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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韓仲澄書(1679) 21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원자신이 귀양가 있는 諸人에 대하여 상소를 올렸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고 하고 흉년이라는 소식을 전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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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韓仲澄書 22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원완전히 은둔하려 한다는데 이는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은거를 말리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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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韓仲澄書 22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원실록 편찬의 소식을 전하고 대학사의 상소가 좋지 못한 것이 많아 권사간은 이로 인하여 引避하였다고 하니 도리어 한바탕 소동이 있을 것이니 가소롭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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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韓仲澄書 22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원자신이 이번에 상소를 올리고 呈單한 것은 부득이한 것이었으나 대신은 이미 公座중에 질책하고 하관은 입 다물고 가만히 있었으며, 이미 처음 상소초본에 대신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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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韓仲澄書 23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원다섯 번이나 상소를 올려 체직을 청하였는데 허락받지 못하였고, 하루 이틀 후에 다시 상소를 올려 사직을 청하고자 하나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또한 허목은 우두머리만 죄를 주자고 청하였다고 하니 緩論이 이와 같으니 자신의 뜻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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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韓仲澄書 23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원최판서가 무변 李某를 추천하였다고 하는데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고 근래의 유언비어가 이러니 현자가 숨어살면서 문밖을 나가지 않아도 비난을 면하기 어려우니 세상사를 논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탄식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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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金重卿書(1672) 24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원편지를 받고 답장이 늦었다고 하고 금년의 농사가 또 흉년이니 민생이 가련하다고 하였다. 또한 수상이 時賢을 배척한다니 손발이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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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兵使某人書別紙(任高城時) 24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원군포를 상납할 때 퇴짜를 놓고 다시 갖추어 올리게 하는 것은 서울의 月利가 매번 증가하는 것으로 궁한 백성들로 하여금 전답과 우마를 팔고 혹은 솥을 팔아 그 값을 대게 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본군의 경우 목화가 나지 않는 땅이라 軍布로 쓸 수 있는 布는 거의 나지 않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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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城主某人書(1664) 25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원지금 흉년으로 말미암아 온 족속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우니 빨리 구휼미를 풀어달라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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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趙奉化(昌門)書(1649) 26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원봉화의 虎變이 있었다는 말은 들리는 이야기로는 빈말이라고 하였는데 지금 글을 보니 실제라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또 조카의 편지를 보니 御史가 허물이라고 잡은 것은 근거 없는 일이라고 하니 어찌 이런 허무맹랑한 무고가 있겠는가 탄식하고 지금 새로 부임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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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冕兒書(1673) 26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원사직하고자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지금 혼자 있은 지 반년이 되어 부득이 너의 어미를 올라오게 했고 꼭 간성을 거쳐서 오되 六十坡嶺을 넘으면 탄탄한 길이라고 하였으며, 숙소에는 남주인을 출입시키지 말 것이며 學이는 아직 혼자 말을 탈 수 없으니 單이는 여종이 안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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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冕兒書(1675) 27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원아들 冕에게 보낸 것으로 가권들이 올라오는 날은 開月 初3일로 하라고 하고 너의 어미 올라올 때는 쌍가마를 쓴다고 하는데 이는 人馬가 왕래하는데 양식과 관계되는 것이라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고 지금 獨轎를 보내니 그것을 타고 올라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약재 중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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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克侄書(1672) 28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원농사가 잘 되었는지 묻고 자신은 이번 가을 돌아가고자 사직 보장을 올렸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또 金台老에게 들으니 南中에 좋은 산이 있다고 하여 台老에게 사놓으라고 하였는데 과연 살만한 곳인지 길지인지 알아보라고 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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寄晩侄書(1682) 29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원남중에서 돌아오는 길이라 아직 너의 편지를 받아보지 못하여 울적하다고 하였다. 무사히 집에 돌아갔는지 묻고, 달력과 시사본말을 보내니 함흥과 명천 편에 즉시 보내라고 하였다. 學이는 아직 안성에 있을 것이니 네가 안성에 있으면 초당에서 같이 거주하면서 공부하고 놀게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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殿策 29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원두 편의 대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 名器에 대한 것으로 1645년(인조 23) 별시의 대책이다. 명기는 국가를 운영하는데 매우 중요한 것이니 가벼이 하지 말 것이며, 門閥로 임용하여서는 안될 것이라고 하였다. 특히 근자에 이르러 淸顯職을 右族이 독차지하고 있는 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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策題 38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원馬政을 주제로 제출한 策問이다. 그러나 단순히 말에 대한 물음은 아니고 말에 비유하여 국정을 어떻게 운영하는 것이 좋을지를 물은 것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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袁盎論 39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원漢代의 袁盎을 소재로 삼아 군자와 소인을 논한 것이다. 원앙은 처음 장석지의 추천으로 벼슬하였으나 吳楚七國의 난 당시 회남 여왕이 촉으로 천봉될 때 정색하고 악악거렸으니 어찌 진군자라 하겠는가 하고 원앙을 비판하였으며 자신은 원앙을 위군자라고 본다고 하였다. 그리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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蓋寬饒論 40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원漢 宣帝대의 蓋寬饒의 사례를 통하여 忠直한 선비의 자세를 논한 것이다. 蓋寬饒가 ‘官天下’를 논한 것은 태자인 원제가 유약하여 대업을 보존하기 어려우므로 이를 내다본 것이라고 하고, 법을 집행하는 사악한 신하가 大逆으로 몰아서 죽인 것은 어찌 원통함이 심하지 않겠는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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赤伏符論 43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원군자가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이치를 보아서 할 뿐으로 이치에 마땅하면 반드시 해야 하고 이치가 그렇지 않으면 하면 안 되는 것이라고 하며, 광무제가 赤伏符를 받고 황제위에 올랐다는 것은 잘못임을 논한 것이다. 즉 적복부가 없었더라도 한실을 받들자는 광무제 밖에 없었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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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坡先生世系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원공의 성은 洪氏요, 휘는 宇遠, 자는 君徵, 호는 南坡, 본관은 南陽이다. 시조인 先幸 고려에 벼슬해서 金吾衛別將同正 先幸부터 부친인 15세 榮까지의 세계를 적었다. 7세 德義까지는 부계만 적었으며 8세 子儆부터 배위를 같이 병기했다. 조부인 14世 可臣은 淸難功臣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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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坡先生年譜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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致祭文 1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원1689년(숙종 15) 국왕이 예조정랑 李日三을 보내어 내린 치제문이다. 홍우원의 학문이 탁월하였음을 말하였고, 일심으로 공도를 행했으며, 그로 인하여 邦論이 정해졌음을 말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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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愈가 撰한 신도비명이다. 어렸을 때부터 제공들을 보아왔는데 남파 홍공은 옛 군자의 心行이 있는 자였다. 그러나 當世에 용납되지 못하여 세상이 꺼리고 미워한 바 되어 마침내 슬픔에 잠기어 버려지게 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이라고 하였다. 공의 휘는 宇遠이고, 자는 君徵이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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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狀 10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원조덕린이 찬한 행장이다. 아들 璄의 부탁을 받고 찬술한 것으로 홍우원의 학문과 인품을 말하고 사환의 행적을 말하였다. 1654년(효종 5) 부수찬으로 경연에 나아갔을 때 조숙원의 두 아들과 소현세자의 아들을 해배해 줄 것을 청하였으며, 공조참판으로 재임할 당시 민생을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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遺事 27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원이봉징이 찬한 것으로 6개의 일화로 구성되어 있다. ①항상 옷을 단정히 하고 가묘를 참배하였으며 종일토록 앉아 책을 보아도 자세가 흐트러짐이 없었다. ② 집이 매우 가난하였어도 입밖으로는 궁하다는 말을 내어 본적이 없었으며, 자신이 선생으로부터 강목을 수업하였을 때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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遺事 29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원李瀷이 찬한 것이다. 이름‧자‧본관을 기록하고 관직생활을 하면서 강직하였으며, 복제논의 등에서 公을 앞세우고 私를 내세우지 않았음을 기록하였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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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峯書院重修記 35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원李瀷이 찬한 것으로 홍우원의 학문은 正己한 후에 다른 사람을 바르게 하는 것이었고, 글은 六經을 위주로 하였으며, 출사해서는 시대의 꺼리는 것을 꺼리지 않았으니 一身으로 世敎를 짊어진 사람이며, 一代의 宗師였다고 하였다. 선생이 돌아가신 지 3년 뒤 안성에 서원을 세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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識 37 / 기록자료>고도서 / 홍우원현손 福田이 쓴 것으로, 1782년(정조 6) 여러 동지들과 의논하여 백봉서원에서 활자로 간행하여 반포하였다. 원집 5권, 연보 1권은 공의 손자 첨추공 洪日恒이 편찬한 것이나 결락이 있어 강의‧계사‧장보‧잡저 등 약간편을 모아 1권을 만들어 간행하니 전후 7권이라고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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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리집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甪里 高聖謙의 문집. 14卷 7冊. 1895. 木活字本. 四周雙邊, 半郭 21.7×15.8㎝, 有界, 10行20字, 註雙行, 內向2葉花紋魚尾, 32.1×21.0㎝. 이 문집은 고성겸이 생전에 손수 엮어 놓았던 것을 그의 아우인 高文謙이 최종적으로 엮은 것이다. 총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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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遠遊篇七首, 敬次首尾詩二十首, 次贈姜耘甫(稷)遣懷韻四首,和贈柳叔斌(疇睦)壬七泛月韻, 宣城歸路和贈李謹休(晩慤)四首, 月欄精舍與李謹休金休萬(奭裕)次退溪韻,敬次高山精舍韻贈李始能(敦禹),與金德吾(樂泓)夜話兩首, 與李驪應(昭著)夜話三首, 送李驪應, 送安宗五(挺喬)四章,姜啓宇(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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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老人行, 七十吟, 八十吟, 和贈黃聲汝(基鍾)秋塘韻兩首,秋塘夜話,和贈黃聲汝兩首,和贈黃聲汝逢別思韻三首,黃聲汝以詩見速兩首, 和贈黃聲汝迎春韻兩首, 蓮社與黃聲汝柳大圭(進奎), 邦慶日與黃聲汝柳大圭諸友會話蓮社, 張稷下(周炳)黃聲汝蔡彛叔(綏禹)見訪三首, 甪墅仲秋與黃聲汝蔡彛叔柳大圭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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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東國詩史, 樂府詞, 浣溪沙, 賞春, 憶王孫二調, 春日晩眺, 南浦月, 春暮, 如夢令二調, 惜春, 减字木蘭花, 曉起, 烏夜啼, 夜坐, 人月圓, 感舊, 碧雲深, 憶遠, 武陵春, 恨別, 賀聖朝, 幽居, 漁歌子, 本意, 少年遊, 嘆老, 鷓鴣天, 梅花, 和贈黃聲汝, 水調歌頭,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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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黃猿臘梅節小會七首, 黃雞淸和節晩華亭初成八首, 晩華亭雜詠, 小塘灌水, 塘水小貯以卵殻爲落火戱, 假作幾種水鳥浮之塘面, 塘堤翠楠, 錦浦柳林, 欲雨, 霖雨兩首, 苦雨, 急雨, 積雨初收霽色可掬, 霽後月色甚佳, 田家, 移秧, 秋千, 連夜拈韻諸君不無苦色, 和贈做課諸卽歸自淸臺韻, 有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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輓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輓李雲山先生四首, 輓蔡稷西丈七首, 輓柳定齋先生五首, 輓柳洛坡相國兩首, 輓李洛北尙書丈三首, 輓溪巖金先生(緬禮時), 輓李淸洞丈七首(幷序), 輓李定軒丈四首, 輓李丈(庭百)三首, 輓柳丈(致直), 輓鄭箕疇丈六首, 輓姜曠士曰成二篇, 輓姜典庵耘甫七首, 輓柳溪堂叔斌兩首, 輓李巖後謹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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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山海遊觀篇, 遊淸凉錄(幷序), 宣城憶約中舊伴, 葛仙臺, 孤山亭, 淸凉洞天, 吾山堂, 與南中同志竟夕登臨,金塔峯御風臺,聰明水, 風穴臺, 動石, 修眞庵, 金生窟, 文殊庵, 滿月庵, 蓮花峯, 蓮臺庵, 祝融峯, 登六六峯最高處, 講畢次白鹿洞韻, 泰愍城舊址, 陶山, 寧越子䂓樓,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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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山海遊觀篇,遊曦陽錄(幷序),三街約行, 兎遷, 夜宿老牧, 孤山途中, 曦陽峯, 夜遊巖, 曦陽古寺, 幻寂庵, 白雲臺, 白雲庵, 外仙遊洞觀瀾巖, 玉舃臺, 內仙遊洞仙遊亭, 次仙遊亭韻贈主人李令(容鶴), 隱仙巖, 臥龍瀑, 龜巖, 爛柯巖, 鍊丹爐, 仙遊洞門, 巴串, 臥龍巖, 鶴巢臺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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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柳定齋先生 1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저자의 조상 세 분에 대한 글을 보내준 定齋 柳致明(1777~1861)에게 감사를 표하며 보낸 답신이다. 다만 月峯 高仁繼(1564∼1647)에 있어서 세 가지 節義에 대한 내용을 보충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첫째 李爾瞻(1560~1623)이 높은 관직으로 종용했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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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柳定齋 2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영남지방을 살피고 올라간 류치명에게 올린 편지이다. 류치명의 행차가 그 지역 민심에 많은 은혜를 베풀었으며, 이로 인해 많은 선비들이 칭송하는 글을 올릴 것임을 언급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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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洛北李尙書丈 2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저자가 아내의 상을 당했을 때 위로의 편지를 보내왔던 洛北 李孝淳(1789~1878)에게 감사를 표한 답장이다. 부부 사이에 누군가가 먼저 죽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지만, 그동안 학문에만 전념하느라 가족을 돌보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마지막 보내는 장례에도 부족한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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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李洛北 3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이효순이 왕명으로 높은 관직에 제수된 것을 축하하는 편지이다. 이 서신에는 근래 2년 동안 나쁜 일들만 생기는 저자의 근황이 담겨 있다. 농사는 기황이 들고 몸도 병이 들어 약으로 살고 있으며, 이 때문에 이웃이나 친척의 경조사도 챙기지 못하면서 지낸다는 내용이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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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蔡稷西丈 4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연배가 높은 稷西 蔡光禹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편지이다. 인근 지역에 宿德耆老들이 모두 별세하였지만, 채광우와 같은 어른이 계셔서 다행임을 토로한다. 이에 저자에게도 많은 가르침을 주기 바란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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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蔡稷西 5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채광우가 저자에게 큰 기대를 표한 글을 보내오자, 저자는 그런 기대를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겸양하면서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답신한 편지이다. 저자는 젊은 날 ‘선비가 세상에 나가 뜻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하여 과거공부에만 골몰하느라 시간을 허비했다고 술회한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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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蔡稷西 6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이 편지는 가을에 편지를 받고 겨울이 되어서야 답신을 하는 것에 양해를 구하는 말로 시작한다. 그동안 어버이께서 병석에 계신데다 딸마저 병으로 세상을 뜨는 일이 있었다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는 모두 자신의 많은 잘못에 대한 하늘의 응보로 순순히 받아들일 뿐이라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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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蔡稷西 7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채광우에게서 글공부를 하고 돌아오는 저자의 아우 편에 가르침을 전해 준 데 대한 감사의 편지이다. 근래에 부친께서 병환 중에 계시는 등 집안에 우환이 생겨서 서책을 읽을 겨를이 없었고, 그전에 배웠던 것들마저 모두 상실하게 되었다는 저자의 걱정이 이 편지에 실려 있다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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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李雲山先生 8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高夢箕의 사위인 雲山 李彙載(1795~1875)에게 고을 수령으로 부임하게 된 것에 대해 축하를 보내는 편지이다. 慶山縣令과 淸道府使 그리고 洪州牧使를 역임했던 이휘재가 편지를 먼저 보낸 것에 대한 감격스럽고 죄송한 마음을 담고 있다. 이휘재가 부임하는 고을은 산수가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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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李雲山 8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漢城府右尹에 임명된 이휘재의 축하연에 참석했어야 하지만 뒤늦게 그 소식을 접하게 되어 서신으로 축하를 대신한다는 편지이다. 저자는 마음을 나눌 만한 친척들마저 하나둘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남은 날들을 허물없이 보낼 수 없다고 탄식하고 있다. 다만 오랜 인연을 맺어온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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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洛坡柳相國 9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洛坡 柳厚祚(1798~1876)에게 하례와 전송을 하지 못한 미안함을 담아 보낸 편지이다. 못난 사람에다 길마저 멀어서 정승에 제수된 류후조에게 하례를 올리지 못하고, 주청사로 청나라를 다녀올 때에도 전송하지 못한 것에 대한 양해를 구하고 있다. 또한 아들이 죽었다는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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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柳洛坡 10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상을 당한 류후조에게 올리는 조문의 글이다. 이보다 더한 일에 견주고 너그러운 생각으로 이겨내야 한다며, 그 방법은 ‘命에 대해 편안히 받아들이라[安於命]’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이번 상으로 자신과 같은 후학들도 의지할 곳을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이런 난세에 누구에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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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李定軒丈 11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華亭에 대한 記文을 부탁했던 定軒 李鍾祥(1799~1870)에게 보낸 답신이다. 이 편지에서 저자는 華亭의 이름의 유래가 선친의 시에도 나와 있음을 보여주면서, 그것은 가족 간에 항상 화목하게 살고자 하는 의미임을 설명하고 있다. 그 정자에는 특별히 화려한 장식이나출처 : 유교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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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箕疇鄭丈 11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箕疇 鄭民秉(1800~1882)이 큰 아들을 잃은 것에 대한 위로의 편지이다. 옛날 哲賢들도 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들을 당했다면서, ‘命’이라는 글자를 언급하며 위로하고 있다. 근래에 여러 친지들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힘든 시간들을 보낸 저자의 처지도 함께 전하고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