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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에 대해 총641,787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 318651

    祭李公(章奎)文 9 / 기록자료>고도서 / 고몽찬
    李章奎 영전에 올린 제문이다. 지금의 세상에 나서 고인의 마음과 모습, 풍도를 지녀 관대해서 가혹하지 않고, 침착해서 드러내지 않고, 통나무처럼 조탁을 하지 않았다며 고인을 기렸다.
    출처 : 유교넷
  • 318652

    祭致齋趙公文 10 / 기록자료>고도서 / 고몽찬
    趙致齋 영전에 올린 제문이다. 온화한 성품은 좋은 옥과 같고 꾸미지 않는 졸박한 마음은 새댁과 같았으며, 남의 선한 말을 좋아하기는 목말라서 물을 마신 듯 했고 남의 악한 행실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았다고 고인을 기렸다.
    출처 : 유교넷
  • 318653

    祭姜道仁文 11 / 기록자료>고도서 / 고몽찬
    姜道仁 영전에 올린 제문이다. 60평생을 두문불출하고 독서에 전념했으며 자신의 몸을 검속하기를 마치 처녀같이 하였고, 사물과 다투지 않기는 마치 면벽한 선사와 같았다고 고일을 기렸다.
    출처 : 유교넷
  • 318654

    祭海中金公文 12 / 기록자료>고도서 / 고몽찬
    金熙昇(1759∼?) 영전에 올린 제문이다. 김희승은 본관이 義城이고, 자는 叔擎, 호는 海中이다. 金範東의 아들로서 1804년 사마시 합격했다.
    출처 : 유교넷
  • 318655

    祭鄭盟文氏文 13 / 기록자료>고도서 / 고몽찬
    鄭盟文 영전에 올린 제문이다. 弱冠의 나이에 이미 鄕里에 이름이 알려진 학업과 덕에 관해 추도하고 있다.
    출처 : 유교넷
  • 318656

    祭蔡稷西文 14 / 기록자료>고도서 / 고몽찬
    蔡稷西 영전에 올린 제문이다. 일생동안 선현들을 잘 따르며 조상들의 업적을 드러내는 데 공이 많았음을 기리고 있다.
    출처 : 유교넷
  • 318657

    祭李殷甫文 15 / 기록자료>고도서 / 고몽찬
    李錫贊 영전에 올린 제문이다. 家業을 받든 전형이며 德業을 갖춘 선비라 칭송하며 기리고 있다.
    출처 : 유교넷
  • 318658

    祭金大建氏文 16 / 기록자료>고도서 / 고몽찬
    金大建 영전에 올린 제문이다. 약관에 성리학을 깊이 공부하여 견해가 정밀하였고 철저히 실천하였다고 했다.
    출처 : 유교넷
  • 318659

    祭李婿承九文 17 / 기록자료>고도서 / 고몽찬
    李承九 영전에 올린 제문이다. 타고난 재질이 아름답고 엄격하여 자신을 수양하였으며 평생 경전을 공부하였으며, 작은 잘못이라도 있으면 스스로 반성하였고 많은 재물이 눈앞에 있어 돌아보지 않았다고 했다.
    출처 : 유교넷
  • 318660

    祭靑田金公文 19 / 기록자료>고도서 / 고몽찬
    鶴皐 金履萬(1683~1758) 영전에 올린 제문이다. 김리만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로, 본관은 예안이고 자는 仲綏이다. 檀溪 金海一의 아들이다. 1713년(숙종 39) 增廣試 병과에 급제하고, 通德郞과 兵曹佐郞을 역임하고 양산군수를 지냈다. 양산군수 재직 때 수
    출처 : 유교넷
  • 318661

    祭李大溪(周楨)文 21 / 기록자료>고도서 / 고몽찬
    李周楨(1750~1818) 영전에 올린 제문이다. 이주정의 字는 翰伯, 初名은 宗洛이고, 號는 大溪이다. 本貫이 固城이고, 李弘輔의 아들이다. 南屛 鄭璞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약관 이전에 명성이 이미 대단하였으며, 그 후에 大山 李象靖의 문하에서 몸을 담아 스승의 기대
    출처 : 유교넷
  • 318662

    祭善長文 21 / 기록자료>고도서 / 고몽찬
    조카인 高彦弼 영전에 올린 제문이다.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남을 슬퍼하면서 하늘이 어찌 우리에게 이런 화를 내리는지 모르겠다며 탄식했다. 붓을 잡고 이 글을 쓰니 정신이 어지러워 무어라 써야 할 지 모르겠다고 했고, 지하에 있는 조카가 지각이 있다면 나의 마음을 묵묵히
    출처 : 유교넷
  • 318663

    祭第四兄文 22 / 기록자료>고도서 / 고몽찬
    넷째 형의 영전에 올린 제문이다. 문헌의 가문에서 태어나 전통을 잇지는 못하였지만, 勤儉과 周密로서 가정을 경영하였고, 농사에 힘썼으며 남에게 허물을 짓지 아니하고 작은 일이라도 직접 노력하여 성취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
    출처 : 유교넷
  • 318664

    行狀 1 / 기록자료>고도서 / 고몽찬
    雲山 李彙載(1795~1875)가 1861년(철종 12) 2월에 지은 행장이다. 공의 이름은 夢贊이고, 字는 理叟으로 본관은 개성이다. 월봉 고인계는 공의 7대조가 되며, 증조는 高師訥이고, 조부는 高星瑞이다. 아버지는 高補寬으로 繼妣인 청주정씨와의 사이에서 1795
    출처 : 유교넷
  • 318665

    墓誌銘 5 / 기록자료>고도서 / 고몽찬
    肯菴 李敦禹(1807~1884)가 지은 묘지명이다. 평소 기거함에 재물을 탐하지 않았고 이웃의 자제들이 배움을 청하면 반드시 온화한 낯빛으로 가르쳐주었으며, 집에 천여 권의 장서를 갖추고 문장을 짓는 것으로써 즐거움을 삼았다. 만년엔 더욱 純正함을 추구하고 오직 이치
    출처 : 유교넷
  • 318666

    墓碣銘 6 / 기록자료>고도서 / 고몽찬
    門人 柳疇睦이 지은 墓碣銘이다. 내용은 행장 및 묘지명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출처 : 유교넷
  • 318667

    識 10 / 기록자료>고도서 / 고몽찬
    1896년(건양 1) 아들 高文謙이 지은 識이다. 아버지는 일찍이 명리를 멀리하고 經術과 文章에 뜻을 두어 평생 저술이 대단히 많아, 살아생전 죽은 형이 아버지의 글을 모아 6책에 이르는 분량의 원고를 만들었지만, 아버지께서 모두 빼고 詩 1책, 文 2책만을 추리면서
    출처 : 유교넷
  • 318668

    서소집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휴
    書巢 金宗烋의 문집. 6卷 3冊. 木板本.四周雙邊, 半郭 21.5×16.5㎝, 有界, 10行20字, 上下內向2葉花紋魚尾, 30.5×20.7㎝. 이 책은 書巢 金宗烋 선생의 시문집으로, 선생의 曾孫인 世洛이 1899년(광무 3) 편집 간행한 것이다. 선생의 문장은 시
    출처 : 유교넷
  • 318669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휴
    庚午至日書懷(時典籍公旅宦在京), 雪夜有懷堂叔(諱相鏞号庸叟), 曉, 逢人, 除夕(庚午), 擬古, 義林池(癸未自京下鄕與李晦文同行作路于此), 淸泠浦, 拜鵑樓, 錦江亭, 酬晦文別洪生, 別洪生, 謾吟呈堂叔, 病中次堂叔投示韻, 又次其韻酬稺常(族姪重夏), 瀛州琴, 效王无㓛呈堂叔,
    출처 : 유교넷
  • 318670

    請景慕宮典禮疏(代士林作,1855)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휴
    1855년(철종 6) 사도세자가 태어난 지 두 번째 환갑 해에 선생이 영남사림을 대신하여 사도세자의 徽號를 청한 상소이다. 서두에 1792년(정조 16) 영남유생 李를 疏頭로 한 1만 57인이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자를 추가로 처벌하라는 소를 올렸을 때, 정조가
    출처 : 유교넷
  • 318671

    請忠定公冲齋權先生陞祀聖廡疏(代士林作)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휴
    冲齋 權橃을 문묘에 배향해야 한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상소로 저자가 사림을 대신하여 지은 글이다. 역대 왕들과 선현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론하면서 권벌의 덕행과 치적을 주장했다. 먼저 권벌의 학행을 나열하고 그 다음 그의 행적을 언급한 중종‧영조‧정조 등의 왕들을 거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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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8672

    先祖潛庵先生請爵謚上言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휴
    저자의 10대조인 潛庵 金義貞에게 시호를 내려달라는 상소문이다. 김의정이 1545년(인종 1)에 일어난 을사사화의 乙巳名賢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적극 주장하면서 선현의 시문에 나타난 그의 학행과 처신을 거론했다. 먼저 을사명현 중 가장 두드러진 인물인 河西 金麟厚
    출처 : 유교넷
  • 318673

    與李承旨(彚寧)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휴
    저자가 李彙寧에게 그의 高祖인 蘆峰 金偮의 墓碣銘을 부탁한 편지이다. 고조부가 서거한 지 백년이 지나도록 방치해 놓아서 자손으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하면서 遺事 1통을 보내니 참고하여 비문을 지어 달라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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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8674

    與權參判(載大)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휴
    權載大가 사도세자 추존 상소문제로 호남으로 귀양가게 되자 저자가 아들을 대신 보내어 위로하는 편지이다. 5언절구 1수로 전별을 대신하게 되어 초솔하고 섭섭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출처 : 유교넷
  • 318675

    與李都正(漢膺)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휴
    저자가 李漢膺에게 이전에 부탁한 글의 내용이 잘못 전달되었으므로 바로 잡아 달라는 내용이다. 부탁하고자 한 글이 墓誌銘이었는데 이한응이 行狀으로 착각하여 편지를 쓰는 바람에 착오가 생겼던 것이다. 그래서 글의 편차를 이미 마쳤다 하더라도 좀 정정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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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8676

    與院會諸生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휴
    서원의 교생들이 저자를 위한 修學禊를 결성하려 한데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힌 편지이다. 자신은 후배들이나 문하생들이 수학계를 결성할 정도로 학문이 출중한 것도 아니고 강학을 열어 후학들을 계도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런 모임의 결성은 남의 비웃음이 된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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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8677

    答金文叔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휴
    저자가 金輝濬(1820∼1898)에게 답한 장문의 글이다. 원래 2편으로 되어 있는 글인데, 문집을 간행하면서 구분하지 않고 차례로 실었다. 김휘준이 질문한 학문에 나아가는 절도와 방법에 대하여 대답한 내용이다. 학문하는 자세로 知行을 말하면서 그 방법으로서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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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8678

    與堂弟季鎭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휴
    從弟인 金宗泰에게 보낸 편지로 임지에 부임 차 먼 길을 여행한데 대한 안부 편지이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 건강한 지 염려된다고 했으며 자신은 특별히 아픈 곳은 없으나 예전 같지는 않다고 하면서 벼슬살이에 있어서 매사에 전전긍긍하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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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8679

    與族孫孟雲(泰璜)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휴
    上疏 일로 疏廳에 심부름가는 족손인 金泰璜에게 보낸 편지이다. 의복과 여비도 갖추지 못한 채로 떠난 것이 못내 걱정스럽다면서 본인이 갑작스럽게 지어 보낸 疏草라서 부끄럽다고 말을 한다. 그래서 심부름 보낸 垕에게 다시 고친 부분을 보내니 그것을 소청에 보여주고 원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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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8680

    寄厚兒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휴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아들인 重厚에게 보낸 편지로 2편으로 되어 있다. 과거시험을 치른 아들에게 언행을 조심하고 몸가짐을 삼가라고 당부하면서 본인은 며칠 동안 치통을 앓았으나 이제는 음식도 순조로이 먹을 수 있게 되었고 從兄의 건강이 전보다 더 좋아졌다고 전했다.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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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8681

    觀書劄疑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휴
    이 글은 저자가 여러 경전을 읽다가 의심나는 항목들이 있으면 따로 모아서 기록해 둔 것을 편집한 것이다. 여기에 언급된 중요 경전들로는 『大學』을 비롯하여, 『論語』‧『孟子』‧『詩經』‧『周易』‧『中庸』 등이 있다. 그리고 경전 이외의 책으로는 陶淵明의 「武陵桃源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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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8682

    太極圖說解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휴
    北宋 때의 周敦頤(濂溪, 1017~1073)가 「太極圖」에 대해 해설을 붙여서 펴낸 『太極圖說』을 보고 기술한 선생의 입장이다. 선생은 『太極圖說』 전체를 13개 조항으로 나누어 놓고, 각 단락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먼저 태극의 이치는 형체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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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8683

    甲午斥和辨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휴
    月川 趙穆(1524~1606)이 지은 「甲午陳情疏」 중의 척화론을 근거로 시비가 일자 월천의 척화론이 그 당시 시론과 맞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하게 제기한 글이다. 아울러 월천이 西厓 柳成龍을 지목하여 主和誤國자로 공격했던 사실에 대하여 류성룡이 주화론자가 아니라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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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8684

    東征錄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휴
    음력 9월 10일 바다를 보기 위해 출발한 이후 13일 동안의 여행길에 있었던 일과 감상 여정이 기록되어 있는 일종의 旅遊記이다. 壬申일에 鳳城에 묵으면서부터 葛川‧淸凉山‧泉谷‧羊邱‧泣嶺‧飛洞‧寧海邑‧觀魚臺‧竹山‧寧德‧淸河‧牧島로 가서, 돌아오는 길에 泣嶺‧羊邱‧泉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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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8685

    武王封箕子于朝鮮論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휴
    사마천의 『史記』에 武王이 箕子를 朝鮮에 봉했다는 기록에 대해서 반박하고 있는 글이다. 저자는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한 것이 아니라, 은나라의 종실 친척인 기자에게 있어서 주나라는 같은 하늘을 지고 살아갈 수 없는 원수의 나라이기 때문에 무왕의 주나라 국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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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8686

    故司猛李公隮祔忠烈祠事呈東萊府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휴
    임진왜란 당시 부산성의 守將인 鄭撥의 副將이었던 李庭憲이 순절하였던 일에 대하여 충렬사에 合祀를 해 달라고 東萊府에 올린 글이다. 당초 충렬사가 지어지고 정발을 비롯하여 송상헌 등이 모두 合祀되었으나 이정헌은 당시 일개 서생의 신분으로 참여한 客將이었기 때문에 군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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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8687

    烈婦金氏請褒事呈巡營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휴
    안동 진사 金燦銖의 어머니 김씨가 남편의 죽음에 장례를 치르고 나서 자진하여 죽은 일에 대하여 열부의 포상을 해 달라는 청원이다. 김씨의 나이는 64세로 50년을 한결같이 節行을 하여 이웃 마을까지 이름이 날 정도로 閨門의 모범으로 알려졌으니 偕老했다고 할 만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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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8688

    冶城宋氏族譜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휴
    宋應煥이 자신의 집안 족보 續刊에 즈음하여 선생에게 서문을 써 달라고 청한데 대해 써 준 족보서문이다. 冶罏氏가 지역에서 번성한 집안인데 舊譜를 펴낸 뒤 백 년이 지나도록 續刊이 없어서 안타깝다고 하였다. 그런 뒤에 襄順·星漆 등 여러 종실 사람이 모여 족보 만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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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8689

    贈靑海孟秀才學容序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휴
    저자가 孟學容에게 써준 서문이다. 함경북도 靑海에 사는 맹학용이란 사람이 자신의 靜窩와 土菴 두 선조가 세상에 알려지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재물을 지니고 관문을 넘고 고개를 넘어 두루 當世의 사대부들을 찾아다니며 글을 부탁하던 차에 마침 필자를 찾아오게 되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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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8690

    望考齋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휴
    저자가 망고재를 짓고 나서 지은 기문이다. 조상 때부터 살아온 집은 梧水가에 있어서 선조인 鶴沙의 先壠과는 거리가 百里나 되며, 부친의 무덤이 있는 塔坪은 또 그 길의 반 정도나 되니 성묘도 한 해에 한두 번 밖에 하지 못하여 평생 매우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더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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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8691

    淸澗堂重建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휴
    1846년(헌종 12) 處士 宣城 金鼎元(1655~ 1735)이 지내던 처소를 중건하면서 지은 기문이다. 먼저 청간당의 위치를 서술하고, 김정원이 죽은 지 100년이 지났는데 그의 자손들이 선대의 남긴 뜻을 추모하여 짓게 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집의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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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8692

    鄭孝子閭閣重建記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휴
    鄭道昌이라는 효자의 비각을 중건하면서 적은 글이다. 효자의 字는 泰甫이며, 圃隱의 후예라는 사실을 먼저 밝혔다. 나이 열여섯에 아버지가 反奴에게 죽자 효자는 목숨을 바쳐 복수하려 하였고 6년 동안 服을 입고 5년을 마음을 삼가 앞뒤로 1일 년을 다하고 나서야 그쳤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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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8693

    追遠錄後小識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휴
    저자의 선조인 鶴沙 金應祖가 지은 追遠錄 뒤에 간단한 기록을 적어 넣은 글이다. 모든 예는 西厓 柳成龍의 永慕錄과 같이 하였고, 14세의 世系와 墳墓·遺事·家稿를 실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錄이 만들어지는 데는 200년이 걸렸지만 상자에 보관되어 있다가 壬午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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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8694

    高祖考蘆峯先生文集後小識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휴
    저자가 고조부문집에 쓴 발문으로 문집이 이루어진 과정을 서술했다. 고조부인 蘆峯 金偮의 문집을 필자의 부친이 1807년(순조 7)에 편집하여 2冊을 만들었고, 또 만사·제문 및 宗叔 弦齋公이 지은 家狀 하나를 합하여 附錄 1冊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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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8695

    三退處士鄭公文集後識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휴
    1862년(철종 13) 4월 하순에 쓴 三退處士 鄭아무개의 문집에 쓴 발문이다. 삼퇴처사는 옛날 逸民의 풍모가 있는 사람으로 言語文字의 학문인 辭章에는 힘쓰지 않았으며, 오직 詩書禮樂의 가르침을 외고 읽으며 뜻을 정밀하게 하고 깊이 致用의 방법에 힘쓴 사람임을 서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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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8696

    讀平菴學士權公遺事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휴
    영조 때 사도세자의 사부로 世子侍講院設書였던 權正忱(1710~1767)에 대해서 전해져 오는 일을 읽고 쓴 글이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날의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고, 권정침이 手記로 남긴 글에, 세자가 촛불이 어두워서 잘못하여 왕이 다니는 길을 범하였다가 깜짝 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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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8697

    義山詠義樓上樑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휴
    의산서원의 문루인 영의루를 지을 때 저자가 쓴 상량문이다. 榮鄕은 뛰어난 지역으로 櫟翁의 자취가 남아 있고 鶴祖의 가르침이 전해져오는 곳이라고 서술하고, 서원 오른쪽에 옛날 터를 참고하여 재물을 모아 누각을 건립한다는 등 이유를 밝힌 뒤, 전아한 7言體로 영의루의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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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8698

    榮川鄕校詠歸樓重修上樑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휴
    고려 공민왕 때 지어진 영주향교는 조선시대에 여러 번 중수와 수리가 있었는데 이 글은 저자가 향교의 문루인 영귀루를 중수할 때 지은 상량문이다. 河崙이 창건한 지 400년이 된 향교의 여러 차례 중수하였던 과정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출처 : 유교넷
  • 318699

    鳯溪社廟宇移建上樑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휴
    鳯溪의 里社 사당을 옮겨 세울 때 金宗烋가 쓴 상량문이다. 鳯溪社와 三架祠屋은 裴氏의 兩대 父子인 安村 裵應褧(1544~1602,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과 그의 아들 癡巖公을 모시는 사당이다. 원래 여러 자손들이 집안에서 모시던 것을(私享) 승격하여 마을에서
    출처 : 유교넷
  • 318700

    春睡堂上樑文 / 기록자료>고도서 / 김종휴
    저자가 지은 춘수당의 상량문인데, 먼저 옛터에 새롭게 당을 짓게 된 경위를 간략히 밝힌 다음 春睡堂 權先生(權, 1576년~1651)이 아버지와 함께 포로가 되었는데, 하늘에 빌었더니 至誠이 天地를 감동시켜 번개가 쳐 오랑캐들이 달아나고 숨자 한 밤중에 아버지를 업고
    출처 : 유교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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