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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4401
1814년(순조 14) 9월에 일일재(一一齋) 김시찬(金是瓚)이 일우(逸愚) 류상조(柳相祚)에게연시(延諡)와 관련된 물품을 협조받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세하 김시찬김시찬은 예안 외내의 광산 김씨(光山金氏) 문중의 학자로,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계암(溪巖) 김령(金坽) 계열이다. 이 편지는 김령이 문정(文貞)이라는 시호(諡號)를 받던 일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영남 유생 김성련(金星鍊) 등이 김령에게 증직(贈職)․출처 : 유교넷 -
294402
1671년(현종 12) 12월에 김시니(金是柅)가 우눌(愚訥) 류의하(柳宜河)에게 딸의 혼례에 필요한 유청(油淸)과 실과(實果)를 내려주기를 요청한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복인 김시니피봉의 ‘봉화(奉化) 아내(衙內)’라는 말을 볼 때, 이 편지는 봉화 현감(奉化縣監)에게 보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우눌 류의하는 이해 3월에 봉화현감으로 임명되어, 1674년 8월 무렵까지 재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김시니는출처 : 유교넷 -
294403
1738년(영조 14) 11월에 남학(南嶨)이 서호(西湖) 류성화(柳聖和)에게 울산으로의 행차가 지체되고 있다는 등의 사연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시생 남학먼저, 남학은 접때 찾아갔을 때에 류성화의 환대에 매우 감사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바쁜 일 때문에 차분하게 말씀을 나누지 못하였기에, 매우 섭섭하였다고 했다. 이제 류성화의 편지를 받고서, 추운 계절에 류성화가 건승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매우 위안이 된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294404
1766년(영조 42) 1월에 남서(南瑞)가 난옹(懶翁) 류운(柳澐)에게 자신의 근황을 전하고 제수(祭需)를 보내준 것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남서겉봉의 황계(黃溪)는 황간(黃澗)의 옛 이름인데, 난옹 류운은 1764년 12월에 이곳의 현감으로 임명된 바 있다. 먼저, 남서는 해가 바뀌고 봄기운이 생동함에, 바야흐로 그리움이 간절하던 터에 관아의 심부름꾼이 와서 류운의 편지를 받게 되었다고 했다. 여기에 심부출처 : 유교넷 -
294405
1733년(영조 9) 7월에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가 서호(西湖) 류성화(柳聖和)에게 안부를 묻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복인 남한조발급자인 손재 남한조는 대산 이상정의 학통을 잇는 영남의 큰 학자이다. 그는 본관이 의령(宜寧)이고 자가 종백(宗伯)이다. 어릴 때에는 소암(素巖) 김진동(金鎭東)에게 글을 배웠고, 후에 이상정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배웠다. 이후 그의 학문은 정재 류치명에게로 이어졌출처 : 유교넷 -
294406
1745년(영조 21) 7월에 남서(南瑞)가 서호(西湖) 류성화(柳聖和)에게 안부를 묻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시생 남서발급자인 남서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수급자인 서호 류성화는 본관이 풍산(豐山), 자가 개중(介仲)으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주손(冑孫)이다. 그는 음직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산음 현감(山陰縣監) 등을 지냈다. 먼저, 남서는 전에 없던 요염(潦炎출처 : 유교넷 -
294407
1739년(영조 15) 2월에 남숙(南璹)이 서호(西湖) 류성화(柳聖和)에게 부탁받은 화훼(花卉)를 보내지 못하는 이유를 해명하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척제 남숙남숙은 해가 지나도록 병으로 누워 있어서 소식을 받지 못하였기에 늘 그리웠는데, 류성화가 먼저 편지를 주니 감사하고 기뻤다는 말로 편지를 시작했다. 더구나 류성화가 건승함을 알게 되니, 매우 다행스러웠다고 하였다. 자신은 부모님을 모두 여의고 의지할 바 없는 처지로출처 : 유교넷 -
294408
1735년(영조 11) 윤월(閏月)에 남여형(南汝衡) 등이 서호(西湖) 류성화(柳聖和)에게 23일의 모임에 꼭 참석하겠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제 남여형발급자는 남여형과 남이운(南以運)이다. 남여형은 대사간을 지냈던 고암(孤巖) 남천한(南天漢)의 아들로, 36세 때에 생원시에 합격한 바 있다. 먼저, 남여형 등은 류성화와 함께 하룻밤의 잠자리를 하였던 것이 회포를 풀기에 미흡하였기에, 서운한 마음이 간절하다고 하였출처 : 유교넷 -
294409
1737년(영조 13) 2월에 남여형(南汝衡)이 서호(西湖) 류성화(柳聖和)에게 자신을 방문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하고 향후 방문하고자 한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제 남여형남여형은 본관이 영양(英陽)으로, 고암(孤巖) 남천한(南天漢)의 아들이다. 그는 식년 생원시에 입격하기도 하였다. 먼저, 남여형은 자신이 서원(書院)에 있을 때에 안부편지를 받았으나 수응(酬應)하는 데에 바빠서 미처 답례를 하지 못하였다고 했다. 이어, 봄 날씨가출처 : 유교넷 -
294410
1745년(영조 21) 3월에 남여형(南汝衡)이 서호(西湖) 류성화(柳聖和)에게 일가의 담제(禫祭) 때 손자를 보내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정제 남여형발급자인 남여형은 본관이 영양(英陽)으로, 대사간(大司諫) 등을 역임하였던 고암(孤巖) 남천한(南天漢)의 아들이다. 그는 1708년에 식년 생원시에 합격하기도 하였다. 먼저, 남여형은 그립던 차에 류성화의 편지를 받고서 류성화가 평안하다는 소식을 알게 되어, 매우출처 : 유교넷 -
294411
1702년(숙종 28) 4월에 노계운(盧啓運)이 백부의 장사 일정을 통지하고 단향(檀香)을 부탁하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복제 노계운수급자는 시기적으로 서호(西湖) 류성화(柳聖和)인 것으로 보인다. 먼저, 노계운은 자신의 가문에 닥친 화(禍)가 매우 혹심하여, 천만뜻밖에 갑자기 백부(伯父)의 상을 당하였다고 했다. 가슴이 찢어지는 슬픈 마음을 이미 이루 말할 수 없는데, 청상과부가 규방에 있고출처 : 유교넷 -
294412
1700년(숙종 26) 11월에 노계운(盧啓運)이 자신의 근황을 전하고 석봉필법(石峯筆法)을 청하기 위해서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척제 노계운수급자는 시기적으로 서호(西湖) 류성화(柳聖和)인 것으로 보인다. 먼저, 노계운은 지난번에 상대의 집으로 나아가 잠자리를 함께 했고, 또 이번에는 겸중(兼仲 : 류성화의 동생인 류성삼(柳聖三)이다.)을 만나서 상대가 평안하게 지낸다는 소식을 듣게 되니, 두 가지 일의출처 : 유교넷 -
294413
정해(丁亥) 11월에 노진원(盧震元)이 혼인 날짜에 대해서 직접 뵙고 말씀을 드릴 계획임을 알리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시생 노진원피봉의 성주전(城主前)이라는 말을 볼 때, 이 편지의 수급자는 어느 고을의 수령이다. 먼저, 노진원은 상대의 편지를 받고, 추운 계절에 상대의 건강이 편치 못함을 자세히 알게 되어 매우 염려스럽다고 하였다. 자신은 독감(毒感)으로 인해 고생하고 있고, 온 집안 식구출처 : 유교넷 -
294414
1714년(숙종 40) 8월에 도영성(都永成)이 연보(年譜)와 편지를 잘 전달했고 받은 답장을 인편에 붙였음을 알리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복인 도영성도영성은 본관이 팔거(八莒)로, 성주(星州) 출신의 관료로 보인다. 그는 증광 생원시와 식년 문과에 합격하였다. 먼저, 도영성은 서로 사는 고을이 멀어서 한 번도 뵙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는데, 지난번 자신이 호현(湖縣 : 호남 고을)에 수령으로 있을 때에 상대가 멀출처 : 유교넷 -
294415
1674년(현종 15) 3월에 유암(楡巖) 배유장(裵幼章)이 우눌(愚訥) 류의하(柳宜河)에게 인산(因山) 이전에 사대부의 장사(葬事)를 금지하는 규례가 있는지를 문의하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복인 배유장배유장은 영주 출신의 학자로, 치암(癡巖) 배상익(裵尙益)의 아들이다. 그는 《주자대전(朱子大全)》,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을 깊이 연구하였고, 특히 존주(尊周) 의식이 투철한 인물로 알려졌다. 수급자는 피봉의 봉화 현감(奉化縣監)이라는 말을 볼 때출처 : 유교넷 -
294416
1732년(영조 8) 3월에 배명옥(裵命玉)이 서호(西湖) 류성화(柳聖和)에게 대동미를 미수(未收)한 일의 처리 상황을 알리고 혼사에 도움을 받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구민 배명옥배명옥은 자신을 구민(舊民)이라 하였으므로, 류성화가 수령으로 재직하고 있던 산음(山陰)의 사족 가운데 한 사람이다. 류성화는 1731년 3월에 산음 현감으로 임명되어, 이해 12월 무렵까지 재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배명옥은 떠나가는 류성화와 이별했던 일이출처 : 유교넷 -
294417
을유(乙酉) 11월 30일, 박동형(朴東亨)이 선공감(繕工監) 직소(直所)의수급인 미상에게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박동형박동형(朴東亨)이 선공감(繕工監) 직소(直所)의 수급인 미상에게 보낸 편지이다. 피봉(皮封)에 “충원군사후서(忠原君謝候書)”라고 있으니, 박동형(朴東亨)의 군호(君號)가 충원군(忠原君)임을 알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회첩(回帖)을 받았다고 하고, 숙직중의 기거출처 : 유교넷 -
294418
1729년(영조 5) 11월에 박동형(朴東亨)이 많은 영남 사람이 문과에 급제하였다는 등의 사연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박동형발급자 박동형은 상주(尙州) 사람으로서, 무신란 때에 박필현(朴弼顯)을 사로잡은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에 책봉되고 충원군(忠原君)에 봉해졌던 인물로 보인다. 그렇다면, 시기적으로 볼 때 수급자는 서호(西湖) 류성화(柳聖和)가 아닌가 한다. 먼저, 박동형은 이른출처 : 유교넷 -
294419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박첨은 당시 무안 현감(務安縣監)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첨은 본관이 밀양(密陽)으로, 진사시와 문과에 급제하였다. 먼저, 박첨은 먼 곳으로 떨어져서 소식이 막히고, 아득한 반생 동안에 세호(世好 : 선대로부터 이어온 우호 관출처 : 유교넷 -
294420
1766년(영조 42) 3월에 동원(東園) 박중경(朴重慶)이 난옹(懶翁) 류운(柳澐)에게 낙상을 입은 자신의 근황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시생 박중경박중경은 본관이 함양(咸陽)으로, 증광 문과에 급제한 인물이다. 그는 이 편지를 작성할 당시에 충청도 도사(忠淸道都事)로 재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급자는 시기적으로 당시 황간 현감(黃澗縣監)으로 재직하던 난옹 류운인 것으로 보인다. 류운은 서호 류성화의 양자출처 : 유교넷 -
294421
1600년(선조 33) 9월에 박수겸(朴守謙)이 국가로부터 작질(爵秩)을 받게 된 일을 축하하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시생 박수겸박수겸은 본관이 함양(咸陽)으로, 예천(醴泉) 출신 인물이다. 박운(朴蕓)의 아들이자, 생원(生員) 박수근(朴守謹)의 형이다. 먼저, 박수겸은 몇 년 동안이나 가르침을 받지 못하여 매우 아쉬웠다고 하였다. 이어, 서리 내리는 때에 복중(服中)에 있는 상대의 안부를출처 : 유교넷 -
294422
1731년(영조 7) 12월에 박사량(朴師亮)이 서호(西湖) 류성화(柳聖和)에게 무사히귀가하였음을 알리고 자신의 봉별 계획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민 박사량박사량은 당시 함양(咸陽)에 거주하던 농묵헌(聾默軒) 박사량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생원 박상규(朴尙圭)의 손자로, 그 역시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박사량은 자신을 민(民)이라고 칭하였는데, 이는 산음 현감으로 재직하고 있던 류성화에 대하여 이렇게 자칭한 것으출처 : 유교넷 -
294423
1745년(영조 21) 1월에 박성일(朴成一)이 서호(西湖) 류성화(柳聖和)에게 자신의 부모님이 노인직(老人職)을 받은 사실 등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하생기복인 박성일박성일은 새해가 되어 수주(壽籌 : 나이를 세는 산가지)가 하나를 더하게 되었다는 말로 편지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류성화가 만복(萬福)을 누리는지 안부를 물었다. 박성일은 지난번에 류성화가 외감(外感 : 고르지 못한 기후로 생기는 감기 등의 질병)이 지속되어 객지출처 : 유교넷 -
294424
1812년(순조 12) 7월에 박육종(朴六宗)이 거둬들이는 일의 기한을 연장해 주기를 요청하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휼하 박육종발급자 박육종에 대해서는 미상이다. 편지에 영감주(令監主)라는 말이 보이는데, 간찰이나 고목(告目) 등의 문서에서 영감은 수급자가 정3품이나 종2품의 관리일 때 쓰는 용어이다. 또한 휼하(恤下)라는 말은 존귀한 상대방에 대하여 자신을 낮춰 쓰는 용어이다. 따라서 수급출처 : 유교넷 -
294425
1737년(영조 13) 2월에 만명헌(晩命軒) 박성옥(朴成玉)이 서호(西湖) 류성화(柳聖和)에게 성균관 전적으로 임명되어 서울로 올라가기 전의 회포를 전하면서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시생 박성옥만명헌 박성옥은 본관이 함양(咸陽)으로, 정언(正言)을 지냈던 박희민(朴希閔)의아들이다. 그는 증광 진사시와 문과에 합격하였으며, 이 편지를 작성하기 직전에는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되었다. 그는 류성화의 육촌 동생인 류성사(柳聖師)와 사돈지간이니, 그의 아들인출처 : 유교넷 -
294426
1739년(영조 15) 12월에 만명헌(晩命軒) 박성옥(朴成玉)이 서호(西湖) 류성화(柳聖和)에게 자신의 근황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시생 박성옥만명헌 박성옥은 본관이 함양(咸陽)으로, 정언(正言)을 지냈던 박희민(朴希閔)의 아들이다. 그는 증광 진사시와 문과에 합격하였다. 그는 류성화의 육촌 동생인 류성사(柳聖師)와 사돈지간이니, 그의 아들인 박손경(朴孫慶)이 류성사의 첫째사위이다. 먼저, 박성옥은 자신이출처 : 유교넷 -
294427
1741년(영조 17) 2월에 만명헌(晩命軒) 박성옥(朴成玉)이 서호(西湖) 류성화(柳聖和)에게 어머니 상을 당해 일시 귀가한 김성탁의 소식을 묻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시생 박성옥만명헌 박성옥은 본관이 함양(咸陽)으로, 정언(正言)을 지냈던 박희민(朴希閔)의 아들이다. 그는 증광 진사시와 문과에 합격하였다. 그는 류성화의 육촌 동생인 류성사(柳聖師)와 사돈지간이니, 그의 아들인 박손경(朴孫慶)이 류성사의 첫째사위이다. 먼저, 박성옥은 새해를출처 : 유교넷 -
294428
1741년(영조 17) 7월에 만명헌(晩命軒) 박성옥(朴成玉)이 서호(西湖) 류성화(柳聖和)에게 당질(堂姪)을 잃은 것에 대하여 애도의 뜻을 표하고 자신의 조카가 죽었다는 소식 등을 전하는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시생 박성옥만명헌 박성옥은 본관이 함양(咸陽)으로, 정언(正言)을 지냈던 박희민(朴希閔)의 아들이다. 그는 증광 진사시와 문과에 합격하였다. 또한 그는 류성화의 육촌 동생인 류성사(柳聖師)와 사돈지간이니, 그의 아들인 박손경(朴孫慶)이 류성사의 첫째사위이다. 먼저, 박성옥은출처 : 유교넷 -
294429
1741년(영조 17) 12월에 만명헌(晩命軒) 박성옥(朴成玉)이 서호(西湖) 류성화(柳聖和)에게 류성사(柳聖師)의 사망에 따른 슬픈 감회 등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시생 박성옥발급자 만명헌 박성옥은 본관이 함양(咸陽)으로, 정언(正言)을 지냈던 박희민(朴希閔)의 아들이다. 그는 증광 진사시와 문과에 합격하였으며, 이 편지를 작성하기 직전에는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되었다. 그는 류성화의 육촌 동생인 류성사(柳聖師)와 사돈지간이니,출처 : 유교넷 -
294430
1742년(영조 18) 7월에 남야(南野) 박손경(朴孫慶)이 숙모상에 대해 위문하고부친 박성옥의 근황 등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시생 박손경발급자인 남야 박손경은 영남 이학(理學)의 큰 학자로 추앙을 받던 인물이다. 그는 만명헌(晩命軒) 박성옥(朴成玉)의 아들이고, 또한 풍산 류씨 인물인 류성사(柳聖師)의 첫째사위이다. 수급자는 시기적으로 서호(西湖) 류성화(柳聖和)로 보이는데, 류성화는 류성사의 육촌형출처 : 유교넷 -
294431
1741년(영조 17) 12월에 남야(南野) 박손경(朴孫慶)이 서호(西湖) 류성화(柳聖和)에게 상사로 인해 분주하고 슬픔에 빠져 있는 자신의 상황을 전하면서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시하생 박손경발급자인 남야 박손경은 영남 이학(理學)의 큰 학자로 추앙을 받던 인물이다. 그는 만명헌(晩命軒) 박성옥(朴成玉)의 아들이고, 또한 풍산 류씨 인물인 류성사(柳聖師)의 첫째사위이다. 수급자 류성화는 류성사의 육촌형이다. 이 문서는 하단 4곳에 충식으로 인한 훼손 부출처 : 유교넷 -
294432
1673년(현종 14) 4월에 백서한(白瑞翰)이 우눌(愚訥) 류의하(柳宜河)에게 자신의 근황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기하 백서한발급자인 백서한은 본관이 수원(水原)으로 무인(武人)이었다. 그는 여러 지방관을 역임하였고, 후에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등에까지 오른다. 수급자는 피봉의 봉화(奉化)라는 지명을 볼 때, 봉화 현감(奉化縣監)으로 재직하고 있던 류의하임을 알 수 있다. 먼저, 백서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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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3년(현종 14) 5월에 오음(梧陰) 성문하(成文夏)가 수급자 미상에게 한식 성묘에 필요한 도구 확보에 협조해 주기를 요청하며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척제 성문하오음 성문하는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의 둘째 아들이다.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영릉 참봉(英陵參奉)에 임명되었다. 이 편지는 자신의 선영(先塋)이 위치한 곳을 관할하는 어느 수령에게 보낸 것으로 보인다. 먼저, 성문하는 가뭄이 혹심한 때에 정사를 살피고 있는 상출처 : 유교넷 -
294434
1673년(인조 15) 5월에 오음(梧陰) 성문하(成文夏)가 제물(祭物)을 협조받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척제 성문하오음 성문하는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의 아들이다.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영릉 참봉(英陵參奉)에 임명되었다. 수급자는 예안이나 봉화의 수령으로 보인다. 먼저, 어제 상대가 답장을 주고 오늘 또 심부름꾼을 보내어 안부를 물어주니 감사한 마음이 실로 깊다고 했다.출처 : 유교넷 -
294435
1734년(영조 10) 6월에 성세정(成世珽)이 서호(西湖) 류성화(柳聖和)에게 자신의 근황을 전하고 『징비록(懲毖錄)』을 청하기 위해서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기하 성세정발급자 성세정은 본관이 창녕(昌寧)으로, 오음(梧陰) 성문하(成文夏)의 장남이며 송파(松坡) 성세욱(成世頊)의 형이다. 당시 영주 출신이다. 먼저, 성세정은 아들과 동파(東坡)의 이씨 집안에 시집을 간 누이를 잃어서, 슬픈 감정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했다. 봄 초에출처 : 유교넷 -
294436
1744년(영조 20) 12월에 성희인(成喜寅)이 서호(西湖) 류성화(柳聖和)에게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내고 내년 봄의 만남을 기약하며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소제 성희인발급자 성희인은 영주 출신의 창녕 성씨(昌寧成氏) 인물이며,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의 증손이다. 먼저, 성희인은 달포 전에 류성화가 오계(梧溪)에 머물고 있으면서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직접 가서 인사하려고 했지만, 조섭하는 와중에출처 : 유교넷 -
294437
1744년(영조 20) 9월에 성희인(成喜寅)이 성혜인(成惠寅)의 과거 합격 소식 등을 포함한 여러 근황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소제 성희인발급자 성희인은 본관이 창녕(昌寧)으로, 남애(南厓) 성언즙(成彦檝)의 조부이다. 그는 전주 류씨(全州柳氏) 류봉시(柳奉時)의 사위인데, 류봉시는 바로 류승현(柳升鉉)·류관현(柳觀鉉) 형제의 부친이다. 수급자는 시기적으로 서호(西湖) 류성화(柳聖和)인 것으로 보인다출처 : 유교넷 -
294438
1731년(영조 7) 7월에 춘암(春庵) 소응천(蘇凝天)이 새로 현감으로 부임한 서호(西湖) 류성화(柳聖和)에게 선정(善政)을 당부하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시생 소응천소응천은 본관이 진주(晉州)로, 이언근(李彦根)·오달운(吳達運)과 함께 당대에 문명(文名)을 드날렸던 인물이다. 원래는 익산 출신인데, 류성화가 산음 현감(山陰縣監)으로 부임해 있던 시기에는 산음의 자연동(紫烟洞)에 거주하고 있었다. 편지 작성 당시는 류성화가 이제출처 : 유교넷 -
294439
1731년(영조 7) 10월에 춘암(春庵) 소응천(蘇凝天)이 서호(西湖) 류성화(柳聖和)에게 제례(祭禮)에 관한 문제 등을 다시 질의하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시생 소응천발급자인 소응천은 본관이 진주(晉州)로, 이언근(李彦根)·오달운(吳達運)과 함께 당대에 문명(文名)을 드날렸던 인물이다. 원래는 익산 출신인데, 류성화가 산음 현감(山陰縣監)으로 부임해 있던 시기에는 산음의 자연동(紫烟洞)에 거주하고 있었다. 먼저, 소응천은 어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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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1년(영조 7) 10월에 춘암(春庵) 소응천(蘇凝天)이 서호(西湖) 류성화(柳聖和)에게 부인(婦人)이 제사를 집례할 때의 복제(服制) 등에 관해서 질의하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시생 소응천소응천은 이언근(李彦根)·오달운(吳達運)과 함께 당대에 문명을 드날렸던 인물이다. 익산 출신인데, 류성화가 산음 현감(山陰縣監)으로 부임해 있던 시기에는 이곳 자연동(紫烟洞)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는 동국 선유(先儒)들이 중요 의절(儀節)에 대해 상세히 논정(論定)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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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7년(현종 8) 4월에 송유광(宋有光)이 우눌(愚訥) 류의하(柳宜河)에게 근황을 전하고 종이를 가져가라고 알려 주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제 송유광발급자 송유광은 당시 경기 전 참봉(慶基殿參奉)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자신을 요제(僚弟)라고 칭하고 있으므로, 수급자는 경기전 참봉에 임명된 바 있는 우눌 류의하가 된다. 먼저, 송유광은 류의하와의 만남이 충분치 못했는데 갑자기 삼상(參商 : 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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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2년(숙종 18) 2월에 송후(宋㷞)가 우눌(愚訥) 류의하(柳宜河)에게 자신의 근황을 전하고 자신과 헤어진 류후장(柳後章)의 안부를 걱정하며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질 송후송후는 본관이 야성(冶城)인데, 부호군(副護軍) 류만하(柳萬河)의 첫째사위이다. 그는 편지 작성 당시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의 직함을 띠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피봉의 류 판관(柳判官)은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에 임명된 바 있던 류의하를 가리킨다. 류만하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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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3년(숙종 19) 2월에 송후(宋㷞)가 우눌(愚訥) 류의하(柳宜河)에게 수령 부임 직후의 정황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질 송후송후는 본관이 야성(冶城)인데, 부호군(副護軍) 류만하(柳萬河)의 첫째사위이다. 그는 편지 작성 당시 익산 군수(益山郡守)로 재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피봉의 류 천안(柳天安)은 천안 현감(天安縣監)을 지낸 바 있던 류의하를 가리킨다. 류만하는 류의하의 친동생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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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丁卯) 1월에 송주세(宋柱世)가 수급자 미상에게 무사히 귀가하였음을 알리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외생 송주세발급자 송주세가 자신을 외생(外甥)이라 칭하였는데, 일반적으로는 외생은 사위를 뜻하는 말이므로, 이 편지는 장인에게 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송주세가 누구이며, 또 누구의 사위인지는 자세하지 않다. 먼저, 송주세는 작별인사를 하고 물러난 후 해가 바뀌었다고 하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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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7년(영조 23) 1월에 송홍기(宋弘基)가 서호(西湖) 류성화(柳聖和)에게 과거응시에 필요한 비용을 부조해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표종제 송홍기발급자 송홍기는 본관이 야성(冶城)으로, 류만하(柳萬河)의 사위인 송후(宋㷞)의 셋째아들이다. 류만하는 수급자인 서호 류성화에게는 친조부이다. 류성화의 부친인 류후상은 류만하의 장남인데, 후에 류만하의 형인 우눌(愚訥) 류의하(柳宜河)의 아들로 입적되었다. 따라서 송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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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6년(영조 22) 4월에 신사만(申思萬)이 서호(西湖) 류성화(柳聖和)에게 행상(行喪)의 일정을 알려주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종질 신사만먼저, 신사만은 접때 류성화의 집으로 나아갔으나 류성화가 마침 출타하여 인사를 드리지 못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지금도 서운하다고 하였다. 이어, 안부를 물었으며, 자신은 그럭저럭 지내고 있으나 인가(隣家)에 전염병 기운이 있어 거처를 옮겨 피하고 있는 중 이라고 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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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2년(순조 32) 3월에 긍구재(肯構齋) 신사영(申思永) 등이 일우(逸愚) 류상조(柳相祚)에게 류성룡 가묘 치제를 축하하고 자신들의 불참에 대하여 양해를 구하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신홍좌 등발급자는 긍구재 신사영과 신홍좌(申弘佐)이다. 1832년 2월에 순조는 류성룡을 비롯한 이항복(李恒福)・윤두수(尹斗壽)・정곤수(鄭崑壽)・권율(權慄)의 가묘(家廟)에 사유(賜侑,국가에서 제사를 내려줌.)하라 명했고, 4월에 전 승지(前承旨) 경주 부윤(慶州府尹) 정예용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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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6년(영조 42) 4월에 신황(申熿)이 자신의 근황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복인 신황발급자 신황은 당시 충효당과 통혼이 있었던 아주 신씨(鵝洲申氏) 인물로, 생원(生員) 신중모(申重模)의 아들이다. 수급자는 시기적으로 난옹(懶翁) 류운(柳澐)일 것으로 보이나, 확실하지는 않다. 먼저, 신황은 연초에 상대가 보내준 편지를 지금도 읽으면서 감사해 하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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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9년(숙종 25) 12월에 수분와(守分窩) 김구성(金九成)이 자신이 책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세기 김구성발급자 김구성은 본관이 선산(善山)이고 자가 천칙(天則)으로, 대사헌을 지냈던 김효정(金孝貞)의 후손이다. 이들 선산 김씨는 안동 신성포(申城浦)에 세거하였다. 그는 두터운 효성(孝誠)으로 정평이 났으며, 만년에는 주자서(朱子書)를 즐겨 연구했다. 피봉에 적힌 수급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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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丙申) 6월에 신태구(申泰龜)가 약재를 요청하고 동송(凍松)의 소식을 묻기 위해 보낸 편지 / 기록자료>고문서 / 소척 신태구신태구는 오랫동안 소식을 듣지 못하여 그리운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는 말로 편지를 시작한다. 그러면서, 무더위에 어버이를 모시고 있는 상대의 여러 가족들이 고루 건승한지 안부를 물었다. 자신은 예전처럼 지내고 있지만, 늙으신 어머니께서 며칠 전부터 서감(暑感 : 여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