전말을 기록한 서문이다.저자의 나이 59세 때인 1831년(순조 31)에 저술했다. 옛날의 성인들이 詩와 樂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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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族姪致儼序 7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族姪 柳致儼이 宮室의 衣服에 관한 제도에 대해 질문한 것을 계기로 격려와 함께 고증에 있어 유의사항을 당부하며 준 序文이다.자신이 宮廟의 제도에 관해 고찰한 『釋宮補』와 사대부의 章服에 대해 설명한 『冠服考證』 등의 저술을 참고하도록 내어주면서,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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虎巖修墓記 8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咸鏡道 宜州(德源)의 虎巖에 있는 고려시대 政堂文學을 지낸 先祖 柳公權(1132~1196) 父子의 묘를 수리하면서 지은 記文이다.1816년(순조 16)에 쓴 것이다. 유공권은 원래 完山(全州)에 살았지만 관직을 따라 松京에서 사망했는데 아들 柳彦沈이 이곳에 장사지내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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遊東湖記 10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1803년(순조 3) 단오날 우연히 흥에 겨워 東湖로 유람을 갔다가 지은 기문이다. 강물이 넘실거리는 모습과 호수의 푸른 물이 서로 삼키듯이 어울린 신비한 모습, 호수 한가운데 비치는 구름의 그림자가 마치 수를 놓은 듯이 아름다운 모습, 호수 주위의 산에 펼쳐진 기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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遊嶺南樓記 10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族弟 柳旭文과 朴時泰와 함께 볼 일을 위해 密州(密陽)으로 갔다가 嶺南樓를 둘러보고 지은 기문이다.1827년(순조 27)에 지었다. 영남에는 이름난 山水에 건립된 樓亭이 많기는 하지만 밀양의 영남루에 견줄만한 것이 없다고 극찬한 다음, 客館인 凌波閣을 비롯해 高巖·覽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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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丈季和(致運)家藏畵屛記 12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義城에 살고 있는 金致運이 祖父 蘭谷 金江漢(1719~1779)이 그린 그림과 遺文을 모아 만든 畵屛의 後辭를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갔다가 주위의 경관을 둘러본 다음 그림을 보면서 감회를 쓴 기문이다.평소 의성 菊潭의 푸르고 산뜻한 모습을 보고 싶어 했던 데다 김강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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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壽堂記 13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내년 回甲을 맞이하는 權幼徵의 祝壽를 위해 방문했다가 지은 기문이다. 樂壽堂은 그의 동생 權幼敬이 지어준 堂號이다. 1817년(순조 17)에 썼다. 權氏들이 世居하고 있는 立巖은 높고 험하면서도 맑은 물과 울창한 숲, 기암괴석이 서로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는 곳으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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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好窩鄭公諸圖後 14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好窩 鄭炅이 그린 圖說의 뒤에 붙여 쓴 글이다.36세 때인 1808년(순조 8) 아들 鄭禹弼의 부탁을 받고 썼다. 일찍이 그의 遺文을 보고는 조화를 지향하면서도 논리성을 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평이하면서도 실용성이 돋보이는 風致에 감탄한 적이 있었는데, 막상 이 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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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祖典翰公事蹟後識 16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先祖 典翰公 柳軾의 中宗代 행적 가운데 오해가 되고 있는 부분을 해명하면서 쓴 글이다.그가 중종 13년(1518) 銓官에 임명되었다가 지나치게 나약하고 무기력하다는 지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己卯士禍를 피해 仁川府使로 옮겼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잘못 판단한데 따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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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六絃琴譜後 16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六絃琴의 聲律에 대해 기록한 『六絃琴譜』의 말미에 쓴 글로서, 그것의 유래와 구조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지금의 가야금은 六絃이지만, 옛날 중국에는 五絃 또는 七絃이 일반적이었다. 濯纓 金馹孫의 고증에 의하면 처음 晉나라에서 高句麗에 七絃琴을 보냈는데, 王山岳이 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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題畵琴 18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그림으로 그린 가야금을 연주하면서 감회를 기록한 글이다.자신은 일찍이 옛날의 곡조를 열심히 배우면서 대단히 즐거워하기는 했지만, 오동나무를 구하지 못해 가야금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그림으로 그것을 대신해 마음으로 연주해 보기도 했다. 크기가 四尺半이고 十三徽, 五聲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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題右軍帖 19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옛날의 書法을 토대로 독자적 書體를 개발해낸 右軍의 書帖 뒤에 쓴 글이다. 晉代 이후 서체의 名家는 적지 않았지만 옛 書法을 좋아한 사람은 右軍 밖에 없었다. 대개 顔眞卿과 같은 사람들은 스스로 一家의 書體를 이루었지만, 그의 隸書는 오로지 漢·魏의 서법을 모범으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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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鹿脯帖 20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顔魯公이 劉太冲에게 보낸 鹿脯帖의 말미에 쓴 글이다.자신은 과거 洛下에서 이 帖과 함께 黃太史筆을 구매했었는데, 이들의 글씨가 남아 있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희귀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가운데 鹿脯帖을 훨씬 애지중지했는데, 이는 朱子가 字劃에는 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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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臺寺講會錄識 20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1832년(순조 32) 겨울 靑城書院에서 開設되었으나 자리가 모자라 인근의 雲臺寺에 백여 명이 모여 ‘明人倫 養德性’을 주제로 講會한 내용을 엮은 책의 말미에 쓴 글이다. 周代에 행하던 典禮는 지금은 비록 볼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사라진 것은 아니다. 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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思誠齋說 21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자신의 書齋를 思誠齋로 命名하면서 그 연유를 설명한 내용이다.일찍이 孔子는 “誠은 하늘의 道이고 성실한 것은 사람의 道이다”라 하고는 擇善과 固執을 誠의 目이라 규정했다. 이는 舜·禹가 授受한 ‘惟精惟一’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千聖의 학문이 결코 여기에서 벗어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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冬夏陰陽升降說 22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易學에 관한 질문들에 자신의 견해를 설명한 내용이다. 첫째, 冬至에는 陽이 생기고 夏至에는 陰이 생기는 법으로 地下에서 上升하기 때문에 陰升陽升의 說이 있게 되었다는 것에 대한 의문, 둘째, 氷溪에서는 여름에 물이 응결하고 겨울에 따뜻해지는데, 이는 陰陽이 地下에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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潮汐說 34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바다에 潮水의 進退가 있을 뿐만 아니라 增減·遲速이 다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 답변한 내용이다. 古今에 이를 논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지가 않았으며, 심지어는 바다에 사는 미꾸라지가 출입하기 때문이라느니 神龍이 조화를 부리는 것이라느니 하늘의 하천이 땅에 들어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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杖銘 1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鹿門 李漢中이 太白山 깊은 산 속에서 구해서 보내온 지팡이를 받고 지은 銘文이다.그 지팡이는 단단하기는 하지만, 모양은 다른 지팡이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몇십 년의 風霜으로 인해 古色이 완연한데다, 마치 石骨이 첩첩이 쌓인 듯한 기이한 형상을 하고 있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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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金穉百簫銘 1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金簫에게 보낸 銘文이다. “굳세면서도 곧은 자세로 마음을 비우고 평온하게 생각하면 感通함이 있을 것이다. 생각이 발하면 거기에 응하는 것이 나의 衷心을 제어하고 보존하는 길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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族子大立(致思)字辭 1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大埜 柳健休(1768~1834)가 손자 柳致思의 字를 大立으로 정한 것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면서 축하와 함께 당부의 말을 전한 글이다.사람이 보고 듣고 먹는 것은 天職이기는 하지만,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있어야 큰 포부를 세울 수 있고 貴·賤의 구분에서 벗어나 成人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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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厚陵參奉呈吏曹狀 2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58세 때인 1830년(순조 30) 厚陵參奉에 제수되었을 때 吏曹에 辭職을 청원하면서 올린 글이다.궁벽한 시골에 사는 용렬하고 천박한 자신을 陵官에 임명한 것은 분명 잘못된 처사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능력에 비추어 과분한 일로 판단된다. 더구나 나이도 六旬이 가까워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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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山廟宇開基祝文 2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高山書院에 大山 李象靖(1711~1781)의 위패를 봉안하는 廟宇를 건립할 때 지은 축문이다.陶山의 退溪學을 수렴해 계승한 현장이자 많은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넘쳐 흐르는 장소에 齋室과 樓亭을 먼저 건립하기는 했지만 항상 春秋에 제사지낼 祠宮이 없어 모두가 아쉬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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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葛菴李先生文 2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葛菴 李玄逸(1627~1704)의 묘를 移葬할 때 지은 제문이다.退溪 李滉의 학문이 鶴峰 金誠一에게 계승되었고 敬堂 張興孝, 南維 金履載를 거쳐 이현일에게 전승되었음을 강조했다. 독실한 자세를 견지한 가운데 치밀한 학문적 태도를 유지하여 영남사림 학문의 모범을 이루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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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霽山金先生文 3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霽山 金聖鐸(1684~1747)의 묘를 移葬할 때 지은 제문이다.김성일이 이황의 적전으로서 학문을 전승한 이래 그것을 이어받아 심화함으로써 영남사림 학문의 발전에 기여함과 동시에 집안의 학문적 위상을 높였다고 평가했다. 영조가 널리 인재를 구할 때 布衣로서 발탁되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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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損齋先生文 4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損齋 南漢朝(1744~1809)의 靈前에 올린 제문이다.大道가 날로 막혀 세속의 사람들이 聲利와 異敎의 유혹에 빠져드는 상황에서 오로지 聖經에만 뜻을 두고 講磨하여 闢邪衛正의 모범을 보였던 점을 강조하면서, 자신이 배움을 청했을 때 不敏함에도 거두어주고 바른 길로 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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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立齋先生文 5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立齋 鄭宗魯(1738~1816)의 靈前에 올린 제문이다.退溪 李滉의 학통을 계승하며 東方의 師表가 된 文莊公 愚伏 鄭經世의 후손으로서 조상의 위업을 계승함으로써 斯文을 다시 밝히는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大山 李象靖의 문하에서 각고의 공부와 변론을 통해 엄정한 典禮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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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東巖先生文 6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族祖父이자 스승인 東巖 柳長源(1724~1796)의 영전에 올린 제문이다.李滉에서 蘇湖로 이어지는 퇴계학을 전수받아 경전들의 내용을 보완하고 諸家의 禮書를 정돈하는 등의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겼으며, 항상 義理를 분명히 하고 動靜에 일관성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시종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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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葛川金先生文 7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葛川 金熙周(1760~1830)의 영전에 올린 제문이다.賢人과 英傑을 잇달아 배출한 白山의 남쪽 기상을 타고나 후덕한 기질과 부지런한 연마로 높은 학문적 수준을 확립해 왕으로부터도 칭찬을 받았음을 강조하며 애통한 심정을 표시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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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外舅申公文 8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장인 處士 申宗烈의 영전에 올린 제문이다.타고난 인품이 부드러웠으며 기질 역시 순박하여 백학과 같은 모습으로 사람들과 어울려 花園을 노닐면서 덕을 기르는 것을 좋아했다고 회고하고 애도의 마음을 표시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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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南子皜文 9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동문수학하던 절친한 교우인 誠齋 南漢皜(1760~1821)의 靈前에 올린 제문이다.海內에는 知己가 거의 없었는데 오직 그와 서로 만나 술을 마시며 담소하며 절친하게 지냈음을 회고하면서, 학문의 토론에 막힘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분명한 논리로 대립된 견해를 절충함으로써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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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廣瀨李公文 10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廣瀨 李野淳(1755~1831)의 靈前에 올린 제문이다.陶山(退溪)의 학문은 士林뿐만 아니라 집안의 家學으로도 계승되어 많은 宿儒가 배출되어 遺訓을 받들었는데, 그 대표적 인물 가운데 한 명으로서 10幅의 圖說을 비롯한 많은 저술로 학문적 업적을 남겼고 뛰어난 자질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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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下菴李丈(宗休)文 10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下菴 李宗休의 靈前에 올린 제문이다.忠信·孝友의 길만을 걷는 처신과 儒家의 학풍에 부합하는 文章으로 이름을 날렸을 뿐만 아니라, 항상 단정한 용모와 과묵한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일그러진 풍속을 바로잡는데 기여했던 점을 부각하며 애통한 마음을 전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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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姑叔李公(彙謹)文 11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姑叔 李彙謹의 靈前에 올린 제문이다.천길 절벽과 같은 곧은 자세와 눈을 이고 있는 소나무와 같이 맑은 기품을 유지하면서도 항상 자신을 따뜻하게 포용해주던 일을 회상하며 애통한 심정을 피력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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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王考三山府君文 11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祖父 三山 柳正源(1703~1761)의 묘를 移葬할 때 올린 제문이다.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별세해버려 직접 감화를 받지 못한 점을 애통해하면서도, 넓고 돈독한 기질과 순수하고 밝은 학문은 父·叔에게 계승됨으로써 단절되지 않고 자신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며 아쉬움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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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伯兄素隱公文 13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伯兄 素隱 柳炳文(1766~1826)의 靈前에 올린 제문이다.弱冠에 형제가 함께 族祖父 東巖 柳長源에게 배우러 갔을 때 ‘博文約禮’의 당부를 들은 이래로 평생을 근신한 가운데 경전을 폭넓게 읽으면서도 깊이 분석하여 올바른 판단을 추구하는 것에만 매진했음을 강조하면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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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宗姪孟淵文 14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宗姪 柳孟淵의 靈前에 올린 제문이다.조상의 先業을 계승해 가문의 사람들이 의지하는 바였고 후배들에게는 儀表가 되었으며 향촌의 이웃사람들이 기대하는 인물이었음을 전제하면서, 영명한 기상과 의연한 면모에다 장중하면서도 효성과 우애를 돈독히 하여 忠厚하면서도 자상함을 本質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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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從姪致澤文 16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從姪 柳致澤의 靈前에 올린 제문이다.하늘이 보내주고도 다시 데려간 것이 믿기지가 않는다며 비통한 심정을 표시하고, 『論語』 등 경서를 강론할 때와 병이 들었을 때 보여주었던 명민함과 지극한 정성을 떠올리며 아쉬운 마음을 피력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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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亡子致堯文 17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아들 柳致堯(1792~1814)의 靈前에 올린 제문이다.항상 길을 떠날 때마다 돌아올 날을 기다리곤 했는데 갈 때는 보았으면서 병으로 인해 객지에서 사망하여 결국 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이 가난과 병에 찌든 자신의 무능함에서 비롯되었다고 자책했다. 7살에 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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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代祖妣贈淑夫人安東權氏墓表 20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5대조 萬嶺 柳益輝(1629~1698)의 부인인 淑夫人 權氏의 墓碑 뒷면에 陰記한 글이다.處士 權璽와 慶州孫氏 사이에서 1628년(인조 6) 태어났으며, 극도로 가난한 집안에 시집을 와서도 조용하면서도 온후한 기품을 잃지 않아 후손들의 儀範이 되었고 1696년(숙종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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仲父通德郞府君墓誌 21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仲父 通德郞 柳明休(1726~1795)의 묘에 쓴 誌文이다.三山 柳正源과 宣城李氏 曦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남다른 비범한 면이 있었다고 한다. 평생의 事行에 대하여는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지만, 천부적으로 효성이 지극했을 뿐만 아니라 사치를 좋아하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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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室孺人申氏壙記 23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1799년(정조 23) 사망한 부인을 장사지내면서 쓴 記文이다.父 申宗烈과 母 固城李氏 元馥의 딸 사이에서 1770년(영조 46) 태어났으며, 19세에 자신에게 시집와 가난한 집안에서도 근검절약하는 생활로 곤경을 극복하여 부녀의 四德을 모두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았다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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斗兒墓記 24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요절한 柳應斗를 장사지내면서 쓴 記文이다.태어날 때부터 총민했으며 효성은 하늘에서 나왔고 죽던 날도 앉은 자리를 지켰다며 애통해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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伯兄素隱公 24 / 기록자료>고도서 / 유휘문伯兄 素隱 柳炳文(1766~1826)의 행적을 기록한 글이다.父 柳萬休와 母 漢陽趙氏 梧竹齋 宜陽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적 성장이 늦어 어눌하기는 했지만 굴뚝에 숨겨진 銅器를 찾아낼 정도로 마음으로는 이미 영특함을 갖추고 있었다고 전했다. 東巖 柳長源, 損출처 : 유교넷 -
269045
호양집 / 기록자료>고도서 / 권익창湖陽 權益昌(1562~1645)의 시문집. 4권 2책. 목활자본. 이 문집은 저자의 현손인 權相頊이 권익창의 저술을 모아 간행을 준비하였으나, 미처 간행하지 못한 것을 1745년(영조 21) 후손 權進龍이 「十圖十目」까지 묶어 간행하였다. 卷1에는 98수의 詩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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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기록자료>고도서 / 권익창自修, 自臥龍山下避亂于武侯里因其名思其人而作, 懷金士悅(兌), 次金器仲韻, 述懷, 見江梅, 老境吟, 讀書有感, 敬次舅氏李公(庭檜)示韻, 送鶴峯金先生奉使日本詩(幷序), 賀金先生還自日本, 族會日上方伯(盼)詩(幷序), 參洞會, 遊淸凉次金子峻(坽)韻, 又口占呈僉益, 次堂叔震峯출처 : 유교넷 -
269047
輓 / 기록자료>고도서 / 권익창輓金子峻, 輓金承旨(中淸), 輓從弟(益壽), 輓金洗馬(潗), 輓上舍堂兄(益亨), 輓張行源(興孝), 權大諫(泰一)哀辭, 輓權僉正, 輓柳立夫, 輓李進士(亨男), 輓孫僉正(蓂).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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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方伯洪書 1 / 기록자료>고도서 / 권익창경상도관찰사 芝溪 洪(1573∼1638)에게 제시한 時務策을 담은 편지글이다. 저자는 홍방에게 정사의 요체를 養民·鍊兵·調糧·任使·得人心 등 다섯 가지를 제시하였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務農·務精·不費·推誠·得賢 등을 요체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 가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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進德箴 4 / 기록자료>고도서 / 권익창덕으로 나가기 위한 잠명으로, 제자들에게 말과 행실을 도탑게 하고 착한 일을 실천하며 허물이 있으면 즉각 고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저자는 말은 반드시 충성스럽고 미덥게 하며, 행실은 독실하고 공경스럽게 하고, 착한 일을 보면 실천하고, 허물이 있으면 반성해야 한다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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修業箴 4 / 기록자료>고도서 / 권익창학업을 닦기 위한 잠명으로, 평생 공부에 임하는 마음가짐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저자는 성현의 경전을 깊이 연구하고, 諸子百家의 서적을 반복 고찰하여 깊이 터득하여 의심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근본이 확고하게 서야 문장에서 증명할 수 있으니, 문장은 뜻이 온전하게 전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