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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에 대해 총641,787건의 자료가 검색되었습니다.
  • 319201

    甪里巖庄記 17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평소 泉石 좋은 곳에서 남은 생을 살아보고자 하였으나 거처하는 錦汀에는 그럴 만한 곳이 없고, 그나마 암석이 기이한 곳은 옛사람들이 이미 점유해 버려서 아쉬워했다. 어느 날 집 서쪽 강물과 인접한 절벽에 벗 서너 명과 놀러갔다가 기묘한 巖庄을 보았다. 주위에 암석이
    출처 : 유교넷
  • 319202

    中窩記 19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이 글은 1884년(고종 21) 錦水 남쪽에 지은 中窩에 대한 기문으로, 집의 이름에 ‘中’을 넣어 짓게 된 이유가 설명되어 있다. 中이란 모든 것의 중앙으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고정되지 않고 조건에 따라 변화한다. 이 집은 깊은 산속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네 가운데도
    출처 : 유교넷
  • 319203

    玉淵諸勝記 20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이 글은 玉淵을 중심으로 그곳의 여러 수려한 勝景을 기록한 글이다. 삼면이 모두 강물로 둘려 있는 河隈를 따라가다 보면 절벽 위쪽 평평한 곳에 芙蓉臺가 있다. 부용대 서쪽에는 謙巖亭이 있고 동쪽에는 玉淵亭이 있다. 이 두 곳은 柳雲龍과 柳成龍이 공부하던 곳이다. 玉淵
    출처 : 유교넷
  • 319204

    近品城堭識 21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상주의 옛지명은 近品城이었다.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이곳의 산들은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錦江 유역에 이르면 더욱 우뚝 솟아 그곳에 올라가면 멀리까지 볼 수 있다. 이 산 정상에 城堭 터가 있다. 이 성이 언제 쌓아졌는지 문헌으로는 확인할 수 없지만, 전하는
    출처 : 유교넷
  • 319205

    浮碧澄潭識 22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근품산에서 남쪽으로 오다보면 강가에 높이가 100척 쯤 되고 제법 넓지만 나무가 없는 언덕이 나온다. 그 언덕 서북쪽에는 소나 말에게 물을 먹일 수 있는 물이 있고, 그곳에서 북쪽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꺾어지는 곳에는 서너 척의 배를 댈 수 있는 못이 있다. 이곳에 晩
    출처 : 유교넷
  • 319206

    竹林古塔識 22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浮碧亭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면 강 건너 3개의 석탑이 보인다. 탑마다 크기는 열 명이 에워싸야 할 만큼 크고 높이도 열 자 정도나 된다. 이 탑이 언제 세워진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불교를 숭상했던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그 마을 이름도 竹林社인데 어쩌
    출처 : 유교넷
  • 319207

    錦江蘆洲識 22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금강에는 원래 갈대가 없었다. 그러던 것이 큰 불이 난 이후 물이 범람할 우려가 있어 사람들이 나무를 심었지만 척박해져버린 그곳에는 갈대 종류만 번식하게 되었다. 드넓은 강가에 무성한 갈대는 가을부터 겨울까지 장관을 이룬다.
    출처 : 유교넷
  • 319208

    牛浦架巖識 23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蘆洲가 끝나는 곳에 牛浦가 있고, 그곳에는 선반을 쌓아놓은 것 같은 기암괴석이 있는데 이를 架巖이라고 한다. 책상을 쌓아놓은 것 같기도 하고, 바둑판을 쌓아놓은 것 같기도 해서, 사람의 지혜로는 그렇게 만들기 어려울 것이다. 서울에는 장인들을 시켜서 돌을 깎아 가짜
    출처 : 유교넷
  • 319209

    淸臺斷壁識 23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가암에서 100여 걸음 떨어진 곳에 작은 산이 있는데 그곳에서 남쪽으로 거슬러가다 보면 그림처럼 깎아지른 암벽이 있다. 그 암벽 위에는 손바닥같이 평평한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弄淸臺이다. 이곳의 여덟 勝景 중 으뜸이다. 농청대 위에는 날개처럼 생긴 작은 정자가 있
    출처 : 유교넷
  • 319210

    江村翠楠識 24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문밖으로 열 걸음만 나가면 커다란 楠나무가 있다. 땅에서부터 한 자쯤 올라가서 두 갈래로 줄기가 나눠져 있는데, 각 줄기마다 굵기가 여러 아름이 되고, 높이는 얼마나 될 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여름이 되면 동네 사람들이 더위를 피할 만큼 큰 그늘을 드리우고, 수령이
    출처 : 유교넷
  • 319211

    傳巖柳林識 24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傅巖이라고 바위를 지칭한 이유는 알 길이 없다. 『書經』 「說命」에 “說을 傅巖이라는 들판에서 성을 쌓았다.”는 말이 있다. 이 때문에 傅巖이라는 이름이 좋아서 간혹 그곳에 가서 그 바위를 살펴보지만, 아무리 봐도 傅巖이라 불러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이 바위
    출처 : 유교넷
  • 319212

    見山鄭公(期遠)逸稿跋 25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이 글은 見山 鄭期遠(1559~1597)의 逸稿에 대한 발문이다. 어느 날 정기원의 10세손 鄭觀鎭이 찾아와서 逸稿를 모으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울면서 발문을 부탁했다. 정기원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하는 일을 맡았을 뿐 아니라, 명나라 부총관 양원의 접반
    출처 : 유교넷
  • 319213

    白下黃公(磻老)遺集跋 27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이 글은 白下 黃磻老의 遺集에 대한 발문이다. 상주 지역에 많은 유학자들이 배출되었지만 그 중에도 白下가 걸출했다는 말로 시작된다. 몇 년 전 白下가 손자인 黃源發이 강호에 흩어져 있던 그의 조부의 글들을 모아들고 저자를 찾아와 교정을 봐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리고
    출처 : 유교넷
  • 319214

    書挹鶴軒恠石記後 28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榮州 挹鶴軒에는 괴석 하나가 9대째 전해지고 있는 것에 관해 쓴 글이다. 이 돌은 勿齋 朴欐(1550~1592)가 스승 退溪 선생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퇴계 선생이 단양군수로 있다가 도산으로 돌아올 때 짐 속에 책 몇 권과 수석 두 점이 있었는데, 이 돌이 그 중 하
    출처 : 유교넷
  • 319215

    書姜吉承儉湖記後 29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강길승의 儉湖 기행문을 보고 쓴 글이다. 어느 날 사촌 高大受가 儉湖를 다녀와서 저자에게 그곳의 경치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저자는 이에 대한 흥미를 갖고 동행하였던 姜吉承에게서 기행문을 얻어 보았다. 글을 본 다음 고대수에게 검호와 같이 큰 호수를 본 느낌을 물었다.
    출처 : 유교넷
  • 319216

    書黃猿雜咏後 30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斗南에게 「黃猿雜詠」이라는 시를 보내주면서 쓴 글이다. 두남은 원래 시문에 능했다. 그러나 자연을 읊고 노래하는 것을 탐탁해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爾雅한 시들을 좋아하게 되어 시들을 교류하였다. 그 수준이 이미 唐詩에 뒤지지 않았으나 특히 저자의 시를 좋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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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217

    書鹿門八景識後 31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鹿門의 승경 여덟 곳을 녹문팔경이라 하고 이를 기록한 글이다. 鹿門이란 지명은 예부터 유명한데, 東漢의 龐德公과 唐의 孟浩然(689 ~740) 그리고 明의 茅坤(1512~1601)이 모두 鹿門이라는 곳에 살면서 자신들의 號로 삼았다. 鹿門이 그렇게 유명해진 것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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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218

    月峯亭重修上樑文 31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저자의 선조인 月峯 高仁繼가 정자를 지었던 옛 터에 후손들의 그림을 모아 月峯亭을 중수하게 된 경위를 기록한 상량문이다. 크나큰 난리를 겪으면서 옛 건물은 쓸어버리듯 없어졌지만 사람들은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기억하고 있다. 옛 건물의 재목들을 가져다 새집에 보태어 풍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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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219

    龍州客舍移建上樑文 33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龍州客舍를 이건하게 된 경위를 적은 상량문이다. 龍州는 예부터 嶺外의 이름난 성으로 50~60개 지역에 3~4천여 호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중세 이래로 여러 차례 난리를 겪으면서 쇠약하게 되었다. 양반댁이나 여염집 할 것 없이 모두가 초라하기 그지없어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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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220

    沙峴齋舍重修上樑文 35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沙峴齋舍는 고씨 집안에 조상들을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사당이다. 이 글은 화재로 인해 불타버린 뒤 다시 중수를 하면서 지은 상량문이다. 정성이 있으면 물품은 오는 법이어서 집집마다 정성을 모았고, 힘들이지 않으면 안녕을 보장할 수 없으니 힘들고 일 많다고 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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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221

    淸香閣上樑文 37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淸香閣을 짓게 된 경위를 적은 상량문이다. 이곳 鹿門은 鳥嶺 동쪽의 이름난 곳으로 강물이 휘감아 돌고 세 봉우리가 에워싸고 있다. 이런 곳이라서 뛰어난 인물도 많이 배출되었고, 기화요초도 잘 자란다. 半畝 쯤 되는 땅에 儒宮을 지어 이 일대의 文敎를 일으키고자 이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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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222

    斥和疏 1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일본이 창궐하여 交隣兄事의 나라인 조선에 대해 無倫不道하게 항복하라고 위협한 데 대해 불가함을 상소한 글이다. 일본의 위협이 허장일 수 있고, 허장이 아니라 진짜라 하더라도 仁義의 군대가 한때의 强暴한 도적에게 질 리 없으며, 혹여 일본에 져서 나라가 망한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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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223

    請景慕宮典禮疏 4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이 글은 정조대왕에게 휘호를 올리기 전에 장헌세자를 貳尊(세자)의 자리에 그냥 두고서는 불가하므로, 먼저 장헌세자를 추숭한 다음 정조대왕에 대한 휘호를 가상하는 것이 의리에 맞는다는 내용의 상소이다. 정조대왕에게 휘호를 올리지 못한 것은 정조대왕이 장헌세자(경모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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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224

    請書院復設疏 7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서원철폐령을 거두고 다시 서원을 복원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문이다.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짓고, 퇴계 이황이 이를 賜額해줄 것을 주청하여 紹修書院이 되었다. 그 후 크고 작은 서원들이 생겨 후학들이 학문을 익히고 선현을 받들게 됨으로써 국운이 융성하였다. 그러나 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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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225

    蔡孝子傳 1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효자 蔡周文에 관한 이야기와 그에 대한 贊을 적은 글이다. 채주문은 懶齋 蔡壽(1449 ~1515)의 후손이다. 그의 아버지 蔡瑞禹는 公賦의 기간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面掌이었던 黃成燁에게 구타를 당해 결국 목숨을 잃었다. 당시 18세였던 채주문은 복수를 하려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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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226

    都孝子傳 4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효자 都始復에 관한 이야기이다. 도시복은 그의 조상 때부터 초야에 묻혀 살아서 사람들과의 교류도 제한적이었고 배운 것도 넉넉하지 못했다. 그저 숯을 구어 팔아서 어버이를 봉양할 뿐이었다. 하루는 장에 나가 숯을 팔고 돌아오는 길에 길을 잃어버렸다. 문득 길 위에 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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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227

    烈婦列傳 6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이 글은 세 명의 烈婦에 대한 기록과 그에 대한 평을 싣고 있다. 세 명의 열부는 宋鎭烋의 아내 蔡氏(蔡周澤의 딸)와 高瀟의 아내 鄭氏(愚伏 鄭經世의 9세손 鄭熙愚의 딸) 그리고 金鎭海의 아내 丁氏이다. 이들은 모두 남편이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장례를 정성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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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228

    爲誰先生傳 12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爲誰 선생에 관해 기록한 글이다. 爲誰 선생이 누구인지 아무도 모른다. 선생 역시 사람들이 아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선생은 가정의 살림에 뜻이 없었고, 명성이나 재물에도 관심이 없었다. 꽃과 돌과 거문고와 술로 걱정을 떨치고 풍류를 즐겼다. 그는 마음을 깨우는 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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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229

    治家十箴 13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집안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유념해야 할 10가지 잠계이다. 첫째는 부모를 섬기는 일(事父母), 둘째는 형제간에 우애하는 일(處兄弟), 셋째는 부부간에 대하는 일(待夫婦), 넷째는 제사를 받드는 일(奉祭祀), 다섯째는 손님을 접대하는 일(接賓客), 여섯째는 자식과 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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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230

    自悼箴 16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저자의 한 평생에 대해 회한하는 글이다. 어려서는 세상을 경영하는 데 뜻을 두어 자나 깨나 管仲과 諸葛孔明을 사모하였고, 나이가 들어서는 文章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이루어놓은 것이 없다. 붙잡을 수 없는 세월 앞에서 자신을 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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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231

    自警箴 16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닦아도 자꾸 먼지가 끼는 오래된 거울과 막아도 자꾸 바람이 들어오는 무너진 집처럼 공경함(敬)과 게으름(怠)·옳음(義)과 이익(利)은 항상 내 안에서 싸운다. 늙은 뒤에도 게으르지 않았던 衛武老人처럼 저자 자신도 그렇게 살아가겠다는 내용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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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232

    昭烈入蜀論 16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昭烈皇帝(劉備)가 蜀으로 들어가는 순간 高帝(劉邦)의 帝業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과 그것이 諸葛孔明의 책임이라는 점을 논하고 있다. 우선 유방이 항우에게 쫓겨 촉으로 들어갔을 때는 項羽의 세력이나 인적 조건이 대단히 열악하였다. 하지만 유비는 이미 세력과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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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233

    項羽本紀論 19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史記』의 「項羽本紀」가 孔子의 春秋筆法에 담겨 있는 ‘좋은 점은 칭찬하고, 나쁜 점은 꾸짖는 의리’(與奪之義)에 입각한 것임을 논한 글이다. 본래 『사기』의 범례대로라면 본기는 황제로 칭해지는 사람들만을 다루고, 해당 인물의 이름이나 자를 제목으로 내걸게 되면 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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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234

    子陵還山論 21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子陵은嚴光(BC.37~AD.43)의 자이다. 어릴 적 후한의 光武帝와 함께 뛰놀며 공부한 사이였으나, 광무제가 王莽의 新나라를 제압하고 제위에 오르자 모습을 감췄다. 광무제가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세 번이나 사람을 보내 부르자 만나러 왔다가 다시 산으로 은거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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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235

    魯城絃誦論 22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漢高祖 劉邦이 項羽를 물리치고 魯城으로 왔을 때 魯城의 君臣들이 높은 관을 쓰고 넓은 띠를 두른 예복을 갖추어 입고 禮와 詩를 담론하는가 하면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면서(絃誦) 태연하였다. 유방이 그 모습을 보고 노성을 함락하지 않고 보전해 주었다. 이 글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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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236

    復至海上望論 24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한나라 무제의 치적 중에서 오점으로 지적할 만한 것은 바다(海)를 지나치게 숭상했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영토를 넓히기 위해 정벌했던 瀚海와 南海에 관련한 일이나, 기이한 물품이나 징조와 관련이 있는 東海에 관련한 일은 모두 聖王의 모습이 아니다. 특히 方士들의 神仙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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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237

    黃石公論 26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黃石公은 前漢三傑 중 한 사람인 張良에게 秘書를 전수해준 사람이라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그런데 황석공은 사람으로 보아도 석연치 않고 귀신이라고 보아도 석연치 않다. 또한 황석공이 있었기에 장량이 훌륭한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 역시 장담할 수 없다. 그렇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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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238

    燕居銘 28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물살이 급한 물에는 고기가 모이지 않고 깎아지른 절벽에는 나무가 번식하지 않듯 사람도 마찬가지다. 일부러 잘난 척할 것도 없고 애써 고답적일 필요도 없다. 많은 글을 읽어서 천하사에 융통하게 되면 생각은 자연히 깊어질 것이고 행동은 자연히 단정할 것이며 말씨도 조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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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239

    藏書閣銘 28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책을 보관하는 장서각에 대한 글이다. 천하에 그 어떤 장서각도 천하의 모든 책을 영원히 보관할 수는 없다. 모든 책을 영원토록 그 어떤 손상이나 절도로부터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있다면 그것은 내 안에 간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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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240

    評花樓銘 28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꽃을 품평하는 누대라는 뜻의 評花樓에 대해 지은 글이다. 화려한 목단이나 맑은 매화보다도 연꽃이나 국화를 더 좋아한다. 그것은 이 꽃들이 깨끗함과 절개를 갖고 있어서 歲寒之交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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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241

    이 글은 見山 鄭期遠(1559~1597)의 墓誌銘이다. 정기원은 1585년(선조 18)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출사하였다. 1592년(선조 25)에는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왜구가 본국을 침입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上使 申點(1530~?)에게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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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242

    祭木齋洪先生文(緬禮時) 1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木齋 洪汝河(1621~1678)의 緬禮 때 그를 애도하며 올린 제문이다. 제문에 朱熹의 ‘君子의 마을에서 태어난 것 또한 선비에게 행운이다.’라는 말을 언급하며, 홍여하와 같은 고향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고 적고 있다. 다만 홍여하의 문하에서 직접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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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243

    祭芝園姜公(世綸)文 1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芝園 姜世綸(1761~1842)을 애도하며 지은 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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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244

    祭白下黃公文(代) 2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白下 黃磻老(1766~1840)를 애도하며 지은 제문이다. 白下는 황반로의 호이고, 본관은 長水, 자는 叔璜이다. 황반로는 姜世綸‧강세백‧이경 등과 음풍농월하며 詩社를 결성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던 영남 남인 학맥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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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245

    祭石坡鄭公(象晋)文 3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石坡 鄭象晋(1770~1847)을 애도하며 올린 제문이다. 石坡는 정상진의 호이고, 본관은 晋州, 자는 日晋이다. 그는 愚伏 鄭經世의 후손인 鄭宗魯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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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246

    祭致齋趙公文 3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致齋 趙公을 애도하며 올린 제문이다. 趙公은 趙龍九의 조부이다.
    출처 : 유교넷
  • 319247

    祭李公(存淳)文 4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李存淳을 애도하며 올린 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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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248

    再祭文 5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李存淳의 제문을 두 번째로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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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249

    祭金姨兄(驪書)文 5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姨從兄 金驪書를 애도하며 올린 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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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19250

    祭洛北李公文 6 / 기록자료>고도서 / 고성겸
    洛北 李孝淳을 애도하며 올린 제문이다.
    출처 : 유교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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