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 에 대해 총641,787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
319151
答黃聲汝 16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聲汝 黃基鍾의 시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담아 보낸 답신이다. 黃基鍾으로부터 받은 시는 대단히 좋은 작품들이었다면서 나이가 들어서도 맑고 강건한 품격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에 저자는 축하를 보낸다. 이 편지에서 저자는 시에 정력을 들이는 것을 두고 식자들은 웃을 것이라출처 : 유교넷 -
319152
答黃聲汝 17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黃基鍾에게 감사를 표한 편지이다. 저자는 지난번 방문해준 것과 이번의 편지에 모두 감사하다면서, 다만 심부름하는 사람이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오해가 생긴 것이 아쉽다고 말한다. 황기종의 叔氏 일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하면서 잘 수습되기만을 바란다고 전한다. 아울출처 : 유교넷 -
319153
與黃聲汝 17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黃基鍾에게 저자가 지은 시를 담아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에서 저자는 지난번에 보여준 「祭儀圖」가 늙은 뒤에도 후생들에 대한 사랑이 시들지 않았다는 증거라며 축하를 보낸다. 그에 비해 저자 자신은 오랜 지병에 시달리다 오늘 아침에야 처음 지팡이를 짚고 걸어보았다고 하출처 : 유교넷 -
319154
答李景活(彙潑) 18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景活 李彙潑의 ‘入深逃名’에 대한 답신이다. 저자는 ‘入深’의 경우는 그럴 수 있다고 하겠지만, ‘逃名’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한다. 이휘발은 젊어서부터 세상에 몸을 던지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을 바꾸기 쉽지 않을 것이고, 이름이라는 것은 저절로 오는 것이기 때문에출처 : 유교넷 -
319155
答閔侯(致序) 19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閔致序가 관에 대한 백성들의 원망과 비방을 해결하고자 저자를 만나자는 전갈을 보내오자 이에 대해 답한 편지이다. 저자는 관청에 드나드는 것이 익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고을에서만 살아서 관아가 어디 있는 줄 모른다며 만나자는 청을 정중히 거절한다. 그리고 원망과출처 : 유교넷 -
319156
答龍倅李竹圃 19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竹圃 李喬榮에게 보낸 답신이다. 저자는 이교영이 지은 글을 읽어봤는데 한두 편에 불과하였지만 대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말한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찾아가 모든 글들을 보고 싶지만 관아를 호랑이처럼 두려워하는 촌사람이라 그럴 수 없다며 언제 한 번 경치 좋은 곳에서 만출처 : 유교넷 -
319157
答龍倅洪(岐周) 20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康伯 洪岐周에게 화답의 시를 담아 보낸 답신이다. 저자는 자자한 홍기주의 부임 소식을 들었으나 저자 자신의 게으름과 관가에 나가기 무서운 촌사람의 성미 탓에 청을 받고도 찾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심부름 온 사람이 “부임한 이후 경치 좋은 곳을 노닐면서 시를 읊어보기도출처 : 유교넷 -
319158
答趙侯(永和) 20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稚祈 趙永和(1806~?)의 초대에 응하지 못한다는 내용의 편지이다. 조영화에게 조정의 부름을 받은 경사가 있어서 저자를 초대했지만 저자는 가지 못함을 양해하라는 답신을 보낸다. 경사스러운 자리에 많은 손님들이 축하를 하였을 것이지만, 저자는 나라의 보살핌으로 살아가출처 : 유교넷 -
319159
答李侯晩(綏) 21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李侯晩을 직접 찾아가지 못하는 미안함을 담은 편지이다. 저자는 이후만이 부임한 줄 알면서도 찾아가지 못했는데 손수 편지까지 보내주니 감사하고 죄송하다고 전한다. 또한 바쁜 공무에도 학문과 수양을 깊이 하여 역내의 백성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하니 옛사람에 뒤지지 않는 아름출처 : 유교넷 -
319160
答龍倅李(淳夏) 21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저자를 방문하겠다는 龍倅 李淳夏의 서신에 답한 편지이다. 공직에 있는 몸으로 누군가를 먼저 찾아가는 것은 같은 반열에서도 쉽지 않은 일인데, 이 때문에 저자와 같은 촌부로서는 더욱 황송하다고 말한다. 이어 바쁜 공무 중에도 학업을 놓지 않는 것을 ‘온 고을 사람들이출처 : 유교넷 -
319161
與宋性純(奎灝) 22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性純 宋奎灝에게 자식의 일로 한번 찾아가겠다고 적어 보낸 편지이다. 사람 나이가 일흔이 되면 직접 찾아다녀야 하는 예를 지키기 어렵다지만 자식이 손자를 낳은 지 1년이 됐는데 얼굴조차 모른다며, 날씨가 좀 더 서늘해지면 한 번 찾아가겠다고 말한다.출처 : 유교넷 -
319162
答李奎甫(龍九) 23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奎甫 李龍九에게 이제야 화답시를 겨우 지어 보낸다는 내용의 답신이다. 저자는 봄에 편지를 받고 매미가 우는 때에 이르러서야 답장을 보내게 되어 부끄럽다는 말로 시작한다. 지난 번 만났을 때 경황이 없어 아름다운 시를 미처 깊이 음미하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아쉽다고 한출처 : 유교넷 -
319163
與李奎甫 23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불행한 일을 당한 李龍九에게 보낸 편지이다. 근래에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모두가 다 놀라고 위로하였음에도 저자는 찾아가지도 않고 편지도 하지 못했던 것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였으며, 이는 이용구의 사촌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적고 있다. ‘역출처 : 유교넷 -
319164
答姜吉承 24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吉承 姜來永에게 조언을 보낸 답신이다. 이 편지를 보면 저자는 아침에 어린 종이 서신에 “鳳臺에서”라고만 되어 있어서 매우 의아해 하다가 이내 길승이 보낸 글인 줄 알았다고 한다. 세상에서 오직 길승만이 저자를 버리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저자는 “글을출처 : 유교넷 -
319165
答姜吉承 25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발문을 검토해 달라는 吉承 姜來永에게 답한 편지이다. 강래영은 앞선 편지에서 보내온 발문을 보고 저자는 기발한 것만 추구하던 예전의 티가 많이 벗어지고 글이 풍부해졌다고 칭찬하면서, 그동안 많이 생각하고 노력한 결과라는 격려를 보낸다.출처 : 유교넷 -
319166
與姜吉承 26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吉承 姜來永 선친 기일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내용의 편지이다. 생전에 강래영의 선친과의 정분을 생각하면 저자 자신이 직접 제사에 참석해야 하지만, 건강이 허락지 않아 再從孫 濬을 대신 보낸다고 적혀 있다.출처 : 유교넷 -
319167
答黃同甫(蘭善) 27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同甫 黃蘭善이 유고에 수록되지 못한 저자의 선친 글을 보낸 것에 대한 감사의 편지이다. 양가 선친들이 교류한 서신이 유고에 수록된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이 있었으나 후손들로서는 이것만으로도 감사하였는데, 이번에 미처 수록되지 못한 글들을 보내와 나중에라도 이를 넣출처 : 유교넷 -
319168
答黃同甫 26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黃蘭善의 청탁에 대한 승낙의 답신이다. 저자는 황난선의 큰아버지가 이미 세상을 떠난 뒤 華山의 주인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어 유림의 윗자리가 비게 되었다며 슬픔을 표한다. 이어서 훌륭한 친구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는 마당에 저자는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만 짓고 있다출처 : 유교넷 -
319169
與金繼孟(興洛) 27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金興洛(1827~1899)에게 보낸 축하의 편지이다. 白衣臺啣은 흔하지 않은 은혜로서 九臯의 학울음이 들에까지 들린 것이며, 이는 또한 公議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이고 모든 유림의 기쁨이라며 저자는 축하를 전하고 있다.출처 : 유교넷 -
319170
答柳士雍 28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士雍 柳驥榮이 금강산 기행문 「金剛行錄」을 보내온 데 대한 답신이다. 宿世의 因果가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잘 묘사할 수 있었겠냐고 한다. 저자도 여러 차례 다녀오려 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이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늙은이가 되었는데 이 글이 큰 선물이 되었다출처 : 유교넷 -
319171
與朴致文(遇賢) 29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致文 朴遇賢(1829~1907)이 유배를 떠나게 되자 이를 위로하고자 보낸 편지이다. 바른 말을 했다가 유배를 가게 되었으니, 이를 불행이라 여기면 公議가 죽을 것이고, 이를 다행이라 생각하면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라고 위로한다. 서울과 상주는 거리가 멀기에 소문만 무출처 : 유교넷 -
319172
與趙景熙 29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저자의 사위인 景熙 趙在九가 관직에 나가게 된 것을 축하하는 편지이다. ‘나아가기는 어렵게 하고 물러나기는 쉽게 하라.’는 것이 영남지역 선인들의 정론이었다면서, 항상 말을 신중히 하라고 당부한다. 그리고 혹시 산이 있는 작은 고을로 부임을 하게 되거든, 가난을 위해출처 : 유교넷 -
319173
與李君宅(晩寅) 30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나라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三政을 바로잡을 대책을 물었을 때 저자가 올렸던 글을 君宅 李晩寅(1834~1897)이 얻어 보기를 청하자 그 글과 함께 보낸 편지이다. 늙은 사람으로서의 저자의 일상을 서술하면서 ‘공부할 때 열심히 하라.’는 말을 건넨다. 나라에서 三政에출처 : 유교넷 -
319174
與李君宅 31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李晩寅이 과거를 보러 서울로 떠나자 이를 격려하기 위해 보낸 편지다. 지금쯤 행차가 양주에 도착했겠다면서, 이 글이 서울에 도착할 때쯤 행차도 서울에 도착할 것이라고 적었다. 시험이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은 할 수 없는 것이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내출처 : 유교넷 -
319175
與李君宅 31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李晩寅이 관직에 나아가게 된 것을 기뻐하는 편지이다. 이번 일은 단지 이만인 개인을 축하하는 데 그칠 일이 아니고, 한 줄기 公議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남쪽 지역 사림들에 대한 위안이라고 적혀 있다. 또한 사람들이 ‘영재를 기른 군자의 기쁨’이 이런 것이면서, 조용출처 : 유교넷 -
319176
答湖中宗人 32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湖中宗人에게 당부의 내용을 담아 보낸 답신이다. 문득 호남에 사는 종중으로부터 편지가 와서 한편으로는 놀랐고 한편으로는 반가웠다고 한다. 전에 만났다 헤어질 때 가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이나 모두 마음이 아팠던 기억과 늘 눈에 밟혔다는 말로 친척으로서의 애틋함을 표현출처 : 유교넷 -
319177
與澤之 33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從姪 高宅龍(澤之)과 젊은 날부터 함께 했던 즐거운 추억들을 회상하면서 그런 날이 다시 올 수 없을까 하고 안타까워하는 내용이 담긴 편지이다. 약관의 젊은 나이에 경전을 외우고 시를 읊었던 일, 풍경이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놀던 추억, 新豊樓나 廣州城에 올라 산하를출처 : 유교넷 -
319178
與澤之 36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상을 당한 從姪 高宅龍에게 보낸 편지이다. ‘소생할 가망이 없다는 것을 일찍 알았으면서도 세상에는 요행이라는 것이 있어서 혹시나 했더니 결국 죽고야 말았다.’며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모두 운명이니 더 슬프고 덜 슬픈 것은 없다고 위로한다. 그리고 이제 여덟 명의 목출처 : 유교넷 -
319179
答從姪彦秀 37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새해 從姪 高彦秀로부터 경사스런 소식을 접하게 되자 이에 대한 기쁨을 담아 전한 답신이다. 저자는 70년을 살아오는 동안 기쁜 일 궂은 일을 수없이 겪어왔노라 말하면서, 죽기 전에 마지막 해야 할 일이 할아버지의 행적을 기록한 實記를 만드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출처 : 유교넷 -
319180
寄再從孫濬 37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再從孫 高濬에게 공부에 대한 충고를 담아 보낸 편지이다. 지난 26일에 출발했느냐고 물으면서도, 만일 저자를 기다렸다가 출발했더라면 낭패를 볼 뻔 했다고 적고 있다. 공부하는 자세와 관련하여 평소 인내력이 부족하고 의심난 곳을 세밀히 탐구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의심나지출처 : 유교넷 -
319181
甪里子自序 1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이 自序는 高聖謙이 자신의 학문 이력과 ‘甪里子’라는 호를 갖게 된 이유 등을 설명하고 있다. 고성겸은 어려서부터 왼쪽 발이 불편해서 보행이 불편하였을 뿐 아니라, 몸이 허약해서 한 번 병석에 누우면 몇 개월 동안 문밖을 나가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들로 해서 그는 尊출처 : 유교넷 -
319182
送柳洛坡相國奉使之燕京序 2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이 글은 1866년(고종 3)에 청나라 연경에 주청사로 떠나는 우의정 洛坡 柳厚祚(1798~ 1876)에게 보낸 편지이다. 고성겸은 먼저 연경이 원래 명나라 황제의 도읍이었음을 환기시키고, 청나라가 되어버린 지금은 문물제도가 변질되어 버렸다며 안타까워 한다. 이어서출처 : 유교넷 -
319183
送姜尙書燕行序 3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1875년(고종 12) 봄 사신으로 연경에 가게 된 전 예부상서 강공에게 보낸 편지이다. 중국이 이미 예악제도가 무너져 보고 들을 것이 없게 되었음을 탄식하는 한편, 명나라의 遺老들은 아직도 조선의 의관을 보면 자신들이 잃어버린 옛 모습이라며 눈물을 훔친다는 말을 전출처 : 유교넷 -
319184
䟽廳同苦錄序 4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1855년(철종 5) 李彙炳을 비롯한 영남유생 수백 인이 景慕宮을 추숭하는 전례를 행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1만여 명의 연명으로 대궐 앞에서 올렸다. 「소청동고록」은 바로 이때 대궐까지 함께 갔던 유생들의 고생과 일의 전말을 기록하는 한편, 이날의 일을 돌아간 후에도출처 : 유교넷 -
319185
高氏族譜重刊序 5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이 글은 開城高氏 族譜를 重刊하면서 그동안의 족보 간행 내력을 기록한 것이다. 처음 간행된 것은 1640년(인조 18) 月峯 高仁繼(1564∼1647)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 뒤 1795년(정조 19)에 다시 한 번 간행이 되었다. 그리고 1874년(고종 11) 중간출처 : 유교넷 -
319186
金氏慶回錄序 6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金氏慶回錄」은 고성겸과 같은 고을 사는 杜谷 金履燮의 부모님이 결혼하신 지 60주년 되는 기념 잔치, 즉 回婚禮 상황을 기록하고 여기에 축하객들의 시문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회혼례 당시 김이섭의 부모님은 모두 81세였다. 고성겸은 「金氏慶回錄」을 보고 참으로 보기출처 : 유교넷 -
319187
送宗人聖有序 7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이 글은 洪陽(충남 홍성)에 사는 宗人인 高聖有가 고성겸을 찾아와 하룻밤 묵고 떠나면서 좋은 말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지은 글이다. 부탁을 받은 고성겸은 고성유에게 皷山 任憲晦(1811~1876)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東陽 申春朝가 지어준 「養禁齋記」라는 글도 있으니출처 : 유교넷 -
319188
送草隱權生序 8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하루는 草隱이라는 호를 가진 사람이 찾아와서 이 호에 대한 說을 지어달라고 부탁을 해서 지은 글이다. 풀(草) 중에는 장수를 상징하는 풀도 있고, 배고픔을 해결해주는 풀도 있으며, 심지어 부귀와 문장을 상징하는 풀들도 있는데, 草隱이란 어떤 의미인지를 묻는다. 하지만출처 : 유교넷 -
319189
壽洛北李尙書丈九十序 9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洛北 李孝淳의 90수를 축하하는 글이다. 나라에서도 이를 축하하여 判義禁府事를 加秩하였다. 예로부터 사람이 한 평생을 사는 동안 얻기 어려운 두 가지는 壽와 貴인데, 이효순이 90세의 壽와 貳相의 貴를 얻었음을 축하한다. 이렇게 두 가지 복을 다 누리게 된 까닭으로출처 : 유교넷 -
319190
送李英陽解配還京序 9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고성겸은 전에 이곳으로 유배를 와 있던 李英陽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때 고성겸은 ‘영남 사람들은 북쪽에서 온 사람을 보면 相公이라 부른다.’는 말을 건네며 이영양이 지금은 유배를 왔지만 올라가면 정승이 될지도 모른다며 웃었던 일이 있었다. 이영양은 聞喜(경북 문경출처 : 유교넷 -
319191
秋懷詩小序 10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秋懷詩’란 일종의 자기반성적인 시모음집이다. 즉 40대가 된 다음, 한때는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 같고 모든 책을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던, 그래서 제자백가의 사상과 서적을 두루 섭렵하는 데 열중했던 젊은 날에 대한 반성으로 시를 짓게 되었음을 밝힌 글이다.출처 : 유교넷 -
319192
漢城樂府小序 11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漢城樂府 28장에 대한 서문이다. 한성악부에는 漢城의 山河와 城闕의 풍광은 물론 임금과 신하들이 조회하는 의식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貴族·豪俠·巨商·名妓에 대한 기록과 곳곳에 있는 壇墠·樓臺·廛肆·船艦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들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책은 地理誌의출처 : 유교넷 -
319193
雲寺小話小序 11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雲寺小話는 1850년(철종 1) 여름에 雪堂이 젊은 선비들과 풍광이 뛰어난 尙州 甲長山 雲寺를 찾아갔다가 그곳에서 지은 시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그 뒤에 趙景熙가 그것을 가져와 고성겸에게 서문을 써줄 것을 부탁했다. 고성겸은 설당 같이 훌륭한 어른이 계신데 어찌 자출처 : 유교넷 -
319194
贈李金溝詩小序 12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이 글은 서울에 있는 李金溝에게 賦와 長律 몇 편을 지어서 보내게 된 내력을 소개하고 있다. 고성겸은 젊어서 經世濟民을 위한 배움에 뜻을 두고 禮樂兵農 같은 것에 관심을 가졌으나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자 초야에 묻혀 桑麻와 耒耜만을 이야기하고 저술들은 모두 깊이 처박출처 : 유교넷 -
319195
石谷唱酬詩小序 13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어느 날 누군가 찾아와 秋波가 보냈다면서 어떤 曠士의 시를 보여주고, “이 광사는 黃鶴樓를 부술 기력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응수하겠느냐.”는 추파의 말도 전했다. 그 뒤로 추파와 그 광사와 함께 한 사람이 시를 지으면 나머지 두 명이 화답하는 형식으로 시를 지었다.출처 : 유교넷 -
319196
續成朱羊小話小序 13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한 해가 저물어갈 즈음에는 찾아오는 친구들도 드물다. 새롭게 꽃망울을 터뜨리는 매화가 있어서 시의 좋은 재료가 되어준다. 이때 彦章이 「朱羊臘梅節小話」를 지어 와서 글 하나를 부탁하기에, “옛사람은 하루라도 아름다운 산수가 없으면 靈心이 살지 못한다고 했는데, 나는출처 : 유교넷 -
319197
送金貞百遊雲達詩小序 14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친구 김정백이 운달산에 놀러간다며 여러 친구들과 함께 찾아왔다. 때마침 저자는 몸이 아파서 함께 가지 못했다. 이에 운달산에 가거든 霽峯이라는 승려를 만나볼 것과 함께 운달산의 풍광을 멋진 시로 담아올 것을 당부하는 내용을 이 글에 담았다.출처 : 유교넷 -
319198
奉恩寺唱和詩小序 14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奉恩寺는 경기도 광주의 修道山에 있는 사찰이다. 1835년(헌종 1)에 그곳에 가 있었는데, 그곳의 서쪽에 있는 성종대왕의 능침을 관리하는 李公이 친분이 있어서, 그곳에 도착한 다음날 술을 들고 찾아왔다. 그리고 嚴文友라는 사람도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마치 오랜출처 : 유교넷 -
319199
輓姜曰成小序 15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曠士 姜曰成을 위해 지은 만사이다. 그는 글 읽기와 문장을 좋아했다. 세상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놀랍거나 우습거나 노래할 만하거나 통곡할 만한 것은 뭐든 그의 시가 되었다. 책상에는 300권의 유명한 책이 있었는데, 대부분은 명나라 畸士의 劍筑風調출처 : 유교넷 -
319200
月峯亭重修記 16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月峯亭은 月峯 高仁繼가 인조반정 이후에 여러 번 제수된 벼슬을 마다하고, 병자호란(1636년) 이후 정자를 짓고 은거하던 곳이다. 세월이 흘러 정자는 터만 남았고, 서원철폐령으로 월봉정 북쪽 竹谷里에 선생을 모시던 院宇도 훼철됨에 따라 후손들이 그곳의 재목들을 가져다출처 : 유교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