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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持平疏 3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司憲府持平을 사직하는 상소이다. 영남 먼 지방의 어리석은 자질을 가진 사람은 참으로 이 직분을 맡을 수 없고, 또한 붕괴된 조상의 묘역을 조성해야 하고 의지할 곳 없는 가족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직책을 면해줄 것을 청하였다. 여기에 덧붙여 현재 상황에서 군왕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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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洪久而(墵) 33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洪墵에게 답한 편지이다. 반년 동안 객지생활을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오니 상전벽해의 감회가 일고 눈에 가득 서글픈 일 뿐이라고 하였다. 말씀하신 일은 현재 江華留守가오래도록 체직되지 않아 조용히 말씀드리지 못했고, 떠나는 날에 말씀드리니 이 일은 자손된 자가 할 일이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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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張道應(緯邦) 3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張緯邦에게 답한 편지이다. 고향에 있을 때 보내신 편지를 서울에 도착해서 받아보고 객지의 수심에 위로가 되었다고 하였다. 뜻밖에 이번에 관직을 받은 임금의 은혜라고 하였다. 바닷가의 승경을 많이 볼 수 있어 좋지만 절역에서 고향을 생각하며 쓸쓸히 빈 집에 앉아 있으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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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趙持平景顔 35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持平 趙景顔에게 답한 편지이다. 그대가 관직을 버리고 주경야독하는 즐거움이 부럽다고 하였다. 자신은 성균관에 매어서 한 발도 나설 수 없으니 용감하게 관직에서 물러난 사람이 비웃을 것이라 하였다. 關幕으로 가기 어려움은 말씀하신 것과 같지만 무단히 체직을 청하는 것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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別紙 3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새로 注書를 천거하는데 자기 집안의 履尙이 薦望에 들었는지 물었다. 영남에서 두 사람을 천거하는데 반드시 이상을 넣어야 한다고 하였다. 家勢나 文翰, 그리고 인물로 보나 반드시 이상이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영남의 公議라고 하였다. 조성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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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趙景顔 3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趙景顔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대의 관직이 체직되었으나 순리를 따른다면 조만간 실제 관직에 천거될 것이라 하였다. 이번 관직 임명에 어려운 일이 많을 것이니 영남사람은 차라리 참여하지 않은 것이 나을 뻔했다고 하였다. 都目政事가 이미 지났는데 한 명도 퇴직한 사람이 없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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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趙景顔 3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趙景顔에게 보낸 편지이다. 성균관에 헤어진 후 안부를 물었다. 자신은 견책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있으니, 황공한 가운데 또한 쾌락한 일이라 하였다. 이제부터 할 일없는 사람이 되어 조용한 물가에서 쌓인 회포나 풀려고 하는데 사는 곳이 조금 좌측이라 여의치 않을 것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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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趙景顔 3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趙景顔에게 답한 편지이다. 여름에 보낸 답장을 가을이 되어 받았다고 하였으며, 그간의 안부는 叔馨형을 통해 대강 들었다고 하였다. 자신은 견책을 당한 이래로 두려워하고 있으나 고향으로 돌아온 후로 연이어 일에 골몰한다고 하였다. 注書에 천거했다가 비방을 받은 일은 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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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趙景顔 38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趙景顔에게 답한 편지이다. 궁중에 연일 숙직을 하니 백성의 근심을 어찌 다 이기겠는가라고 하였다. 學錄 朴命球는 저자의 동료인데 그 사람의 가문으로 보면 堂后가 되기에 합당한데도 한 번도 그 직책을 얻지 못했으니 개탄스럽다고 하였다. 나중에 전형하는 일이 있으면 그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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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從子(若鍊)匪所 38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귀양간 조카 若鍊에게 보낸 편지이다. 만나는 것에 따라 천명에 순응해서 옛 교훈을 잃지 말라는 것과 올해의 추위는 전에 없던 것이니 염려된다는 것과 자신의 발병과 여러 가지 병이 있다는 것과 누나가 세상을 마쳤다는 것과 교류를 신중히 할 것 등에 대해 말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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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雲谷士林 39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雲谷士林에 보낸 답장이다. 뜻하지 않게 雲谷事에 대해 물으니 저같은 사람은 들은 바가 없으니 물음에 답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滄洲故事에 따르는 것은 편하지 않게 여긴다고 하였고, 이러한 중요한 예법은 경솔하게 대답할 수 없으니 널리 禮家에게 묻기를 바란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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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39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운곡사림에 보낸 편지로, 雲社의 성대한 예를 치르는 날이 멀지 않았는데, 자신은 병이 들고 또 집안에 忌故가 있어서 참석하지 못해서 서운하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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聞見錄 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제가 들은 것 세 가지를 기록하였다. 文定公 胡安國의 후손 翰林學士 克己가 남경에서 북경으로 사신으로 오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황해도 鳳山에 정박했는데, 명나라가 망하자 돌아가지 않고 三水와 甲山 사이에 살았다고 한다. 그 현손 德恒을 泮村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선조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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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澗書堂移建記 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서당은 옛날에 고을 동쪽 南澗 가에 있었기 때문에 남간이라고 이름하였고, 1686년(숙종12)에 창건하였고, 47년이 지나서 뒷산 산록으로 이건하였고, 18년이 지나서 다시 그 위로 이건하였는데 남간이란 명칭을 바꾸지 않았다고 하였다. 한적하고 산수가 아름다워 공부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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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祖栢巖先生文集跋 3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栢巖 金玏(1540~1616)의 문집 발문이다. 김륵은 본관이 禮安, 자는 希玉, 호는 栢巖이다. 이황‧황준량‧박승임 등의 문인으로 1576년(선조9)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전적을 거쳐 사간원정언‧홍문관부수찬‧이조좌랑‧경상우도관찰사‧대사간‧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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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峯誌跋 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三峯誌에 발문을 쓴 것이다. 三峯誌는 金始鏵(1662~1731)가 편집한 것이다. 金始鏵는 자가 開伯, 호는 默齋‧鐵南이며, 본관은 咸昌이다. 1702년(숙종 28) 생원시 합격하고, 李麟佐의 난 때 사방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일으켰다. 이 삼봉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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賓洞齋舍重修上樑文 5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賓洞齋舍를 중수하고 상량식 때 지은 글이다. 賓洞齋舍는 金淡(1416∼1464) 선생의 묘소를 지키기 위해 묘 아래에 1753년(영조 29)에 지은 건물이다. 봉화군 봉화읍 손골[賓洞]에 있다. 선생의 호는 撫松軒이며, 20세에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지냈다. 특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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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洞齋舍重修上樑文 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後洞齋舍를 중수하고 상량식 때 지은 글이다. 상량한 후에 수많은 산들이 조용하고, 온갖 신령이 보호하여, 松楸는 우거지고 산등성이는 이지러지지 않으며, 제사를 올림에 제 때에 하여 신령과 사람이 함께 기뻐하며, 훌륭한 자손 많이 나서 제향이 끊이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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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昌安(宅延)招魂辭 9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金宅延의 죽음을 애도한 글이다. 金宅延이 지난 해 가을에 아들을 데리고 眞城試에 참석했다가 일이 생겨서 급히 돌아가게 되었는데, 合江에 이르러 불어난 홍수 때문에 물에 휩쓸리게 되었다. 관찰사와 수령이 關文을 발급하고 장정을 보내서 유해를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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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陽坡柳公文 10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陽坡 柳觀鉉(1692~1764)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柳觀鉉은 본관이 全州, 자는 用賓이다. 백씨인 升鉉의 문인으로 金聖鐸과 망형지우를 맺었다. 1735년(영조11)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지평과 형조참의를 역임하였고, 외직에 있을 때 목민관으로서 선정을 베풀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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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徐尙甫文 1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徐昌載(1726~1781)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자는 尙甫, 호는 梧山, 본관은 達城이다. 李象靖의 문인이며, 莊獻世子의 참변이 있은 뒤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저자보다 17살 적은데 죽으니 세상의 이치에 어긋난 것이며, 부모와 자식들을 남겨두고 세상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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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金聖希文 1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金應濂(1710~?)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金應濂은 본관이 義城, 자는 聖希이다. 金誠一의 후손이며, 1750년(영조 26) 式年試 丙科에 급제하고 掌令을 역임하였다. 저자와는 어릴 적부터 막역한 사이였고, 늦은 나이에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우연이 아니라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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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權奇玉文 13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權奇玉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여섯 번 시험에 모두 떨어지고, 이제 鄕試에 일등하여 재주를 쓸만한데 세상을 마쳤다고 하였다. 과거는 外物이니 그것 때문에 기쁘고 슬픈 것은 없다고 하였다. 기개 있고 자상한 성품을 타고 났으니 몇 년의 나이를 더 빌려 주어서 가정에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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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李貞叔文 1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李長泰(1705~1763)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李長泰는 본관이 永川이며, 1750년(영조26) 저자와 같은 해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병조좌랑과 옥구현감을 역임하였고. 청렴하고 정직했으며, 특별히 서호안핵사를 역임하였다. 같은 해에 급제한 인연이 있을 뿐만 아니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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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金丈(湜)文 15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金湜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선친과 형제처럼 지냈던 고인을 생각하며, 정성스러운 모습과 아름다운 풍모, 남을 대하는 정성과 공경을 이제는 다시 보기 어렵게 되었다고 하였다. 친척과 고을 사람들 모두 상여를 잡고 따라가는데 자신은 일에 구애되어 가지 못하여 한 잔 술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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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成淸源(澯)文 15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成澯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저자와 같은 형제처럼 지냈으며, 두 선친도 서로 격려해 주는 친구였으며, 두 모친은 재종 자매 사이였으며, 나이도 서로 비슷하고, 사는 집도 가까워 어릴 때부터 늘 함께 자랐다고 하였다. 그리고 늙을 때까지도 멀리 떨어진 적이 없는데, 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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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金上舍子裕(浹)文 1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金浹(1697~?)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金浹은 자가 子裕, 호는 晩學齋이며, 1729년(영조 5)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金浹의 형은 저자의 선친과 나이도 같고 친한 벗이었기에 선친이 돌아간 후로는 아버지처럼 모시기도 하고 아버지 친구로 모시기도 하였는데, 형이 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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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從兄雙巖公文 1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從兄 金埅(1706~1778)의 제사에 올린 글이다. 金埅은 자가 巨卿, 호는 雙巖이다. 1729년(영조 5) 생원시에 합격하고, 1738년(영조14) 문과에 급제하여 成均典籍‧禮曹正郞‧兵曹佐郞‧慈仁縣監 등 역임하였다. 남에게 관대하나 是非를 가릴 때는 과감하다는 평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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哭亡子(魯鍊)文 18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아들의 죽음을 애도한 글이다. 너는 평소에 부득이하게 밖에 나가면 반드시 장소를 알려 주고 돌아올 기일을 알려 주어서 걱정하지 않게 하였는데, 어머니의 상여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어서 1년이 넘었는데 돌아오지 않느냐고 애통해 하였다. 자식을 땅에 묻은 늙은 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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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誌 19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선조 郞將公 이하 6세의 墓誌文은 묘지문을 묻을 때 집안의 재력이 넉넉하지 못해 상세하게 기록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생몰년과 家系, 그리고 묘소의 위치와 방향에 대해 기록한다고 하였다. 金輅‧金小良‧金淡‧金萬秤‧金士明의 墓誌를 기록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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曾祖考處士府君墓誌 23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증조부 金宗溥(1627~1656)의 墓誌이다. 부군의 휘는 宗溥, 자는 仲淵, 선조는 禮安人이다. 부군은 불행하게 일찍 세상을 마쳐서 기록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다만 힘이 약하여 묘소에 비석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세월이 오래 지나면 산천이 변하여 묘소를 잃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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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考成均生員府君墓誌 2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조부 金東柱(1655~1682)의 묘지이다. 자는 系能, 선조는 禮安人이다. 늦게 태어나서 조부를 모시지 못했지만 조모를 통해서 대략 들었는데, 모친이 병이 났을 때 손으로 가래를 받아내며 잠시도 옆을 떠나지 않았다고 하였다. 집안에 근거할 만한 기록이 없어서 남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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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考處士府君墓誌 25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선친 金元烈(1678~1732)의 묘지이다. 자는 天則이고, 선조는 禮安人이다. 5살 때 부친을 여의고 어렵고 외롭게 성장하였다. 정성을 다해 제사를 받들었고, 가난한 친척들을 돌보았다. 병이 들어서 일찍 과거를 포기하고 자손을 교육하는데 힘썼다. 자신들이 지금 출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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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妣孺人全州柳氏墓誌 26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先妣 全州柳氏의 묘지이다. 성균관 진사 柳昌時의 따님으로 1675년(숙종 1)에 태어나서 1750년(영조 26)에 세상을 마쳤다. 타고난 자질이 자애롭고 은혜가 있었으며, 시집온 후로는 근실하고 유순하여 부군을 어기지 않았다. 집안을 다스리는데 법도가 있었고 무당에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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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德郞月軒金公墓誌 2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月軒 金宗溟의 墓誌이다. 자는 浩源, 자호는 月軒, 선조는 禮安人이다. 1625년(인조 3)에 태어났다. 풍채가 빼어나고 문장도 뛰어났다. 성품이 단아하고 신중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래서 모두 크게 될 것이라 기대하였는데,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마쳤다. 김응조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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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士金公墓誌 28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金弘運의 묘지이다. 자는 應甫, 선조는 禮安人이다. 1711년(숙종 37)에 태어나서 1754년(영조 30)에 세상을 마쳤다. 성품이 온아하고 모습이 의젓하였다. 12살에 조부의 상을 당해서 상례를 지키는 것이 성인 같아서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관례를 한 후로 경사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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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士思亭金公墓誌銘(幷序) 29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處士 金行秋의 묘지명이다. 자는 時伯, 선조는 禮安人이다. 1715년(숙종 41)에 태어나서 1758년(영조 34)에 세상을 마쳤다. 성품이 독실하고 후덕하였으며, 몸가짐은 근실하고 조심스러웠다. 조상을 추모하는 일에 더욱 힘을 쏟았다. 11대조 참판공 이하 묘소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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伯氏成均生員晩庵公墓誌銘(幷序) 30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伯氏 金墀의 묘지명이다. 자는 獻可, 호는 晩看庵‧癡翁이며, 선조는 禮安人이다. 1697년(숙종 23)에 태어나서 1750년(영조 26)에 세상을 마쳤다. 부친의 독려에 힘입어 열심히 공부하여 金聲久‧權斗經‧金昌錫 등의 칭찬을 받았다. 1723년(경종 3)에 성균관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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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兄通訓大夫行司諫院正言雙巖公墓誌銘(幷序) 3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從兄 金埅(1706~1778)의 묘지명이다. 金埅은 자가 巨卿, 호는 雙巖이다. 외롭고 어렵게 자랐지만 1729년(영조 5) 생원시에 합격하고, 1738년(영조 14)에 문과 급제하였다. 明陵別檢으로 있다가 成均典籍으로 옮겼으며, 禮曹佐郞과 正郞을 거쳐 永喜殿令이 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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伯嫂宜人潘南朴氏墓誌銘(幷序) 3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伯嫂 潘南朴氏의 墓誌銘이다. 성균관 생원 金墀의 부인이다. 1694년(숙종 20)에 태어나서 1740년(영조 16)에 세상을 마쳤다. 성품이 온화하고 착했으며 부군을 잘 섬겼다. 시부모에게 효도하였으며 제사는 정성껏 모셨다. 동서간에 이간하는 말이 없었고, 무당을 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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思復齋權公墓碣銘(幷序) 35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思復齋 權定의 墓碣銘이다. 權定(1353~1411)은 본관이 安東, 자 安之, 호 思復齋이다. 1368년(공민왕 17) 문과에 급제하여 知槐山郡事를 역임하고 벼슬이 좌사간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서서 태조가 벼슬을 주고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벼슬을 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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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五代祖安奇道察訪金公墓碣銘(幷序) 3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安奇道察訪을 지낸 金幾善(1568~1613)의 묘갈명이다. 金幾善은 자가 元吉, 본관은 宣城이다. 성품이 단아하고 신중하여 사람들이 淸風과 蘭雪에 견주곤 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부친 민절공 玏이 安集使가 되자 자신은 가족을 데리고 白屛山으로 피하여 조용히 공부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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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均生員金公墓碣銘(幷序) 38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성균관 생원 金鋻(1590~1626)의 묘갈명이다. 자는 應久, 본관은 宣城이다. 1612년(광해군 4) 생원시 합격하고, 李适의 난 때 의병참모로 활약하였다. 천품이 독실하고 행실이 단정하였다. 조상을 받을 때는 효성을 다하였고, 자신에게는 엄격하게 하였으며, 남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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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銘(幷序) 40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직접 쓴 자신의 묘갈명이다. 앞부분에서는 선대의 家系를 서술하고 그 다음에는 자손에 대해 기록하고 뒤에 銘文을 붙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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亦樂齋權公行狀 42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亦樂齋 權斗南(1573~1646)의 행장이다. 權斗南은 본관이 安東, 자는 景望이다. 1609년(광해군1)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2년(광해군 4) 문과에 급제하였다. 당시 北人이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공이 李爾瞻과 인척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좋은 관직을 얻으려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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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士思亭金公行狀 4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처사 金行秋의 행장이다. 자는 時伯, 선조는 禮安人이다. 1715년(숙종 41)에 태어나서 1758년(영조 34)에 세상을 마쳤다. 성품이 독실하고 후덕하였으며, 몸가짐은 근실하고 조심스러웠다. 조상을 추모하는 일에 더욱 힘을 쏟았다. 11대조 참판공 이하 묘소에 모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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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狀 1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金若鍊이 저자의 家狀이다. 자세한 내용은 글 앞의 저자 소개에 나와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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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狀補 4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金晦鎭이 쓴 저자의 家狀補이고, 저자의 행적 중에 가장에 혹 소략하게 기록된 것을 보충한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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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誌銘(幷序) 7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金道和가 쓴 저자의 墓誌銘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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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碣銘(幷序) 9 / 기록자료>고도서 / 김위權相翊이 쓴 저자의 묘갈명이다.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